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경제학자들
필 손튼 지음 | 시그마북스
위대한 경제학자들
필 손튼 지음
시그마북스 / 2015년 5월 / 263쪽 / 15,000원
애덤 스미스 - 경제학의 ‘창시자’
영국인이라면 다들 애덤 스미스가 누구인지, 혹은 적어도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이는 2007년부터 영국에서 발행되는 20파운드 은행권에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지폐에는 그의 초상 아래 ‘핀 제조 공장의 분업’이라는 글귀와 함께 “그 결과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라는 인용문이 괄호 안에 적혀 있다. 이 구절은 스미스의 대표작인 『국부의 본질과 원인에 관한 연구』에서 나온 말인데, 흔히들 『국부론』이라고 짧게 줄여서 부른다.
젊은 시절과 성격: 애덤 스미스는 1723년 스코틀랜드의 소도시 커콜디에서 태어났다. 아들과 이름이 같았던 그의 아버지는 유력한 가문 출신의 사무 변호사 겸 세관 감사관이었지만, 아들이 태어나기 5개월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의 손에서 자란 스미스는 아버지가 유언장에 아들의 교육비를 따로 명시해놓은 덕분에 가정교사를 고용해 교육받을 수 있었다. 스미스는 열네 살 때 글래스고 대학에 입학했고, 3년 뒤에는 옥스퍼드 대학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학교를 옮겼다. 스미스는 옥스퍼드에서 6년간 공부한 뒤 커콜디로 귀향했고, 결국 글래스고 대학으로 돌아가 논리학을 가르치게 되었다(스미스는 평생 경제학 수업을 듣거나 본인이 직접 경제학을 가르친 적이 없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자신의 스승인 허치슨이 예전에 담당했던 윤리 철학 강좌 교수로 임명되었다.
풍부한 아이디어 / 철학에서 경제학으로: 『국부론』의 핵심 이론들을 살펴보기 전에 스미스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도덕감정론』의 내용부터 먼저 확인해 보면, 철학자이기도 한 스미스는 이 책에서 사람들이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는 방식을 조리 있게 설명했다. 이후 런던으로 돌아온 스미스는 10년간 총 5권으로 구성된 『국부론』을 써서 1776년에 출간했는데, 1권에서는 노동 생산성과 노동의 산물을 사회의 다양한 부분에 분배하는 방법을, 2권에서는 부의 축적을, 3권에서는 여러 국가가 서로 다른 속도로 성장하는 방식에 대해 알아본다. 또 4권에서는 농업과 상업 시스템을 비판하고, 5권에서는 정부가 조세를 통해 세입을 늘리는 방법과 그 세입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보이지 않는 손: 『국부론』은 『도덕감정론』에서 처음 다룬 사리 추구 이론을 정리해서 사회가 번영을 이루는 방식을 살펴보는데, 스미스는 당시 지배적이던 관념인 중상주의를 타파하고자 했다. 참고로 중상주의자들은 당시 한정된 것으로 여겼던 부를 축적하는 것만이 번영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런 체제 하에서는 국가가 다른 국가에 상품을 판매하면서 그와 동시에 관세를 높여 다른 나라가 자신들의 부를 앗아가지 못하도록 막아야만 한다.
하지만 스미스는 진정한 부란 나라 전체의 토지와 노동을 통해서 얻는 연간 생산물의 총합이고, 그런 생산물을 늘려야만 나라가 번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스미스는 ‘자연적 자유’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는 사람들이 남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발상이고, 이 과정을 통해 어떤 활동이 가장 가치 있는 활동인지 알아낼 수 있다. 예컨대 광산업이 다른 활동보다 평균적으로 더 높은 수익을 안겨준다면, 자연히 그 분야로 자본이 모이고 생산성이 낮은 분야에 투자했던 자본은 회수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자 또한 가장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얻고자 하는데, 스미스의 말처럼 이런 노동자는 “공공의 이익을 도모할 의도도 없고 자기가 공익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할 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자신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증진시키게 된다.” 그리고 스미스는 자유시장의 수요 공급 체계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은 일반 균형 이론이 되었고, 그 자세한 내용은 스미스의 시대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뒤에 정리되고 나중에 폴 새뮤얼슨과 다른 저명한 경제학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세세한 부분까지 체계화되었다.
