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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회주의 선언

바스카 선카라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
미국의 사회주의 선언



바스카 선카라 지음

미래를소유한사람들 / 2021년 9월 / 379쪽 / 19,800원



사회주의 시민의 어떤 하루


20세기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사회주의자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다. 우리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몇 가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주의로 가는 길은 개혁과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거친다는 점이다. 개혁과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로 가는 별도의 경로가 아니다. 또한 우리들이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가진 선한 의도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사회는 자유로운 시민 사회와 활력 있는 민주적 제도를 갖춰야 권력의 남용을 막을 수 있다. 그런 사회가 이름에 부합하는 ‘사회주의’이다.

최근 들어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들이 많다. 사실 나는 민주적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와 동의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민주적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구분은 사회적 정의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가 공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믿음의 차이가 아니라 어떻게 개혁을 위한 투쟁을 전개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위로부터의 거시 경제 정책을 통해서 노동자를 돕고자 투쟁하고 있는 것 같다. 민주적 사회주의자들도 다양한 형태의 기술 관료적 전문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래로부터의 대중 투쟁이 있어야 지속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다.

영국의 제레미 코빈과 미국의 머니 샌더스는 ‘계급투쟁’ 사회민주주의을 추구하면서 좌파를 부활시킬 대중적 에너지를 확산시키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기회를 살릴 수 있는 잠정적인 전략을 제안하고 왜 노동 계급이 여전히 사회적 변혁의 주체인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는 착취, 기후적인 대재앙, 악선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류를 위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PART 1



사회주의와 미국


베르너 좀바르트가 1896년에 발표한 저작인 『왜 미합중국에는 사회주의가 없나?』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좀바르트의 추론에 따르면, 만약 근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한 필연적인 반동으로 등장했다면, 가장 자본주의가 발전한 선진국, 즉 미합중국이 사회주의의 전형을 보여주는 나라가 되고, 미국의 노동 계급이 가장 급진적인 사회주의 운동의 지지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미국은 왜 그렇지 않고, 미국의 노동 계급은 왜 또 그렇지 않을까? 그의 답은 간단했다.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선동에 현혹되기에는 미국의 번영으로 ‘로스트버프와 애플파이’를 너무 많이 먹는다.

그의 답은 오랫동안 어느 정도 혹은 그 이상으로 정확한 것으로 여겨졌다. 비슷한 내용이지만 다른 이는 미국적 ‘예외주의’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예외주의란 건국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개인주의와 제한적 국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말한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사실 미국에서도 오래된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가 좀바르트의 시대에는 미국 정치에서 대중적 힘을 갖지 못했을 수 있지만, 점차적으로 추진력을 얻기 시작했던 것 같다. 1912년에 사회주의당(Socialist Party)은 대통령 선거에서 거의 1백만 표를 얻었고, 당원이 25만 명에 달했으며, 1천 명 이상이 공직에 선출되었다. 이 문화가 당시 미국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1820년대 말에 미국에서 세계 처음으로 노동자 정당이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등에서 조직되었다. 공장 생산이 막 도입되고 여성과 아동을 주로 고용한 공장은 뉴잉글랜드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조직들은 장인들의 이해를 대변했다.

뉴욕에서는 노동당의 지도자인 토마스 스키드모어가 급진적인 토지 균분 운동과 함께, 잠시 동안 노동 시간을 제한하려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 혁명의 공화주의에 근거하여 임노동을 비판하는 표현을 사용했다. 한편 오늘날 수천 명의 인민들이 깊은 시름과 가난에 빠진 채, 자신들의 하루 생계를 우리들 중 몇 명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 몇 명은 야만스럽게 거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다. 이것은 자유롭고 공화주의적인 우리 자신의 제도가 자연스럽지 못하게 운용되기 때문이다. 한편 스키드모어는 그의 강령이 공상에 가까웠고 성품이 권위적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성공을 거두게 되는 첫 선거 운동 이전에 이미 조직에서 쫓겨났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지 않아서 뉴욕의 ‘노동자당’은 민주당(Democratic Party)으로 흡수되었고 민주당 내에서 독립적인 노동자 활동의 모범을 보인다.

이후 1870년대와 1880년대에는 노동 분규의 시대였다. 1873년의 공황은 노동자의 감원을 초래했고 파업에 불을 지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877년의 대철도파업인데, 10만 명의 노동자들이 연방 군대뿐만 아니라 주 방위군과 민병대에 의해서 큰 패배를 당했다. 비슷한 운명이 1890년대에 홈스테드 파업과 풀먼 파업을 덮쳤다. 풀먼 파업의 과정에서 미국철도조합의 지도자 유진 뎁스는 급진화되었다.

1890년, 현재 사회주의 노동당(SLP)으로 알려진 노동자당은 다니엘 드 레온의 지도하에 들어갔다. 드 레온은 큐라소에서 온 이민자이다. 그가 1886년 헨리 조지의 시장 선거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그는 컬럼비아 대학 법대의 강사였다. 조지는 넓게 보면 맑스주의 계통의 뉴욕 지역 동맹인 중앙노동동맹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조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은 절충적이었다. 그는 『진보와 빈곤』이라는 베스트셀러의 저자였는데, 그 책은 평등주의적인 토지 가치세를 주장했다. 이 사상에 따르면, 인민이 자신의 노동 결실을 장악해야 하지만, 토지와 다른 자연 자원은 전체적으로 사회에 속한다.

