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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경제학

현재욱 지음 | 인물과사상사



보이지 않는 경제학

현재욱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8년 7월 / 364쪽 / 17,000원





경제는 먹고사는 문제다



경제란 무엇인가?

나는 경제에 대한 정의를 책이 아닌 삶에서 배웠다. 단골 음식점에서 칼국수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음식점은 중년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가게다. 부인은 요리사, 남편은 서빙 및 배달 담당이다. 솥에서 육수가 부글부글 끓는 동안 맞은편 벽에 걸린 텔레비전에서는 경제 전문가들의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다. 수출이 줄고 있다, 가계부채가 늘고 있다, 경제가 어렵다, 주로 이런 내용이었다. 음식점 사장이 칼국수 두 그릇과 김치 한 접시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을 때, 나는 툭 던지듯 물었다. “도대체 경제란 뭘까요?” 사장은 생각도 않고 대답했다. “경제? 먹고사는 문제죠, 뭐.” 먹고사는 문제. 이보다 간결한 정의가 있을까.

‘먹고살다’라는 말은 ‘생계유지’와 동의어다. 그 말에는 안정적인 일자리, 일정한 소득, 균형 잡힌 지출 관리, 실현 가능한 계획 등의 개념이 모두 함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먹고사는 일은 삶의 기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경제는 어렵지 않다. 일을 해서 돈을 벌고 필요한 데 쓰는 것이 경제다. 쓰고 남은 돈을 저축하면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할 수 있다. 저축은 미래의 소비이므로 결국 인간의 경제활동은 벌어서 쓰기, 즉 먹고사는 것이 전부다.

경제활동의 목적은 물질적 효용 또는 편익을 얻기 위함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개념은 ‘물질’이다. 경제는 물질을 초월한 관념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물질의 이야기다. 따라서 경제활동의 대상은 몸(뇌)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유형ㆍ무형의 자원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일컬어 ‘재화와 서비스’라고 한다. 재화와 서비스가 시장에서 팔리는 이유는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경제활동은 크게 생산과 소비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건 반드시 둘 중 하나, 혹은 두 과정 모두에 참여하게 된다. 분배는 생산과 소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이다. 밥을 지어서(생산) 먹으려면(소비) 사람 수대로 그릇에 담아 밥상 위에 올려놓고 숟가락을 얹는다. 이것이 분배다. 최종 생산물이 서비스상품인 경우에는 대체로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을 때, 미용사 입장에서 보면 생산활동이고 고객 입장에서 보면 소비활동이다. 학원 강의, 치과의사의 치료, 여행 가이드, 동시통역, 가수의 공연 같은 서비스상품은 생산과 동시에 소비된다. 이렇게 보면 노동도 생산현장에서 소비되는 일종의 서비스상품이다.

분배는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문제다. 노동자가 받는 일당 또는 월급은 생산활동에 참여한 대가로 노동자에게 할당한 몫이다. 분배 시스템이 공정하다면, 노동자는 최종 생산물에 기여한 만큼 보상받을 것이다. 그 노동자를 고용한 사람의 기대보다 높은 성과를 내면 특별상여금을 받을 수도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누가 더 가져가면 다른 누구는 그만큼 덜 가져간다. 성과급은 경쟁을 부추기는 유력한 수법이다. 이렇게 인간의 노동력을 어떤 쪽으로 쏠리게 하는 힘을 ‘경제적 유인’이라고 한다. 처벌과 보상, 모두 경제적 유인이다.

최종 생산물의 일부는 정부가 가져간다. 이른바 ‘세금’이다. 기업은 법인세로, 사용자와 노동자는 소득세의 형태로 제 몫의 일부를 떼어 국세청에 납부한다. 소비하는 데에도 세금이 붙는다. 4,500원짜리 담배 한 갑을 사면 이미 3,318원의 세금을 낸 것이다. 이렇게 개인과 기업의 소득이 정부로 이전되어 다시 국민복지에 쓰이는 것을 ‘재분배’라고 한다. 분배와 재분배는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자 민생의 근본이다.



진정한 부란 무엇인가?



