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을 위한 경제학
우종국 지음 | 북카라반
마흔을 위한 경제학
우종국 지음
북카라반 / 2019년 7월 / 328쪽 / 14,000원
Chapter 1. 경제학은 모르지만 경제는 알고 싶어
사회적 정의와 경제적 정의는 다르다
<사례> 중저가 패션 업체를 경영하는 A씨는 재고로 남은 가방을 형편이 좋지 않은 학생들에게 기부하기로 했다. 사회단체를 통해 가방을 전달한 뒤 A씨는 “아저씨, 아줌마 가방처럼 생겨서 아무도 가져가려 하지 않는다”는 반응을 들었다. 호의가 무시당한 것처럼 느껴진 A씨는 기부를 중단하고 가방을 폐기했다.
위의 사례에서 불쌍한 사람을 돕겠다는 A씨의 선한 의도를 철없는 아이들이 무시한 것일까? 가방을 전달받은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안 그래도 옷과 신발 때문에 기가 눌려 지내는데, 가방까지 볼품없어 보이는 것을 메고 다니면 놀림을 받을 것 같아 걱정되지 않을까? 비싼 가방을 메지는 못해도 마음에 드는 것, ‘없어 보이지 않는’ 것을 갖고 싶지 않을까?
지금은 ‘취향의 시대’다. 배고파서 슬픈 것이 아니라 맛있는 것을 먹지 못해서 슬프다. ‘가방’이 없어서 슬픈 것이 아니라 ‘예쁜 가방’을 메지 못해서 슬프다. 월급이 적어서 슬픈 것이 아니라 친구ㆍ동창ㆍ친척보다 월급이 적어서 슬프다. 배고파 죽는 사람보다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 한국에서 연간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4,000명가량 되는데, 자살자는 그보다 3배 이상 많은 1만 5,000명쯤 된다. 하루에 41명씩 자살하는 꼴이다.
사회적 정의로 판단하면 ‘불쌍한 사람을 돕겠다’는 A씨의 선의를 학생들이 무시한 것이다. 그러나 사춘기 학생들에게는 학교 친구들의 멸시가 공포다. A씨가 학생들의 심리를 고려했다면 조금 더 좋은 가방을 보내주었어야 했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율을 얻는 것이 경제적 정의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고전 경제학의 시각으로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고전 경제학은 안타깝게도 공급이 부족한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구두는 발을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취향보다는 튼튼함이 우선이었다. 그것도 없어서 못 신었다.
40대 이상이라면 만화 <검정고무신>을 기억할 것이다. 1992~2006년 만화 주간지에 연재되었던 만화로,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못살던 시절의 어린이가 주인공인데, 제목 ‘검정고무신’은 그 시절 경제ㆍ사회의 상징물이다. 1900년대 초기에는 비싼 가죽 신발이나 저렴한 짚신 말고는 신발이 없었다. 화학공업이 발달하면서 나온 고무신은 그야말로 혁명적이었다. 고무신이 나오자 여러 업체가 고무신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모양이 거의 비슷했다. 당시는 공급이 부족했기 때문에 신발의 목적은 발을 보호하는 것이지 취향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형태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신발이 발을 보호하는 기술적 단계는 넘어섰다. 튼튼함보다 ‘이 신발은 나에게 잘 어울리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구매한다. 고전 경제학에는 취향의 개념은 없지만, 한계효용의 법칙이나 수요라는 개념으로 취향을 반영한다. 반면 마르크스 경제학에는 취향의 개념이 없다. 고전 경제학은 공급과 수요를 중심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반면, 마르크스 경제학은 생산력, 생산관계로 논리를 전개한다.
우리가 소비하는 제품 중에 인도ㆍ베트남ㆍ인도네시아ㆍ태국에서 만들어진 브랜드가 있는가? 신발을 구매하는 이유에는 ‘기능’과 ‘기분’이 있다. 동남아시아 공장은 ‘기능’은 잘 만든다.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유명 브랜드의 신발은 대부분 ‘메이드 인 차이나’, ‘메이드 인 베트남’, ‘메이드 인 인도네시아’다. ‘기능’은 동남아시아 국가의 것이지만, ‘기분’은 미국, 독일 등의 것이다. 고도로 자본주의화가 진행된 지금의 시대는 기술적으로만 잘 만든다고 회사나 나라가 발전하지 않는다.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
대부분 사회적 사건, 예를 들어 살인ㆍ성범죄ㆍ성매매ㆍ사기ㆍ도박ㆍ납치ㆍ협박ㆍ강도ㆍ방화 등은 선악의 판단이 명확하다. 사건을 인지한 순간 옳고 그름의 판단은 끝난다. 반면, 경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프라이드치킨 가격을 올리면 기업이 이익을 늘리려고 서민의 피를 빨아먹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가맹점주 또한 서민이다. 그들도 임대료를 올려주어야 하고 직원 월급을 올려주어야 한다. 구조 조정 요구에 직면한 회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직원 일부를 해고하고 회사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해고 대신 회사를 청산할 것인가.
