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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을 위한 경제학

원용찬 지음 | 인물과사상사



빵을 위한 경제학



원용찬 지음

인물과 사상사 / 2016년 9월 / 304쪽 / 14,000원





1. 순환과 흐름을 위한 경제학



카이로스의 시간을 위하여



호혜와 연대의 순환운동: 시간이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산 자와 죽은 자의 거리는 가깝다. 중세 초기의 게르만인은 죽은 자와 산 자를 동등하게 취급했다. 그들은 죽음이 현세의 소멸이 아니라 저세상으로 이행하는 것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 당시 촌락공동체는 바깥세상과 고립된 산 자의 생활공간으로서 소우주였다. 죽은 자의 영역은 대우주로서 인간의 운명과 길흉화복을 좌우하는 초월적 존재가 자리한 곳이었다. 대우주에는 악령, 거인, 사자 등 수많은 신이 거주했다. 소우주의 사람들은 풍요, 가뭄, 기근, 질병의 배후를 지배하는 대우주의 신에게 공물을 바침으로써 촌락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했다. 소우주와 대우주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거리만큼이나 가깝게 상호 순환관계를 이루었지만, 6~10세기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기독교는 대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잡다한 신들을 우상이라 여겨 추방했다. 기독교는 유일신 이외는 인정하지 않았다. 사람도 삶의 방식에 따라 사후 최후의 심판을 받는 일방적 회로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소우주와 대우주는 호혜의 순환관계에서 유일신이 관장하는 수직관계로 바뀐다.

전통적 촌락 공동체도 교회를 중심으로 종교적 사유와 생활양식의 지배를 받게 된다. 마을 사람들 역시 공동체의 집단영역에 속했던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하나님께 개별적으로 의탁했다. 특히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티즘은, 신과 인간의 중간에 매개되어 있던 사제를 제치고 하나님과 직접 영적 교통을 하는 통로를 마련했고, 이로써 기독교와 개인의 관계는 더욱 발전한다. 서구의 개인주의가 기독교라는 종교적 에토스와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한 것이다. 신과 직접적이고 내면화된 관계를 맺고 ‘(죽은 뒤) 세상 밖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각자 마음 깊이 개인화가 뿌리내렸다.

경제학에서 합리적 경제인의 대표 모델로 여기는 로빈슨 크루소도 프로테스탄티즘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일확천금을 바라는 투기심과 허황된 모험심에 사로잡혀 있던 로빈슨 크루소는, 프로테스탄트 신자인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항해를 떠난다. 그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배는 난파되고 로빈슨 크루소는 어느 외딴섬에 갇힌다. 로빈슨 크루소는 그곳에서 하루하루를 지내면서 지나온 삶을 반성하며 밤마다 하나님에게 참회했고, 이제는 신에게 부여받은 소명으로서 근검절약의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현대 경제학에서 상정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로빈슨 크루소의 계산 합리적 모델을 체화해 경제학적 방법론의 인간 아이콘으로 추상화되었을 것이다. 서구의 개인주의가 경제학에서 최소 비용으로 최대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경제인이라는 인간 유형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을 방법론적 개인주의라고 부른다면, 여기에도 어김없이 기독교와 개인의 관계가 깊이 잠복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기독교의 직선운동이 닿는 자리는 최후 심판으로서 천국이라는 궁극점 또는 목적이기도 하다. 경제학에서 수요와 공급이 자기 조정을 거쳐 마침내 도달하는 균형점이나, 이를 뒷받침하는 패러다임인 뉴턴의 기계론적 사고방식도 모두 기독교의 신학이나 목적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주류 경제학을 비판하고 새로운 방법론을 궁리할 때, 근원적으로 기독교적인 직선운동에서 벗어나 소우주와 대우주의 호혜와 연대의 순환운동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의 시간이 상인의 시간으로 바뀌다: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초까지 수도원에서는 일정한 시각에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따라서 종소리를 제 시간에 맞춰 울릴 수 있도록 알려주는 시계가 필요했다. 종교적 이유로 제작되었던 수도원의 시계는 14세기 무렵 도시 시민을 위해 광장이나 시장에 시계탑으로 선다. 기계시계가 출현하면서 사람의 시간 의식도 바뀌었다. 그전까지는 아침에 해가 뜨면 일어나 밭에 나가 일어나 밭에 나가 일하고 저녁에는 별을 벗 삼아 집으로 돌아오는 자연의 시간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계시계의 출현 이후, 자연의 시간은 인공적으로 잘게 쪼개졌으며 사람의 생활은 다른 방식으로 제도화되었다.