부의 원천은 노동이다

애덤 스미스의 위대함은, 인류사에서 대부분 노예나 농노의 몫이었던 노동을 국부의 원천으로 격상한 데에 있다. 만약 후세의 위정자들이 스미스에게서 참된 배움을 얻고자 한다면 노동자를 함부로 대하거나 노동자의 권익을 침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에 대한 오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야경국가론이다.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스미스는 ‘국가는 도둑이나 지키면 된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문명이 발달할수록 정부의 역할도 커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국방, 공공사업, 교육 같은 일은 정부(국왕)의 의무임을 명확히 밝혔다.

특히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다른 구성원의 불의나 억압으로부터 최대한 보호할 의무가 국가에 있다.”는 스미스의 지적은, 자본권력의 무한 폭주를 지지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논리와는 결이 달라도 한참 달라 보인다. 그가 1776년에 발표한 『국부론』은 국가의 보호무역 정책을 비판하기 위해서 쓴 책이지,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하리라는 믿음을 전파하려고 쓴 책이 아니다.

『국부론』은 노동에 대한 명쾌한 규정으로 시작한다. “연간 노동의 생산물이 연간 소비를 공급한다. 한 나라 국민의 연간 노동은 그들이 연간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 전부를 공급하는 원천이며, 이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은 언제나 이 연간 노동의 직접 생산물로 구성되어 있거나 이 생산물과의 교환으로 다른 나라로부터 구입해온 생산물로 구성되어 있다.” 한마디로 부의 원천은 노동이라는 뜻이다. 스미스가 말한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을 요즘 말로 하면 ‘재화’다. 그가 살았던 18세기 영국 사회에서 돈은 곧 금이었다.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먼저 금본위제를 시행했다. 그전에는 금과 은을 모두 화폐로 사용했다. 스미스는 금과 은이 다른 재화와 마찬가지로 국부를 구성하는 한 요소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금과 은을 국부의 전부라고 여겼던 중상주의 정치가들과는 사고의 출발점이 달랐다.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한 사람이 얼마나 부유한지 묻는 것은 그가 재화를 얼마나 향유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과 같다. 그 재화의 대부분은 타인의 노동에서 얻어 와야 한다. 따라서 한 사람이 가진 부의 수준은 그가 지배할 수 있는, 혹은 구매할 수 있는 노동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 결국 부의 총량은 노동의 총량과 같다. 이것은 금융가들이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다. 일을 하면 부유해지고, 일을 안 하면 가난해진다. 일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잘사는 나라가 되고, 일하는 사람이 적어지면 가난한 나라가 된다. 무엇이든 일을 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에 비하여 조금이라도 낫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한 사회의 부가 늘어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의 증진에 기여한 만큼 보상받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기여도가 같을 때 보상의 수준이 같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는데 임금이 다르다. 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있는가? 예를 들어 노동자 (가)와 노동자 (나)가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두 사람의 숙련도는 같고, 생산요소 가운데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50퍼센트다. 두 사림이 10시간 일한 결과 총 20만 원 상당의 최종 생산물이 만들어졌다. 최종 생산물이 나오기까지 두 노동자가 기여한 가치는 10만 원이다. 따라서 (가)와 (나) 모두 5만 원씩 받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가)는 정규직이어서 6만 원, (나)는 비정규직이어서 4만 원을 받는 일이 벌어진다. 이것을 자유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가?

결과를 놓고 보면 (나)의 몫에서 1만 원을 덜어서 (가)에게 얹어준 셈이다. 이게 정당하지 않다는 점에서 다툼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동일노동에 대한 임금격차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기업 혹은 사용자에게 이 같은 방식의 임금 결정권을 주는 것이 기업의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아마도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 (가)와 (나)의 경쟁을 부추기면 노동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둘째, (가)를 3명 고용하는 비용보다 (가) 1명에 (나) 2명을 고용하는 비용이 적기 때문에 기업의 가격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어느 쪽이든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을 훔치는 행위이고, 이를 합법화하는 것은 자유시장의 원리에도 어긋난다.

