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한민국, 재벌공화국
이동연 지음 | 북오션
아! 대한민국, 재벌공화국
이동연 지음
북오션 / 2012년 8월 / 280쪽 / 14,500원
까치밥을 남겨두던 조선인의 마음
조선의 매서운 겨울 아침은 간밤에 내린 서리를 뒤집어쓴 빨간 홍시가 하루하루 까치를 기다리면서 시작되었다. 눈 덮인 뒤뜰, 불 켜진 홍등인 양 매달린 홍시 몇 개. 그 홍시들은 배고프던 시절에도 날짐승을 위해 남겨둔 조선인의 마음이었다. 이처럼 선한 마음을 지닌 우리 민족은 국난을 만날 때마다 몸을 사리지 않고 희생했다. 구한말 국채보상운동, IMF 경제위기 당시의 금 모으기 운동이 대표적이다. 이 두 가지 국가적 위기에는 위기를 일으킨 측과 희생당한 측이 다르다는 공통점이 있다. 구한말 경제 주권을 외국에 빼앗긴 것은 왕실과 관료들의 사색당파 놀음이 주원인이었고, 김영삼 정부의 외환위기도 무능한 정권과 여기에 편승한 재벌의 방만 경영이 주원인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재벌을 회생시키기 위해 국민의 혈세로 만들어진 공적자금을 막대하게 투입했다. 사고는 교활한 지도층이 치고, 수습은 착한 백성이 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 재벌은 국민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 재벌의 성장 이면에는 항상 정경유착과 특혜가 있었다. 이런 반칙과 특권을 누려온 소수의 재벌이 있다면 재벌의 디딤돌 역할을 하며 배척과 모멸을 당해 온 다수의 서민들이 있다. 이들이 비빌 언덕이라고는 영세 사업장뿐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 영세업종마저 재벌이 가져가려 한다. 영세 서민들의 숨구멍이던 떡볶이, 순대, 라면 등의 업종까지 진출하면서 손을 대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생존만을 생각하는 이기적 유전자와 공동체의 존속을 꾀하는 이타적 유전자가 공존한다. 이기적 유전자만이 득세하는 사회는 공동체성을 상실한 곳이다. 야박하게 까치밥을 다 따버린 곳에는 어떤 새도 찾아오지 않는다. 서민들이 자영업을 할 영역까지 재벌들이 다 독식해버린 사회는 죽은 사회다. 그런 사회를 만들려는 재벌들, 그들은 사람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인간성을 상실한 욕망 기계로 변하고 만 것은 아닐까?
불륜을 통해 탄생한 재벌
대한민국 재벌은 정부가 만들어 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른 나라 대기업들은 세월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성장했으나 대한민국 재벌은 국가 정책을 바탕으로 처음부터 육성되었다. 재벌(chaebol)이라는 단어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록되어 있고 외국 주요 언론에서도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만큼 재벌은 대한민국의 정경유착이 만들어 낸 세계적으로 희귀한 기업 형태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 기업 중 가장 큰 회사는 경성방직이었다.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는 그의 가문에서 동아일보, 삼양사, 고려대를 설립했다. 그다음으로 화신백화점을 만든 김흥식이 일본인도 부러워하는 부를 이루었다. 이런 번창은 조선총독부 및 일본 금융과 맺은 내밀한 관계 덕에 가능했다. 재벌과 권력의 유착은 미군정에서도 계속되었다. 미군정은 일제가 남긴 토지와 산업시설을 몰수한 후 이를 기업인들에게 불하(국가의 재산을 개인에게 팔아넘기는 일)했다. 두산그룹의 창시자 박두병은 기린맥주(후의 OB맥주)를 불하받았고, 쌍용그룹의 김성곤은 동경방직을, SK그룹도 전신인 선경합섬을 불하받아 태어났다. 삼성물산, 한화그룹, 삼호방직, 대한양회는 은행의 주식을 불하받았다. 이때 로비를 통해 불하받은 사람이 많았고,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재벌들은 권력과 결탁하는 원초적인 속성이 생겼다. 불하를 남들보다 먼저 받기 위해 미군정청 장교들을 매일 요정으로 불러 유착관계를 만든 것이다.
