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경제학
한성안 지음 | 팩컴북스
블로그 경제학
한성안 지음
팩컴북스 / 2012년 3월 / 336쪽 / 15,000원
경제를 다르게 바라보는 방법
부동산 광풍 시대, 집은 투자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공간이다
나는 우리 집을 무척 좋아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 집을 방문해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부러워한다. 집 넓이는 약 166제곱미터이며, 거실 바닥은 대리석으로 깔려 있다. 거실은 유럽식으로 매우 넓다. 거실엔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어 겨울이면 장작으로 불을 지피며 낭만적으로 산다. 우리 집 뒤뜰은 바로 금정산으로 연결되어 있어 마음만 먹으면 등산화를 신고 산으로 갈 수 있다. 나는 이 집을 통해 낭만과 함께 건강을 얻었다. 집이 지하철로부터 5분 거리에 있으니 불편하지도 않다. 걸어서 오면 약간 가파르지만 가벼운 운동에 불과하다. 이 집을 살 때 알게 된 일이지만, 원래 주인이 우리 지역의 유명한 놀이공원 사장이어서 집을 고급으로 꾸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매일 '평등'이나 '못 가진 자'에 대해 얘기하다가 우리 집 이야기를 해보니 영 다른 느낌이다.
나는 부자다. 맞다! 매우 부자다. 그리고 깨끗하고 쾌적하게 살고 있다. 그런데, 이 집의 공시가격은 7천만 원이다. 빌라이기 때문에 이렇게 싸다. 그나마 이 가격도 살 때보다 값이 떨어진 것이다. 자산 가치로 보면 나는 분명 부자가 아니어서 불행하리라. 하지만 스스로 매우 부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 집에서 아주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10년 전 이 집을 살 때는 모든 사람들이 말렸다. 빌라는 가격이 자꾸 떨어지기 때문에 투자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집을 투자 대상이 아닌 삶의 공간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굳이 경제적으로 계산하지 않더라도, 그동안 집값 상승분을 훨씬 능가하는 경제적 혜택을 누린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경제학'과 '경제'는 효율과 경쟁, 이윤으로 회칠되어 있지 않다. 경제활동은 '얼마나 소유할 것인가'에 관한 욕망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인문학적 질문과 항상 연결되어 있다. 인문학적 성찰을 망각해버린 경제는 '경제'가 아니라 '시장'일 뿐이다. 신고전학파 주류 경제학은 경제(economy)와 시장(market)을 혼동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경제학은 시장이 아니라 경제를 연구한다. 그래야 인간은 행복해진다.
재벌의 탐욕, 본능과 제도의 경제학
보수적인 신고전학파 주류 경제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이기적이라고 가정하고 이론적 모형을 구축한다. 이들이 보는 모든 인간은 악하고 게으른 존재다. 인간의 선한 행동 뒤에는 자기만족과 이기심이 은폐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 진보적인 경제학자들 중 일부는 인간의 이타적 본성에 무게를 두고 이론을 전개해나간다. 맹자의 '성선설'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인간이 원래 선한 품성을 갖고 태어난다고 믿는다. 그러다 크게 당하고 나면, 인간을 쉽게 환멸하게 된다. 이렇게 단순한 본성론이 많은 경제학자들에겐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진보적 경제학자들 중에 많은 이들은 인간의 본성은 본유적이지 않고 '기술조건과 제도적 맥락'에 따라 변한다고 본다. 예컨대, 물질적 조건이 갖추어지면 인간은 선하게 되거나, 반대로 물질적 조건이 풍요로워지면 도리어 악하게 된다는 식이다.
주로 마르크스와 케인즈 경제학자들이 수용하고 있는 이러한 '선호체계의 가변성' 견해는 고자의 '성무선악설'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 모든 견해는 과학적 입증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나태한 주장이다.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이 인간을 단순히 악하거나 선한 존재로 묘사한 후 경제정책을 수립한다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다. 또, 인간의 본성이 물질적 조건에 따라서만 변한다고 보면, 풍요로운 물질을 갖고 있는 부자들의 악행은 물론 가난한 자들의 배신과 '몰인간성'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이런 설명방식이 매우 불만스럽다. 베블런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서 영감을 받아 인간이 진화과정에서 이기적 본능은 물론 이타적 본능도 함께 획득했다고 보았다. 곧 단일본능론을 폐기하고 '다중본능론'을 주장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행동은 이기적인 동시에 이타적일 수도 있다.
