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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경제

제이슨 솅커 지음 | 리드리드출판


반란의 경제

제이슨 솅커 지음

리드리드출판 / 2021년 5월 / 208쪽 / 14,800원



PART 1 왜 경제인가



미래학자로서 내다본 경제


식량, 쉴 수 있는 공간, 안전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요소이자 필수적 요소이다. 아주 먼 미래에도 이 요소들은 인간 삶의 밑바탕을 구성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 요소가 사회적 불안과 혼란을 촉발할 수도 있다.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기본 요소가 충족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분노하고, 자기희생을 자처하면서까지 저항과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코로나19 팬데믹과 불황 이후의 세계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과거 저항과 혁명을 초래했던 계기를 분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의 팬데믹 현상이 우리를 어떤 미래로 인도할지에 주목하며 과거를 연구하는 것이다.

미래학자의 역할: 미래 트렌드와 기술을 장기적으로 분석하고, 전략적으로 계획하는 일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중요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래학자의 역할이 나온다. 지금처럼 불안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만 두드러지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기술이 구현하는 일이나 사회의 변화, 과학의 발전을 이끄는 역할을 미래학자가 담당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을 때 내가 공유한 트렌드, 자료, 미래에 대한 큰 틀이 여러분의 비전과 전략을 만들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많은 것이 바뀌게 될 코로나19 이후 세계에서 유용하게 사용되리라 확신한다.

‘글쓰기’에 대한 미래학자로서 갖는 부담: 급변하는 시대에 미래학자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 하지만 미래학자로서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놓고 ‘글’을 쓰는 것은 위험 부담이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많은 주제도 빠르게 바뀌고 과학기술의 발전은 비약적이며 사회적 현상은 불확실하게 전개된다. 이를 느끼는 강도는 수용하는 개인차에 따라 다르다. 그럼에도 나는 미래의 잠재적 비전과 향후 전개될 방향을 공유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국가 안보, 경제, 로봇과 자동화로 인한 미래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과 파급력에 대해 예견해주며 많은 이들이 이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쩌면 동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의 고민을 나누는 일이며 잠재적 가능성이 있는 미래를 여는 일이기도 하다. 이 믿음 때문에 많은 위험 부담을 안고서도 이 책을 쓰게 되었다.

PART 2 저항의 시작점



저항과 혁명을 일으키는 틀


과거는 저항과 혁명의 사례로 넘쳐난다. 특히 열악한 경제적 상황은 늘 혁명의 주범이었으며 ‘성공한 혁명’에서는 그 역할이 두드러졌다. 이 책에서는 저항과 혁명을 유발하는 다음 여섯 가지 요인을 기준으로 과거에 일어났던 15개의 저항과 혁명을 분석한다. 여섯 가지 요인은 다음과 같다.① 전반적으로 열악한 경제 조건

② 실제로 일어난 그리고/또는 사람들이 인식한 경제적 기회 부족

③ 실제로 일어난 그리고/또는 사람들이 인식한 구조적 불평등

④ 실제로 일어난 그리고/또는 사람들이 인식한 외국의 영향

⑤ 가까운 시일 내 대규모 무력 충돌에서의 패배

⑥ 정치적 대표성의 결여



물론 모든 혁명과 저항을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 공통점은 존재한다. 열악한 경제 상황, 사람들이 인식한 경제적 기회 부족 이 두 가지 요소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부른 공포정치


저항과 혁명이 난무하는 역사에서 가장 전형적인 혁명은 프랑스 대혁명이다. 당시는 경제적으로 엄청나게 불평등했고 열악한 환경에 식량난까지 겹쳤던 시기였다. 정부 및 정치 시스템은 민중에게 매우 억압적이고,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으며 정치적 대표성도 결여된 상태였다. 프랑스 역사에서 부연설명을 가장 길게 덧붙여야 하는 부분은 ‘혁명이 일어났을 때’이다. 프랑스 혁명 때 타도의 대상이었던 것은 절대왕정 체제, 바로 앙시앵 레짐인 구체제였다. 절대왕정 체제가 유지되는 동안 경제와 정치에서 새로운 기회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결국, 절대왕정 체제는 급진적으로 발생한 혁명에 의해 무너졌다.

