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가 되려면 먼저 국내 최고 은행이 돼야 한다
마우로 기옌, 아드리안 최글 지음 | W미디어
세계 최고가 되려면 먼저 국내 최고 은행이 돼야 한다
마우로 기옌 외 지음
W 미디어 / 2011년 6월 / 336쪽 / 15,000원
1. 세계 경제 속의 가족 주도 은행소매금융 시장은 나라마다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외국 은행이 현지 은행과 경쟁하기 아주 힘들다. 우선 고객의 선호도와 취향이 다르다. 예를 들어 미국 시장에서 고객은 고정 모기지 금리를 선호하지만 유럽 대륙의 표준은 변동 모기지 금리이다. 서비스가 전달되는 방법의 차이도 확연히 드러난다. 오늘날 인터넷 뱅킹이 보편화되고 있지만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사람들이 얼굴을 대면하고 거래하는 것을 여전히 선호한다. 소매 금융에서 국가 간 분할이 일어나는 또 다른 요인은 정부 규제와 관계가 있다. 국가 간 자본 흐름이 비교적 자유롭고 기술상의 표준도 하나로 모아졌지만 바젤 협약 같은 조치 덕분에 자격, 최소자본 소요액, 예금 계수, 다른 금융 서비스로 다각화할 법적 용인성, 그리고 특정 상품에 대한 규제가 시장마다 판이하게 다르다.
금융기관의 경쟁에 영향을 미치는 시장 집중도도 나라마다 판이하게 다르다. 예를 들어 캐나다, 벨기에는 4위까지의 은행이 전체 예금과 대출금의 75%를 차지한다. 하지만 독일이나 미국 같이 경제규모가 큰 나라는 25%를 밑도는 수준이다. 시장 집중도의 차이 때문에 어떤 은행이든지 동일하면서도 세계적인 전략을 추구하기가 힘들다. 비용 측면에서 소매 금융업의 활동은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세분화는 덜 되어 있다. 이처럼 소매 금융업계의 경쟁 체제에는 복잡성과 정교성, 세분화가 결합되고 축적되어 어떤 은행이든 국제적으로 영업을 할 때, 이 엄청난 도전을 극복하기 어려워졌다. 과거에는 한 개 이상 나라에서 소매 금융업계에서 강자로 군림하는 은행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산탄데르는 그런 드문 다국적 소매 은행일 뿐만 아니라 세계 10대 은행 중 유일하게 한 가족이 3대에 걸쳐 기업 경영이나 전략에 대한 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은행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가족 경영의 장점과 단점을 탐구하는 사례 연구로는 산탄데르가 적격이다.
2. 가족 은행의 기원 1857년 6명의 사업가가 스페인의 변방 산탄데르 지방에 은행을 설립했다. 당시 스페인은 정치, 경제적으로 고난의 시기였다. 19세기 들어 식민지의 독립과 나라를 온통 뒤흔든 세 번의 내전, 몇 번에 걸쳐 군대가 권력을 장악한 사건 등이 일어났다. 스페인 경제도 항상 적자인 국가 예산, 실패로 돌아간 농정 개혁의 파고, 투기적 성격의 투자 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스페인 최초의 포괄적 금융 관련법은 1856년 발효되었으며 동 법에 의해 빌바오 은행이 1857년 3월 최초의 발권은행으로 정부의 인가를 받았다. 산탄데르는 1857년 5월 인가를 받았지만 영업활동은 빌바오보다 4일 먼저인 1857년 8월 20일에 시작했다. 창립 때부터 경쟁해 온 산탄데르와 빌바오, 두 은행이 오늘날 스페인을 대표하는 거대 은행이 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당시 은행 사이의 경쟁은 매우 치열했다. 1874~1892년 사이에 생겨났다가 사라진 은행이 58개였다. 1890년 살아남은 곳은 빌바오, 산탄데르 등 4개 은행에 불과했다.
스페인에서는 1910~1920년대 식민지에서 자본이 들어오면서 구이푸즈코아노 은행, 히스파노 아메리카노 은행 등 7개의 대형 은행이 설립되었다. 이런 은행들이 스페인의 산업 자본 특히 전기, 정유, 철강 분야의 발전을 이끌었다. 대형 은행들 때문에 산탄데르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고, 1922년 산탄데르는 상위 50개 은행에도 들지 못했다.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까지는 고난의 시간으로 경제가 봉쇄되어 자급자족을 해야 했던 경제적 침체기였고, 스페인의 금융 분야 역시 성장이 아주 미미했다. 산탄데르 은행도 1950년대가 되어서야 성장을 했는데, 이는 보틴 가문과 연관이 있다.
