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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마 스토리

이갈 에를리히 지음 | 아라크네
요즈마 스토리

이갈 에를리히 지음

아라크네 / 2019년 9월 / 351쪽 / 18,000원





수석 과학관 - 브랜드 되기



1983년 총리실 산하 산업부 소속의 ‘수석 과학관’의 직책을 맡으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IDF(이스라엘 방위군)에서 의무 복무를 마치고 나서 43살의 나이에 이 제안을 받기까지 22년 동안 나는 대학에서 공부하고 실험실에서 연구했으며 공직에 몸담았다. 참고로 수석 과학관 직책은 과학 연구나 컨설팅을 하지 않으며, 스타트업에 연구 개발 자금을 지원하는 산업부의 집행 조직이다.

대부분의 경우 혁신은 위험한 계획이다. 따라서 개발자의 두려움을 누그러트려 그들이 모험적으로 혁신 활동을 확대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국가가 자금을 지원하는데, 수석 과학관은 프로젝트 비용의 최대 50퍼센트까지 지원한다. 지원할 분야를 정해 두지 않고, 혁신, 새로운 개발 마케팅의 실행 가능성, 차후 개발을 위한 자금 확보 가능성 등을 지원의 기준으로 정한다.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보조금은 탕감되고 개발자에게는 어떤 요구도 하지 않으며, 성공하면 개발자는 국가에 로열티를 지불해야 한다.

나는 결정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다. 내가 재량껏 쓸 수 있는 연간 예산 2,000만 달러가 이스라엘 경제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킬 만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또 관료주의적인 장애물이 존재하고, 민간 부문의 CEO들이 이런 장애물 때문에 분통을 터트린다는 사실 또한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도전인 것은 분명했다. 더군다나 그 무렵 나는 공직 이외에 어떤 일자리도 제안 받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당시 재정부 예산국 부국장이었으며 훗날 국장을 맡는 아론 포겔에게 조언을 구했다. 포겔은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난 이 자리가 이스라엘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이라고 생각하네. 자네는 해낼 수 있을 거야. 예산을 확대해 주겠네.” 나는 결국 1984년 임시 재임자로는 처음으로 수석 과학관으로 부임했다. 참고로 당시 이스라엘은 역사상 가장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따라서 수석 과학관실에서 내가 마주한 개인적인 도전은 한층 더 힘겨운 것이었다.



경제적 격동기와 ‘금융의 사나이’



수석 과학관으로서 내가 맡은 책임은 새로운 연구 개발 이니셔티브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책상에는 보조금 신청서가 가득 쌓였다. 이 외에 기존 기업을 구제하는 임무도 맡았다. 새롭게 맡은 임무는 두 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연구 개발에 투자하려는 기업을 우선하여 지원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재정부로부터 추가 자원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내가 새로운 직책을 맡을 무렵에 경제 위기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래서 기업들은 회사의 미래를 걱정해야 할 위기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파격적인 변화를 단행할 기회가 왔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수석 과학관으로 재임하는 내내, 보조금 신청서의 1차 조사를 맡은 심사관들과의 회의가 특히 즐거웠다. 직원회의는 내가 잘 모르는 과학 분야에 대한 속성 교습과도 같았다. 이 과정에서 나와 심사관들은 우리가 모든 주제에 정통할 수는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아울러 수석 과학관의 역할이 심사관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 그리고 모든 신청서의 단점을 확인한 뒤 혁신 방안을 강조하는 것이라는 점도 깨달았다. 한편 특정 분야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다. 세부 사항으로 가득한 신청서에서 문제점을 확인하고, 연구 위원회의 승인 단계를 더욱더 철저하게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이스라엘에는 이스라엘 특유의 또 다른 도전이 존재하는데, 그 도전이란 ‘금융의 사나이들’과의 논쟁을 말한다. 유력한 정책 담당관을 포함해 공공 분야의 관리자라면 누구나 예산국의 젊은 경제학자들과 한바탕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젊은 경제학자들은 공직의 정예 전사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을 대중의 돈을 지키는 수호자라 생각하고 부처의 활동 자금을 신청하는 장관들의 요구까지 거절하기 일쑤다.

