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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만삭스

리사 엔드리치 지음 | 21세기북스
골드만삭스

리사 엔드리치 지음

21세기북스 / 2010년 4월 / 605쪽 / 15,800원



1. 1986년 : 누구도 가지 않은 길




1986년 10월 골드만삭스 대표 존 와인버그는 파트너 총회를 소집했다. 총의에서 차기 대표직 승계 후보자인 루빈과 프리드먼 두 사람이 회사의 미래상을 제시했다. "골드만삭스는 위대한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할 것이며, 세계 곳곳에서 투자은행서비스를 제공하는 도매금융회사로 발돋움할 것이다. 위험이 크고 집중적인 자본 투자가 필요한 트레이딩 사업은 이제 골드만삭스가 직접 수행할 것이다."

프리드먼과 루빈은 투자은행업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는 일류 투자은행으로 골드만삭스의 목표로 설정했다. 총회에서 논란이 된 것은 사업 확대에 필요한 자본 조달을 위해 골드만삭스가 기업공개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격론 끝에 파트너들은 비상장기업으로 남은 채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길을 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12년이 지난 1998년 파트너들은 기업공개를 추진하기로 하였다. 12년 사이 회사 규모는 2배 커졌고 자본금은 5배 늘었으며 사업은 글로벌화 되었다.

골드만삭스가 1980년대 이후 미국 투자은행 업계에서 1위가 된 것은 엄격하고 우직하게 회사의 핵심가치를 밀고 나간 덕분이다. 경영진은 장기적인 관점을 견지하면서 고객을 이롭게 한다는 서비스 정신을 확고하게 지켜나갔다. 파트너들이 공동 출자하는 합자회사 형식에서 장기적인 보상 동기가 자리 잡았다는 점도 성공 요인이다. 긴밀한 고객 접촉에서 독점적인 정보가 생겼고, 이 정보는 고객에 딱 맞는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원천이 되었다.

골드만삭스가 높은 실적을 달성한 궁극적인 요인은 헌신적으로 일하는 직원들이다.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꿈과 믿음은 지원자들의 열정을 자극했고, 출중한 인재들이 골드만삭스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공유하는 신념체제로서 골드만삭스의 회사 문화는 월스트리트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전설적인 것이다. 골드만삭스는 50~60개의 소기업이 돌아가는 것처럼 운영된다. 그 각각이 하고 싶은 대로 사업을 펼치는 자유를 누린다. 회사에서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면 자기 사업에서 성공하면 된다. 그리고 같이 협력해서 일할 동기가 실리와 문화 양면에서 존재한다.

월스트리트에서는 실적이 뛰어난 직원 위주로 보상하는 스타 시스템이 횡행하고 있지만 골드만삭스는 이런 시스템을 멀리한다. 1980년대 이후 큰 인수합병 거래를 성사시킨 사람들은 유명인사 대우를 받았고, 월스트리트는 대형 스타들의 거리로 돌변했다. 골드만삭스는 이런 추세에 저항했고 개인적 영광을 찾는 사람들에게 다른 회사를 알아보라고 권했다. "골드만에서는 '우리'라고 하지 '나'라는 말을 절대 쓰지 않습니다." 골드만삭스 역사를 통틀어 회사의 사기는 항상 고조되어 있었고 이직률은 극히 낮았다. 안정적인 인력 운영은 고객관계 면에서나 임직원 사이에서의 신뢰와 인화 면에서 값진 효력을 발휘했다.

골드만삭스에서 파트너들의 이해는 이런저런 부분에서 갈라지기도 하지만 회사 이익 문제에서는 완전히 일치된다. 파트너 보수가 회사 이익에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파트너들은 회사를 소유하면서 경영하기 때문에 경영과 자기 일을 구분하지 않는다. 파트너들은 인수합병이나 증권거래 같은 큰 거래를 직접 처리하면서 자기 밑의 직원들 못지않게 열심히 일한다. 직원들 입장에서는 자기 돈을 회사에 걸고 일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보다 더 큰 동기부여는 없다. 골드만삭스의 문화는 파트너들이 꾸려가는 합자회사에서 자라났고 그들이 창출한 동기 구조에 의해 유지되었다.

2. 1869~1976년 : 위대한 시작



골드만삭스가 오랜 세월 발군의 역사를 일구어오는 동안 세 집안이 회사를 경영했다. 사돈관계인 골드만과 삭스 가문, 새로 합류한 와인버그 가문이다. 이 사람들은 성과를 말할 때 단기 실적을 따지지 않았다. 자신이 물려받은 것보다 더욱 견실한 사업체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일을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사업을 계속 이어간 덕분에 골드만삭스는 월스트리트의 뼈대를 이루던 합자회사들 모두가 상장회사로 바뀐 뒤에도 오랫동안 가족회사로 남을 수 있었다.

골드만삭스의 창립자는 유대계 독일인 마커스 골드만이다. 그는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대거 몰려들었던 1848년 미국으로 넘어왔다. 이민 초기 필라델피아에서 장사를 하면서 돈을 모은 골드만은 1869년 뉴욕 맨해튼 남부 파인스티리트에 '마커스골드만'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채권 매매 브로커 일을 시작했다. 그에게는 독일 출신 조지프 삭스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삭스의 맏아들 줄리어스와 둘째 아들 샘이 골드만의 딸들과 결혼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겹사돈을 맺게 되었다.