보틴가 사람들은 19세기 중반부터 금융과 상업 활동에 종사했다. 1828년 외과 의사였던 호세 마리아 보틴이 산탄데르 시에 정착했다. 그는 그 지방의 유명 사업가 가문인 로페즈-도리가 집안의 미망인과 결혼했다. 로페즈-도리가 집안사람들은 산탄데르 시에서 가족 기반 사업을 하며 구축한 두터운 연결망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상업에 종사하는 다른 가문과 결혼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로페즈-도리가 집안사람들은 산탄데르 은행 설립뿐 아니라 철도 사업에도 깊이 간여했고, 1866년 도산한 금융회사인 유니온 메르칸틸 설립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산탄데르 은행은 설립 초기부터 소매 금융에 초점을 맞추었고 산업 발전에 참여하길 주저했다.
호세 마리아 보틴의 장남인 라파엘 보틴 아귀레는 1895~1903년까지 은행의 경영 이사를 역임했는데 그는 보틴 가문 사람으로 처음으로 산탄데르 은행고위직에 오른 인물이었다. 호세 마리아 보틴의 다른 아들인 에밀리오 보틴 아귀레는 광산업, 낙농업, 철도 회사에 투자하다 1901년 산탄데르 은행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그의 아들인 에밀리오 보틴 1세는 1909년 보틴 가문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산탄데르 은행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보틴 가문 사람들은 전체 지분의 1%를 소유하고 있었다. 에밀리오 보틴 1세는 1923년 사망할 때까지 회장직을 지켰다 .
1923년 보틴 1세가 사망하자 주주들은 사투르니노 브리즈라린을 회장으로 선출했다. 브리즈라린은 에밀리오 보틴 1세의 아들 에밀리오 보틴 2세에게 경영자 훈련을 시켰고 에밀리오 보틴 2세는 1933년 경영 이사를 거쳐 1950년 산탄데르 은행의 회장이 되었다. 그는 1950년대 시작되어 1970년대까지 계속된 은행이 라틴아메리카와 유럽에서 국제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초기 절차와 작업을 지휘했다. 보틴 2세는 1976년 자신의 아들 에밀리오 보틴 3세를 최고 경영자로 임명해 산탄데르 은행에서 보틴 가문의 위상을 공고히 다진 뒤 1986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보틴 2세는 물러나면서 스페인 내 지점 1,500개, 외국 지점 150개, 직원 수 1만 명에 달하는 건실한 은행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에밀리오 보틴 3세는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산탄데르를 국제 금융계의 강자로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보틴 3세는 수차례에 걸친 국내외 인수합병을 성사시켰고, 이로 인해 산탄데르는 세계 상위 10위 안에 드는 은행이 되었다. 그는 산탄데르를 ABN 암로, 시티은행, HSBC, ING, RBS, 와 그 밖의 소수의 은행으로 구성된 특별한 그룹에 속하는 진정한 세계적 소매 은행으로 만들었다.
3. 산업체 그룹금융체제는 경제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제조업의 성장, 에너지 생산과 수송 시설, 농업 현대화를 위한 기본 토대를 마련하는데 엄청난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탄데르는 역사적으로 스페인의 산업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 스페인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던 1960년대 말 산탄데르는 맥주, 건설, 전기, 철강, 정유, 자동차, 화학 회사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중 몇 가지는 이전부터 보유한 것들이다. 산업체 기업의 주식 보유분이 상대적으로 작았던 산탄데르는 다른 대형은행들 같이 심하게 산업체와 맞물리지 않았다. 산탄데르가 산업 분야에서 왕성한 역할을 하지 않은 것이 계획된 일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1970년대 세계 경제 위기로 스페인 경제가 급격히 하강하는 시기가 닥쳤을 때 오히려 축복이 되었다는 점이 입증되었다.
1970년대 스페인의 산업체들은 증가하는 금융위기뿐 아니라 두 번의 석유파동, 민주주의로의 과도기 동안 발생한 임금 인플레이션을 견뎌야만 했다. 그런 부담을 국가에 지우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금융 분야가 그 위기에서 피해를 입고 말았다 1977~1985년 사이에 스페인에서는 거의 60개의 중소형 은행이 도산했다. 그리고 새롭게 생긴 두 개의 금융 그룹(방카 카탈라나와 루마사)이 예금액의 27%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은행의 대부분은 1960년 이후 만들어졌으며 산업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국가가 위기 비용의 5분의 4를 책임졌고 나머지는 개인 은행이 맡았다.
