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별곡
차현진 지음 | 인물과사상사
중앙은행 별곡
차현진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6년 6월 / 344쪽 / 16,000원
위폐 사건을 계기로 반공 사회가 된 한국
일찍이 볼셰비키 혁명 이후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본주의를 붕괴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돈을 타락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돈을 타락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짜 돈을 유통시키는 것일 테다. 돈은 신뢰를 바탕으로 주고받는 것이며 가짜 돈의 범람은 그 신뢰를 파괴한다. 그렇게 되면 그 어떤 교환과 무역도 안심할 수 없다.
가짜 돈은 요즘과 같은 불태환 화폐제도뿐만 아니라 금속화폐 제도하에서도 골칫거리였다. 기원전 6세기경 소아시아 지역에서 화폐가 발명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인류는 가짜 돈 또는 불량 화폐와 전쟁을 치러왔다. 그 전쟁을 일으킨 범인은, 진짜 ‘전범’과 다름없는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위조범에 대한 가장 가혹한 처벌은 1690년에 있었다. 영국의 토머스 로저스라는 사람은 가짜 돈을 만든 것이 아니라, 딸 앤과 함께 은화 40개를 고의적으로 깎아서 약간의 은가루를 챙겼을 뿐이다. 그러나 로저스는 교수형에 처해지고 그 시체는 물에 담갔다가 토막이 난 채 버려졌다. 그의 딸은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졌다. 명예혁명을 통해 등장한 영국 최초의 민주 정부가 한 일 치고는 전혀 명예롭지 못하다. ‘돈을 타락시키는 것’은 그만큼 용서할 수 없는 역모로 간주된다.
16세기 인쇄술이 가져온 변화: 위조지폐에는 고도의 기술이 동원된다. 북한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100달러짜리 ‘슈퍼노트’는 너무나 정교해 감별기로도 식별이 안 된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140여명의 유대인 최고 기술자들을 강제수용소에 잡아가둔 뒤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필사적으로 파운드화를 위조하게 했다(베른하르트 작전). 영국 로저스 부녀의 사례가 개인 차원의 일탈이었다면, 북한과 나치의 사례는 타국을 향한 국가 차원의 공작이었다. 그렇다면 ‘가짜’ 돈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짜’ 화폐전쟁이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진짜 돈에는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이 동원된다. 화폐의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조폐기술은 1550년경 독일 남부에서 시작되었다. 이 지역은 이미 100여 년 전 인쇄업자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했을 정도로 금속과 기계를 다루는 기술이 발달해 있었다. 그 이전에는 모든 나라가 귀금속을 녹여서 돈을 만들었다. 그래서 모양이 균일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쉽게 변형되고 마모되었다. 그런데 1550년경 인쇄기술에서 파생된 압축 공법이 개발되어 과거보다 훨씬 단단하고 정교한 모양의 돈을 만들 수 있었다. 때마침 남미 대륙에서 거대한 은광을 발견한 스페인은 국왕 펠리페 2세가 통치하던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독일 지역에서 압축 기계를 가져와 은화 제작에 적용했다. 세고비아 지방에서 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새 돈은 정교함과 단단함, 균일함 면에서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었다. 주변국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는 가운데 스페인 은화는 자연스럽게 기축통화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스페인의 은화는 ‘톨라르’라는 이름으로 유럽과 신대륙으로 퍼졌다. 이것이 오늘날 ‘달러’라는 화폐단위가 널리 보급된 발단이었다(dollar는 한 국가에서만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문자로 쓴다). 그 돈은 임진왜란 이후 필리핀과 일본을 거쳐 한국과 중국에까지 유입되었다. 중국인들은 스페인 은화를 ‘은원(銀圓)’이라고 불렀다. 가운데가 뻥 뚫린 그들의 엽전과 달리 가운데가 막혀 있어 둥그런 은쟁반 같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둥글다’는 뜻의 한자가 한중일 3개국의 화폐단위로 쓰이게 된 계기였다. 이 모든 것이 16세기 독일의 인쇄술에서 출발한 사건이었다.