나는 개발 계획에 대한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금융의 사나이들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나는 금융의 사나이인 아론 포겔을 친구로 두고 있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프로젝트 예산을 승인받으려면 말단에서부터 시작하고 두 가지 중대한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네. 첫째는 계획서를 제출할 때 완벽한 투명성이 필요하지. 재무 공무원은 의심이 많고 항상 숨겨진 세부 사항과 데이터가 없는지 찾거든. 둘째는 재정부 고위 공무원의 승인을 받기까지의 과정(승인을 받는 비율은 10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을 처리하는 의사 결정권자들에게도 잇달아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네.”

내가 재정부 예산국장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은 것은 수석 과학관실의 업무에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보조금 예산은 매년 증가했으나 한편으로는 이견에 부딪히기도 했다. 또 나는 심사관이 추구하는 원칙, 즉 투명성을 완벽하게 보장한 상태에서 열 개의 계획 가운데 한 개만 승인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래야 공직의 관리자가 금융의 사나이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 혁신의 DNA



천연자원은 부족하지만 완전 고용을 열망하고, 인력 자원을 개발하며, 국민의 복지와 삶의 질을 개선하는 일에 전념하는 국가의 세계화된 경쟁 경제가 이스라엘의 혁신 전략이며, 이는 국가의 건설과 동시에 수립되었다. 또 이 전략에서 혁신을 이룩할 모든 계획 과정과 메커니즘이 시작된다. 나아가 난관과 이견, 논쟁과 장애물에 직면할 때도 이 전략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도구가 된다.

이스라엘 정부는 수년 동안 이 단순한 원칙을 토대로 과학과 기술 연구 개발, 교육, 학계, 방위, 산업에 막대한 예산을 투자했다. 참고로 이 과정의 정점은 1985년의 산업 연구, 개발, 기술 및 혁신 장려법(R&D 법)의 탄생이다. R&D 법에 따르면, 수석 과학원은 이 원칙을 수행할 책임자로서 다른 정부 기관의 활동과는 독립적으로 1년 이상 자금이 필요한 중요한 연구 개발 프로젝트에 지속해서 보조금을 지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R&D 법은 내가 개인적으로 추가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도 이로웠다. 보조금 신청 과정을 명확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체계를 수립하겠다는 것이 나의 또 다른 목표였다.

1985년 초반, R&D 법안을 신청하고 조직적인 변화를 실행하면서 1년가량을 보낸 후의 수석 과학관실 운영은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수석 과학관실이 연구 개발의 중추적인 자극제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갈 길이 멀었다. R&D는 주로 군사 분야에서 강조되었고, 민간과 사업 부문의 R&D는 무시되었다. 민간 기술을 개발하고자 지속해서 노력한 기업 가운데 일부는 경제 위기를 넘기지 못했고, 소기업은 초기 자본 마련을 위한 자금원을 확보하지 못했다. 수석 과학관실에도 경제 위기로 타격 받은 기업을 회복시키거나 야심 찬 프로젝트를 장려할 자금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느 정도 추진력을 만들었다. 기존의 타디란(Tadiran)과 비교적 신생인 텔레라드(Telerad)와 ECI가 수석 과학관으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아 성공을 거두었고, 일부 기업은 세계적인 명성까지 얻었다. 나는 임기 초기에 또 다른 변화를 시도했다. 보조금 수혜자들에게 로열티를 징수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모든 기업이 로열티 계약서에 서명한 상태였지만 나의 두 선임자는 로열티를 징수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수익을 창출한 개발 사례가 드물었고, 기업이 R&D 보조금을 신청하도록 장려한 정책이 효과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연구 개발 프로젝트에 위험을 감수한 채 투자하고, 이 프로젝트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경우 투자비용을 떠맡았다. 그런데 로열티를 받으면 위험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원으로 연구 개발 프로젝트가 성공했다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후속 조사와 로열티를 징수하는 방안을 결합해) 보상 펀드(Compensation Fund)를 조성했다. 참고로 1984년에 로열티로 징수한 액수는 100만 달러에 지나지 않았는데,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400만 달러에 이르렀다. 그리고 내가 수석 과학관실을 떠날 무렵에는 연간 2,500만 달러에 이르렀다.