프랑스 대혁명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는 ‘권력의 공백’이다. 독재 정권의 시대가 막을 내린 후 권력에 공백이 생겼다. 대혁명이 일어났지만 전제 정치와 완전한 단절을 이루지는 못한 것이다. 그 결과 궁극적으로 더욱더 강화된 독재 정권을 탄생시켰고, 반혁명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급진적 투쟁은 권력통합을 추구하는 보수의 바람이 일면서 주춤한다. 그 사이 독재적으로 권력을 통합한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가 자리를 차지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공포감을 조성했다. 그가 속한 자코뱅당은 대유럽 전쟁 수행을 위해 모든 식료품에 대해 최고가격을 정했다. 그리고 국내 치안에 혁명민병대를 동원해 반혁명분자와 곡물 사재기 행위를 단속했다. 대규모 징병, 독재적 경제관리, 전면전을 위해 철저한 공포정치를 강화한 것이다. 이로써 대외 전쟁은 성공적으로 추진되었지만 국민의 반감은 높아지기만 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고 난 이후 권력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잡았다. 뒤이어 프랑스 제국 시대가 열렸다. 프랑스 제국이 수립되면서 각 대륙의 수많은 나라를 식민 통치했을 뿐 아니라 유럽의 많은 지역에 혁명의 변화와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혁명을 일으키는 6가지 주된 요인을 고려했을 때,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켰던 동인은 다음과 같다.- 전반적으로 열악한 경제 조건

- 실제로 일어난 그리고/또는 사람들이 인식한 경제적 기회 부족

- 실제로 일어난 그리고/또는 사람들이 인식한 구조적 불평등

- 실제로 일어난 그리고/또는 사람들이 인식한 외국의 영향

- 정치적 대표성의 결여



1899년 중국, 서구 열강에 무너지다


혁명은 동양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말 역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혁명 중 하나는 중국에서 벌어졌다. 바로 1899년에 시작된 ‘의화단 사건’으로, 중국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외세 배척 운동이다. 오랫동안 중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중국 연안의 항구들을 공격해온 유럽 열강에 반발해서 일어났다. 이 점만 보면 의화단 사건은 외국 열강의 간섭과 식민주의에 대항한 반란이다.

그러나 다른 혁명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경제’ 상황 역시 이 반란의 주요 촉발제였다. 당시 중국인들은 경제적으로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며 분노와 긴장이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19세기 아편전쟁이 벌어진 이후 열악한 경제를 극복해야 하는 상황과 겹쳐 위기는 극에 달했다. 계속된 가뭄과 홍수는 경제를 빈곤 상태로 몰아넣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랜 기간 긴장 상태에 있던 정치 상황과 경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에 참을 수 없는 국민들이 일어난 것이다.

1900년 5월, 의화단 세력은 톈진과 베이징에서 외국 공사관이 모여 있는 구역을 포위하고 외국 세력의 추방을 요구했다. 깜짝 놀란 서구 열강은 청 조정에 하루빨리 의화단을 진압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의화단과 열강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저울질하던 서태후는 마침내 의화단 세력을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민중들의 대대적 반외세 바람을 등에 업고 서구 열강을 몰아내고 자신의 권력도 지키겠다는 계산을 하고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서태후는 의화단을 베이징에 불러들이고 열강에 선전 포고를 했다. 외국 공사들에게 중국을 떠나라고 통보하고, 각 지방 관아에 의화단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 8개국 열강의 대응이 더 빨랐다. 이들은 연합군을 구성해 순식간에 톈진을 함락시키고 베이징으로 쳐들어왔다. 당황한 서태후는 “선전 포고는 본의가 아니었다. 의화단을 직접 진압하겠다”라며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청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연합군은 베이징을 점령하고 무자비한 약탈을 자행했다. 서태후는 초라하게 서안으로 쫓겨 갔다.

