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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탄생 돈의 현재 돈의 미래

제이컵 골드스타인 지음 | 비즈니스북스


돈의 탄생 돈의 현재 돈의 미래

제이컵 골드스타인 지음

비즈니스북스 / 2021년 3월 / 304쪽 / 16,800원



물물교환에서 돈이 탄생했을까? - 돈의 기원




돈의 발명


1860년경 가수 마드모아젤 젤리는 남동생과 두 명의 가수와 함께 월드 투어에 올랐고, 화폐가 두루 쓰이지 않던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푯값을 대신해 섬사람들이 제공할 수 있는 물품을 받기로 하고 콘서트를 열었다. 콘서트는 대성공이었다. 표는 무려 816장이 팔렸다. 그녀는 이모에게 보낸 편지에 푯값으로 받은 물품들에 대해서도 썼다. “돼지 3마리, 칠면조 23마리, 암탉 44마리, 코코넛 5,000통, 파인애플 1,200통, 바나나 120다발, 호박 120통, 오렌지 1,500개. 근데, 어떻게 여기서 이 물품들을 되팔아서 현금으로 바꾸겠어요. 섬사람들이 현금을 갖고 있을 리 만무해요. 내일 인근 섬에서 투기꾼이 이 섬으로 들어와서 현금을 지불하고 이 물품들을 사기로 했어요.” 이후 마드모아젤 젤리가 쓴 편지는 화폐의 역사에 관한 프랑스 서적의 각주로 인용됐다.

경제학자 윌리엄 제번스는 이 각주가 마음에 들어 10년 뒤에 쓴 저서『화폐와 교환 메커니즘』에서 그녀의 편지로 서문을 열었는데, 제번스는 마드모아젤 젤리의 경험에서 ‘물물교환은 형편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제번스는 물물교환은 ‘욕망의 상호 일치’가 이뤄져야 성사되기 때문에 골치 아프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섬사람들은 마드모아젤 젤리가 제공한 것(콘서트)을 원했고, 마드모아젤 젤리도 섬사람들이 푯값으로 지불한 것(돼지, 코코넛 등)을 원했기에 거래가 성사됐다. 제번스는 인류가 상대적으로 내구성이 강하고 희귀한 무언가로 가치를 표시하기로 합의하면서 물물교환의 문제가 해결됐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인류는 화폐를 발명해 물물교환의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화폐가 물물교환에서 시작됐다는 주장은 명쾌하고 강력하며 직관적이다. 하지만 이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없다. 화폐가 탄생하기 이전에 사람들은 대체로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았다. 약간의 거래가 이뤄졌지만, 그것은 주로 무언가를 주고받는 철저한 기준에 따라 행해지는 공식적인 의식의 일부였다. 화폐가 물물교환에서 시작됐다는 주장과 달리 이러한 공식적인 의식에서 유래됐다는 주장도 있다.

마드모아젤 젤리가 방문했던 섬에는 돼지, 칠면조, 코코넛 그리고 바나나로 모두를 위한 성대한 잔치를 벌이는 관습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녀가 자신이 받은 물품으로 섬사람들을 융숭하게 대접했다면, 오늘날 병원이나 대학교 도서관을 지어 주는 사람들이 누리는 사회적 지위가 그녀에게도 주어졌을지 모른다. 또 섬사람들은 대접에 대한 보답으로 마드모아젤 젤리를 위해 잔치를 열어 줬을 것이다. 화폐가 등장하기 전에는 모든 경제 시스템이 이러한 호혜에 기반을 뒀다. 이렇듯 화폐는 단순히 가치를 환산하고 편리하게 보관하기 위해 고안된 교환 수단이 아니다. 화폐는 피와 욕망으로 묶인 사회 구조의 핵심 요소다. 그러니 사람들이 돈에 환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돈, 모든 것을 바꾸다: 고대 그리스의 왕국들은 대체로 공물과 재분배 시스템으로 오랫동안 운영됐다. 하지만 기원전 1100년경 고대 그리스 문명이 붕괴됐다. 몇 세기 이후 그리스 인구가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마을은 소도시로 성장했고 장인이 등장했으며 소도시별로 특산품도 생겨났다. 그리고 그리스 소도시들에 공공건물이 들어섰고 공공 급수 시설이 마련됐다. 왕이나 사제가 관리하는 공물과 재분배 시스템을 중심으로 형성된 경제 시스템은 이런 환경에서 운영됐다. 이후 그리스인들은 상의하달식으로 운영되는 소왕국을 형성하는 대신에 새로운 형태의 집단을 탄생시켰다. 그들은 그것을 도시 국가라는 의미의 폴리스(polis)라 불렀다. 그리스를 중심으로 수백 개의 폴리스가 생겨났다.