경제 문제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어떤 판단을 내리든, 이익을 보는 집단과 피해를 보는 집단이 생긴다. 그렇다면 이익을 보는 집단을 최대화하고 피해를 보는 집단을 최소화하는 합리적 판단을 해야 한다. 피해를 보는 사람이 한 명도 생기지 않게 하려면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한다. 선택의 문제가 있을 때, 대화와 토론으로 설득하고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 민주 사회의 방법이다. 그런데 경제 문제는 타협이 쉽지 않다. 사람은 자신의 경제적 이해를 기반으로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생각을 바꾸기 쉽지 않다.
자신이 강남의 고급 아파트에 살면 보유세ㆍ종부세 인상에 반대할 것이다. ‘가난한 서민이 집을 사려면 아파트 가격이 너무 오르면 안 되므로 세금을 늘려야 한다’는 대의에 동의할 수는 있겠지만, 그 부담이 자신에게 온다면 반대 입장에 설 것이다. 또한 경기 부양을 위해 기업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대의에는 동의하더라도 자기 집 주변에 공장이 들어선다면 극렬히 반대할 것이다. 그 피해는 자신이 받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제 문제는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세력 대 세력의 대결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Chapter 2. 무소유의 역설, 자유의 반전
‘무소유의 삶’은 가능할까?
중학생 때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감명 깊게 읽었다. 소유에 대한 집착이 마음을 어지럽히니, 무소유로 마음의 자유를 찾자는 내용이었다. ‘무소유의 삶’을 동경하는 사람들은 아파트를 싫어한다. 대한민국에서 아파트는 물질적 욕망의 상징이다. “집은 사는(買) 곳이 아니라 사는(生) 곳”이라는 말은 아파트를 부의 척도로 보는 시각에 대한 반발이다.
물질적 욕망의 상징인 아파트의 대안으로 색다른 주거 공간을 모색하는 사람도 많다. 도시의 번잡함이 싫어 교통이 불편한 한적한 변두리의 허름한 집을 사기도 한다. 문제는 이 집을 팔고 이사를 가려고 할 때다. 결혼ㆍ이직ㆍ자녀 교육 등의 이유로 이사하려고 집을 내놓을 때 대중적 취향이 아닌 집은 도통 나가질 않는다. 처분하고 싶을 때 곧장 처분이 안 되니, 그 집에 발목이 잡힌다. ‘전세로 살면 되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전세 계약 기간이 끝나 나가려고 했더니 새로운 새입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집주인이 ‘사람이 들어올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해서 기다렸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새로운 세입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세입자가 소송을 내어 집을 경매에 넘긴다. 그런데 경매조차 참여하는 사람이 없다. 몇 번 유찰되고 최초 감정가의 절반 가격에 낙찰이 되어, 세입자는 전세금의 절반밖에 건지지 못한다.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아파트였다면 집을 내놓는 순간 사겠다는 사람이 줄을 설 것이다. 부동산 시장이 호황일 때는 금방 팔릴 것이고, 불황일 때조차 상품 가치가 좋다면 ‘쌀 때 사두자’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당장 필요해서 사려는 것이 아니어도 ‘사 놓으면 가격이 오르겠지’라는 잠재적인 수요도 많다. 이런 아파트는 이사 가고 싶을 때 언제든 이사를 갈 수가 있다. 따라서 아이러니하게도 ‘물질에 매이지 않고 가볍게 움직이고 싶다면’ 아파트에서 살아야 한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려고 아파트 아닌 집에서 살았는데, 이사 갈 때 팔리지 않으면 집에 매이게 된다. 욕망의 상징인 아파트를 피해 무소유의 삶을 살려 하면 물질에 매이게 되고, 아파트에 살았더니 물질에 매이지 않고 가볍게 살 수 있다. 무소유의 역설이다.