스미스의 말은 사람들의 모든 행동이 곧 이기심의 발로라는 뜻이 아니다. 그저 한 개인으로서 자신에게 가장 큰 이익을 안겨주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사회에 더 큰 이익이 돌아간다는 의미다. 예로 사람들이 날마다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업자,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본인의 이익을 고려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 말에는 국가가 개입하지 말고 사람들이 각자의 본능과 욕구에 따라 행동하도록 해야 사회에 더 큰 이익이 돌아간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자유방임주의라는 경제 경영 사상과도 논리적으로 연결된다. 정부가 체제 전체를 관리하려고 할 때보다, 구매자와 상인, 은행가, 노동자가 내리는 수백만 가지 결정을 모두 조합하는 편이 자원을 좀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본인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고 말한다. 대신 스미스는 국가에는 세 가지의 의무가 있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바로 국방을 책임지고, 국가 안보와 치안을 체계화하며, 개인의 힘으로 건설하기 힘든 공공 기반 시설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기적인 유산: 애덤 스미스가 경제학 발전에 미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우리가 오늘날 미시경제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의 대부분이 그의 저작에서 파생되었으며, 특히 분업과 가장 효율적인 자원 배분법인 ‘보이지 않는 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참고로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경제학자(그리고 다른 수많은 이들)는 스미스의 글에서 영향을 받아 그의 연구 결과를 발판으로 삼거나, 관련된 논의를 더욱 확장하거나, 그에 대한 반대론을 펼치기도 했다.
결론 - 신용과 부채: 애덤 스미스는 분명 그의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 중 한 명이었지만, 문제는 현대인들도 그의 사상에 확실하게 공감을 느끼는가이다. 분업과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그가 정리한 핵심 개념과 경제적 부는 단순한 돈의 축적이 아닌 거래와 생산 활동을 통해 창출된다는 사상은 서구 경제 체제에 깊숙이 내재되어 있어서 그것이 원래 스미스에게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잊기 십상이다. 그리고 독점에 대한 스미스의 경멸은 오늘날의 사업 환경에도 비슷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스미스의 교리를 희석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인 경제체제는 영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매우 다르게 보일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사람들은 자유시장의 원칙을 수용하면서도 정부가 개입해서 보이지 않는 손을 억제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예로 국내 에너지 공급, 항공 및 철도 여행, 공해 산업과 주택 융자 같은 분야에서 시장이 작동하는 방식을 바꾸기 위해 세금과 규제를 활용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스미스의 시대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를 존경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상이 자유시장의 우파 옹호자들 사이에서 매우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정치적 스펙트럼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스미스에 반대한다. 2007~2010년의 글로벌 금융 위기와 그 이후의 세계적인 불경기 이후로 이런 적대감이 더욱 커졌는데, 이는 금융시장 붕괴에 일조한 스미스의 자유시장 정책을 비난하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난 세기 대부분과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국 정부들은 스미스가 주장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국가는 법체제를 뒷받침하고 국내 치안과 국방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지하는 주류 세력은 거의 없다. 참고로 영국 경제의 40퍼센트는 사회보장 혜택, 국민건강보험, 교육 시스템 등의 형태로 국가가 좌지우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국부론』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 성공, 실패, 성공 … 그리고 실패
경제학자 가운데 케인스만큼 사후에 그 작품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인물도 없다. 2007~2008년에 시작된 글로벌 금융 위기의 여파 속에서 정치가, 중앙은행장, 금융 전문가, 저널리스트들은 모두 케인스의 대표작인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 이론』(이하 『일반 이론』) 표지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1930년대의 대공황을 거치면서 얻은 그의 교훈을 다시 되새겼다. 케인스가 미친 주된 영향은 경제 침체기에 국가가 개입해야 할 필요성을 정당화한 이론이다. 벼락경기와 불경기가 교대로 찾아오는 시기에도 정부가 나설 수 있다는 생각은 자유시장은 항상 가격(그리고 특히 임금)을 조정해서 경기침체를 해결한다는 고전파 및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의 핵심적인 주의 주장에 대한 거부를 바탕으로 한다.