각 폴리스에는 시민 의회가 있었다. 폴리스에서는 시민 의회가 만나서 의견을 나눴지만, 소수의 엘리트들이 최종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시민들, 즉 폴리스 주민인 폴라이트(polite)들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줄지’를 결정할 때 자신들도 발언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을 상의하달로 관리하는 통치자나 하의상달로 움직이는 친족 관계가 없어도 공적 생활과 일상생활에서의 교환 활동을 체계적으로 움직일 수단이 필요했다. 그들에게는 바로 화폐가 필요했던 것이다!

오늘날 터키 지역에 해당하는 리디아는 기원전 600년경 금과 은이 섞인 광물을 대량으로 채굴했는데, ‘일렉트럼’(electrum)이라 불리는 합금은 리디아인에게 큰 문제를 안겼다. 그들은 합금의 가치를 매기기 위해서 금과 은의 비율을 따져 봐야 했다. 이때 누군가 기가 막힌 방법을 찾아냈다. 그들은 금과 은의 비율이 일정한 일렉트럼을 일정한 크기의 덩어리로 나누고 한쪽 면에 사자 무늬를 찍었다. 크기가 같은 일렉트럼 덩어리는 그 가치도 같았다. 이렇게 리디아인은 합금으로 주화를 발명해냈다. 그로부터 머지않아, 그들은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은전과 금전을 주조해 내기 시작했다.

주화는 도시 국가들이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데 더없이 필요한 것이었다. 도시 국가의 사회는 굉장히 거대해 가족 공동체 단위의 호혜 시스템으로 운영될 수 없었다. 또 더없이 평등한 나머지 공물 시스템으로 운영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곧 그리스 전역에 은화를 주조하는 백여 개의 조폐국이 생겨났다. 수십 년이 지나지 않아 그리스인이 가치를 측정하고 상품을 교환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은 이제 더 이상 화폐를 닮은 무언가가 아니었다. 돈은 주화였고 주화가 곧 돈이었다.

주화는 그리스인의 일상생활을 180도 바꿔 놓았다. 각 그리스 도시 국가에는 아고라라 불리는 공공장소가 있었는데, 주화가 널리 쓰이기 시작할 무렵 사람들은 팔 물건을 들고 아고라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시민들은 아고라에서 옷, 무화과, 솥 등을 사고팔기 시작했다. 물론 아고라는 여전히 공론의 장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으로 변모했다.

주화가 등장하기 전에 가난한 그리스인은 부유한 지주의 농장에서 일했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아는 임금을 받지 않았다. 그들과 지주는 일종의 거래를 했다. 그들이 농장에서 한 계절이나 1년 동안 일하면 지주는 그 대가로 음식과 옷 그리고 잠잘 곳을 제공했다. 주화가 등장하고 수십 년 뒤에 그들과 지주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가난한 사람들은 날품팔이가 됐다. 그들은 아침에 출근해서 일하다가 하루가 끝날 무렵에 품삯을 받고 퇴근했다. 사람들은 새로운 임금 기반 경제 시스템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주화의 확산, 즉 화폐의 부상으로 사람들은 더 자유로워졌고 자신의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됐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더 고립되고 나약해졌다.

화폐가 발명되고 경제 혁명이 일어나다


중국은 리디아와 거의 같은 시기에 주화를 발명했다. 중국이 주화를 발명한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 초기 중국의 주화는 아주 작은 청동 칼과 청동 삽이었다. 그러다가 엽전과 유사한 모양의 주화가 등장했다. 당시 중국인은 가운데 구멍이 뚫린 작은 청동을 주화로 사용했다. 주화의 가치는 주화에 함유된 금속의 가치를 기준으로 책정됐는데, 사실 청동은 그렇게 값진 금속이 아니었다. 그래서 물건을 사려면 적어도 주화를 한 움큼씩 들고 다녀야 했다. 이후 서기 1세기 초, 중국은 관료제를 기반으로 통합된 제국을 세웠고, 수만 명이 고위 관직을 얻기 위해서 과거에 응시했다. 과거에 급제한 몇몇은 실크 또는 나무나 대나무로 만든 판에 적인 방대한 기록물을 관리했는데, 기록물이 급격히 늘어나자 실크 비용과 나무와 대나무 판의 부피가 문제가 됐다. 중국 관료들은 문서 작업에 더 적합한 기록 매체가 필요했다. 바로 이때 종이가 등장했다.