드 레온이 장차 아일랜드 순교자가 되는 제임스 코널리와 벌인 논쟁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1902년 사회주의노동당이 아일랜드 이민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연설회를 위해 코널리를 초대했고 코널리가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당시 카톨릭 교회는 아일랜드 노동자들에게 노동 운동에 참여하지 말 것을 권유했고, 코널리의 메시지가 성공적인 반응을 가져왔기 때문에, 사회주의노동당은 그를 전임 조직자로 데려왔다. 그러나 코널리는 스스로를 손님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회주의 노동당의 강령과 관련하여 드 레온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코널리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임금에 대한 당의 입장이었다.

드 레온은 외과의사이자 식민지 관료의 아들이었다. 그는 코널리와 달리 진정으로 노동자 생활을 이해하지 못했다. 코널리는 에든버러의 카우게이트 빈민가에서 태어나서 9살 때부터 노동을 했다. 드 레온주의자들은 노동 계급의 일상적 현실로부터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임금 인상은 자동적으로 가격 상승에 의해서 상쇄된다는 추상적인 임금 이론에 집착했다. 따라서 임금 인상 투쟁은 시간과 자원의 낭비였다. 그런데 코널리는 이것이 ‘매우 혁명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상 노동자가 사회주의 운동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어렵게 한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이것은 중요한 논쟁이었다. 코널리의 주장은 미국의 급진주의자들이 1890년대의 노동 분규를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으로 이어가는 데 실패한 원인을 해명할 수 있는 통찰력 있는 지적이다.

한편 1890년대의 혼란은 미국 노동자의 힘을 드러내 주는 계기가 되었다. 1901년 미국사회주의당(Socialist Party of America, SP)이 창당되었고 노동 운동은 마침내 큰 장막을 갖추었다. 이 당의 창당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유진 뎁스인데, 그는 풀만 파업 이후 6개월간 수감되면서 급진화한 대표적인 노동조직가였다. 그는 당시의 많은 사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사회민주주의로부터 감화를 받았다. 그러나 사회주의 진영에서 모든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독일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념 노선 때문에 분열했던 것처럼, 당은 노선에 따라 나눠졌다.

이후 1960년대에도 미국사회주의(SP)의 귀환을 보지 못했다. 그 당은 1972년에는 3개로 쪼개졌다. 우파는 미국사회민주주의자(Social Democrats, USA)를 결성했고 러스틴이 첫 의장이 되었다. 이 조직은 매파 반공주의와 결합했고 기존 노동조합 내에서 미미한 압력 단체의 역할을 했다. 좌파는 미국사회당(Socialist Party USA)을 결성하여 독자적인 선거 참여에 초점을 맞추는 뎁스주의적 노력을 계속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마이클 해링턴이 이끌던 중도파는 민주적사회주의자조직위원회(DSOC)를 조직했는데, 그것이 미국 민주사회주의자의 전신이다. DSOC는 진보적 노조 지도자, 민주당 관료, 새로운 사회 운동을 광범위하고 효과적인 연합체로 한데 묶고자 했다. 해링턴의 정치적 목표와 스타일은 크게 달랐지만 기본적으로 브라우더주의의 전략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왜 미국은 사회주의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사회민주주의적인 복지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독자적인 노동 계급의 당을 가지고 있지 못한가? 좀바르트가 언급했듯이,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는가? 이 질문들은 여전히 오늘날 우리를 괴롭힌다. 미국의 사회주의적 전통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보다 더 영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리케이드로 돌진하지 못했고 권력을 잡지도 못했다. 사회주의자들은 미국을 보다 민주적이고 인간적으로 만드는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오늘날 미국 사회를 특징짓는 불평등은 우리들의 실패를 상기시켜주는 냉혹한 상징이다.

해링턴은 급진주의자들이 ‘아주 위험한 외줄 위를 걸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우리는 ‘새로운 사회의 사회주의적 비전에 충실해야’하며, 또한 ‘그 비전을 체제를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다소나마 존엄성을 높이고 한 조각의 빵이라도 성취해내는 실제적인 운동과 결부시켜야’ 한다. 미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여러 계기마다 비현실적인 종파주의에 빠져 스스로를 고립시키거나 현실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민주당과 자유주의적 경향 속에 가두었다. 결국 외줄 위를 걷는다는 것은 유권자들에게 가능성 없는 제3당 후보를 당장 지지하라고 요구하지 않으면서 노동 계급의 특수한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선거 전략을 수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갓 태어난 ‘붉은 노조’를 맹신하고 지지하도록 요구하지 않으면서, 노동 운동을 성장시키고 근본적으로 민주화시킬 필요가 있다.