젊은 시절과 주변의 영향: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883년에 태어났다. 케인스는 사교육을 통해 이튼 대학에 진학해서 여러 가지 상을 받았고,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에 입학한 뒤에는 케임브리지 유니언 소사이어티의 회장을 역임했다. 그의 아버지도 경제학자였다. 케인스 1세는 1882년부터 1911년까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도덕 과학을 강의했고, 대학 학적 과장이라는 상급 지위로 승진해서 1925년에 73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그는 『정치경제학의 범위와 체계』라는 유명한 교재를 집필하면서 실증 경제학(경제가 작동하는 방식)과 규범 경제학(경제가 작동해야 하는 방식)을 구별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유효한 중요한 구분이다. 경제학 쪽에 이렇게 확실한 기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케인스 2세는 케임브리지에서 수학을 전공해 최우수 등급 학위를 받았다.
경제학계로 진출 - 명성과 실패: 이튼과 옥스브리지를 거치는 20세기 초 중상류층 출신의 고전적인 여정을 완성하기라도 하려는 듯, 케인스는 공무원이 되어 인도 사무국에서 일했지만(비록 근무지는 런던이었지만) 곧 싫증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학부생이었을 때 잠깐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 마셜에게서 경제학 강사직을 제안 받고,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가 대학에서 마셜의 후임자인 A. C. 피구가 개인적으로 자금을 대는 강사직을 맡았다.
케인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화이트홀(런던에서 관공서가 밀집해 있는 거리)로 돌아가 다시 재무부에 합류해서 외부 금융, 특히 영국이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 필요한 수입품 자금조달을 관리하는 일을 담당하는 새로운 부서의 책임자가 되었는데, 당시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한번은 수입 자금을 얻기 위해 필요한 스페인 페세타의 공급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상급자들은 이제 필요한 물자를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기뻐했지만, 케인스가 스페인의 화폐가치를 폭락시키기 위한 성공적인 시도로 그 돈을 팔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아무튼 외부 금융을 관리해본 이 경험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브레튼 우즈 국제통화제도를 설립하는 데 맛보기 구실을 했다. 그리고 4년 뒤, 그는 『화폐개혁론』을 출간해 대중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한편 케인스는 분석과 예측의 정확성 때문에 명성을 얻었지만, 그 자신의 금전 거래는 빛나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24년에 케인스는 케임브리지 대학 킹스 칼리지의 기부 기금을 관리하는 회계 담당자가 되었는데, 복잡한 경제학 모델과 화폐 및 경제 지표를 이용해 주식과 채권, 현금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정하는 ‘하향식’ 전략을 사용한 1920년대에 그의 투자 성과가 시장 평균에 못 미쳤다.
『일반 이론』- 고전적인 합의에 대한 도전: 뉴욕 증시 대폭락은 자금 관리인으로서의 케인스의 명성에 약간의 타격을 입혔지만, 그 후에 발생한 대공황은 그가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이라는 걸작을 탄생시킬 수 있는 기초를 제공했다. 이 책은 그가 이전에 쓴 글에서 제시한 수많은 아이디어를 한데 모은 것이지만 거기에서 훨씬 큰 발전을 이루었다. 제목이 이렇게 장황해진 이유는 케인스 본인이 고전파와 신고전파 경제학을 대체할 완전히 새로운 경제학 이론을 제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책에서 소개한 여러 가지 중요한 원칙 중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에 집중할 수 있다. ① 저축과 투자는 서로 다른 동인에 의해 다른 기간 동안 진행되므로 언제나 같다고 할 수는 없다. ② 생산량이 급격하게 감소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삭감된 임금을 회복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 ③ 총 생산량을 결정하는 열쇠는 경제계의 총 수요이므로, 정부는 세금과 수요를 늘리기 위한 지출을 이용해서 경기침체기에 고용을 늘릴 수 있다. ④ 미래에 대한 사람들의 불확실성과 기대가 경기순환의 주요 동인이다.