Chapter 3. 부동산과 주식으로 배우는 경제
경제는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삼성전자 실적이 떨어질 것이다”, “아니다 오를 것이다”라는 예측이 난무한다. 실적 발표일이 되자 삼성전자는 기대 이하의 실적을 발표했다. 주가가 폭락할 것 같았는데, 하루 이틀 주가가 하락한 뒤 다시 오르기 시작한다. 왜일까?
경제주체들은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실적이 좋을지, 나쁠지 불확실하면 투자를 주저하게 된다.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자 정부가 대책을 발표했다. 정부가 대책을 내놓겠다고 언급한 순간부터 한 달 동안 부동산 거래가 뜸해진다. 마침내 정부가 강력한 부동산 규제 정책을 발표했다. 그러자 가격이 하락하기는커녕 오르기 시작했다. 이 또한 불확실성이 제거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불확실성이 존재하면 투자자는 나서지 않고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아 가격은 하락하거나 정체된다. 그러나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결론이 나면 시장은 움직인다. 마치 취업에 실패한 취업 준비생이 다음을 기약하며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것처럼 말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도 팀장이 불확실성을 줄일수록 팀원의 자율성이 커진다. 팀장은 너그럽고 자율적인 사람이 되고자 하지만, 기준 없이 상황에 따라 판단하면 팀원은 팀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너그러운 팀장이 되고자 해도 불확실성을 무기로 팀원을 쥐락펴락한다면 팀원들은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시장도 조직도 참여자들은 불확실성을 가장 싫어한다.
주식 투자를 하지 않는 이유
한창 주식 투자를 하면서 투자 총액이 1억 원을 넘던 때가 있었다. 2~3퍼센트만 올라도 수익은 200~300만 원이었다. 매일 사고파는 데일리 투자는 아니었고, 오를 만큼 올랐다고 생각하면 팔았고 내릴 만큼 내렸다고 생각하면 샀다. 연 2~3회 정도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주식이 오를지 내릴지는 하늘도 모른다. 오를 만큼 올랐다고 생각되어 팔았는데 며칠간 더 오르는 경우가 많다. 내릴 만큼 내렸다고 생각해서 샀는데 추가로 하락하면 ‘더 기다렸다가 살 걸’하며 후회가 막심해진다. 주식 투자를 오래 하다보면 내려가다가도 오르고, 오르다가도 내려가는 것이 주가임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판단을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일시적인 손실에 대해서는 무덤덤해지게 된다.
전문가들은 주식 투자를 잘하려면 스스로 원칙을 정하고, 그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를테면, ‘투자액의 10퍼센트 손실이 나면 무조건 손절을 한다’는 원칙 같은 것인데, 결코 말처럼 쉽지 않다. 장부상으로 1,000만 원 손실을 봤더라도 언젠가 주가가 다시 올라 손실이 만회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파는 순간 1,000만 원은 진짜 손실이 되기 때문이다.
어디가 바닥인지 모를 정도로 주가가 하락할 때는 손절 원칙을 지키는 것이 상책이다. 이런 판단을 내릴 때가 내게는 딱 한 번 있었다. KTX를 타고 지방 출장을 가던 중이었다. 속절없이 하락하는 주가에 ‘더 떨어지기 전에 빨리 팔자’고 큰마음을 먹고 스마트폰으로 실행에 옮겼다. 시골 국도 주변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밥을 먹는지 모래를 씹는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속이 쓰렸다. 실연의 상처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과연 나는 주식 투자를 할 만한 사람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하지 않는 것이 나을 듯했다. 그 이후 주식 투자는 하지 않고 있다.
Chapter 4. 기분을 파는 사람이 위너
기분을 파는 시대
식당에서 파는 음식의 가격을 분석하면 기능적 가격과 기분적 가격으로 나뉜다. 된장찌개와 파스타를 비교해보자. 흔한 밥집에서 된장찌개를 시키면 밥과 찌개 외에 김치, 콩나물, 콩자반 등 다양한 반찬이 나온다. 직원을 불러 반찬을 더 달라고 하면 더 가져다준다. 인건비 비싼 사람을 콩나물 하나 가져오게 하려고 두 번이나 걸음을 하게 만드는 비효율적인 시스템이다. 파스타는 대부분 된장찌개보다 비싸게 팔린다. 두 배가 넘는 경우도 있다. 파스타도 맛있게 만들려면 많은 노력이 들지만, 파스타가 된장찌개의 두 배 가격을 받을 만큼 재료비가 많이 드는가? 공정이 복잡한가?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선택지가 된장찌개와 파스타만 있다면, 데이트할 때 파스타를 먹으러 가지 된장찌개를 먹으러 가지 않는다. 파스타집은 인테리어, 가구, 집기류가 유럽 스타일이다. 외국에서 식사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고, 데이트한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 된장찌개 집도 그런 인테리어를 하면 되지 않나?’는 의문이 들 것이다. 맞다. 인테리어가 세련된 된장찌개집도 많이 생기고 있다. 그리고 파스타 가격만큼 받는다. 똑같은 된장찌개인데 판매하는 가게가 허름하면 싸고, 세련되었다는 이유로 비싸다면 가격 차이는 ‘기분’ 때문이다.