현재 악랄한 지배 계급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간의 간극을 확대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은 우리가 미국에서 보다 지속적인 사회주의적 정치를 창조할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민주적 사회주의자인 버니 샌더스의 명성과 지난 수년간의 고무적인 행동주의 때문에 이 염세주의자까지도 대답은 ‘그렇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PART 2



맥의 귀환(Return of the Mack)


최근 들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20세기 중반까지 미래를 두고 경쟁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1939년 뉴욕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에서 기업들은 나일론, 에어컨, 형광등, 뷰마스터 등의 새 기술을 선보였다. 그러나 신제품 이상으로 대공황과 경제적 부족으로 지친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중산 계급이 누리게 될 여가와 풍요의 이상이었다. 만국 박람회의 ‘미래 생활 전시회’는 새로운 고속도로와 발전 기획이 담긴 변모한 풍경, 간단히 말해서 다가올 세계의 축소 모형이 참석자들을 불러 모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이 비전의 일부는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널리 공유되던 번영의 꿈은 퇴색하기 시작했다. 사회민주주의와 그것의 미국적 아류를 격퇴하려는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새롭게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성장을 회복했다. 하지만 그 성과는 단지 노동 계급을 향한 난폭한 공격을 통해서였다. 그때 이후 실질 임금은 정체되었고 부채 규모는 치솟았으며 젊은 세대들은 부모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기를 기대하지만 그들의 전망은 암울하다.

한편 1990년대 기술 붐은 ‘신 경제’에 대한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 신 경제는 낡은 포드주의적 작업 현장을 대체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신 경제는 1939년 만국 박람회가 약속했던 미래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떤 맑스주의자가 예상했던 것만큼이나 합리적으로 행동했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들의 역량을 개조하려 했다. 일자리를 찾을 수 없다고? 이력서를 다시 쓰고, 핸드세이크에 공을 들여라. 당신의 공장이 해외로 나갔다고? 투덜대지 말고 코딩 수업을 들어라. 한 자유지상주의적 책 제목처럼 『당신이 빈털터리인 이유는 당신이 그리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실리콘 밸리의 지배자들은 미래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준비하고 있다 - 우주 여행, 3D 프린팅, 인공 지능, 자율 주행 자동차. 그런데 이 모든 단절적인 혁신과 함께 대량 고용이 약속되지 않는다면, 그 혁신들은 경외감보다는 로봇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우려를 낳을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단지 ‘혁신 진료소’로 가서 우리 자신의 앱을 띄울 수는 없다. 이런 노력은 산업의 새로운 강자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정치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하고 있다.

마크 주커버그 같은 기술적 지도자들과 자선가들은 자신들의 주장과 기부를 통해서 공적 영역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 그들은 (기부를 통해서) 세금으로부터 자신들의 부를 보호함으로써 공적 영역의 자금 조성을 어렵게 하고 있다. 수백만 명이 악몽 같은 ‘태스크래빗(Task Rabbit, 심부름을 대신해주는 서비스를 말함) 경제에서 간신히 생활을 영위하고자 분투하고 있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은 “좋아하는 것을 하라”는 자립 전문가들의 간청대로 부업을 하고 있다.

2008년 대불황은 아래로부터의 위협에서 자유로운 투기적 자본에 의해서 촉발되었다. 대불황은 적어도 일시적으로 (자본주의의) 승리주의를 무너뜨렸다.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조차도 직장을 찾지 못하고 빚을 지고 있다. 18세에서 29세 사이의 미국인들은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에 더 우호적인 입장이다. 그들은 냉전의 기억과 기존 체제에 대한 애착이 없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사회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우파들이 기본적인 복지 프로그램조차 잠행적 사회주의로 비난하고 있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지지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경제적 고통이 한 세대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전 세대에 걸쳐 있다. 미국에서 1979년 이후 시간당 임금이 고작 0.2% 올랐다. 영국의 상황은 실제로 더 나쁘다. 영국의 경우, 2007년부터 2014년 사이에 경제 생산성이 10% 올랐지만 임금은 오히려 그만큼 떨어졌다. 이 두 나라에서는 사용자의 유연성 증가는 노동자의 불확실성 증가를 의미했다. 유럽의 ‘산업화 이후’ 경제도 마찬가지이다. 영국에서 2008년 시간제 노동자의 약 9%가 정규직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으로 보도되었는데, 2013년에는 그 비율이 2배 이상 늘어났다. 전후 시기에는 보이지 않던 ‘비자발적 시간제 노동자’ 혹은 ‘1099 노동자(미국에서 자영업자나 독립 계약 노동자를 의미)’가 우리의 경제 지형을 특징짓는다. 당신은 이 같은 시대에 사회주의 운동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당신이 옳다.

한편 버니 샌더스의 정치적 삶은 미국사회당의 스러져가는 잔해 속에서 무명의 정치 신인으로서 시작되었는데, 그의 첫 시도는 미국 좌파에게는 익숙한 결과를 낳았다. 1972년 상원 보궐 선거에서 유효 투표의 2.2%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샌더스의 입장은 일관되었고 그의 메시지는 간명했다. 그는 닉슨과 그가 대변하는 백만장자와 억만장자의 세계를 비판했다. 그 당시 그는 청중들에게 ‘미국은 현재 인구 2%가 개인 소유 부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그들만의 세계’라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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