중세에는 이자를 징수하는 행위가 죄악이었는데 그 이유도 시간 개념과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당시에 시간은 하나님의 것이었다. 원래부터 시간은 신의 소유였기에 아무도 시간에 따른 이득을 얻을 수 없었다. 이자는 하나님의 시간을 훔친 결과물이기에 중세 교회의 신학자들은 이자 취득을 범죄 행위로 간주했다. 교회는 상인의 이자 취득을 금지하는 이자금지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도시가 융성하고 상업이 활발해지면서, 시간이 이자를 낳는다는 사고가 서서히 주목받았다. 상인들은 시간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돈벌이에 응용했으며 ‘시간은 바로 돈’이라는 논리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금융업자와 상인들은 돈을 빌려주고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원금과 함께 이자를 받았다. 신의 시간이 상인의 시간으로 바뀐 것이다.

상인과 부르주아가 지배한 시간 위에서 인간의 삶과 노동이 규제되고 경제활동이 이루어졌다. 1563년 영국의 도제법에서도 노동시간이 규정되었다. 정해진 노동시간을 어기거나 태만하면 임금을 대폭 깎았다. 오로지 임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자는 시간 규칙에 철저하게 순응해야 했다.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사회는 상인과 부르주아가 시간을 지배하면서 탄생했다. 시간이 금전이기 때문에 돈처럼 아끼고 저축해야 하며 이를 위해 근면 성실하게 사는 것이 최선의 덕목으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인간의 시간은 다시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붙잡혀 조작되고 있지만 시간 안에 내재된 성스러움은 여전히 자연 속에 머금어 있다. 우리 모두는 가슴속에 저마다의 시간을 갖고 있고, 이슬을 머금은 들판의 풀 한 잎에도 어김없이 신의 자비와 은총이 배어 있는 것이다.



2. 정의와 균형을 위한 경제학



애덤 스미스와 정의로운 신의 손



잘못 이해된 ‘보이지 않는 손’: 2014년 여름 한 일간지의 작은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눈부신 경제성장의 주역이었던 한국 자본주의의 어두운 이면을 자성하자는 반성론과 함께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애덤 스미스의 메시지”를 간략히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기사를 찬찬히 살펴보니, 신이 인간의 마음에 심어준 도덕적 능력이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을 따를 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게 된다는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은 신의 계획과 의지를 실현하는 ‘신의 손’이므로, 우리도 도덕적 능력을 높여서 한국 자본주의가 건강한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흔히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개인의 이기심을 공적 이익으로 연결시키는 시장 메커니즘과 동일시된다. 그동안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이 만능기계처럼 모든 것을 알아서 해결해준다는 식으로 왜곡되어왔고, 사회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 모습과 탐욕도 정당화할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해왔다.

사실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을 찬양한 적도 없고, 보이지 않는 손을 시장의 가격기구와 연결시켜 ‘시장 만능론’으로 이끈 적도 없다. 따라서 스미스만큼 억울한 오해를 많이 받고 있는 학자도 드물다. 스미스는 자신의 모든 저작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가볍게 세 번 언급했을 뿐인데도, 이것이 그의 대표적 메타포가 되었고 시대 상황에 따라 잘못 해석되기도 했다. 원래 스미스는 도덕철학자로 출발했다. 경제는 인간적 따뜻함과 도덕적 틀 속에서 작동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휴머니즘 경제학자였다. 경제가 도덕을 쫓아낸 이 마당에서 스미스는 탐욕 자본주의와 시장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이기주의적 경제학자이자 그 준거점으로 왜곡되었으니, 아마도 그가 되살아난다면 매우 억울해할 것이다.