모조지로 화폐를 발행하다: 불태환 시대로 접어들면서 화폐와 인쇄술은 더욱 가까워졌다. 불태환 시대에는 주화보다 은행권 즉, 지폐를 더 많이 쓰기 때문이었다. 그럼으로써 위조량은 금속화폐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해방 직후 우리가 겪었던 위조지폐의 경험은 나치가 저지른 베른하르트 작전보다도 극적이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일본은 대한제국의 상징이던 원구단을 허물고 그 자리에 조선철도호텔(오늘날 조선호텔)을 지었다. 인천항에서 경인선을 타고 서울역에 도착한 일본인들의 서울 생활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그 주변에는 조선은행(오늘날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을 포함한 주요 국가시설들이 밀집했다. 그중에는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교과서 인쇄)와 근택인쇄소(신문 인쇄)도 있었다. 그리고 조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태종의 딸(경정공주)이 살던 동네의 이름을 ‘작은공주골(소공동)’에서 ‘하세가와마치’로 바꿨다. 하세가와는 조선총독의 이름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은행권은 원래 일본 대장성인쇄국에서 인쇄했다. 그러나 패전에 가까워오면서 일본 본토가 극심한 물자 부족에 빠지자 제작 장소가 서울로 바뀌었다. 이 무렵 조선도 정상은 아니었다. 대장성인쇄국 서울 출장소는 화폐 용지를 조달하지 못해 시내 지물포에서 모조지를 구입한 뒤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서 은행권을 제작했다. 교과서 인쇄기로 급하게 만들어진 조악한 지폐는 이후 수십 종의 위조지폐가 출몰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해방이 찾아왔다. 철수 작전에 돌입한 조선은행의 일본인 간부들은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 있던 100원짜리 인쇄 원판을 빼돌렸다. 그리고 인근의 근택인쇄소에서 미 군정청과 조선인 직원들 몰래 지폐를 인쇄한 뒤 귀국 길에 나선 일본인 예금주들에게 지급했다. 그 바람에 불과 며칠 동안 100원 권 발행액은 2배로 늘었다. 그런 불법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인쇄소에서 근무하던 직원들이 철수하기 바쁜 일본인들 손에서 다시 인쇄 원판을 빼돌려 똑같은 일을 저지른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 직원은 조선공산당 당원이었다. 해방 직후 남조선에서는 공산당이 합법 단체였다. 그래서 미 군정청은 일본인들에게 압수한 재산을 불하할 때도 조선공산당에 근택인쇄소를 넘겼다. 거기서 근무하는 직원의 상당수가 조선공산당 당원이었기 때문이다.
조선공산당은 근택인쇄소를 조선정판사로 개명한 뒤 공산당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인쇄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활동이었다. 인쇄소의 임직원들은 빼돌린 인쇄 원판을 이용해 건물 지하에서 대량으로 위조지폐를 제작했다. 그리고 공작금으로 썼다. 그 후 다른 사람에게 인쇄 원판을 팔아넘기려다가 적발되었다.
소공동 74번지 지하에서 진행된 위폐 제작: 1946년 5월 검거된 10여 명의 피고인들은 ‘용공조작’이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법정에서는 사상 최초의 법관 기피신청과 법정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법정 밖에서는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이 의문사하거나 담당 판사가 길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극도의 혼란이 수개월간 계속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은 국민들로부터 철저히 외면 받았다. 당시 신탁통치 찬반 문제는 지식인들끼리의 관념적인 문제였던 반면, 위조지폐 문제는 전 국민을 금방 빨아들여 흥분시키는, 무섭도록 폭발적인 문제였다. 은행에서 100원짜리 지폐 수취를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가운데 공산당은 불법 단체로 낙인찍혔다. 주범 박낙종과 이관술은 종신형에 처해지고(한국전쟁 중 처형),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북으로 도망갔다. <해방일보>는 매각되어 오늘날 <경향신문>으로 전환되었다. 이것이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의 전말이다.
