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적의 길
이정동 지음 | 지식노마드
축적의 길
이정동 지음
지식노마드 / 2017년 5월 / 284쪽 / 16,000원
PART 1 - 대전환 : 착각에서 축적으로
고도 상승을 멈춘 로켓
중간소득함정을 돌파한 대한민국: 최근 경제성장을 연구하는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중간소득함정’이다. 핵심적인 내용은, 한 국가의 경제가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 성공적으로 경제개발을 시작하더라도 ‘중간소득’ 수준에 이르면 이상하게도 성장이 서서히 멈추는 현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중간소득 수준이 얼마인가는 연구자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일인당 국민소득 기준으로 7,500달러에서 15,000달러 사이 정도로 이야기하고 있다.
왜 성장이 멈출까? 가장 널리 언급되는 원인은 경제가 발전하면서 소위 ‘후발자의 이득’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논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경제개발을 처음 시작한 후발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점이 있다. 우선 농업 등 생산성이 낮은 전통적인 분야에 생산가능인력이 많이 몰려 있는데, 공장이 들어서고 제조업 기반이 마련되기 시작하면 이들이 노동시장에 낮은 임금으로 대량 공급된다. 미취업 상태인 여성인력이 산업인력으로 대규모 공급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선진국에서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만들어진 검증된 기술을 중고장비의 형태로 싼값에 도입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또한 비용경쟁력이 있는 산업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이처럼 인력이나 자본, 기술의 측면에서 경제개발 초기에 누리게 되는 이점을 후발자의 이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후발자의 공짜 이득을 무한정 누릴 수는 없다. 농촌의 유휴인력을 활용하는 것이 한계에 이르면 임금이 오르기 시작한다. 선진국도 무작정 기술을 내어놓지 않게 되면서 기술적으로도 한계에 직면한다. 게다가 결정적으로는, 더 최근에 출발한 후발 개발도상국이 비슷한 방식이지만 더 값싼 노동력과 더 최신의 장비로 무장하고서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수출시장에서의 상대적인 경쟁력이 점차 약화되고, 그 결과 경제성장률도 서서히 낮아진다. 그렇게 해서 중간소득 수준에서 로켓의 고도 상승이 서서히 멈추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중간소득함정이라는 개념이 국제적으로 관심을 받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중국 때문이다. 중국은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연평균 성장률 10% 수준에서 줄기차게 성장을 거듭하여 2015년 일인당 국민소득 10,057달러의 중간소득국가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 중국 정부의 최대 관심은 중국경제가 다른 대부분의 나라들처럼 중간소득함정에 빠지게 될지, 혹은 빠진다고 하더라도 빨리 빠져나갈 수 있을지 그 방법을 미리 찾는 데 있다. 그럼, 한국경제는 어떨까?
식어가는 성장엔진: 한국의 산업은 두말할 것도 없이 놀라운 성장을 이뤄냈다. 그러나 성장의 속도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중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정체 현상이 최근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지난 20년 이상 추세적으로 심화되어 온 위기라는 점이다. 대내외적 환경을 고려하면 앞으로의 전망도 그리 밝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터널의 끝이 아니라 시작에 가깝다. 그러나 막연한 좌절은 금물이다. 한국의 산업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지금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다른 나라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성취를 이룬 저력이 있다. 문제의 근본원인을 찾고, 해법을 도출하기 위한 공감대를 마련한다면, 고도 상승을 멈추어가는 로켓을 다시 차오르게 할 수 있다. 아무튼 로켓의 비유를 들면 1단 엔진 분리 실패, 2단 엔진 점화 실패다. 이것이 한국 산업이 당면하고 있는 중장기적인 문제의 원인이다.
한국산업의 위기 - 개념설계 역량이 없다
한국 산업이 처한 위기의 본질은 ‘개념설계 역량이 부족하다’라는 한 문장으로 압축해서 표현할 수 있다. 이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념설계’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2015년 3월 일간신문에 국내에서 건설하고 있는 최고 높이의 빌딩 공사과정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는데, 이 초고층빌딩에 세계 최고의 기술이 집약되어 있다는 내용의 신문기사를 잘 살펴보면, 개념설계가 무엇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초고층빌딩을 짓는 과정을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백지 위에 건물의 밑그림을 그리고(설계), 필요한 자재를 산 다음(구매), 설계도대로 터를 파고, 사온 자재를 이용하여 실제로 짓는 것(시공)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절차를 한 번 더 단순화해서 두 단계로 표현하면, 설계하는 ‘밑그림 그리기’와 그 밑그림대로 구매, 시공하는 ‘실행하기’로 나눌 수 있다. 건물을 짓는 것뿐만이 아니다. 휴대폰이나 자동차를 포함한 모든 제품을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면 밑그림을 그리는 부분과 그려진 그림에 따라 실행하는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제품의 개념을 최초로 정의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앞 단계의 밑그림 그리는 부분을 ‘개념설계’라고 하고, 밑그림대로 시행한다는 의미에서 뒤의 단계를 ‘실행’이라고 한다. 따라서 혁신적인 제품은 혁신적인 개념설계가 있어야 나올 수 있다.