남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자애심: 스미스가 살던 산업혁명의 시대는 영국 맨체스터의 공장 굴뚝에서 회색 연기가 뿜어 오르고 노동자가 긴 행렬로 출근길을 메웠다. 시장에서는 서로 흥정하고, 적당히 사기도 치고, 남의 것을 빼앗는 무절제와 무질서가 판을 쳤다. 중세시대에만 하더라도 촌락 단위의 사회는 오랜 전통과 상부상조의 미덕으로 질서가 유지되었다. 이러한 공동체에서 자신의 이득을 내세우는 욕심은 범죄와 같았다. 교회가 지배하던 중세시대에, 인간 본성의 하나였던 사리사욕은 커다란 죄악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산업혁명과 상업의 시대가 열리면서 인간 본성도 다양하게 발현되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이타적인 본능이 실타래처럼 엉킨 다발이다. 그동안 억눌려 있던 인간의 본성은 화폐를 이익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욕구를 거침없이 내뱉었다. 자본가와 상인으로 이루어진 부르주아 계급이 사회질서를 이끌었고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꺼릴 것 없이 표출되었다.

스미스는 시대 변화에 따라 어차피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이기심과 탐욕을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발로라고 보았다. 여기에 도덕과 절제의 회로를 통과한 자기이득 또는 자기애를 가지고 사회적 조화를 이룩하고자 했던 것이 스미스가 『국부론』에 앞서 『도덕감정론』을 쓰게 된 동기였다.

스미스는 인간 본성을 자기이득 또는 자기애의 자연스러운 발로로 설정했다. 그러나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기 이득을 챙기는 이기적 성향이 인간의 유일한 본성은 아니었다. 자기애는 내가 사랑하고 싶은 만큼 타인도 사랑받기를 원하는 공감대 속에서 형성되는 감정이다. 남을 증오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증오당하는 것을 부자연스럽게 여기는 감정도 역시 자기애에 속한다. 자기이득이라고 다를 게 없다. 스미스는 자기애와 자기이득의 추구는 자신이 이익을 얻는 만큼 다른 사람의 이익도 존중하는 인간 행동이다. 타인의 이익을 침해하면서까지 자신의 것을 챙기려는 이기심과는 엄격히 구분된다. 자기애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안정감을 얻으면서 타인과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분별력 있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 오해하듯 스미스는 이기심을 찬양하지 않았다. 전환기 시대에 맞게 자기이득과 자기애를 긍정하는 가치론 위에서 새로운 도덕적 판단의 범주를 설정했다.

입장을 바꿔보는 상상력: 애덤 스미스 시대에 들어와 세상은 넓어졌다. 사람의 활동 영역이 좁은 마을의 경계를 넘어 전국적으로 넓어졌고, 스미스는 이기적이고 낯선 타인끼리 교류하는 시장 사회에 적합한 도덕철학의 기준을 마련해야만 했다. 스미스는 선하든 악하든 누구나 본성으로 갖고 있는 연민이나 동정을 도덕적 기초로 삼았다.

지금도 우리는 “너도 내 입장에서 생각해봐!”라는 말을 자주 한다. 우리는 처지를 바꿔 상대방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봄으로써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타당한지 판가름한다. 동감의 원리는 ‘상상 속에서 서로의 입장을 대신하는 교환 행위’ 안에서 이루어지며 행위의 적정성의 기준이 된다. 스미스에게 자신의 이기심을 억누르고 조절할 수 있는 도덕적 판단력은, 타인의 처지에서 나를 바라보고 서로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동감 원리를 통해 끊임없이 훈련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부상을 당했을 때,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될 수도 있다’는 마음의 상상력은 사회 전체를 거대한 가족처럼 연결해주는 동포 의식의 원천이다. 스미스는 타인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고, 사람에게 인정받고 비난을 피하려는 본능적 욕구와 자연스런 감정을 동감 원리로 삼아, 혼란과 무질서로 나갈 수도 있는 시장 사회에 도덕적 질서를 부여했다.

장 자크 루소도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자연 상태로 보고 본원적으로 자기애와 연민을 가진 존재라고 보았다. 신은 이제 더 이상 바깥에서 권위 있는 자세로 도덕 군주처럼 군림하지 않았다. 신은 한발 뒤로 물러섰으나 다른 모습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조용히 들어섰다. 위대한 자연의 모습은 신이 자신의 의지로 끊임없이 계획을 세워왔음을 증거한다. 인간도 자연의 한 조각이며 신의 의지가 반영된 존재다. 인간은 원죄에 의해 타락한 존재도 아니며, 무서운 하나님과 일대일로 소통하며 간절한 기도를 통해 자신의 구원을 확증하는 나약한 존재도 아니었다.