애덤 스미스의 생각을 다시 되새겨 보자. 국가는 노동자를 포함한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다른 구성원의 불의나 억압으로부터 보호할 의무가 있고, 국가가 그 의무를 포기한 시장은 더 이상 자유시장이 아니다. 일찍이 영국의 사상가 존 로크가 주장했듯이, 그런 국가는 엎어져야 한다. 존 로크에 의하면, 국가는 국민의 재산을 보호한다는 조건을 걸고 국민에게서 권력을 위임받았다. 만약 국가가 그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계약은 국민에 의해 파기될 수 있다(사회계약설). 만약 존 로크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같은 주장을 펼쳤다면 극우 정치세력에게 ‘종북좌파’로 매도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노동의 몰락

부의 원천인 노동이 천덕꾸러기가 된 것은, 노동을 ‘비용’으로만 간주하는 자본의 생리 때문이다. 생산활동에 참여한 사람은 ‘최종 생산물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이것은 노동자의 권익을 정당화하는 합리적 근거이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최종 생산물에 대한 권리를 자본가가 독차지한다. 자본과 노동이 나누어 가져야 할 권리를 자본이 독점해 버리면 노동은 단순한 비용으로 전락한다. 노동이 비용으로 전락하면 사회 구성원들은 노동을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인식은 자본가에게서 노동자에게로 확산된다. 결국에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하찮게 여기고 돈벌이의 수단쯤으로 인식하게 된다. 노동자는 과연 생산의 주체인가, 아니면 생산의 도구인가? 이는 단순한 이익분배의 문제를 넘어서 인권의 경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논점을 제공한다.

노동자를 노동력으로만 보면, 노동자에게서 노동만 남고 ‘사람’이 사라져 버린다. 군인을 병력으로만 볼 때 군번만 남고 인격이 지워지는 것과 비슷하다. 제복은 인격을 지우는 강력한 상징체계다. 색상과 디자인이 통일된 군복, 교복, 죄수복, 작업복은 그것을 입은 사람의 인격을 효과적으로 제거한다. 인격이 사라지면 노동은 비용이 된다. 그때부터 노동은 수량으로 치환되고, 생산성으로 평가받고, 처벌과 보상으로 통제되는 관리대상이 되어버린다.

인격이 사라진 노동은 단지 노동시장에서 소비되는 소모품일 뿐이고, “노동능력이 떨어지면 쓰레기처럼 버려진다.” 그리고 “노동시장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사회적으로도 ‘무용지물’ 취급을 당한다. 이쯤 되면 경제학은 ‘사람의 활동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 ‘돈벌이의 효율을 높이는 기술’이 된다.



도박판으로 변한 세상



남이 망하기를 갈망하는 금융상품

과거의 금융업은 대출업과 동의어였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이 금융업의 근간이었다. 금융자유화 바람을 타고 월가의 은행들이 직접투자를 확대하면서 금융 팽창이 가속화되었다. 예컨대 과거에 인수합병은 기업과 기업 간에 벌어지는 게임이었고, 투자은행은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국제투기자본이 직접 사냥감을 고르고, 직접 요리를 해서,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장사꾼에게 팔아넘긴다. 구조조정은 그들이 애용하는 요리법이다. 외환은행이 그렇게 넘어갔다. 외환위기 직후에 한국에 진출한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는 2003년 10월 외환은행을 1조 3,800억 원에 인수해 2012년 하나은행에 팔아넘겼다. 론스타는 배당금과 지분 매각대금을 합하여 총 4조 6,600억 원의 투자수익을 거두었다.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이 시작될 무렵, 미국의 정치권력과 국제투기자본이 의기투합했다. 이른바 ‘워싱턴 합의’인데, 미국식 시장경제체제를 개발도상국의 발전 모델로 삼으려는 구상이다. 그 핵심 내용은 작은 정부, 자본시장 자유화, 외환시장 개방, 관세 인하, 공기업 민영화, 자국 기업에 대한 외국 자본의 인수합병 허용, 정부 규제 축소, 지적재산권 보호 강화 등이다. 1997년에 국제통화기금이 한국에 달러를 빌려주는 조건으로 증권시장의 완전개방을 요구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미국식 시장을 이해하기 위해 19세기 미국으로 가 보자. 당시 미국의 보험회사들은 ‘장묘보험’이라는 생명보험 상품을 팔았다. 생명보험은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을 피보험자로 설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19세기 미국에서는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타인을 피보험자로 지정하고 그가 죽었을 때 자신이 보험금을 받는 조건으로 계약하는 것이 가능했다. 무법천지의 서부 개척 시대, 허리에서 권총을 뽑는 속도가 생사를 가르는 서부극을 떠올리면 장묘보험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장묘보험 가입자는 보험료가 비쌀수록, 그리고 보험금이 많을수록 피보험자가 어서 죽기를 바라게 된다. 피보험자가 날마다 환하게 웃으며 건강을 과시한다면, 보험금이 지급되는 시기를 직접 결정하고픈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원래 신용부도스와프는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할 경우 채권자를 보호하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보험 상품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주로 돈을 빌려준 채권자가 신용부도스와프를 구매했다. 신용부도스와프 구입자는 1년에 계약총액의 0.5~1퍼센트를 수수료(보험료)로 판매자인 투자은행에 납부한다. 예를 들어 만기 5년짜리 회사채의 신용부도스와프를 판매했다 치자. 5년 후 채무자, 즉 회사채를 발행한 기업이 빚을 갚으면 투자은행은 5년 동안 받은 수수료만큼 수익을 거둔다.