한국 기업들은 그동안 선진 기업들이 그려준 밑그림을 받아와, 빠르고 효율적으로 실행하며 성장해왔고, 현재 한국 산업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바로 이 개념설계 역량이다. 즉, 한국 산업이 현재 당면하고 있는 위기의 본질은 개념설계 역량이 부족한 데 있다. 그런데 개념설계 역량은 사오거나, 아이디어 하나 얻었다고 금방 생기지 않는다. 오래도록 직접 그려보고, 적용해보면서 시간을 들여 꾸준히 시행착오를 축적해야 얻을 수 있다. 이것이 핵심이다.
PART 2 - 축적의 전략 : 축적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축적의 전략 1 - 시행착오 경험을 담는 궁극의 그릇, 고수를 키워라
지난해 말 도쿄에 있는 ‘조다이(長大)’라는 이름의 회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길고 큰 교량, 즉 장대교를 설계하는 데 특화된 회사인데, 방문 목적은 고부가가치의 개념 설계 역량을 어떻게 갈고닦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게다가 ‘조다이’는 우리나라의 장대교인 인천대교와 영종대교의 설계에 참여했다. 회사의 시스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천대교와 영종대교 설계 때 얻었던 시행착오의 경험이 무엇이었고, 그 이후에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알고 싶어, 설계에 참여했던 사람을 만나볼 수 있겠느냐고 부탁을 했다.
담당자가 두 명의 사원을 소개해 주었는데, 언뜻 보더라도 할아버지인 것에도 놀랐지만, 회사 작업복을 입고 막 근무를 하다 온 상태라서 더 놀랐다. 두 사람의 입사연도가 각각 75년과 76년이니 설계로 경력을 쌓은 햇수만 40년이 넘는다. 공사 경과를 담은 백서를 펴놓고, 두 교량을 설계할 때 겪었던 특이한 공학적인 도전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 가지 질문을 하기는 했지만, 이미 두 사람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많은 의문들이 풀렸다. 창의적인 개념설계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량은 매뉴얼이나 교과서, 시스템이 아니라 다른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40년 넘게 전 세계의 특이한 프로젝트들을 경험하면서 쌓았던 시행착오의 경험들, 그 경험을 온몸으로 축적한 엔지니어 그 자체가 창조적 밑그림을 그릴 수 있는 힘의 원천이었다. 걸어 다니는 교과서를 만난 셈이다.
착각 - ‘개념설계 역량은 사면 된다’: 개념설계 역량에 대해서는 불행하게도 교과서나 매뉴얼이 없다. 시설이나 장비 구축과 같은 하드웨어를 갖춘다고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직접 새로운 그림을 그려보고, 적용하고, 다시 고쳐보는 경험을 반복해야만 얻을 수 있다.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효율이 높아지는 반복경험학습(Learning-by-Doing)의 세계가 아니라, 다른 일에 도전하여 새로운 밑그림을 그려보면서 더 차별화하는 설계경험학습(Learning-by-Building)의 세계다.
그런데 창의적 경험은 암묵지이기 때문에 매뉴얼이나 교과서 혹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에게 쌓인다. 그래서 경험을 축적한 핵심인재를 유치하기 위한 인재전쟁은 지금도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핵심인재가 속한 기업을 인수 합병한다고 하더라도 개념설계 역량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돈이 있다고 해서 쉽게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개념설계 역량은 사면 된다’는 것은 대표적인 착각이다. 창의적 개념설계 역량은 어디에 담겨 있는가? 결국 사람의 몸에 끈적한 형태로 체화되어 있다. 그래서 쉽게 분리해내기 어렵다. 쉽게 얻어지지도 않지만, 떼어내서 옮기기도 어렵다.