신은 자연이며, 자연 속에 내재해 있었다. 신은 우리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동거 생활에 들어갔다. 스미스는 신이 자연의 모습으로 인간의 내면에 들어선 것을 발견했다. human nature(인간성)란 단어는 신이 내재적인 자연의 모습으로 인간에 깃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자연 존재로서 인간’에게는 소박하고 풍부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으며,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고쳐나갈 수 있는 가능성마저 지니고 있다. 인간 안에 내면화된 자연, 즉 신은 스미스가 말하는 공정한 관람자나 다름없다. 우리는 도덕적 행위의 기준으로 삼기 위해 매일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반응한다. 내면에 자리 잡은 제 3자의 시선이 내부 재판관으로서 행위의 적정성을 결정짓는다. 주변 사람의 판단이나 평가가 언제나 옳지는 않다. 아무리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도 도덕적으로 회의가 따르는 일도 많다. 이때 최종적으로 행위를 판단해주는 것이 내면화된 신, 즉 공정한 관람자라고 할 수 있다. 동감의 원리 속에서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또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다시 공정한 관람자의 시선으로 판단한다.

공정한 관람자는 가슴속에 자리하는 위대한 동거인으로, 언제나 양심의 속삭임을 들려주고 도덕적 최종 판단을 내려주는 심판관이다. 우리는 인간도 아니고 신도 아닌 제3의 존재, 즉 공정한 관람자를 통해 신을 모방하고 신의 위치까지 가려고 하지만 결코 신의 영역에는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규제와 절제를 통해 자연의 모습으로 내면에 자리 잡은 신을 끊임없이 닮아가려 한다. 신은 언제나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손을 내밀고 있다. 인격을 높이고 싶은 마음,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타인을 사랑하려는 자기애, 사회를 조화롭게 발전시키려는 인간의 능동적 노력은 ‘보이지 않는 손’과 더 굳세게 악수하는 것과 같다.

도덕적 우주를 위한 신의 손: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기본적으로 인간 세계에 도덕적 우주를 만들려는 신의 손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타적일 수 없다. 이타적이고 자비로우면 더욱 좋겠지만 그것은 완전한 존재인 신의 몫이고 인간은 그저 불완전할 따름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는 만큼 타인의 이익도 존중하면 된다. 자기이득을 위해 노력하면 의도하지 않았던 공공의 선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달성되는 것이다. 스미스는 당시 천문학과 자연과학에서, 따로 떨어져 멀리서 움직이는 물체의 역학을 중력의 법칙으로 설명했던 뉴턴의 놀라운 발견을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장에서 사람이 서로 만나고 거래하고 교환하는 행위는 이타적 자비심이 아니라 자기애와 자기이득의 중력이 있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스미스는 인간의 자기애와 자기 이득을 뉴턴의 중력처럼 본성적으로 서로 끌고 당기는 활성적 힘이라고 승인했다.

보이지 않는 손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공정한 관람자를 통해 억누르고, 타인의 자기애도 존중하는 자애심으로 이끈다. 인간의 선천적 본성에서 비롯되는 도덕 감정은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시장, 푸줏간 주인, 손님처럼 분신된 대상들을 하나로 잇는다. 시장의 가격기구 속에서, 개인이 자애심을 뛰어넘는 탐욕을 절제하고 역지사지의 상상력으로 교환 행위를 했을 때 우리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공공의 선을 달성할 수 있다고 스미스는 말한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천문학의 역사」라는 논문에 처음 등장한다. “불이 타오르고 물이 다시 깨끗해진다. 그리고 타고난 본성의 필요에 따라 무거운 물체는 하강하고 가벼운 물질은 위로 날아간다. 그러한 일들에 벌어지는 것에 주피터의 보이지 않는 손이 종사했는지는 여태껏 깨닫지 못했다.” 주피터의 보이지 않는 손은 신의 섭리이며 신성한 손으로 우주 질서를 조화롭게 이끄는 배후였다. 결국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신의 섭리가 작용하는 신성한 손이며 약자를 배려하고 독점과 부자의 탐욕을 경계하는 정의로운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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