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위한 경제학은 없다
스튜어트 랜슬리 지음 | 비즈니스북스
우리를 위한 경제학은 없다
스튜어트 랜슬리 지음
비즈니스북스 / 2012년 4월 / 320쪽 / 14,000원
경제적 대격변
소득 분배 분야의 두 경제 전문가 파리고등사범학교의 토머스 피케티 교수와 하버드대학의 이매뉴얼 사에즈는 소득 분배 조사 기간을 늘리고(1913년부터 2006년까지) 개인 소득 신고 자료를 이용해 소득 분포 상태를 조사했다. 이 조사에서 장기간의 데이터가 보여준 것은 미국의 소득 집중화 과정이 93년의 조사 기간 동안 한 차례의 주기가 완료되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상위 1퍼센트의 소득은 1925년에서 1929년 사이에 전체 소득의 5분의 1에서 4분의 1을 차지했는데, 이 기간은 바로 1929년 대붕괴가 일어나기 전의 5년이다. 그리고 대붕괴 이후 이 그룹의 소득 몫은 1930년대 경기침체기 내내 감소했고, 1950년대까지 계속 감소하여 1976년 마침내 8.9퍼센트 지점에 도달했다. 그리고 이런 장기 감소 추세 뒤 1970년대 중반에 반전이 일어났고, 2007년에 이르자 상위층의 소득이 세 배 가까이 증가하여 23.5퍼센트가 되었다. 1920년대 말의 수준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보다 소수인 상위 0.5퍼센트 계층도 비슷한 경로를 그렸다.
피케티와 사에즈가 발견한 중요한 사실은 지난 세기 미국에서 재산이 상위 1퍼센트인 가정이 국민소득의 5분의 1 이상을 차지한 적이 두 번의 시기밖에 없었다는 것인데, 첫 번째는 1920년대 후반기이고, 두 번째는 20세기 말엽으로, 역시 경제 혼란을 앞둔 때였다. 게다가 이 두 시기의 공통점은 소득 집중도뿐 아니라 채무 수준의 갑작스런 상승까지 일어났다는 것이다. 부의 집중과 관련하여 미국의 최근 추세에 관한 공식 정보는 제한되어 있으나, 경제분석가들의 조사 결과, 상위 1퍼센트의 소유 재산이 비슷한 경로를 좇아 1976년 19.9퍼센트에서 2007년 34.6퍼센트로 상승했음이 밝혀졌다. 이는 대공황 이전 시기에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재산 집중도에 근접하는 수준인데, 상위 1퍼센트 계층이 1922년에 전체 부의 36.7퍼센트를, 1929년에는 44.2퍼센트를 차지했었다.
초갑부들이 보유한 개인 자산의 극적인 증가를 두고, 부의 역사를 연구하는 미국 전문가 케빈 필립스는 '경제 대격변'이라는 표현을 썼다. 현재 영국과 미국의 갑부들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몫은 80년 전의 부자들이 향유했던 수준에 근접했다. 당시보다 민주주의가 훨씬 성숙해지고 경제가 훨씬 많은 규제를 받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불평등이 증가하면서 최상위층의 소득이 더 크게 증대되고, 빈부 격차 역시 모든 계층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진 불평등의 경계선은 상위층과 나머지 계층 사이에 그어졌다. 두 나라에서 심화된 재산 집중 현상은 최상위층의 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반면, 중하위층 소득 근로자들의 보수는 계속해서 하락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불평등의 증대가 영국과 미국에서 특히 두드러지긴 했지만, 빈부 격차의 확대는 전 지구적 현상이었다. 세계 최대 부자 1,000명의 재산을 합하면, 가장 가난한 25억 명의 재산을 합한 수치의 두 배에 이른다. 물론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의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일부 부국과 빈국의 평균 소득 격차는 줄어들었다. 그러나 가장 부유한 국가(미국, 일본, EU의 일부 회원 국가)와 가장 가난한 국가(에티오피아, 아이티, 네팔 등)의 격차는 줄곧 확대되어 왔다. 헬싱키에 본사를 둔 세계개발경제연구소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성인 2퍼센트가 전 세계 가계 재산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불평등화 과정에 관한 증거는 이제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불평등의 이점에 관한 논란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자유 시장을 편드는 자들은 불평등의 증대를 여전히 지지하는데, 그들이 흔히 하는 주장은 불평등한 보상이 재능과 능력을 좀 더 정확하게 평가하는 효율적인 시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흔히 부자들에게는 그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언어가 따로 있었다. 그들의 활동이 '일자리를 만들어 내거나 보호하고 가치를 창조'하며, 그들의 보상은 '그들이 감수한 리스크에 따른 결과'라는 식이었다. 이런 시각은 지금까지 지속되는 경제학 정설의 바탕에 그대로 남아있다. 하지만 심화된 불평등의 경제적 영향에 의구심을 던지는 오피니언 리더들도 있었다. 2011년 1월, 당시 국제통화기금 총재였던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은 2008년에서 2009년의 위기를 설명하면서, 불평등 심화로 인한 폐해를 하나의 이유로 꼽았다. 비슷한 견해가 2011년 세계경제포럼에서도 나왔다.