‘스타벅스 원가는 500원’이라는 말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원가가 아니라 재료비겠지만, 스타벅스에서는 500원짜리 커피를, 4,000원 넘게 받는데도 주말 오후 피크 타임에는 앉을 자리조차 없을 정도다. 500원 들여 만든 커피를 4,000원 넘게 주고 사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 것일까? 스타벅스에 가면 맛도 보장되지만 특유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데이트를 하든, 공부를 하든, ‘멍을 때리든’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어떻게 보면 스타벅스는 커피보다 ‘기분’을 파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는 ‘자리’를 파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스타벅스를 비롯한 다른 커피 전문점도 커피 마실 자리를 판다. 그런데 왜 다른 커피 전문점이 아니라 스타벅스를 찾는 것일까? 스타벅스는 커피를 비싸게 팔아도 장사가 되고, 다른 가게는 싸게 팔아도 고객이 잘 오지 않는다. 아주 싸게 팔아야 그제야 손님이 온다. 소비자가 ‘기능’만 원할 때는 ‘기분’에 대한 대가를 배제하지만, ‘기능’과 ‘기분’을 동시에 소비할 때는 최대한의 ‘기분’을 느끼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어중간한 ‘기분’은 팔리지 않는다.
Chapter 5. 마르크스가 21세기에 태어났다면
마르크스적 노동가치론의 붕괴
‘상품의 가격은 만드는 데 든 노동 시간에 수렴한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나오는 ‘노동 가치론’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성수동 구두 공방 장인이 구두를 만드는 시간과 이탈리아 장인이 구두를 만드는 시간은 비슷하다. 그런데 가격 차이는 10배가 넘는다. 이탈리아 장인이 10배의 시간을 투입해서 만드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것은 육체노동보다 정신노동의 가치가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열광할 디자인으로 만들면 동일한 노동 시간을 들여도 훨씬 비싼 가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성수동 구두 공방 장인의 정신노동 시간과 이탈리아 장인의 정신노동 시간이 그렇게 많이 차이가 날까? 이때의 정신노동은 개인이 아니라 그 사회가 축적한 문화적 가치에서 나온다. 여기서 마르크스 경제학과 현대 자본주의 경제학의 괴리가 발생한다. 현재는 상품의 가격이 노동 시간에 수렴하지 않는다. 결정적인 이유는 지금은 공급과잉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주택가 시장에서 1톤 트럭에 신발을 잔뜩 싣고 와서 파는 노점상이 있다. 신기하게도 이런 ‘시장표’ 신발도 트렌드가 있어서 나이키나 아디다스 제품과 유사한 모양으로 만든다. 디테일이 부족하지만, 로고만 제외하면 소위 ‘메이커’ 신발과 비슷하다. 주시할 점은, 나이키 신발은 10만 원인데 나이키 로고 없이 비슷하게 생긴 신발은 1만 원이라는 점이다. 나이키 신발이 더 꼼꼼하게 만들어졌으니 노동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10배나 차이가 날 정도일까?
가격의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나이키가 소비자의 ‘기분’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9만 원의 가격 차이는 ‘기분’에 대한 가격이다. 유통 마진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지금은 ‘소비자가 사는 가격’에 집중해서 보자. ‘기분’이 중요해진 이유는 공급이 지나치게 과잉되었기 때문이다. 살 수 있는 신발이 너무 많아져서, 소비자의 선택을 받으려면 기능도 좋아야 하지만 디자인이 뛰어나야 한다. 소비자의 마음에 들면 비싸도 팔리고, 소비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싸도 팔리지 않는다. 팔리지 않으면 노동 시간을 아무리 투입해도 그만한 가치를 벌 수 없다. ‘기능’ 보다 ‘기분’이 중요해진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