축적의 길 - 결국 ‘사람’이다: 개념설계 역량이 결국 사람에게 시행착오의 경험으로 오랫동안 축적되는 것이라면, 우리 산업계의 관행은 개념설계 역량을 축적한 고수를 키우기에 부족한 점이 많다. 1975년에 입사한 일본 조다이의 설계엔지니어 사례와 달리, 우리나라의 경우 전문가 트랙이 형성되어, 순환보직하지 않고 한 분야에서 꾸준히 시행착오를 축적해 고수가 된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우리 산업의 발전경로가 창의적인 밑그림을 그리기보다, 그려진 밑그림을 받아와서 빠르게 실행하는 모델이어서 그동안 시행착오를 축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글로벌 챔피언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밑그림을 만들어 보기 위해 도전하고, 그 와중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시행착오를 사람에게 꾸준히 축적해 나가는 전략적 노력이 필요하다. 사회적으로도 자본과 기계가 아니라,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에게 투자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
축적의 전략 2 - 아이디어는 흔하다, 스케일업 역량을 키워라
새로운 성능을 가진 플라스틱을 만들어낼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실험을 한 후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쓰고 미국특허도 획득했다. 그러나 축하 샴페인을 터트리기에는 이르다. 이것만 가지고는 돈을 벌 수가 없는데, 실제 공장 크기에서 물질들이 반응하는 환경은 실험실과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상 파일럿 플랜트라는 것을 짓고, 실제 생산과정과 유사하게 진행해 보면서, 어떤 문제가 없을지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과정을 스케일업 과정이라고 하는데, 여기를 무사히 통과하고 나서야 비로소 수백억 원 혹은 수천억 원을 투자해서 실제로 공장 건설을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스케일업 과정을 거치면서 기업 고유의 끈끈한 암묵지가 생성된다.
스케일업은 교과서에 있는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본질적인 실패 리스크가 가장 크게 작용하는 과정이기도 한데, 이 위험 때문에 스케일업 과정이야말로 신사업 프로젝트를 담당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스케일업 과정에서 플랜트의 설계는 보통 라이센스 기술을 가진 글로벌 선진기업들에게 맡긴다. 선진기업들은 다른 회사들이 경험하지 못한 온갖 시행착오의 경험을 축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아예 다른 기업이 스케일업을 완성해 놓은 플랜트를 나중에 사기도 한다.
착각 -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있으면 먹고살 수 있다’: 아이디어가 아무리 좋아도, 그것을 현실에서 작동 가능하도록 키워낼 수 있는지가 문제인데, 이 과정을 스케일업이라고 한다. 이는 기가 막힌 발명이 손에 잡히는 혁신의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위험이 큰 구간이며, 스케일업은 하지 않으면서 신사업을 일으킬 수 있는 원천적 아이디어를 찾는 것만큼 기대 난망인 것은 없다. 결국 블루오션을 찾아다녀도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여러 번 오래도록 도전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쇠붙이에서 면도날을 만들어내듯, 시간을 들여 차별화를 지속하고자 노력할 때라야 비로소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개념설계에 이르게 된다. 블루오션 혹은 혁신은 그 자체를 찾거나 추구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 축적의 결과일 따름이다. 그것도 확률적인 결과일 따름이다.
축적의 길 - 빠른 대응이 아니라 집요한 버팀: 스케일업 역량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산업의 몇 가지 특징적인 관행이 눈에 띈다. 무엇보다 아이디어를 가져와서 완성해가기보다 완성된 결과물을 도입하는 데 익숙하다. 혹은 아예 스케일업이 필요 없는 사업, 즉 인허가권으로 보호받는 안전한 비즈니스를 찾기도 한다. 신성장 동력을 찾고자 노력하는 경우에도 늘 블루오션을 되뇌면서, 최신의 유행을 따라 본업과 상관없는 비관련 다각화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정부 정책도 스케일업 과정을 참아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거의 5년마다 혹은 그것보다 더 짧은 주기로 성장동력을 발표하고, 거기에 맞추어 정부재정을 조정한다. 이전에 조금 손을 대기 시작하던 프로젝트의 스케일업이 본격화되기도 전에 이미 타깃이 이동하는데, 이 과정에서 ‘선진국들은 이렇게 하고 있더라’라는 벤치마킹 정보가 우리의 맥락과 상관없이 중요한 의사결정의 근거로 작용한다. 블루오션 집착증이다. 기업이나 정부 모두 신성장동력, 특히 지금까지 해보지 않던 기발한 아이디어와 키워드만 끊임없이 찾아나서는 노력을 그만두어야 한다. 글로벌 챔피언 기업이 올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벤치마킹하고, 거기에 맞추어 기존에 하던 일과 상관없이 쫓아가는 관행도 그만두어야 한다.
