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절대로 침몰하지 않는다
정승욱 지음 | 메디치미디어
일본은 절대로 침몰하지 않는다
정승욱 지음
메디치 / 2016년 7월 / 320쪽 / 14,000원
1장 일본은 20년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우리가 알던 세계에 종언을 고하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1990년 새해 벽두부터 닛케이225 지수가 곤두박질치자 일본 전역은 충격에 휩싸였다. 주가지수가 203포인트나 폭락하는 광경을 일본인들은 망연자실하며 지켜봐야 했다. 불과 엿새 전인 1989년 12월 29일에 일본 증시는 장중 사상 최고치인 3만 8,957엔을 찍은 터였다. 그 후로 2년 반이 지났을 때, 일본 증시는 63%나 하락한 1만 4,309엔으로 주저앉았고, 2002년 말까지 부동산 1,200조 엔을 포함해 총 1,500조 엔에 달하는 자산가치가 증발했다. 2016년 명목 GDP의 340%에 달하는 수치였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잃어버린 20년은 언제이고,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잃어버린 20년이라는 말은 그 자체에 ‘경제적 향수’가 깃들어있다. 지금은 은행에 돈을 넣어두면 이자로 원금이 깎이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지만, 버블경제 당시 일본 은행의 금리는 8%를 웃돌았다. 한편으로 주식과 부동산은 광풍이 따로 없었다. 일본 전신전화주식회사의 상장 시초가는 무려 120만 엔에 달했고, 연말에는 400만 엔 가까이 치솟았다. 민영화가 된 다른 기업의 주식도 없어서 못 살 정도였다. 도쿄의 주택담보대출비율이 200%를 초과했다. 도쿄 시 평균 지가는 1988년에 전년 대비 300%가 상승했다. 신주쿠 중심가의 땅은 1m2가 수억 엔에 달했다. 물론 뜨거운 나이프로 버터를 가르듯이 일본 경제가 불과 며칠 사이에 완전히 결딴난 것은 아니었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버블경제의 여운은 지속되었다. 하지만 배가 가라앉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했고,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잃어버린 10년이 20년으로 가고 있다고 스스로 진단했고, 2010년대 들어서는 30년까지 이어지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그럼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가? 사실 잃어버린 20년이 구체적으로 몇 년부터 몇 년까지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무엇을 잃어버렸는가’에 대해서도 관점에 따라 답이 다르다. 다만 이 책에서는 버블경제의 붕괴와 장기불황에의 연착륙이라는 큰 주제에 맞춰서, 잃어버린 20년을 1991년경부터 2011년경이라고 가정하려 한다. 1991년은 일본 경제가 본격적인 침체에 이른 기간이며, 2011년은 그 이후로 딱 20년이 되는 해다. 그리고 ‘무엇을 잃어버렸는가?’에 대한 답은 일본의 경제 활력과 거시 경제지표에서 볼 수 있는 유무형의 자산가치로 규정지으려 한다.
20년 전 일본과 20년 후의 한국: 잃어버린 20년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시초인 ‘잃어버린 10년’(1991년부터 2002년까지)을 알아야 한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일본 경제는 깊은 골짜기에 빠져들었다. 특히 1991년 초반의 높은 경제성장률은 이후 일본 경제가 다시는 오르지 못한 정상이 되고 말았다. 성장률의 지속적인 하락은 결국 일본이 장기불황에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장기불황의 진행 상태와 거의 똑같이 전체 실업률이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이 기간 동안 경기는 침체되고 노동시장은 악화되었다. 또 하나 심각한 것은 실질성장률이 명목성장률을 웃돈다는 것이다. GDP 디플레이터로 봤을 때 매년 물가가 하락한 것이다. 심각한 디플레이션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이 20여 년 전 걸었던 장기불황과 디플레이션의 모습은 불행히도 한국에게 낯설지 않다. 한국도 잃어버린 10년의 4, 5년차에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일본 경기의 확장과 침체의 파도는 한국에도 곧 닥쳐올 것이다.