해방 직후 순진했던 남조선은 소공동 74번지(오늘날 조선호텔 앞) 지하에서 벌어진 위조지폐 사건을 계기로 순식간에 반공 사회가 되었다. 돈의 타락은 자본주의를 붕괴시키지만, 그 실패는 공산주의를 추방시킨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돈의 ‘짝퉁’은 그 어떤 ‘짝퉁’보다도 위태롭다. 원래 ‘돈의 타락’은 위조지폐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레닌은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지면 자본주의가 붕괴된다고 믿었다. 즉, 무능한 중앙은행에 의한 화폐 남발이 화폐 불신을 초래해서 자본주의의 씨앗인 화폐를 사라지게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 무능한 중앙은행은 사회 전체를 구렁텅이로 떨어뜨린다. 제 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라이히스방크는 돈을 너무 많이 풀어서 탈이었고, 대공황 때 연준은 돈을 너무 적게 풀어서 탈이었다. 화폐경제를 제대로 유지하려면, 물질로서 돈을 잘 만드는 것 말고도 사회제도와 신념체제로서의 돈을 잘 가꾸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조상들은 이를 잘 몰랐다. 조선 말기까지도 금융과 중앙은행에 무지했던 나머지 돈의 재질을 개량하는 데만 매달렸다. 그런 면에서 레닌보다도 더 유물론적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첨병 노릇한 조선은행
1909년 첫 아침, 순종은 창덕궁 인정전에서 이토 히로부미 조선통감 일행의 하례를 받는 것으로 새해를 시작했다. 하지만 순종을 알현하는 이토의 머릿속에서는 대한제국이 지워져 가고 있었다. 조선을 병합하기 위한 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중앙은행 설립 계획도 있었다. 이토는 처음에 ‘일본은행 경성지점’을 설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일본계 은행을 제외한 은행 점포 수가 24개에 불과해, 상업은행들만 상대하는 일본은행의 경성지점은 할 일이 없을 것이 뻔했다. 따라서 개인과 기업을 상대로 상업은행 업무를 수행해가면서 은행권 발행과 국고금 관리를 취급하는 은행을 세우기로 했다. 일찍이 영란은행(1694년)이 그러했으며, 10년 전 일본이 대만에 설립했던 대만은행(1899년)도 그랬다. 당시 조선에 은행 점포가 극히 적었던 것은 자본도 부족했고 은행업의 개념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제일은행이 1878년 부산에서 영업을 시작한 이후 원산과 인천 등에도 제102은행, 제18은행, 제58은행 등 일본계 은행들이 속속 진출했으나 조선 정부는 이런 사태를 수수방관했다(20세기 초까지는 정부가 부여한 설립인가번호를 은행 이름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 제일은행도 ‘인가번호 1번’이라는 뜻이다).
사실상 일본의 은행이었던 구한국은행: 한국 최초의 중앙은행 즉, 구한국은행은 상업은행들보다 늦은 1909년 11월 설립되었다. 수권자본금은 1,000만 엔, 납입자본금 250만 엔이었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한국’과는 거의 상관이 없었다. 주식 공모도 일본에서 진행했고, 설립 허가도 일본 대장상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창립총회 역시 도쿄상업회의소에서 개최했다. 1만 명을 넘는 주주의 절대다수(98%)도 물론 일본인이었다. 조선인 주주는, 왕실과 7개 기업, 그리고 211인의 소액주주가 전부였다. 6인의 임원 중에 조선인은 없었다. 구한국은행의 주식 공모는 1909년 10월 엄청난 열기 속에 진행되었다. 경쟁률이 292대 1에 이른 데는 주주에 대한 투자수익 보장 장치도 한몫을 했다. 정부는 주주들에게 5년간 최소 6%의 배당을 보장했다. 그 대신 최대 주주인 한국 정부(30%)가 첫 5년간 배당을 포기하도록 했다. 다만, 1,200만 엔(납입자본금의 4.8배)까지는 한국 정부에 무이자로 대출토록 해 정부의 은행임을 분명히 했다.
구한국은행의 간판은 2년간 유지되다가 1911년 8월 ‘조선은행’으로 바뀌었다. 이때 조선은행의 설립일도 1909년 11월로 소급했다. 한때 서구 열강을 의식해 일본이 예의상 불렀던 ‘한국’이라는 이름을 그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선은행’으로 이름이 바뀐 뒤 ‘정부의 은행’ 역할은 더욱 확대되었다. 이제는 일본의 국체까지 매입했다. 한일강제병합 직후 일본 정부는 그들에게 적극 협조한 공로로 작위를 받은 76인을 포함, 수천 명의 조선인에게 축하금을 뿌렸다. 그 축하금은 연 5%의 이자가 50년간 지급되는 기명식 국채(임시은사금공채)로 지급되었다. 채권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조선인들은 그것을 하루빨리 현금화하려고 안달했고, 조선은행은 그것을 액면가로 사들였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공개시장조작인데, 그 결과 ‘임시은사금공채’는 발행된 지 4년 만에 70%가 조선은행 금고로 회수되었다.