결국 중국(청) 정부는 연합군과 베이징 의정서에 조인하고 앞으로는 반외세 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의화단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여러 국가가 힘을 모아 병력도 배치했다. 이토록 거센 진압을 받은 반란은 의화단 운동이 유일하다. 외세와의 교전과 개입이 없었다면 의화단 운동의 결과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의화단 사건이 주는 시사점이 여기에 있다. 당시 경제 상황 및 사회적 조건으로 미루어봤을 때, 혁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외부 세력이 개입하면서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를 안 서양 열강들은 승리의 대가로 중국 정부로부터 엄청난 배당금을 뜯어갔다. 그로 인해 반란 세력과 갈등 상황이 끝난 이후에도 오랜 기간 동안 중국은 경제 발전과 성장에 있어서 곤혹을 치러야 했다.

의화단 사건은 아편전쟁과는 달리, 서양 열강의 결속으로 진압되었다. 중국을 상대로 전체 8개의 식민지 열강들이 합세함으로써 결국, 중국은 패배했다. 일부는 의화단 사건을 중국 내 역사라는 관점으로 바라보지만, 세계의 관심과 반응을 끌었던 사건이기에 세계사적 의미가 더 크다. 저항과 혁명의 주된 요인을 고려해볼 때, 의화단 사건의 주된 동인은 다음과 같다.

- 전반적으로 열악한 경제 조건

- 실제로 일어난 그리고/또는 사람들이 인식한 경제적 기회 부족

- 실제로 일어난 그리고/또는 사람들이 인식한 구조적 불평등

- 실제로 일어난 그리고/또는 사람들이 인식한 외국의 영향



1989년 소련, 경제난에 무너진 소비에트연방


안타깝게도 소련은 ‘파산’으로 붕괴되었다. 소련은 미국을 따라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냉전이 끝나갈 무렵의 소련군은 병들고 피폐했으며 군인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소련군은 그저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혁명의 발생 원인으로, ‘군사적 패배’가 혁명에 미친 영향력은 크다. 실제로 소련 정부의 운영 능력에 가장 타격을 준 사건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무려 9년 4개월 동안 엄청난 병력을 동원했다. 하지만 종교적으로 결속된 게릴라 ‘무자헤딘’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철수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소련 정부는 재정적ㆍ정치적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이끈 많은 혁명들과는 다르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일이나 냉전 종식, 소련의 붕괴는 격렬한 혁명으로 발생했다고 보기는 다소 어렵다. 특히 소련의 붕괴는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정치적ㆍ사회적 시스템에 의존했던 ‘경제’가 처참하게 무너지면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게 맞다. 당시 공산 진영 국가들이 제시한 정치 사회 시스템은 비효율적이고 억압적으로 작동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상대적 빈곤 속에 살아가는 국민에게 더 큰 불신만 안겨준 꼴이 되고 말았다.

특정 나이대의 미국인들이 코로나19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특별히 더 큰 충격을 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식품이나 화장지 같은 생필품들이 동이 나는 것을 보면서 구소련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경제난과 정치적 불안, 사회적 혼란을 다시 목격한 셈이다. 거대한 국가가 무너질 때의 양상들을 보며 두려움에 떠는 것이다.

소련의 붕괴가 전반적으로 ‘폭력적인’ 과정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독립 공화국이 되면서 소련으로부터 탈퇴했거나, 탈퇴를 시도했던 발트해 국가들과 다른 지역에서는 폭력적인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소련이 무너지면서 결과적으로 러시아뿐 아니라 연방공화국이었던 나라들은 자유 시장과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불안한 체제는 계속해서 위험에 처해있다. 소련의 붕괴와 혁명이 시작된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푸틴의 정치는 프랑스의 테르미도르 반동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그는 21세기 저항과 혁명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크다.