디플레이션은 경기침체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끝없이 추락하던 일본 경제에 반전이 찾아왔다. 2002년 1월 이후 일본 경제가 살아날 조짐을 보인 것이다. 2002년부터는 경기가 완만히 상승했고 실질성장률과 명목성장률 모두 회복세에 접어들었다. 2004년까지도 경기 회복이 꾸준히 이어졌다. 이때 원동력은 민간이 주도한 설비투자였다. 이와 더불어 금융 부문도 안정되어갔다. 기업들은 부실채권과 과잉부채를 처분했고 이 기세는 2005년까지 이어졌다. 이때 비로소 1990년대 대규모 구조조정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해석된다. 2006년에는 개인 소비도 회복되었다.
문제는 2007년과 2008년이었다. 리먼 쇼크 이후 엔화가 상승하면서 2000년대 중반 경제 회복을 이끌던 수출이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다. 2008년 일본의 실질성장률은 마이너스 5%를 기록하고 말았다. 하지만 경기침체가 급속했던 것만큼 회복도 빨랐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잃어버린 20년은 2002년을 기점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분명하게 나눠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20년간의 순환경기 각 구간을 분석해보면 전반부 10년은 말 그대로 잃어버린 10년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후반부 10년은 다르다. 일본 가게와 기업은 과잉부채를 처분했고 오히려 순채무가 증가했다. 실질성장률과 명목성장률을 봐도 완만한 상승세를 그리고 있고 실업률도 꾸준히 감소했다. 세계금융위기와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역대급 변수가 있었지만 일본 경제는 그때마다 바닥을 치고 올라왔다. 전반기처럼 완만한 하락세는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잃어버린 20년의 전반기와 후반기가 서로 다른 성격이고, 경기침체와 확장이 엎치락뒤치락했지만, 디플레이션만은 20년 동안 꾸준히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오랜 디플레이션은 원인이 무엇일까? 이에 관해서는 ‘20년’ 후반부에 내각부 경제재정자문회의원으로 경제정책 수립에 간여해왔던 요시카와 히로시 도쿄대한 경제학 교수의 “일본 디플레이션은 장기침체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라는 말이 큰 힌트가 될 것이다.
버블경제 붕괴 이후 대규모 구조조정을 하고, 완전실업률이 상승하면서 일본의 노동시장구조가 개편되었다. 1998년 이후부터 일본 정규직의 명목임금은 분명한 하락세를 보였다.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고용이냐 임금이냐’의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고용을 우선시하고 임금의 억제를 받아들였다. 임금이 동결되거나 하락하니 물가가 하락하고 경기침체가 지속된 것이다. 그렇다면 ‘정규직ㆍ실질임금 하락’ 때문에 일본 경제의 디플레이션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다른 시각도 있다. 바로 비정규직의 임금 상승률이다. 1998년경부터 일본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정체되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특히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는 고용 대신 임금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잃어버린 20년에 대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전반부는 버블경제 붕괴와 급격한 자산가치의 하락, 민간투자 축소로 인한 장기불황이 분명하지만 후반부는 일본 경제가 완만한 회복세를 보이고, 몇 번의 대외적 충격으로 다시 침체기에 들었지만 빠른 시일 내에 바닥을 치고 올라왔다는 것이다. 즉 전반부는 장기불황, 후반부는 긴 디플레이션이었다. 따라서 잃어버린 20년의 후반부는 일본이 장기불황에 연착륙하는 기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용어가 일본 경제를 나타내는 데 적절치 않으며,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2장 황(黃): 일본을 지탱하는 정신적 기둥
천황을 알아야 일본 경제가 보인다
‘일본 제대로 보기’의 첫걸음은 천황이다. 현대 일본을 알기 위해서는 일본을 지탱하는 세 기둥인 천황, 총리, 기업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천황과 총리, 천황과 기업, 천황과 일본인의 관계가 경제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예컨대 근대 일본과 일본제국, 전후 일본과 경제 대국 일본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왔는지 그 궤적을 살펴야 비로소 일본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천황과 메이와쿠 비즈니스: 일본 사회의 핵심은 겸양, 우애, 수치의 문화다. 이러한 문화가 자리 잡게 된 중심에는 국가의 큰 어른이 있다. 바로 천황이다. 한국인에게 천황이란 메이지유신 당시의 군주(메이지 천황), 제2차 세계대전의 주범(전대 히로히토 천황), 입헌군주국의 꼭두각시 왕(현 아키히토 천황) 정도로 인식된다. 하지만 일본인에게 천황이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존재로 군림하고 있다. 일본에서 천황은 국민 통합과 사회적 규범의 중심이다. 천황에 대한 일본 국민의 태도는 한 마디로 존경과 사랑이다. 일본에서는 어떤 신문이나 공공방송도 천황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나 해가 될 소식은 절대 전하지 않는다. 또한 일본의 큰 어른으로 모시며 극존칭을 쓴다.