일본을 위한 조선은행의 공개시장조작: 이런 일을 지휘한 사람은 이치하라 모리히로 총재였다. 이치하라가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장에 임명되었을 때 그에게 부여된 임무 중 하나는 일본 제일은행이 경성에서 항구적 중앙은행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건물을 짓는 것이었다. 기독교 신자인 그는 경성에서 선교사들과 자주 접촉했다. 그중에는 예일 대학교 동문 스크랜턴도 있었다. 의료선교사 스크랜턴은 때마침 자신이 관리하던 병원과 교회를 합해서 더 큰 교회를 지을 계획이었다(이것이 오늘날 남대문시장에 있는 상동교회다). 이치하라는 스크랜턴의 교회를 사들여 지금의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건물을 지었다. 그 주변으로 조선저축은행(SC제일은행 제일지점), 조선상업은행, 조선식산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이 연이어 모여들면서 은행가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무렵 일본 정부는 일본 제일은행 대신 조선에 새로운 중앙은행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다만 이치하라 지점장의 행정 능력은 버리기 아까워서 그를 구한국은행의 초대 총재로 임명했다. 권위적인 성품의 이치하라 총재 아래서 구한국은행과 조선은행은 일본 정부를 향한 상명하복의 자세를 확실하게 지켰다. 그러나 시키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한 탓인지, 이치하라 총재는 재임 7년 차에 병을 얻어 갑자기 사망했다.
국제투자기관의 성격을 지닌 조선은행: 두 달 뒤 조선은행 총재로 임명된 쇼다 가즈에는 도쿄대학교 법대를 졸업한 정통 대장성 관료로 조선은행에서는 10개월밖에 근무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은행이 가야 할 방향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제시했다. 구한국은행법을 조선은행법으로 바꿀 때 대장성 차관이었던 그는 “조선은행의 역할은 일본-조선-만주를 관통하는 경제 안정대(엔 블록)를 견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조선은행 총재로 부임하자마자 조사실을 대폭 확대하고 유능한 직원들로 채웠다. 자료 수집과 현장 답사를 통해 만주 지역의 경제와 화폐제도를 파악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쇼다의 생각에 따르면, 조선은행은 일본의 대륙 진출을 위한 금융적 도구다. 따라서 조선은행은 조선을 넘어선 존재여야 했다. 이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총독의 생각과도 같았다. 쇼다는 자신의 철학을 밀어붙였다. 조선은행이 중국, 만주, 시베리아 정부에 차관을 제공할 수 있도록 자본금을 2배로 개정(1918년)한 것이다. 그때 쇼다는 일본 의회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조선은행이) 다소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으며, 비밀을 엄격히 지키고, 또 정부 명령에 따라 한층 기민하게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 법률 개정 취지라고 설명했다. 청일전쟁 직후(1895년)에는 일본은행이 조선 정부에 차관을 제공했는데, 이제 조선은행이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후 조선은행은 조선이든, 만주든, 시베리아든 일본 정부가 지정한 곳으로 달려가서 시킨 일을 하는 철저한 ‘을’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은행은 한반도 안에서 돈을 찍어 한반도 밖에 투자하는, 일종의 국제투자기관이었다. 이는 자산의 90% 이상을 미국 국채 등에 투자하는 오늘날의 한국은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선은행은 일본 정부가 시키는 일이라면 어떤 위험과 손실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금본위제 고수하던 일 대장상, 우익 청년에게 살해되다
중견작가 신경숙 씨의 표절 시비는 안타깝다. 표절의 원전이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1961년)이라는 점은 충격적이다. 미시마는 평화헌법 개정과 일본의 재무장을 주장하던 끝에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할복자살한 인물이다. 자기가 쓴 소설 『우국』의 결말과 똑같았다. 미시마와 같은 극우주의자들의 뿌리는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일본 사회의 중심부를 차지하게 된 출발점은 1920년대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거침없이 영토와 이권을 확장해온 일본은 1920년 반동공황을 시작으로 기세가 꺾였다.
경제난이 시작되자 사회 기강이 흔들렸다. 뇌물 수수, 전별금 착복, 도시계획 누설, 정치자금 수수, 이권 개입 등 정치 지도자들의 추한 금전 스캔들이 줄을 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야마나시 한조 총독도 뇌물 문제로 교체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조선의 항일투쟁은 한층 강렬해졌다. 1919년의 3ㆍ1운동이 기폭제가 된 것이다.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전투,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 6ㆍ10만세운동,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조명하 의사의 히로히토 장인 독살 시도 등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이 전개되면서 군부의 입김이 강해졌다. 내각이 군부를 통제한 것은 1924년 조선은행법 개정 즉, 조선총독부(군부)의 감독 권한을 대장성으로 흡수시킨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듬해 ‘치안유지법’ 제정을 계기로 ‘다이쇼 데모크라시’ 즉 민주주의 시대는 끝나고, 군국주의 시대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