업의 본질에 충실하면서,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수준의 시행착오를 꾸준히 축적해서, 최소한 자신의 분야에서는 글로벌 챔피언 기업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 아이디어를 구하는 정성만큼이나, 쓸 수 있는 개념설계에 이르도록 꾸준히 참고 투자하고 장기적으로 키워나가는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글로벌 챔피언 기업들이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는 결과만 보면 언뜻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아도 그 힘은 느리고 꾸준한 축적에서부터 온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이것저것 뜬다는 키워드를 쫓아다니면서, 기발한 아이디어만 머릿속에 잔뜩 넣어서는 개념설계를 할 수 있는 전문가, 고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우연이든 어떤 계기로든 하나의 아이디어를 구하게 되었으면, 그때부터 꾸준히 남들이 겪지 못한 수준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혁신적 개념설계를 내어놓을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가야 한다.
축적의 전략 3 - 시행착오를 뒷받침할 제조 현장을 키워라
착각 - ‘생산 활동은 개도국에서, 개념설계는 한국에서’: 제조현장 없이는 새로운 개념 설계도 없다. 그래서 미국, 일본, 독일 등 기술 선진국들, 그리고 글로벌 챔피언 기업들이 기를 쓰고 첨단의 공장을 자국 내에 만들거나, 심지어 개도국으로 나간 공장을 다시 들여오는 리쇼어링 전략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런 면에서 ‘생산 활동은 개도국에서 하고, 국내에서는 개념설계를 하는 방식으로 국제 분업을 하자’는 이야기는 대표적인 착각이다. 생산, 제조현장이 없어지면 개념설계 역량도 사라진다. 현장의 힘은 사람을 키울 때도 중요하다. 학교 교육에서도 교과서와 공식을 넘어 직접 상상하게 하고, 만들어보고, 수정해가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축적의 길 - 강한 제조현장은 혁신의 모판이다: 제조업 기피 현상이 국내 산업계의 걱정거리 중 하나가 된 지는 오래되었다. 개인의 직업 선택에서도 외면 받은 지 오래되었고, 기업들도 제조현장을 정리하거나 해외로 이전하고 있으며, 정부 정책도 제조업은 뒷전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이라는 것도 모두 제조업이라는 현장이 있을 때 경쟁력을 갖는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더 이상 자동차를 만들지 않는다고 하면, 과연 자동차 디자인 분야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혹은 자동차를 만드는 그 어떤 나라의 자동차기업이 한국 기업에서 자동차 디자인을 맡기려고 할까? 경쟁력을 갖춘 제조업, 축적의 힘을 보유한 현장을 살리는 것이 혁신의 모판을 가꾸는 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팩트다. 그래서 어렵지만, 제조현장을 유지하고, 경쟁력을 높이는 데 국가적 노력을 다해야 한다. 바라 마지않는 고부가가치의 지식서비스업을 살리기 위해서도 그렇다.
축적의 전략 4 - 고독한 천재는 없다, 사회적 축적을 꾀하라
착각 - ‘천재는 어디에서나 탄생한다’: 워런 버핏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이 이룬 부의 상당 부분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가 벌어준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현대의 기술혁신이 가져다준 혜택을 누리고 있는 사람은 모두 과거로부터 이어진 오래된 축적의 혜택을 은연중 누리고 있는 셈이다. 천재 혹은 놀라운 혁신은 아무 곳에서나 탄생하지 않는다. 반드시 주변에 축적된 지식이 있을 때 탄생한다. 기술 선진국의 참모습은 각 분야에서 오랜 시행착오의 경험을 축적한 고수들이 모여 있다는 점이다. 이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혁신적 조합이 생기고, 이 조합의 결과가 다시 다음 단계 혁신적 조합의 재료로 활용되면서 혁신은 누적적으로 진화한다. 기술 선진국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기술 선진국에 있는 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오랜 축적의 시간, 그 끝에서 개념설계 역량이 숙성되고 쌓여야 한다. 출발이 늦은 국가와 기업의 입장에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사회 곳곳에 축적의 허브들이 있어야 혁신적 개념설계가 나온다는 인식이 올바른 진단과 처방의 출발이다. 절대적 시간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