또한 일본 문화 가운데 가장 철저히 지켜야 하는 것으로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가 있다. 여기서 ‘폐’를 일본어로 ‘메이와쿠(迷惑)’라고 한다. 일본인들에게 메이와쿠는 철저한 예절 교육이며 사회구성원의 공존을 위해 필요한 덕목이다. 대중이나 타인에게 절대 피해를 주지 않는 것, 이는 행동을 하기에 앞서 타인의 입장에서 행위의 결과를 생각하는 것이기에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일본 정치인이나 경제인들 사이에서 서로를 헐뜯는 기자회견을 하거나 상대방을 ‘공개적으로 공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매우 민감한 법안을 놓고 극우와 극좌 성향의 국회의원들이 몸싸움을 하거나, 젊은 세대 가운데 가끔은 엽기적인 정치인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극히 희귀하다. 오피니언 리더들은 명예, 권력, 돈을 균분한다는 의식이 강하며, 설령 경쟁 관계에 있더라도 상대를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일본 재계에서는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마쓰시타 그룹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올바른 경제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정계에 진출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단호하게 뿌리쳤다. 그 대신 사재를 털어 유능한 정치 지망생들을 키우는 마쓰시타 정경숙을 만들었다. 기업인은 돈과 권력을 동시에 탐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일본식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할 수 있다. 이것도 균분이라는 일본 주류 사회의 사고방식에 의한 것이다.
일본을 지탱하는 세 기둥, 천황ㆍ총리ㆍ기업: 일본 사회를 지탱하는 세 기둥에서 천황은 명예(권위)만 갖는다. 총리는 권력을 소유한다. 기업은 권력과 명예는 없지만 돈을 갖는다. 일본인 개인이 갖고 있는 돈과 권력과 명예를 셋으로 나누면 일본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는 일종의 사회적 묵계인 셈이다. 평론가 다케우치 히로시는 이 같은 균분 의식을 일본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회적 합의라고 풀이한다. 돈과 권력과 명예의 균분 의식은 일본 역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적 불문율로 이어져왔다.
천황과 같은 큰 어른이 사회에 존재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자발적인 통제나 스스로 절제하는 사회적 미덕이 작동하게 마련이다. 천황은 19세기 후반에야 막부정치에서 권력을 넘겨받아 비로소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당시 사카모토 료마 등 개혁 세력에 의한 이른바 ‘대정봉환(大政奉還, 1867년 일본 에도 바쿠후가 천황에게 국가 통치권을 돌려준 사건)’은 천황을 허수아비가 아닌, 국가의 원수로서 자리 잡도록 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메이지 천황 시대인 1898년 헌법이 제정되면서 입헌군주제가 제대로 자리 잡게 된다.
현재 일본의 천황은 아키히토다. 전대 천황인 히로히토가 지금까지도 제2차 세계대전의 원흉으로 비난을 받는 것과 다르게 그는 일관적으로 평화를 강조한다. 일본 사회에서 극우 세력이 끊임없이 등장하면서도 일본 사회 전체를 휩쓸지 못했던 이유는 아키히토 천황 덕분이라는 것이 일본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지금까지 극우 성향의 정치인이 총리에 올라도 평화헌법을 함부로 개정하지 못한 이유는 반극우 성향인 아키히토 천황 때문인데, 아키히토 천황이 파킨슨병으로 투병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얼마 안 있어 아베 신조 총리가 일본 여당의 지지를 통해 집단적 자위권인 ‘안보법안’을 통과시키고 말았다. 이러한 일본 사회의 급격한 우경화를 보더라도 천황은 정치와 역사의 꼭두각시가 아니며 일본 사회의 큰 어른으로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장 관(官) : 일본의 100년을 결정한 리더십
패전을 딛고 선 요시다 시게루
도쿄 시내 중심에 위치한 치요다구 기타노마루 공원에 가면, 요시다 시게루의 동상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시다 시게루는 제 2차 세계대전 패망 직후인 1947년에 45대 총리에 올랐고, 1948년에 재차 총리에 올라 전후 일본을 재건하고 오늘의 경제대국 일본을 설계한 인물이다. 그의 동상은 그가 일본인들에게 얼마나 큰 존경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상징적 조형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제국 일본은 이미 없어졌기 때문에, 지금의 일본은 사실상 ‘전후 일본’이다. 전후 일본에서 동상으로 세워져 존경받는 인물은 요시다 총리가 유일하다. 요시다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완전히 피폐해진 일본을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을까?