일본인이 남겨두고 간 재산에 대한 불하는 대한민국 초대 정부수립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정치자금이 필요했던 이승만 정권은 1950년대 말 국유화하였던 일제의 은행을 민간에 불하하였고, 삼성의 이병철에게는 옛 일본기업인 제일모직과 제일제당을 헐값에 주었다. 전체 시중은행 주식 중 과반수를 인수한 이병철은 은행을 장악하면서 계열사를 늘렸고 삼성은 국내 최대 기업이 되었다. 당시 삼백(三白) 산업이라고 불리던 밀가루, 설탕, 면에 주로 투자하면서 1950년대 말까지 형성된 대기업들이 오늘날 재벌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친일로 태동된 대한민국 재벌은 미군정을 통해 성장하고 동족상잔인 6‧25를 거치며 이승만 정권에 유착하고 아부하는 불륜을 저지르며 몸집을 키워온 것이다.
1961년 5‧16으로 집권하게 된 박정희 정권은 수출을 통한 경제발전 전략을 시작했다. 1964년 수출기업을 위한 고환율 조치를 단행하여 달러당 130원이던 환율을 225원까지 끌어올렸다. 환율이 2배로 뛰자 국민들은 높은 물가에 고통을 받았지만 수출기업은 막대한 환차익을 챙겼다. 고환율 정책과 같은 손쉬운 유인책을 통해 재벌들을 길러 온 5‧16세력은 정치자금 마련 방식도 과거 정권과는 달리 더 체계적이었다. 과거 정권이 주로 기업들과 사바사바하면서 뇌물성 정치자금을 받아 챙겼다면, 이들은 막강한 힘으로 시스템을 만들어 가면서 컸다. 대표적인 예가 월남 파병이다. 1965~1973년까지 32만 5천 명이 월남전에 참가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린 대가로 국내에 유입된 돈이 50억 달러, 이때 대한민국 기업들도 군수품, 재건사업 등에 참여하며 재벌로 성장했다.
10월 유신을 통해 장기집권의 길을 연 박정희 정권은 권력의 정당성을 경제성장에서 찾으려 했고, 여기에 편승한 기업들이 결사적으로 계열사 확장을 시도했으며, 필요한 자금은 관치금융을 동원하거나 이것도 부족하면 외자를 끌어들였다. 1973년 박정희는 제철, 조선, 금속, 석유화학, 비철금속, 정유 등 6개 업종의 중화학공업을 집중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국민투자기금법을 만들어 국채 발행과 은행 예금으로 조성한 기금을 특정기업에 최장 10년 동안 저리로 빌려주며 중화학산업을 지원했다. 이때부터 정부의 지원정책에 힘입어 대규모 자본을 축적하는 기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정책에 부응해 조선, 자동차, 항공 등에 진출했던 현대, 삼성 등 6대 그룹의 매출액이 평균 10배 이상 급증했으며, 계열사도 116개에서 308개로 크게 늘었다.
군부 정권과 납품 재벌
10‧26 이후 정권을 잡은 전두환의 5공화국은 재벌들과 밀월관계를 맺고 정치자금을 헌납받았다. 이때 각 그룹들이 헌납한 정치자금 규모는 1조 원이 훨씬 넘을 것이라고 한다. 5공은 재벌과 결탁은 했지만 재벌개혁의 중요한 초석을 깔기도 했다. 그중 첫째는 1980년 12월 제정된 공정거래법이다. 이 법은 독과점 방지, 담합 행위 규제를 통해 경제력의 과도한 집중 및 남용을 방지하고 국민경제의 균형 있는 발전 도모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헌법이 개정되어 그 유명한 제119조 2항이 만들어졌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이런 조항이 역사적으로 가장 폭압적 정권이라는 전두환 정권에서 탄생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1987년 민주항쟁 이후 경제적 민주주의의 욕구가 분출하자 5공은 재벌개혁을 위해 대규모기업집단 제도와 출총제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하지만 정권과 재벌의 정경유착 고리가 형성되어 있는 한 아무리 좋은 법과 제도를 만들어도 공염불일 가능성이 크다. 삼성은 5공 정부에서 율곡사업, 차세대 전투기, 반도체 등의 사업 진출에 특혜를 받고, 정치자금 220억 원을 헌납했다. 현대 정주영, 동아 최원석, 한진 조중훈 등 여러 대기업에서 조성한 비자금만 수천억 원대다. 요즘 화폐가치로 십조 원이 훨씬 넘을 것이다. 이 자금은 경제민주화를 외치는 노동자를 억압하고, 정치민주화를 부르짖는 학생들을 탄압하며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데 쓰였다.
5공 때 정치자금을 상납하며 눈치를 보던 재벌들의 행태는 6공에도 이어졌다. 5공과 달리 6공은 ‘알아서 챙겨오라’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기업들 간에 미리 적정 수준의 금액을 조절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후문이다. 이런 후원을 빌미로 재벌들도 5공 시절 숨죽이고 지내던 저자세에서 ‘공정거래위원회 폐지’까지 요구할 정도로 6공의 정책에 압력을 가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비자금 관리를 맡은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5대 그룹은 300억 원 정도, 10대 그룹은 200억 원 정도, 기타 그룹은 100~150억 원 정도 바쳤다고 한다. 자신은 보통사람임을 강조한 노태우 대통령은 처음부터 끝까지 재벌과의 밀월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했다.