참고로 여러 나라의 관련 기관과 면담할 때 왜 로열티를 징수했느냐는 질문을 나는 자주 받았다. 연구가 결실을 맺었다고 해도 로열티를 징수하는 것은 관례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보조금의 토대를 이루는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중요한 공적 원칙이 있다. ‘우리는 기업이 감수하는 위험에 참여하고 기꺼이 그들과 함께 손실을 부담하는 동시에 성공 또한 함께 나누고자 한다. 로열티 징수는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자금을 쓴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입증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였다.’ 대중은 당연히 자신의 돈이 민영 기업을 부유하게 만드는 데 쓰일까 봐 걱정한다. 하지만 민영 기업이 성공하면 정부가 투자금을 부분적으로 회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 한시름 놓을 것이다.



아리엘 샤론의 정치 학교와 관료주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방법



관리직에서 성공한 주된 요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 관리자들 대부분은 “경험이 핵심”이라고 답한다. 적절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직관이나 직감을 따른다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이들도 있다. 나는 이따금 직관이나 직감이 어디에서 오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상식과 경험이 결합되었을 때 생긴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자신의 상식을 이용해 관련 경험에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확한 직관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더 높을 것이다.

아리엘 샤론은 군인과 장군을 거쳐 마침내 총리가 된 인물이다. 그는 정치적인 상황을 파악해서 본인에게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이를 이용할 수 있는 직관과 일반 상식, 경험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민간 조직이든 군대 조직이든 항상 큰 논란을 일으킨 후 비난을 받으며 사임했던 그는 안정성과 지속성이 요구되는 경제부를 운영하기에 부적합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미지와 현실은 판이하게 달랐다. 샤론이 산업부에서 재임한 5년은 환상적인 기간이었다. 그와 함께 일한 경험은 정부 기관에서 내가 경험한 어떤 일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특했다. 놀랍게도 이 기간에 산업부는 발전했다.

아리엘 샤론은 1984년 9월에 수립된 거국 중립 내각의 산업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아리엘 샤론이 산업부에서 보낸 5년은 내게 정치 교습 기간과도 같았다. 나는 정치인, 다시 말해 권력과 영향력을 획득한 사람들과 협력하는 법을 배웠다. 한편 모든 장관은 현장을 시찰하는데, 특히 장관이 외딴 지역을 방문할 때면 더욱 이목이 집중된다. 그런데 샤론의 특허 공장과 개발 도시 시찰은 일반적인 장관의 시찰과는 확연히 달랐다. 샤론은 모든 산업부 공무원에게 시찰에 참석할 것을 요구했는데, 항상 수십 명의 사업가, 경영자, 리쿠드 당 운동가를 시찰에 대동했다. 시찰에는 일종의 극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단순히 지역 주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그것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관료주의 논쟁을 해결하는 엔진 역할을 담당했다. 샤론은 시찰에서 본인의 정책과 우선 사항을 매우 분명하고 명확하게 전달했다. 시찰은 표준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공장 시찰을 빠른 속도로 끝내면 장관을 위한 환영회와 긴 식사가 이어졌다. 그다음에는 장관의 고위 공무원과 직원, 해당 지역에 이해관계가 있는 지역 사업가와 경영자가 모여 참가자 회의를 열었다. 지역 의회 의장과 장관이 국가 개발 구역(중심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국가 차원의 이유로 정부가 개발을 우선시하는 주변 지역)과 산업 증진의 중요성에 대해 연설하면, 다른 연사들이 장관에게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연사가 공장과 프로젝트의 수립과 운영을 위해 정부 보조금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을 토로하고 난 후에는 관련 직원이 불려 나와 지원을 제공하는 과정에 따르는 어려움을 설명했다. 설명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샤론은 금세 화를 내며 모든 청중이 보는 앞에서 직원을 나무랐다. 이런 식으로 신속하고 공개적인 토론이 끝나면 그 자리에서 결론을 내리고 실행 일정을 정하면서 이렇게 마무리했다. “내게 보고해 주세요. 어려운 점이 있거나 지연 사태가 벌어지면 즉시 나를 불러 주십시오.”