최초의 종이가 등장하고 수백 년이 지나 인쇄술이 등장했다. 그 배경에는 불교가 있었다. 불교에서는 경전을 필사해 널리 퍼뜨리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일부 승려들이 똑같은 경전을 끊임없이 베껴 쓰는 데 진저리를 느껴 기막힌 아이디어를 냈다. 경전에서 성스럽지 못한 내용을 모두 삭제하고 목판에 새긴 것이다. 그리고 목판에 잉크를 바르고 종이 위에 찍었다. 서기 710년경, 현존하는 불경 인쇄물 중 가장 오래된 인쇄 활자는 그렇게 종이 두루마리 위에서 탄생했다. 이제 중국은 종이, 인쇄술 그리고 주화를 갖게 됐다. 그로부터 2세기 뒤, 중국 쓰촨성에서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탄생한다. 바로 지폐다. 중국의 주화는 대부분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청동이 귀했던 쓰촨성에서는 철전이 사용됐는데, 철은 주화 재료로서 최악이었다. 소금 약 500그램을 사려면 철전 약 700그램이 필요했다.

이후 서기 994년경, 쓰촨성 청두에서 활동한 어느 상인이 기막힌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사람들이 철전을 맡기면 종이에 영수증을 찍어서 내줬다. 일종의 예탁 증서로, 오늘날 사용하는 코트 보관증과 같은 것이었다. 보관증만 보여주면 코트를 찾아갈 수 있듯이, 이 영수증이 있으면 누구나 상인에게서 철전을 되찾아 갈 수 있었다. 또 영수증은 양도가 가능했다. 사람들은 철전을 무겁게 짊어지고 다니는 대신, 물품을 구입할 때 영수증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종이’ 영수증이 화폐로 사용된 것이다.

이윽고 다른 상인들도 영수증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쁜 생각을 품은 상인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어떤 상인은 보관하는 철전도 없으면서 영수증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차용 증서를 발행했고, 이렇게 차용 증서가 유통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철전과 맞바꾼 차용 증서가 아무 가치 없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분노했고 고소와 소송이 난무했다. 몇 년 뒤 쓰촨성 정부는 직접 지폐를 발행했는데, 지폐에 주화를 그려 넣었고,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지폐에 그려진 주화의 개수대로 지폐와 주화를 교환할 수 있었다.

당시 상인들은 교역을 하려면 무거운 주화를 짊어지고 다녀야만 했다. 이로 인해 교역 활동이 어려워지거나 불가능하기도 했는데, 지폐는 그런 불편함을 타개하는 돌파구 같은 존재였다. 지폐가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자 교역이 활성화됐고 사람들은 보다 많은 것을 배웠고 기술을 발전시켰다. 지폐는 노동 방식마저 바꿨다. 수백 년 동안 국가에서는 옷감과 곡물을 세금으로 거둬들였고, 사람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옷감을 짜고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주화와 지폐가 통용되자, 당국은 주화와 지폐로 세금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유롭게 직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됐다.

학자들은 중국의 화폐 등장을 유럽의 산업 혁명보다 수백 년 앞선 경제 혁명이라 설명한다. 활자와 자기 나침반이 발명됐고 농부들은 같은 크기의 토지에서 더 많은 쌀을 수확할 수 있는 새로운 농법을 개발했다. 또 책이 인쇄되면서 정보가 중국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점점 많은 사람이 공물제로 운영되는 봉건 경제에서 벗어났고 화폐에 의해 움직이는 시장 경제로 편입됐다. 초기 황제들은 몇 개의 구역을 정해 두고 그곳에서만 시장이 열리도록 했다. 정부가 관리하는 시장에서는 가격이 엄격하게 통제됐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시장에 대한 규제는 느슨해졌고 사람들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것을 판매할 수 있게 됐다. 시장이 생기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도시가 형성됐다. 런던과 파리의 인구가 10만 명이 채 안 되던 시기에 중국의 두 개 도시의 인구가 각각 10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유로화부터 비트코인까지 현재진행형인 돈의 변신 - 새로운 화폐의 탄생