6공 시절 대통령의 비자금은 1.7조 원으로 추정된다. 가장 큰 정치자금 조달처는 율곡사업이었다. 율곡사업은 건국 이후 최대의 전투력 증강사업으로 매년 국방예산의 30~40%가 투입되었다. 전투기, 잠수함, 헬기 등 초고가의 무기와 장비를 구입하는 과정을 극비에 부치고 청와대가 모든 것을 직접 통제했다. 그러다 보니 엄청난 국가예산이 들어가면서도 외부의 감시와 견제는 전혀 없었다. 1995년 야당이 율곡사업 비리를 폭로하면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가 시작되었다. 이 수사는 재계로 번져 삼성 이건희 회장, 대우 김우중 회장을 포함한 재벌 총수 8명을 포함한 기업인 35명이 뇌물공여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하지만 항소심에서 대부분 집행유예와 무죄로 판결이 났다. 한국은 역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나라이다.
삼성 이건희, 김영삼을 꺾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이후 재벌과 권력의 경제적 유착을 끊기 위해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를 도입하는 등 과감한 정치를 했지만, 재벌들의 강한 저항에 막혀 결국 개혁에 성공하지 못했다. 언론을 장악한 재벌들이 정부를 조절했기 때문이다. 이런 확연한 증거가 1995년 4월 삼성 이건희 회장의 북경 발언이다. “우리나라 정치인은 4류, 행정 관료는 3류, 기업은 2류다.” 대한민국의 각종 행정규제와 권위의식을 비판하는 말이긴 하지만 당시 일개 재벌총수가 정부를 비판한다는 것은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런 발언이 나와도 청와대는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일 뿐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삼성의 이건희가 김영삼 대통령을 꺾어 누르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5공 때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은 청와대 모임에 불참하여 그룹이 해체되는 비운을 겪었다. 6공 시절 청와대에서 열린 폭탄주 모임에서 한 재벌회장이 “이렇게 기업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차라리 농사를 짓는 게 더 낫겠다.”고 하자 노태우 대통령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후에 그 회장은 대통령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이런 시절을 겪은 국민들은 이건희의 발언에서 통쾌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이미 주도권은 재벌이 쥐고 있었고, 정부도 그 힘에 밀려 재벌개혁에서 손을 놓아야만 했다.
삼성은 노태우 정권 때부터 자동차 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끈질기게 정부의 문을 두들겼고, 삼성의 집요한 로비에 정부는 ‘승용차가 아닌 상용차만 만든다’는 각서를 받고 허락해 주었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자 삼성은 승용차까지 만들기 위해 전방위 로비를 했다. 삼성은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배경인 부산 지역에 자동차 공장을 설립하겠다고 언론 플레이를 하며 지역 여론을 유리하게 만들어 청와대에 집중 로비를 했다. 결국 1994년 12월 삼성의 자동차 사업이 승인되었고, 삼성의 자동차에 대한 탐욕 때문에 대한민국은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입게 된다. 그 내용은 이렇다. 1997년 초 ‘국내 자동차 산업의 구조 개편 필요성’이라는 삼성의 보고서가 언론에 유출되었다. 보고서에는 장기적 발전 가능성이 없는 기아차의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 후 오비이락 격으로 삼성 계열 금융사로부터 기아에 갑작스런 자금 압박이 가해지고, 정부는 그해 7월 기아를 부도유예 기업으로 지정했다. 생산 능력 85만 대, ‘프라이드’ 신화를 창조한 기아차가 문을 닫으면서 IMF 사태의 결정적 기폭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편 삼성 승용차는 1998년 SM5 시리즈를 처음 출시했으나 IMF를 맞아 위축된 내수시장을 극복하지 못하고 위기에 빠졌다. 삼성차는 1999년 6월 최종 부도 처리되어 2000년에 이르러 르노에 인수되었다.
DJ, 신자유주의의 덫에 걸리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일성으로 “우리나라에 더 이상 재벌이란 말이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부채 비율 200% 축소, 계열사 간 신규 채무보증 금지, 부당 내부거래 금지 등 폭넓은 개혁정책을 선보였다. 그러나 그는 당선자 시절부터 IMF체제하에 들어간 국가경제를 IMF의 뜻에 맞게 관리해야 할 운명이었다. 당시 IMF가 내건 지원조건은 기업 구조조정, 금융 구조조정, 재정긴축과 고금리 정책이었다. IMF의 핵심교리는 작은 정부,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 규제 완화이다. 그중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은 정리해고제, 근로자 파견제로 나타난다. 이 내용들 모두 자본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춘 신자유주의의 본질이다.