그의 다중본능론은 이후 인지과학자들과 뇌과학자들의 과학적 연구로 속속 입증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상대적으로 이타적인 행동을 보이지만, 다른 이는 훨씬 이기적인 행동을 보이는 수가 많다. 예컨대, 기업가나 특정 정치집단의 소유욕과 권력욕은 하늘을 찌른다. 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그들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 페스탈로치나 슈바이처 박사,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는 대단히 이타적이다. 왜 그럴까? 베블런의 관점을 따르는 진화 경제학자들에 의하면 가족과 그 나라의 문화, 곧 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처럼 입시경쟁이 치열하고 결과만 중시하는 제도 아래서 승리하기 위해 인간은 비도덕적으로 행동할 뿐 아니라 이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하지 않고 과정을 중시하며 사회통합과 정의를 존중하는 유럽사회 같은 곳에서는 인간이 좀 더 상대를 배려하며 이타적으로 될 수 있다. 본능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제도도 그만큼 중요하다. 제도는 여러 가지 본성들 중 바람직한 것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탐욕스런 부자들 사이에도 도덕성의 차이가 발견된다.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의 광란 아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궁핍에 시달리고 있지만, 자신들이 세금을 더 내겠다는 부자들과 보수세력은 없다. 이들에게 불법과 탈법 상속은 이미 하나의 '미덕'에 속한다. 날치기 예산을 통과시켜서라도 서민 예산을 깎아버리고 자신들의 배를 끝없이 불린다. 참으로 희한한 인종들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백만장자 45명이 세금을 더 걷어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합당한 몫을 담당하고 싶다'며 자기들로부터 세금을 왜 적게 걷느냐고 정부에 항의까지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겠지만 그 나라에서는 그게 정상인가 보다. 교육과 제도가 이렇게 사람을 다르게 만드는 것인가? 미국은 신자유주의의 본국으로 악명 높다. 그런데도 부자들 사이에 이러한 이타적 본능이 발현된다. 이런 세계적인 움직임마저도 외면하거나 마지못해 생색을 내는 이 땅의 부자들은 어떤 '종'에 속하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왜 이토록 탐욕적인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
장자연의 눈물, 가치판단 논쟁
경제학은 사회과학의 '여왕'이라고 불린다. 그렇게 불리는 이유 중 하나는 경제학이 역사학, 정치학, 사회학, 문화인류학은 물론 물리학, 생물학, 수학과 연관될 뿐 아니라 철학과 윤리학적 기반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방대한 영역과 연관되어 있으니 경제학 안에서는 학술적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중 하나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일어난 '방법 논쟁'과 '가치판단 논쟁'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인간의 판단은 크게 두 가지, '사실에 관한 판단'과 '가치에 관한 판단'으로 나뉜다. 예컨대, '이 책은 사회과학 서적이다', '그는 공금을 횡령했다'는 말은 사실판단인 반면 '이 책의 내용은 우수하다', '그의 공금 횡령행위는 나쁘다'는 말은 가치판단에 해당한다. 이 논쟁에서 구스타프 폰 슈몰러와 같은 신역사학파 경제학자들은 가치판단에 관한 과학적 기준(객관적 기준)이 존재하므로 가치판단은 사회과학의 연구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경제학 연구는 윤리와 도덕 등 가치에 관한 연구와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곧, 경제학은 가치판단을 기준으로 연구되어야 할 뿐 아니라 가치판단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치판단은 도덕적, 윤리적 기준을 필요로 한다. 이 기준에 따라 사실에 대해 바람직한 것과 기피해야 할 것이 가려진다. 바람직한 것은 장려되고, 기피해야 할 것은 억제되어야 한다. 가치판단은 대개 행동과 정책으로 이어진다. 즉 이들에게 '사회정책'은 경제학의 최종 목적이 된다. 반면, 카를 멩거 등 신고전학파 주류 경제학자와 막스 베버는 가치를 판단할 객관적 기준(과학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가치판단에 관한 연구는 사회과학의 주제로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고 경제학에서 가치판단을 배제할 것을 주장하였다. 곧, 경제학은 '가치중립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윤리와 도덕을 잊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치판단이 내려지지 않으니 이들에게는 행동과 정책이 필요 없게 된다.