군사력 없는 경제대국: 요시다는 태평양 시대의 개막과 동시에 ‘팍스 아메리카나’가 펼쳐질 것을 예측하고 미국과 단독 안보조약을 체결했다. 그 덕분에 일본은 국가안보를 미국에 맡기고 모든 힘을 경제 재건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는 패전국이라는 당대 국가 상황에서 미국과의 국제관계 변화와 한국전쟁이라는 경제 회생의 기회를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요시다는 입이 거칠었고 ‘일본 우월관’을 자주 드러냈기 때문에 당대에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냉전이라는 동아시아 정세를 미리 내다보고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한 리더십이 그의 사후 새삼 주목을 받았다. 친미ㆍ재군비 반대ㆍ반공 등 1945년부터 1951년 사이에 요시다가 내렸던 여러 전략적 선택에 대해 일본 국민은 시대 흐름을 정확히 읽은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평가한다.
일본 재건의 반석이 된 요시다 독트린: 1946년 5월, 도쿄 시민들은 폐허 속에서 먹을 것조차 없어 아우성이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개전 후 국가총력전을 수행하며 모든 공장을 군수공장으로, 노동이 가능한 모든 국민을 군수공장 노동자로 동원했다. 경제 붕괴에는 미국의 해상봉쇄와 공습이 결정타로 작용하기도 했다. 일본 본토로 들어오는 물자가 차단되고 공습 때문에 물류와 생산 역시 중단됐다. 산업뿐 아니라 국민의 삶 자체가 붕괴한 것이다. 종전 직후 일본 방방곡곡은 부랑자로 가득했고, 도쿄 시내는 매일 수만 명의 좌파 시위대가 거리를 누벼 제정 러시아의 혁명 전야처럼 불안했다.
그 무렵 신헌법 초안이 발표되고 총선거에 따라 자유진보당이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더글러스 맥아더의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연립내각 수장인 하토야마 이치로의 반미 이력을 문제 삼아 1946년 총리 인준을 거부하고 하토야마를 추방해버렸다. 하토야마는 신임 총리로 외무부관료 출신인 요시다 시게루를 천거했고, 요시다는 즉시 내각을 구성해 총리에 올랐다. 67세의 나이로 총리에 오른 요시다는 패전국이라는 상황과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배를 받는 일본의 현실에 맞춰 외교노선을 설정했다. 이를 요시다 독트린이라고 한다.
▲ 요시다 독트린
1. 냉전 상황에서는 미국과의 제휴를 외교의 최우선 기조로 한다.
2. 안보는 미국에 최대한 의존하고 군사력은 최소한으로 한다.
3. 경제외교에 중점을 둔다.
요시다 독트린의 목적은 재군비에 투입될 예산의 부담을 없애고 경제발전에 국가역량을 집중하는 것이었다. 요시다는 국가 재건을 위해 맥아더에게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면 우선 국민을 먹여 살리고 일자리를 주어 생활을 안정시키는 게 중요하다”며 식량 원조를 호소했다. 맥아더는 요시다의 원조 요청을 받아들였고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매년 70여만 톤의 식량을 얻어내는 데 성공 했다. 물론 미국이 패전국인 일본에 대량의 식량을 원조한 까닭은 온정주의가 아니라 당시 득세하던 좌파 세력에 일본이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정치적 판단 때문이다. 맥아더는 일단 일본 사회를 안정시켜야 했기 때문에 요시다의 원조 요청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