신자유주의의 표어는 ‘작은 정부, 큰 시장’이다.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지 않을수록 국가의 부가 확대되고 자연히 사회적 복지도 늘어난다고 주장한다. 자유무역을 통해 신자유주의를 글로벌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1995년 형성된 WTO이다. 이에 따라 상품은 물론이고 생산요소인 노동과 자본까지 어느 국경이든 자유롭게 넘나들게 되었다.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것은 사회의 모든 영역을 시장논리화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화폐 아래 국가, 종교, 교육, 문화, 예술, 개인, 양심, 가치관까지 모든 것을 집어넣고자 한다. 돈만 많이 벌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런 천민자본주의 마인드가 대한민국 사회를 본격 지배하게 된 시기가 IMF 경제위기 이후부터이다.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 직후 재벌 총수를 만나 기업 구조조정 원칙에 합의했다. 주요 내용은 ‘경영의 투명성 제고, 상호 지급보증 해소, 재무구조 개선, 업종 전문화, 경영진 책임강화’의 5개 항이었다. 이 조치는 재벌의 독점 소유형태를 청산하려는 것이었는데 실제 효과는 크지 않았다. 재벌들끼리 부실 계열사를 빅딜하면서 업종 단순화, 경영 합리화 선에 머물고 말았고, 가장 중요한 경제력 집중은 해소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경제를 파탄 낸 주범인 재벌들이 IMF 시기에 당한 고통은 폭식으로 찐 군살을 빼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서민들은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대기업은 구조조정이라는 미명하에 수많은 사람들을 실업자로 만들었고, 연관된 중소기업들이 줄도산하면서 노동자들도 백수가 되어야 했다. 여러 공기업도 구조조정을 당하면서 매각되거나 해외자본에 잠식당했고, 여기 속했던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와야만 했다. 사고 친 당사자들은 멀쩡한데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사람들은 파산, 이혼, 노숙, 자살 등 엄청난 아픔을 겪어야 했다.
IMF를 극복하면서 받은 상처는 컸고 현실은 혹독했다. 가장 진보적이라는 김대중 정권도 지구촌을 휩쓴 신자유주의를 이겨내지는 못했다. 이겨낼 의지나 전략이 부족해 재벌들에게 끌려 다녔고, 재벌체제는 더욱 공고하게 굳어졌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도 크게 작용했다. 국내 1위 기업이라는 삼성도 흔들흔들하면서 해외자본에 넘어갈 우려가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IMF 이후 재벌개혁 관련 법안들은 오히려 완화되기까지 했다. 김대중 정부는 정치적으로는 상당한 진보를 이루었으나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에 완전히 포섭되고 말았다.
서민을 위한 정부는 없다
16대 대통령 노무현도 역대 대통령들처럼 후보 때는 재벌개혁을 외쳤다. 당시 경실련이 주최한 대선 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노무현 후보는 “대기업의 불공정 경쟁, 부당 세습, 왜곡된 지배구조와 불투명한 경영을 바로잡겠다.”고 했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된 후 사석에서 “개혁의 역점은 정치에 두고 경제는 안정 위주로 가겠다.”고 밝혔는데, 그 순간 한 참석자는 ‘경제개혁은 물 건너갔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 초대 경제부총리는 처음에는 김종인이 유력했다. 김종인은 한국에서 반 재벌인사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노태우 정권에서 경제수석을 지내면서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을 성사시켜 전국의 투기 열풍을 잡았다. 이런 그를 재벌과 재벌의 광고로 먹고사는 언론, 그리고 정치권에서 경제부총리가 되도록 놓아둘 리가 만무했다. 희한하게도 노무현 당선자의 일부 측근까지 김종인 불가론을 주장했다. 결국 막판에 재경부 출신의 김진표가 경제부총리로 임명되었다. 재계는 재계 친화적 인물인 김진표의 등장에 크게 안도했고, 김진표는 취임 일성으로 “경기 활성화를 위해 기업의 세금 부담을 줄이겠다.”고 했다. 이후 김진표 경제팀의 대기업 친화적 정책 성향을 투자 여력이 있는 사람들이 감지했고, 이는 사상 최악의 아파트값 폭등사태로 이어졌다. 김종인이 참여정부 초대 경제부총리가 되었더라면 적어도 노무현 정권의 최대 실책인 부동산 가격 폭등은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