1970년대 말까지 반세기 동안 선진국의 임금 노동자들은 기업의 이익이 증대된 만큼 동일한 몫을 손에 쥐었고, 이로써 전후의 장기 성장을 뒷받침하는 수요가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초부터 노동자들의 협상력이 감소하자,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생산 능력의 증가를 더 이상 따라잡지 못하고 말았다. 이런 과정은 자유 시장 실험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영국과 미국 같은 나라에서 가장 심각하게 진행되었다. 사실, 정도는 덜하다고 해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비슷한 추세가 일어났다. 앞으로 이 책에서 보여 줄 것은 임금 하락과 이윤 상승, 상위층 재산의 폭발적 증가가 경제 안정에 본질적으로 요구되는 균형을 크게 뒤흔들었다는 점이다.
임금 인상이 지체되자 구매력이 초과 생산물을 감당하지 못하는 결과가 발생했다. 소비자 수요가 계속 감소하면서 경제의 수레바퀴는 궁극적으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히 임금 하락이 가장 심했던 영미에서는 개인 대출을 대폭 허용해 주었고, 이로써 서민들은 생활비뿐 아니라 주택도 마련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경제 번영의 확대는 유럽이나 미국이나 전례가 없는 개인 부채의 폭발적인 증가에 의해 보장되었다. 이런 과정은 금융 부문의 규모 증가와 이윤 흐름의 가속화를 뒷받침했다.
일반 소비자의 구매력이 감소하는 동안 또 다른 유해 요소가 출현했다. 크게 증가한 이윤에서 나온 과잉 자금이었다. 이런 과잉 자금은 또 다른 형태의 경제 불균형을 초래했다. 고삐 풀린 글로벌 자금이 신속한 수익을 찾아 세계를 들쑤시고 다녔으며, 대부분은 결국 런던과 뉴욕으로 흘러 들어갔다. 정처 없이 세계를 떠도는 핫머니 가운데 부와 고용을 창출하는 지속적인 투자처로 들어가는 돈은 거의 없었다. 돈은 헤지펀드, 사모펀드, 기업 인수, 상품, 상업용 부동산으로 몰려들었다. 이제 거래와 기업 구조 조정은 새로운 부를 창조하는 과정이 아니라, 기존의 부를 이전하는 복잡한 메커니즘이 되었다. 그런데 1930년대 대공황이 발생하기 전에도 비슷한 파괴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었다.
1920년대 후반, 특히 미국에서는 가처분 소득이 감소하고 이윤이 증가하고 상류층 재산이 크게 불어났다. 곧이어 2000년대처럼 엄청난 투기 자금이 부동산과 주식 시장으로 몰려들고, 부채 수준은 크게 증가했다. 소수에게만 이익이 되는 지속 불가능한 경제 모델은 이렇게 세계 경제 붕괴의 조건만 조성했을 뿐이다. 그 뒤 세계는 1929년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었고, 이를 토대로 1930년 중반부터 반세기 가까이 부의 과도한 집중을 꾸준히 억제했다. 하지만 지금의 세계는 1929년의 붕괴를 조성한 조건이 다시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위기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현재 부채 폭증과 엄청난 자산 거품을 발생시킨 과도한 소득 격차는 세계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장의 과실은 계속하여 매우 불공평하게 분배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에게는 변화가 필요하다.
사라지는 중산층
지난 30년간 영국의 노동 시장은 계속 양극화되었다. 높은 수준의 교육과 경험을 요구하는 안정된 고소득 일자리와, 보수가 낮고 불안정하며 틀에 박힌 일을 하기 때문에 제한된 기술과 훈련만 요구하는 일자리로 극명하게 나뉜 것이다. '중간 정도의 임금'을 주고 중간 정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일자리는 크게 감소했다. 참고로 선진국의 경우, 전쟁이 끝나고 나서 몇십 년간 일자리, 임금, 기회 면에서 중간 정도의 기술에 중간 정도의 보수를 받는 중간 정도 지위의 일자리가 지금보다 훨씬 많았었다. 이들은 보수가 높은 전문직과 반숙련 혹은 비숙련 블루컬러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역할을 했다. 상당히 큰 집단을 이루는 이들을 두고 필립 굴드(토니 블레어 총리 밑에서 노동당의 여론 조사를 책임졌던 인물)는 "특권 계층도 아니고 박탈 계층도 아니다."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이 집단은 '고용 양극화'에 따라 꾸준히 줄어들었고, 국가는 '특권 계층'과 '박탈 계층'으로 나뉘었다.