산탄데르는 1970년대 위기 이후 자사의 산업체 포트폴리오의 상당량을 다시 배치했다. 1985년 스페인이 EU에 가입할 당시 산탄데르 투자의 대부분은 제조업체와 에너지, 금속세공, 식품가공, 물, 전력회사에 몰려 있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 걸쳐 산탄데르는 제조업체에 투자했던 지분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2004년 산탄데르는 제조업과 중장비 사업 분야의 활동을 대폭 줄였다. 그리고 지분을 부동산, 건설, 도매와 소매업, 통신과 미디어, 여행과 레저, 인터넷과 전자상거래 등 스페인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분야로 옮겼다. 고성장 산업에 목표를 맞춘 산탄데르의 투자 전략은 엄청난 자본 이득을 창출했다. 또한 산탄데르는 보턴 3세의 지휘 하에 국내외에서 기업 또는 기업의 일정 부문을 매매하여 상당한 자본 이득을 올렸다. 산탄데르는 기업들의 소액 지분을 인수한 다음 나중에 미국의 메트라이프, 영국의 스코틀랜드 왕립은행, 프랑스의 소시에테 제네랄 등에 매각 처분했고, 이 과정에서 70억 달러가 넘는 혼합 자본 이득을 보았다.
산탄데르의 산업체 지분 운용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은행-산업 연결 고리의 이득과 손해 두 가지 모두를 살펴볼 수 있다. 산탄데르가 산업에 투자하기를 주저했던 것은 초기 산탄데르 은행의 스페인 국내 시장에서의 성장을 제한했다. 하지만 산탄데르가 산업계에서 역할이 미미했던 점이 1970년대 위기 이후에는 유리한 점으로 변했다. 산탄데르는 작지만 건실한 구조 덕분에 경쟁 은행을 능가했고, 경쟁 은행이 투자에서 기대 이하의 실적을 보이고 어려운 구조 조정에 붙잡혀 고전하고 있을 때 국내외에서 인수합병을 통해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산탄데르는 기업 투자를 통해 얻은 자본 이득을 국내외 성장에 필요한 자금으로 사용하여 국제 소매금융업계에서 급격하게 성장한 것이다.
4. 강자 생존1989년 유럽위원회는 새로운 금융 강령을 발표했다. EU 회원국에서 금융업을 하도록 허가 받은 은행은 다른 회원국에서 규제 당국의 행정 승인 없이도 지점을 열 수 있도록 한 조치이다. 이 조치로 인해 스페인 은행들이 경쟁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단일화된 유럽 시장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 자명해졌다. 1980년대 스페인의 7대 은행은 세계 표준은 물론 유럽 표준에 비춰 봐도 규모가 작았다. 산탄데르는 7대 은행 중에서도 작은 편에 속했다.
1980년대 중반 금융 혁신의 시기에 스페인 은행들은 경쟁력 강화를 위해 서로 결합을 시도하게 되었다. 자신보다 규모가 큰 경쟁 은행들이 합병을 시도하거나 완성시키고 합병 후 통합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산탄데르는 이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89년 보틴 3세는 과감한 결정을 내려 이자율이 높은 당좌예금인 '수퍼쿠엔티'를 선보였다. 이로 인해 예금 전쟁이 촉발되었다. 바네스토 은행이 산탄데르의 도전에 정면으로 맞섰다가 수익이 급격히 악화되어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산탄데르가 먼저 주도권을 잡고 새로운 상품이나 서비스를 내놓으면 다른 은행들이 그에 반응하고, 다시 산탄데르가 그들의 조치에 반응하는 패턴이 나타났다.
스페인 3대 은행인 BBV, BCH, 아르헨타리아가 어려운 합병 건을 소화하는 데 힘을 쏟고, 바네스토는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고전하는 동안 보틴의 산탄데르는 계속해서 성장하였다. 보틴은 1994년 바네스토를 인수함으로써 스페인의 2대 은행 중 하나가 된다는 목표를 이루었다. 보틴은 바네스토 인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국제 시장에서 활동하려면 먼
저 자국 시장에서 1위가 되어야 합니다. 바네스토 인수로 인해 그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산탄데르로서는 엄청난 약진입니다."