소련의 붕괴 이후 ‘어떤 유형의 정부가 러시아를 이어갔나?’를 생각해보자. 벤자민 프랭클린이 미국에 대해 언급한 말이 떠오른다. “미국은 공화국입니다. 물론 당신들이 끝까지 이 체제를 지켜낼 수 있다면 말이죠.” 소련 혁명의 주요한 요인을 고려해볼 때, 그 동인은 다음과 같다.- 전반적으로 열악한 경제 조건

- 실제로 일어난 그리고/또는 사람들이 인식한 경제적 기호 부족

- 실제로 일어난 그리고/또는 사람들이 인식한 외국의 영향

- 가까운 시일 내 대규모 무력 충돌에서의 패배



2010년 아랍의 봄, 독재는 몰아냈지만 봄은 오지 않았다


2010년부터 시작된 아랍의 봄은 세계 여러 아랍 국가에 퍼진 혁명이다. 아랍의 봄은 ‘경제’와 ‘빈곤’이 데모와 무력시위의 핵심 원인이었다. 2010년 12월에 시작된 아랍의 봄은 1968년에 일어난 프라하의 봄과 1848년에 유럽에서 일어난 민중의 봄의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2010년 12월, 튀니지 남동부 지방도시인 시디 부지드 거리에서 무허가 청과물 노점상을 하던 26세 청년 무함마드 부아지지는 경찰의 단속으로 과일과 좌판을 빼앗겼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업을 못 해 노점상을 하던 그는 시청에 찾아가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2010년 12월 17일 시청 앞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했다. 그의 분신 소식은 트위터와 페이스북, 블로그 등을 통해 도시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대규모 시위대를 형성했다. 특히 2011년 1월 4일 부아지지가 끝내 사망하면서 시위는 더욱 격해졌다. 이 시위는 부아지지의 죽음으로 촉발됐지만 높은 청년 실업, 빈부격차, 물가 폭등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아랍의 봄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오랜 시간 축적된 경제적ㆍ정치적 상황의 발현이었다. 이는 월가 시위가 발생한 동기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월가 시위는 2011년에 일어난 비폭력운동으로 자본주의와 뱅스터리즘(banksterism) 즉, 부도덕한 행태를 보이는 은행가들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반면 아랍의 봄은 민중이 기반인 저항 운동이다. 하지만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가 간섭하면서 지역 대리전으로 확대되었다. 그로 인해 중동 지역에 조성된 불안은 더욱 악화되었다.

폭력적으로 전개되었던 아랍의 봄은 결국 다수의 정부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대표적인 국가로 시위가 시작된 튀니지, 예멘, 무바라크 대통령이 사임한 이집트, 카다피가 축출된 리비아 등이 있다. 이처럼 여러 아랍 국가의 정부가 전복되면서 정치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아랍 나라들은 유혈사태를 거치며 독재자를 몰아냈지만, 그 이후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기가 쉽지 않았다. 튀니지만이 비교적 평화적으로 민주화의 길을 이행하고 있다. 그 외 국가들은 군부정치로 돌아가거나 수많은 난민을 발생시키며 내전에 빠져들었다. 혁명의 6가지 주요 요인을 고려해볼 때, 아랍의 봄에서 전개된 저항과 혁명의 주요 동인은 다음과 같다.- 전반적으로 열악한 경제 조건

- 실제로 일어난 그리고/또는 사람들이 인식한 경제적 기회 부족

- 실제로 일어난 그리고/또는 사람들이 인식한 구조적 불평등

- 실제로 일어난 그리고/또는 사람들이 인식한 외국의 영향

- 정치적 대표성의 결여



PART 3 세계 경제 위기 선언



일자리와 실업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 폐쇄가 미국 노동 시장에 끼친 피해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2020년 7월 실업자 수는 1730만 명 이상이었다. 이 시점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인 부분은 2020년 5월 9일 2490만 명 이상이었던 실업자 수가 1730만 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2020년 첫 10주 동안 실업자 수가 170만 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여전히 10배 이상 높은 수치이다. 참고로 1933년 대공황 시절 실업률이 최고조에 달했었는데, 당시의 실업자 수는 1280만 명이었다. 한 마디로 현재 직장을 다니지 않거나, 실직한 사람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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