중간층이 사라지면서 생긴 결과는 정상적인 계층이 아닌 소득 순위에 따라 분류할 경우 영국의 사회 형태가 매우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계층의 사다리에서 위쪽으로 올라갔다고 해도 정작 상대적인 임금과 기회 면에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하위 소득이 상대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절대적으로 하락하면서 저임금 정도도 훨씬 심화되고 빈곤 근로층도 훨씬 많아졌다. 실제로 지게차 운전, 포장 및 병입, 제빵 등의 업종은 1978년 이후 실질 소득이 계속 하락해 왔다.
시간당 임금이 중앙값의 3분의 2 아래인 종업원의 비율은 1977년 12퍼센트에서 2009년 22퍼센트로 증가하여 두 배가 되었다. 노동 가정의 가난한 아이들 비율 역시 큰 폭으로 증가하여 2009년 61퍼센트가 되었다. 이런 추세로 인해 최상위층과 나머지 계층의 격차에 또 한 가지 왜곡이 보태졌다. 부자들이 저 위로 빠르게 올라가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소득 분포의 아래쪽 절반에 무리지어 남아 버린 것이다. 1970년대 영국 사회는 부유층과 빈곤층이 적고 중산층이 많은 '달걀형' 혹은 '다이아몬드형' 구조였다. 하지만 지금은 맨 위는 약간 볼록하고 가운데는 가늘며 바닥은 매우 뚱뚱한 왜곡된 모래시계 형태다. 원래 영국보다 중산층 규모가 훨씬 컸던 미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탈산업화와 임금 감소가 '중산층 몰락'을 낳은 것이다.
한편 실업 증가, 중간층 소멸, 소득 감소, 저임금 확산 등으로 인해 영국은 직업적ㆍ사회적 하향 이동이 증가했다. 전후 시대만 해도 노동자들은 적정한 보수를 받았고 계층 이동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중하위 소득 집단에서 소득 증가가 둔화되고 일자리가 줄어들자, 사회적 상향 이동은 모습을 감추었다. 지난 30년간 세 번의 경기침체기마다 가속화된 추세다. 사회적 하향 이동에 가장 취약한 경우는 50세 이상 노동자로, 숙련공뿐만 아니라 전문직 종사자도 포함된다. 사회적 하향 이동은 세대 간에도 적용된다. 2010년 2월, 노동당 당수 에드 밀리밴드는 '영국의 약속'이 위태로워지는 정책을 추구한다며 연립 정부를 비난했다. 그가 말하는 영국의 약속은 아이들이 부모 세대보다 더 잘살고 더 많은 기회를 가질 거라는 기대를 낳았다. 전후 시대에는 경제ㆍ사회 정책이 각 세대에 더 나은 생활수준과 사회적 상향 이동의 가능성을 제공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다. 블루컬러 노동자의 자식은 화이트컬러가 되어야 하고, 손자는 전문직 종사자가 되어야 했다. 모든 사람의 소득이 증가해야 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약속'은 1980년대 초반부터 지켜지지 않았다.
보수당 정부나 노동당 정부나 탈산업화 과정에 대한 반응은, 금융업 중심의 경제를 통해 좀 더 성공적인 후기 산업 경제로 진화하리라는 것이었다. 금융과 서비스가 제조업 기반의 불가피한 쇠퇴를 보상하고도 남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역사가 해럴드 퍼킨스가 주장했듯 비극적인 환상임이 밝혀졌다. 1979년 이후 피고용자는 370만 명 증가했으나(대부분 서비스업에서) 노동력의 규모 역시 증가하여 지난 30년간 고용률이 하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새로 생긴 일자리 가운데 절반 정도만 정규직이었다. 참고로 100만 명이 넘는 시간제 근로자는 정규직을 선호했다.
아무튼 금융 서비스는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으면서도 지난 30년간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했다. 국가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빠르게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금융 부문은 1979년에서 2009년까지 일자리가 겨우 14만 개(약 16퍼센트) 증가하는 데 그쳤다. 그나마 1980년대 런던에 새로운 은행들이 설립되면서 생겨난 것일 뿐, 피고용자는 계속 줄어들었다. 2000년에서 2007년의 호황기에도 1만 7,000명이 감소했다. 이윤을 늘리기 위해 직원을 줄인 것이다. 커진 이윤은 사회에 널리 이익이 돌아가도록 일자리를 만들기보다, 기존의 중역, 특히 고위 중역의 보수를 지불하는 데 쓰였다. 반면, 각 초과 생산 단위로 따져볼 때 제조업은 금융업보다 1.5배나 많은 일자리를 창출했다.