물론 5년 후 채무자가 빚을 못 갚는 사태가 발생하면 신용부도스와프 판매자, 즉 투자은행은 계약대로 목돈을 지급해야 한다. 그래서 위험도가 높은 채권에 대해서는 신용부도스와프를 판매하지 않는다. 부도가 나도 채권자는 최소한 95퍼센트의 원금을 건질 수 있다. 만약 보험금을 채권의 10배로 계약했다면 신용부도스와프 구입자는 막대한 투자수익을 거둘 수 있다. 그러나 수수료도 10배로 커지기 때문에 예상한 대로 부도가 나지 않으면 피가 철철 흐른다. 도박도 이런 도박이 없다.

신용부도스와프는 현대판 장묘보험이고, 남이 망하기를 갈망하는 금융상품이다. 만약 누군가가 특정 기업이 파산한다는 기대를 전제로 신용부도스와프 증권을 구입했다면, 그는 계약서에 서명한 순간부터 그 기업이 망하기를 바라고 또 바랄 것이다. 혹시라도 그 기업을 살리기 위해 정부가 공적자금을 지원하다는 계획이 발표되면 사회주의 노선이라고 맹렬하게 비난할지도 모른다. 공매도와 신용부도스와프는 베팅 대상이 망할 때 이익을 취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개념이다.



시장이 효율적이라는 거짓말



시장의 먹이사슬

2016년 2월 4일, 마틴 슈크렐리라는 남자가 미 하원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시종일관 답변을 거부하거나 손가락으로 볼펜을 돌리며 히죽거렸다. 당시 32세의 슈크렐리는 튜링제약이라는 회사의 대표였다. 2015년에 튜링제약은 에이즈 바이러스와 말라리아 치료제인 다라프림의 특허권을 사들인 후 가격을 55배 올려 물의를 일으켰다. 다라프림은 시판된 지 62년 된 항생제로 많은 에이즈 환자가 복용하고 있다. 슈크렐리는 약값을 1정당 13.5달러에서 750달러로 올렸다. 하루에 한 알씩 복용한다고 치면 한 달에 약값만 2,500만 원 가까이 들어간다. 돈 없는 사람은 그냥 죽으라는 이야기다. 청문회에 나온 마틴 슈크렐리는 표정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비싸면 안사면 될 것 아니야? 청문회가 끝나고 슈크렐리는 트위터에 짤막한 소감을 올렸다. “이 얼간이들을 우리 정부의 대표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가 생각하는 정부는 어떤 정부인지 궁금하다.

상품의 가격은 시장에서 정해진다. 특정 약품의 가격이 비싸면 그와 비슷한 효능을 가진 약품을 개발하기 위해 다른 제약사들이 뛰어들고, 결국 경쟁에 의해 가격이 떨어진다. 그리하여 시장은 발전하고 개인의 삶의 질도 나아진다. 정부는 쓸데없이 시장에 간섭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의 핵심 주장이다. 그런데 다라프림 같은 약품은 시장이 너무 작아서 제약회사들이 신약 개발에 자본을 투자하지 않는다. 특허기간이 만료되었지만 다라프림이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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