방법 논쟁과 가치판단 논쟁 후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경제대국인 미국은 이 '가치 없는' 경제학파의 지적 공급처가 되었다. 동시에 모든 학문에 대한 '여왕'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강화되자 가치판단을 외면하고 사실판단에만 주력하는 신고전학파 주류 경제학의 방법론이 여타 사회과학은 물론 예술과 문학까지도 지배하게 되었다. 실로 신고전학파 주류 경제학의 제국이 건설된 것이다. 나는 경제학이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이야말로 신뢰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베버도 지적했듯이 가치는 역사적으로 변하며, 공간적으로 다양하다. 그래서 과학적 가치, 곧 가치의 절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는 실로 상대적이다. 따라서 가치는 사실 앞에서 겸허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가치의 과잉은 오히려 인류를 불행에 빠뜨리기도 한다. 중세시대의 기독교가 보여주듯이 종교적 가치의 과잉 상태는 인간을 몽매하게 만들 뿐 아니라 타인을 멸시하거나 증오하게 만든다. 더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이유가 있겠지만, 1919년의 미국의 '금주법' 같은 경우도 가치의 과잉이 낳은 결과다. 이처럼 가치과잉은 경우에 따라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가치는 과학적 방법과 사실에 의해 끝없이 통제되어야 한다.
인간은 도덕군자로만 살 수 없다. 스님, 신부, 수녀, 목사로만 이루어진 세상을 상상해보라. 절대적 고요와 극도의 순결함은 인간을 절망에 빠뜨릴 것이다. 그래서 엄격한 가치판단은 바람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고 보면 사실이라는 것도 그리 객관적이지 못하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도 실제로 나의 가치관과 이 시대의 가치, 나아가 지역(국가)의 가치에 의해 선별된 것에 불과하다. 또, 인간의 합리성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사실도 이 초라한 합리성에 의해 획득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가치만큼 사실도 객관적이거나 과학적이지 못할 뿐 아니라 불완전하다.
나아가, 가치판단은 인간만이 내릴 수 있다. 가치판단을 포기하는 인간은 짐승이나 기계와 다르지 않다. 뿐만 아니라 가치에 의해 통제되지 않은 사실은 인간사회를 궁극적으로 파괴한다. 공금 횡령, 원자폭탄, 살인, 강간, 전쟁, 환경파괴, 불평등, 이 모든 사실이 가치로 통제되지 않는 사회를 상상해보라! 가치가 결여된 삶은 악마와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정글과 같다. 인간의 삶에서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 가치는 인간의 본질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도 성찰과 비판에 대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야 할 뿐 아니라, 가치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비록 그 가치가 초라할지라도 말이다. 결국, 가치와 사실은 상호작용하면서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즉 경제학 연구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에 관한 연구를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사실판단은 물론 가치판단에 대한 질문에 초라한 답이나마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해방 후 우리 사회는 미국의 지적 식민지가 되어가고 있다. 경제학은 특히 그렇다. 대학의 경제학과는 거의 미국 출신의 신고전학파 주류 경제학자들로 채워져 있다. 여왕의 학문을 하였으니 이들이 이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가 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사회는 유난히 가치판단을 두려워하며 행동을 멸시한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가치에 색깔을 덧칠하고 행동을 비난하며 탄압한다. 그 결과, '가치 없는' 경제학에 의해 우리 사회는 '가치 없는' 사회로 타락해버렸다.
몇 년 전, 배우 장자연이 화폐와 권력의 후원을 받는 악마와 짐승들의 비윤리성과 비도덕성, 곧 가치의 타락을 죽음으로 고발하였다. 그녀는 죽음으로써 이 사회에 가치판단을 요구한 것이다. 수많은 '장자연'이 성접대로 몸서리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판단하였지만, 이 사회는 그 연약한 몸부림을 기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외면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현재까지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가치판단을 유보한 것이다. 신고전학파 주류 경제학과 그 우군들의 가치중립성에 포섭되어 있는 이상, 우리 사회에서 그들은 가치판단을 유보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 사회는 진실이 가려진 채 어둡게 추락할 것이다. 그러한 우려가 현실로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경제현실과 경제정책
부의 대물림, 불완전 경쟁시장의 불평등
시장은 불평등 문제를 치유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악화시킨다. 불평등은 갈등을 유발하고 인간과 사회를 타락시킨다. 그리고 보수 우파들이 시종일관 뻔뻔스럽게 주장하는 것처럼 불평등은 결코 어떤 '고상하고 합리적인 경제법칙'에 의해 발생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약탈과 폭력, 공갈, 사기 등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의해 등장한 것이다.