프로젝트 보조금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갖가지 이유를 늘어놓는 데 이골이 난 노련한 공무원이라도 수십 개의 눈, 특히 샤론의 눈이 뚫어지게 쳐다보는 상황에서는 금세 고분고분해져서 해결책을 내놓곤 했다. 사람들이 보기에 샤론은 ‘관료적 형식주의를 퇴치하는 사람’이자 주변 지역과 이스라엘 산업을 발전시키는 지도자였다. 이런 방법은 특히 과도한 관료적 형식주의를 근절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1990년대 소련 이주 - 스타하노프가 이스라엘 기술 인큐베이터에 들어오다



1990년 한 해는 인사이동, 그리고 분열되고 있는 소련으로부터의 거대한 이주 물결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거대한 이주는 이스라엘에 기회와 도전을 동시에 선사했다. 기존 이스라엘 인구의 20~25퍼센트에 해당하는 1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이주해 온다면 이미 불안한 경제를 절벽으로 밀어 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반면에 제대로 대처한다면, 특히 기술 부문에서 대대적인 경제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이주민의 특징은 학자와 과학자, 연구원의 비율이 높다는 점이었는데, 이들을 모두 고용 시장에 흡수해 통합하는 것은 수석 과학관실의 몫이었다. 수석 과학관실에서 일하는 리나트 프리도르는 기술 인큐베이터의 운영 규칙을 정하기 위해 수석 과학관이 지휘하는 운영 위원회를 구성했다. 기술 인큐베이터를 설립하려는 사업가가 국가로부터 재정 지원을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은 간단했다. 3~5명의 연구원으로 구성된 열 개가량의 소규모 개발팀을 담을 수 있는 웹 사이트, 행정을 처리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할 작은 사무실, 임의의 경영진을 임명하는 것 등이 조건이었다. 경영진은 사업 전문 멘토와 수석 과학관실 운영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인큐베이터 이사회가 인정할 만한 프로젝트를 선택했다.

결과는 엄청났다.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인큐베이터 열 개가 이미 활동을 시작했고, 이 과정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전국적으로 24개의 기술 인큐베이터를 만들 수 있었다. 기술 인큐베이터가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우선 소련에서 이주한 수많은 과학자와 엔지니어를 수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뿐만 아니라 기술 인큐베이터를 통해 이스라엘의 선임 학자들 사이에 새로운 문화가 조성되었다. 그들은 대학에 남아 연구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사업에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기술 인큐베이터에서 탄생한 몇몇 기업은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예를 들면, 1998년 나이오트 인큐베이터에서 설립한 엔지모텍 컴퍼니가 있다. 엔지모텍은 특수 지질을 개발하고 제조하는 전문 회사이다.

이제 기술 인큐베이터가 거둔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신생 스타트업 기업을 설립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할 때가 왔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껏 정부가 맡았던 큰 짐을 재정과 사업 분야의 노련한 투자가가 떠맡아야 했다. 나는 1991년부터 줄곧 기술 인큐베이터를 통한 글로벌 기술 사업화 분야에 내 에너지를 바쳤다. 그동안 잠자고 있던 기술이 기술 사업화를 통해 생명력을 얻어 창업으로 연계되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기술 창업으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었다.



시장 실패? 요즈마!



여태껏 1980년대 이스라엘의 기술 분야를 다룬 심층적인 학계 논문은 없었다. 설령 있다 해도 연구자는 이 시기 기술 산업의 상황에 대해 ‘시장 실패’라고 정의했을 것이다. 시장 실패란 사회주의 국가와 자유 시장 가운데 어느 편을 선호하든 상관없이 정부가 반드시 개입해야 하는 상황을 뜻한다. “이스라엘 연구원은 개발에는 능하지만 관리와 마케팅에 관한 아이디어는 부족하다”는 불만스러운 평가가 되풀이되었다. 가슴 아프지만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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