1996년 사회당 정부 시대가 막을 내릴 무렵 스페인 금융계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금융시장이 자유화되었고, 금융관행에 규제 완화가 이루어졌으며, 두 번의 거대 합병(BBV와 BCH)이 있었고, 12개 국영 은행이 아르헨티리아로 통합되었으며, 산탄데르의 바네스토 인수가 이루어졌다. 7대 대형 은행이 4대 대형 은행이 되었다. 하지만 유럽이 직면한 금융 시장 통합이라는 도전을 생각할 때 상대적으로 여전히 규모가 작았다. 1996년 민중당이 승리하자 금융계에 커다란 바람이 불어왔다. 가장 큰 변화는 1999년 스페인이 유럽경제통화동맹에 창립 회원국으로 가입하기로 한 결정이었다. 이로 인해 금융 통합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정부의 암묵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1999년 BCH와 산탄데르는 대등 합병을 발표했고, 각 은행 최고 경영자가 공동으로 새로운 은행을 대표하기로 하였다. 두 은행 경영진 간의 긴장은 3년 정도 지속되다가 결국 보틴이 합병 은행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로 인해 산탄데르는 스페인 은행의 선도자 자리를 꿰찼을 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로 확장해 나가며 유럽에서 가장 큰 은행 중 하나가 되었다. 반복되는 산탄데르의 성공 행보에 압력을 받은 BBV는 1999년 아르헨타리아와 합병을 선언해 BBVA로 다시 태어났다. 이제 스페인 금융계는 2개의 거대 은행(산탄데르와 BBVA) 대결 구도로 재편된 것이다.
스페인 금융 분야 통합 과정이 시사하는 것은 작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은행이 사냥을 당하기보다 사냥을 하는 입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산탄데르는 경쟁은행의 대차대조표가 불안정하고, 산업체 지주회사의 실적이 저조하여 부담을 느낄 때를 틈타 이점을 누렸다. 산탄데르는 자신보다 덩치가 큰 경쟁은행이 대등합병으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 고전할 때 인수를 하는 식으로 주도권을 잡았다. 산탄데르의 최고 경영진과 독특한 경영구조는 이런 성장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5. 신세계산탄데르는 두 번의 파도를 타고 라틴 아메리카로 팽창해 나갔다. 첫 번째 파도는 2차 대전 직후 시작되어 '잃어버린 10년(Lost Decade)'이 시작되기 전에 끝났다. 두 번째 파도는 산탄데르가 스페인의 주요 지방 은행을 인수하며 현재의 위상을 갖추기 시작한 1990년 대 초반 시작되어 1990년대 중반에 걸쳐 몰려들었다. 두 번째 파도를 타면서 산탄데르는 성장 전략을 라틴아메리카로 전환하였음을 나타내었다. 산탄데르의 해외 진출은 스페인 금융시장의 한계에서 시작되었다. 포화된 내수 시장과 유럽 통합이 가한 경쟁 위협이 산탄데르의 국제화를 촉진시킨 두 가지 엔진이었다. 스페인 은행들은 유럽 다른 회원국 은행에 비해 여전히 상대적으로 작았고, 이 때문에 전략적인 구상을 하게 된 것이다. 산탄데르의 한 중역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인수 대상이었습니다. 성장을 해야만 했어요. 그래서 한바탕 쇼핑을 하러 나갔지요."
산탄데르의 초기 라틴아메리카 진출은 국제 금융의 고전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진출하려는 나라에 자국 고객들을 위해 대표사무소와 지점을 개설하고 나서 작은 소매 은행을 인수할 기회가 오면 그 기회를 잡았다. 몇 십 년이 지난 후 산탄데르는 라틴아메리카에 좀 더 체계적으로 자회사를 설립하고 주식 지분을 사들이게 되었지만 1980년대 '잃어버린 10년' 기간 동안 엄청나게 후퇴했다. 1990년대 들어 다시 대대적인 진출을 꾀했는데, 그때는 전통적인 국제금융과 과거에 했던 방식은 모두 버리고 대신 라틴아메리카 전역의 거대 현지 은행을 완전히 소유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새로운 전략과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산탄데르는 스페인 금융 시장의 구조조정 파고에서 효율적이고 경쟁력있는 은행으로 부상했고, 그와 동시에 라틴아메리카의 잃어버린 10년은 끝났다.
라틴아메리카로의 확장은 산탄데르가 세계 10대 은행이 되기 위한 목표로 향하는 첫 발을 내딛는 것과 같았다. 이 지역에서의 인수 작업으로 산탄데르는 이 목표를 성취했고 세계 주요 은행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산탄데르는 라틴 아메리카의 9개 국가에서 27개 은행을 인수하는 데 123억 달러를 썼다. BBVA는 78억 달러를 투자해 34건의 인수 작업을 완료했다. 현재 산탄데르와 BBVA는 라틴아메리카에서 1, 2위를 달리고 있다. 2006년 《유로머니》와 《글로벌파이낸스》는 산탄데르를 '라틴아메리카 최고의 은행'으로 선정했다. 산탄데르는 세계 10,852개 지점 중 4,368개 지점(40%), 전체 종업원 129,196명 중 66,889명(52%)이 라틴아메리카에 있다. 산탄데르는 66억 유로의 그룹 순이익 중 35%를 라틴아메리카에서 창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