아마 국가 개입이 없었다면 낮은 보수와 중산층 감소 문제는 훨씬 더 심각했을 것이다. 아무튼 국가는 많은 지역에서 취약한 민간 부문을 보조해야 했을 뿐 아니라, 시장주도적인 경제에서 심화되는 임금 하락의 영향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힘써야 했다. 저임금 고용의 확대가 생활수준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하여 정부는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첫째는 상대적 소득 감소와 빈곤 증가를 내버려 두는 것이다. 1970년대 말부터 보수당 정부가 취한 정책이었다. 그 결과 상대적인 빈곤은 1979년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두 배로 증가했다. 두 번째 선택은 국가가 개입하여 시장의 힘이 소득 수준에 미치는 영향을 완화시키는 것이었다. 노동당은 이 정책을 채택했다.
1997년부터 사회 목표를 빈곤 퇴치에 둔 결과, 다음 12년 동안 빈곤도가 약간 떨어졌다. 하지만 보수 불평등이 노동당 집권 뒤에도 계속 증가했기 때문에 정부는 단순히 현상 유지를 위한 것이라고 해도 훨씬 많은 일을 해야 했다. 노동당은 빈곤도를 안정화하기 위해 빈곤 퇴치 프로그램에 공적 자금을 쏟아 부었다. 특히 관대한 세금공제제도를 도입해 저임금 노동자의 소득을 개선했다. 그러다 보니 국가가 경제를 관리하는 수준이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영국에만 국한된 상황은 아니었다. 경기 침체에 이어 전 세계에 혼란을 야기한 엄청난 재정 적자로 인해 시장이 노동자들에게 온당한 생활수준을 보장해 주지 못함으로써 정부가 그 책무를 떠안았기 때문이다. 실직과 저임금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지난 30년의 가장 큰 승자는 금융이었다. 금융은 미국, 영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부터 확대되는 소득 격차의 배후에서 가장 중요한 힘으로 작용했다.
소비 능력 없는 소비 사회
1914년 1월 5일 헨리 포드는 극적인 발표를 했다. "포드 자동차회사는 1월 12일 노동자 보수 문제와 관련하여 산업계에서 유례가 없는 가장 큰 혁명을 일으킬 것입니다. 스물두 살이 넘는 직원은 하루 최소 5달러의 임금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회의 노예 감독자 소수를 백만장자로 만드는 계획을 따르기보다, 2만 명의 직원에게 만족과 번영을 주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다음 날 아침 미국 언론의 전면을 장식했다. 뉴욕의 《이브닝 포스트》는 '관대하고 훌륭한 행동'이라고 표현했다. 반면 다른 자동차 제조업체는 사정이 달랐다. 포드의 경쟁사들은 그의 회사가 설정한 임금(업계 표준의 두 배에 가까운)에 분개했고, 그들로서는 경쟁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자기 계급의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이런 조치를 취하게 된 헨리 포드에게는 두 가지 동기가 있었다. 우선 그는 노동자들이 반복적인 일관 공정 작업을 싫어하며 생산성이 낮다는 것을 눈치챘다. 노동자들에게는 동기 부여가 필요했다. 또 한 가지는 직원들에게 더 많은 가처분 소득을 제공함으로써 그의 제품을 위한 소비자 기반을 창출하자는 것이었다. 훗날 그는 "5달러의 일당으로 우리의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날 우리가 처음으로 수많은 고객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헨리 포드는 저소득ㆍ고이윤 위에 세워진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중요한 모순을 깨달았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소득 수준의 문제는 소비자 수요에 크게 의존한 민간 기업 경제를 따라다녔다. 특히 산업 혁명기에 세계 최대의 산업 국가, 즉 영국과 미국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였다. 이 문제는 1920년대에 그리고 1980년대 이후에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두 기간 모두 수요가 증가하는 생산을 따라잡을 만큼 소득 증가 수준이 충분치 못했다. 한편 1920년대, 1990년대, 2000년대에는 임금 상승 둔화에 대한 정치적 해결책이 신용 대출과 개인 부채 확대였다. 이런 부채 없이는 민간 경제가 의존하는 대량 소비가 불가능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선진국에서 임금이 생산성과 보조를 맞추었기 때문에 부채로 경제를 떠받칠 필요가 없었다. 이 시기에는 간헐적으로 수요 부족이 발생했으나, 그때마다 케인스가 고안한 수요 관리 과정을 통해 공적 자금이 투입되었다. 선진국에서 선택한 해결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