국내 경제학자에서 국제적인 정치가로: 케인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다시 정부기관으로 돌아가 공무원으로서 가장 중요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그는 킹슬리 우드 장관의 고문으로 일하다가 잉글랜드은행 이사로 선출되었고, 마침내 상원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그는 전시 영국 경제와 전후 국제체제를 위한 케인스 계획에 자신의 사상을 적용했다.
케인즈는 재무부로 돌아가기 직전에 「타임스」지에 기고한 두어 편의 기사를 바탕으로 『어떻게 전비를 조달할 것인가』라는 소책자를 발간했는데,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경험을 통해 재무장을 할 경우 경제를 완전 고용 이상의 수준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리고 경제 분야의 과도한 수요를 어느 정도 진정시키고, 최빈곤층의 생계를 위협하는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기 위한 강제 저축 계획을 세우라고 조언했다. 이 계획이 완벽하게 실행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케인스는 재무부에서의 자기 지위를 이용해 본인의 정책을 옹호했다. 이는 1944년 정부가 ‘전쟁 후에도 높고 안정적인 수준의 실업률을 유지’하게 하는 ‘영국 고용정책 백서’에서 극에 달했다.
그러나 케인스가 그다음에 내놓은 마지막 계획안의 시험대는 국제경제였다. 그는 전쟁의 잔해와 그것을 재건하려는 추진력 속에서, 양 대전 사이의 기간에 전 세계에 피해를 입힌 금본위제에 내재된 디플레이션 편향 없이 새로운 경제 질서가 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미국이 이 새로운 질서를 주도할 것임을 깨달았다. 한편 케인스는 여러 국가들이 디플레이션과 높은 실업률, 부채에 시달릴 필요가 없도록 국가들 간의 국제수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체제를 원했다.
그리고 케인스는 조정 부담을 채무국에서 채권국(전후 미국이 될 것이 거의 확실한)으로 이관하는 체제를 고안했다. 그의 계획은 국가들 사이에 흑자와 적자를 발생시키는 거래를 국제결제은행에서 해결하도록 하는 국제통화연합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준비금이 다 떨어져가는 국가들에게 국제 유동성을 보장하기 위한 당좌 대월 약정도 포함된다. 이것은 국제 시스템에 금융 원칙(예금자가 여유 자금을 은행에 맡기면 그것을 대출자에게 융자할 수 있는)을 적용하고, 그렇게 되면 채권국은 채무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참고로 전 세계 대다수 지역이 재건을 위해 상당량의 수입을 필요로 했지만, 즉각적으로 수출품을 생산해 빚을 갚을 돈을 버는 것이 불가능했던 전후 시기의 상황에서 불균형을 조정하기 위한 자금을 대는 것은 채권국의 책임이었다. 미국이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미국에서 케인스의 역할을 맡았던 해리 덱스터 화이트는 경제가 부실한 국가가 화폐가치를 절하해 환율전쟁이 시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들에게 재량 대출을 할 수 있는 좀 더 적당한 수준의 외환안정기금을 제안했다.
그 후 1994년 뉴햄프셔 주의 브레튼 우즈에서 2주 동안 열띤 협상을 벌인 뒤, 미국과 영국은 케인스의 청산동맹을 광범위하게 거부하고 화이트의 IMF 안을 채택하는 계획을 논의했다. 케인스는 경제 발전에 중점을 둔 국제부흥개발은행(지금은 세계은행 그룹의 일부로 편입된) 창설을 보장하고 몇 가지 사소한 양보를 얻어냈다. 참고로 캐나다 경제학자이자 전시에 공직에 있었던 윌리엄 매킨토시는 케인스가 죽고 1년 뒤에 쓴 감동적인 헌사에서 케인스는 “그가 늘 바랐던 것처럼 영국의 위대한 국력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운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영국을 위해 일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