내가 항상 비판하는 신고전학파 주류 경제학은 이런 사기와 착취를 정당화해주기 바쁘다. 미시경제학에서 유명한 '오일러의 정리(Euler's theorem)'는 그러한 열망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이 정리에 따르면, 완전 경쟁시장에서 한 나라의 총생산물은 노동자의 노력(노동자의 한계생산력)과 자본가의 노력(자본의 한계생산력)에 따라 공정하게 분배된다는 것이다. 완전 경쟁시장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현실 속에서 그런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완전 경쟁시장이라면 무엇보다 시장 행위자들이 '동질적'이어야 하며, 특히 소득과 재산 규모가 같아야 한다. 두 사람이 동일한 규모의 재산으로 출발한다면 경쟁의 결과는 적어도 공정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재산과 소득의 초기 규모가 엄청나게 다르면 게임의 결과는 결코 공정해질 수 없게 된다. 누적된 부는 규모의 경제, 범위의 경제, 네트워크 효과 등 다양한 '외부 경제(external economy)'를 생산한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많은 이익이 넝쿨째 굴러오는 것이다. 출발부터 가난한 사람은 이와 같은 외부효과를 누릴 수 없다.
경쟁의 과정에는 반드시 이런 경제적 법칙만 작용하지 않는다. 선조와 부모가 형성해놓은 사회적 관계와 '문화적 자본'은 경제적 법칙보다 더 큰 축적효과를 낳는다. 속옷 한 장만 걸치고 맨주먹으로 출발한 사람은 이 거대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본력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다. 그래서 이런 불완전 경쟁시장에서 부자는 계속 부를 축적할 수 있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는 것이다. 이런 불완전 경쟁시장만으로도 보통 사람들은 무기력해지는데, 부유층이 대놓고 저지르는 꼼수들은 우리를 절망케 한다. 필자의 학생들은 350만 원 등록금이 없어서 아르바이트 전선에서 죽어라 뛰고 있는데 재벌가(家) 자녀들은 땅 짚고 헤엄치듯이 돈을 긁어모으고 있다. 계열사 내부거래를 통해 일감을 몰아줌으로써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수십억 원의 돈을 날름 집어삼키는 것이다. 그들의 하룻밤 술값도 안 되는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학생들을 보고 있자니 세상이 원망스럽다.
그래도 신고전학파 주류 경제학자들은 '오일러의 정리'라는 해괴한 논리를 동원해서 재벌가 자녀들의 높은 배당금과 주가차익은 그들 부모의 노력과 기여 때문이며, 학생들이 6개월간 뼈 빠지게 일해서 받은 300여만 원은 그들 부모의 나태함 때문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아무리 그들의 장학금이 좋고 떡고물이 맛있다 하더라도 그런 말을 해서 되겠는가? 그건 열심히 사는 아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건 학문도 아니며 미친 짓일 뿐이다.
불통정부, 그들만의 FTA
영국의 헨리 7세는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제조업이 중요하며 선진국과 달리 후진국은 자유무역보다 보호무역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리하여 그는 1485년에 등극하자마자, 양모를 수출하는 대신 수입 대체 전략을 채택하였으며 1489년에는 의류에 대한 관세를 인상하였다. 이러한 보호무역 전략으로 영국의 모직물 제조업은 크게 발전되었고 국민소득도 크게 향상되었다. 영국은 이처럼 보호무역주의를 통해 빈곤한 주변부로부터 세계의 공장으로 급부상하자마자, 애덤 스미스를 내세워 후진국인 독일에게 해로운 산업인 농업을 특화하라고 권하는 동시에 온 세계국가들이 자유무역을 채택할 것을 권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