리먼 사태와 그림자 금융


두 사내와 머니마켓펀드: 브루스 벤트는 한 보험 회사의 투자 부서에 취직했다. 그는 해리 브라운과 같은 날 첫 출근을 했는데, 브라운은 훗날 벤트의 상사가 된다. 두 사람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몇 년 뒤에 둘은 회사를 나와서 브라운 앤드 벤트를 설립했다. 그들은 투자할 여유 자금이 있는 보험 회사들과 대출이 필요한 회사들을 서로 연결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업은 신통치 않았다. 그들은 하루하루 근근이 버텼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 그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33년에 제정된 연방 규정은 적금 계좌의 금리 한도를 설정했고 예금 계좌에는 이자를 일절 지급하지 않도록 했다. 그러자 돈이 많고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 돈을 묶어 둘 의향이 있는 사람들은 10만 달러 적금 계좌를 개설하거나 트레저리 빌(Treasury bills) 또는 T-빌(T-bills)로 알려진 단기 국채를 매입해서 더 많은 이익을 챙겼다. 하지만 일부 투자자들은 여유 자금을 장기간 묶어 두기 싫어했고, 투자자들 중에는 거금을 투자할 여력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두 사람은 이런 투자자들을 위해서 단기 국채와 고액 적금 계좌처럼 높은 이자 수익을 제공하는 투자 상품을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어느 날 오후 벤트에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벤트는 “전 브라운을 쳐다보며 뮤추얼 펀드는 어떠냐고 말했죠.” 뮤츄얼 펀드는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되는 자금이다. 퇴직 계좌가 있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한두 개 이상의 뮤추얼 펀드에 투자하는 투자자일 가능성이 높다. 뮤추얼 펀드에 투자한다는 것은 사실상 해당 뮤추얼 펀드를 구성하는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하는 것과 같다. 뮤추얼 펀드의 가치는 펀드를 구성하는 주식과 채권의 가치와 함께 매일 오르고 내린다.

브라운 앤드 벤트는 주식이나 채권에 대한 투자가 아니라, 은행에 있는 돈처럼 느껴지는 뮤추얼 펀드를 만들고자 했다. 예금 계좌의 편의성을 모두 갖지만 이자율이 높은 뮤추얼 펀드 상품을 원했다. 그래서 뮤추얼 펀드 모델을 약간 변형하기로 했다. 뮤추얼 펀드에 사람들이 투자하면 그들은 투자자의 돈을 단기 국채 형태로 정부에 대출해주고, 고액 적금 계좌의 형태로 은행들에 대출을 해줬다. 이 금융 상품들은 매우 안전한 단기 투자 상품이었다. 너무나 안전해서 뮤추얼 펀드 가격은 펀드를 구성하는 주식이나 리스크가 높은 채권처럼 매일 오르내리지 않았다. 브라운 앤드 벤트는 주가를 주당 1달러로 정했다. 그리고 외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주가를 주당 1달러로 유지할 수 있는 회계 시스템을 사용했다. 그야말로 은행에 맡긴 돈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뮤추얼 펀드를 ‘적금 펀드’라 부르려 했지만, 뮤추얼 펀드를 규제하는 증권거래위원회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적금 펀드’만큼이나 재미없는 ‘리저브 펀드’(Reserve Fund)라는 이름을 붙였다. 리저브 펀드는 ‘준비금’이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바로 정확히 그들이 노린 것이었다. 리저브 펀드는 1972년부터 운용되기 시작했다. 1973년 말까지 그들은 리저브 펀드를 통해 1억 달러를 운용했다. 몇 년 만에 경쟁 펀드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것들은 머니마켓펀드(money-market funds), 즉 MMF라고 불리게 될 새로운 종류의 펀드들이었다. 머지않아 사람들은 자신의 머니마켓펀드로 수표를 발행할 수 있게 됐다. 다시 말해 머니마켓펀드에 들어 있는 돈으로 소비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마침내 머니마켓펀드에 투자한 돈은 은행에 맡긴 돈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머니마케펀드에 뛰어든 대형 은행: 벤트와 브라운이 작은 사무실에서 머니마켓펀드의 씨앗이 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지 10년이 흐른 시점인 1982년, 머니마켓펀드에 2,000억 달러 이상의 자금이 흘러 들어갔고, 매년 수십억 달러의 돈이 머니마켓펀드 시장에서 움직였다. 벤트와 브라운은 고액 적금 계좌와 단기 국채에 계속 투자했지만 다른 펀드 회사들은 새로운 투자 상품을 찾기 시작했다. 일부는 펀드 자금으로 ‘기업 어음’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주로 안전하고 탄탄한 기업의 어음을 매입해 어음을 발행한 기업에 단기로 돈을 융자해 줬고, 1980년대 머니마켓펀드는 기업 어음의 최대 매수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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