1892년 골드만은 사위인 샘을 회사로 불러들이면서 회사명을 골드만앤드삭스로 바꾸었다. 이후 50년 동안 이 회사의 파트너들은 사돈관계인 두 가문 사람들이 맡았다. 1885년 골드만은 아들 헨리와 맏사위를 파트너로 불러들이면서 회사명을 지금의 골드만삭스로 변경했다. 2년 뒤 회사는 뉴욕증권거래소 회원사로 가입했고, 파트너들의 노력에 힘입어 기업어음 분야에서 미국 최대 자기매매업자로 성장했다. 회사 자본금은 1984년 58만 달러에서 1906년 450만 달러로 크게 늘어났다.

마커스 골드만은 은퇴하면서 회사를 아들 헨리와 사위 샘에게 물려주었다. 두 사람은 골드만삭스를 투자은행으로 키우는 것을 추진하였다. 1906년 골드만삭스는 리먼브러더스와 함께 주식공모 업무에 뛰어들었다. 30년 동안 골드만삭스와 리먼브러더스는 총 56개 발행회사에서 114건의 공모발행 업무를 함께했다. 해가 갈수록 두 회사의 평판이 좋아졌고, 양사가 주관하는 공모발행은 공모가격이 책정되기도 전에 공모 청약이 완료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두 회사의 합작 사업은 수익성은 좋았지만, 둘 사이에 알력이 생기면서 1936년 공식적으로 관계가 끊어졌다.

1차 세계대전은 골드만삭스를 나누어놓았다. 독일계 유대인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헨리는 전쟁 중에도 적국인 독일 은행과 거래를 지속했고 이로 인해 골드만과 삭스 가문 사이에 반감이 커졌다. 독일 은행과의 거래 때문에 골드만의 사업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결국 헨리는 회사를 떠났다. 이후 골드만삭스는 증권인수 업무를 맡아줄 파트너로 워딜 캐칭스를 선택했다. 캐칭스는 증권인수 및 기업합병 부문에 뛰어들어 연전연승을 했고 골드만삭스트레이딩컴퍼니(GSTC)이라는 투자신탁회사를 설립했다. GSTC는 엄청난 투자금을 모았지만 1929년 10월 주가 대폭락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GSTC 때문에 엉망이 된 골드만삭스의 경영을 맡은 사람은 시드니 와인버그였다. 그는 1930~1969년 동안 대공황의 여파를 헤치며 골드만삭스를 지금의 모습으로 일으켜 세웠다. 고등학교 중퇴 학력의 그는 사환으로 시작하여 35세 때 골드만삭스 파트너 자리에 오른 금융의 귀재이다. 와인버그는 골드만삭스를 이끄는 동안 업계 인맥을 폭 넓게 다졌다. 회사의 미래가 일류 기업들을 고객으로 확보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6년 와인버그는 미국 최대의 비상장회사였던 포드 자동차의 주식공모 업무를 성사시켰다. 6.5억 달러 규모의 이 거래로 골드만삭스는 일거에 투자은행업계의 주역이 되었다. 와인버그는 자신의 이미지대로 골드만삭스를 만들었고 그의 개인적인 신조는 신성불가침의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예를 들어 와인버그는 남의 돈을 받아 투자하는 자산운용 사업을 하지 않았다. 그가 중시한 것은 일류 고객과 일하는 일류 투자은행을 만드는 일이었다. 골드만삭스의 두드러진 특징인 절제와 겸손도 그가 몸소 실천한 것이었다.

1969년 세상을 떠난 와인버그에 이어 파트너 대표를 맡은 사람은 트레이더 출신인 구스타브 리먼 레비였다. 트레이더 출신을 사령탑에 앉힌 결과 골드만삭스는 1980년대 초 투자은행 업계에 나타나기 시작한 매매지향적 세계에 대비할 수 있었다. 레비는 트레이딩 사업에 따르는 매매 위험을 골드만삭스에 도입해 와인버그와는 전혀 다른 길로 회사를 이끌었다. 그는 창의적인 생각으로 수익을 내는 사업 방식을 추구했다. 레비는 대단위 보유 주식을 매매하는 대량매매 거래 방식을 고안하여 당시 증권거래소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레비가 회사를 맡고 가장 어려운 시기는 1970년대 벽두에 찾아왔다. 펜센트럴 철도가 침체된 회사 이익을 발표한 직후 1970년 2월 전국신용관리국(기업어음 신용등급 평가 기관)이 펜센트럴의 신용상태를 골드만삭스에 문의했다. 골드만삭스가 동사의 기업어음을 발행했기 때문이다. 골드만삭스는 긍정적인 상황이라고 말해주었고, 신용관리국은 골드만삭스의 답변에 근거하여 펜센트럴의 기업어음을 우량 등급으로 유지했다. 그러나 얼마 후 펜센트럴은 파산으로 치달았고, 기업어음 시장에는 공황 사태가 휘몰아쳤다. 이 사건은 골드만삭스에 재앙이었다. 고객들이 줄줄이 소송에 나섰고 골드만삭스는 엄청난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에 직면했다. 소송의 패배로 회사의 명성과 재무 상태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다행히 대폭 할인을 통해 환매해 둔 펜센트럴의 기업어음 가격이 급등한 덕분에 손실을 만회할 수 있었다. 1976년 10월 레비는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회사는 지도자를 잃고 혼란에 빠졌다.

3. 1976~1990년 : 거대한 발걸음



1976년 레비가 사망한 후 존 와인버그(시드니 와인버그의 아들)와 존 화이트헤드 두 사람이 공동 대표를 맡았다.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골드만삭스의 운영이 엉성하다고 생각했다. 권한과 책임이 분명하지 않았고, 원칙과 규정이 없었다. 지출되는 경비는 많았지만 적절히 통제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경영 시스템, 예산, 조직 구조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화이트헤드와 와인버그는 권한을 배분해서, 재능 있는 파트너들이 더 많은 책임을 맡을 수 있도록 했다. 두 사람은 고객면담, 거래 기획, 장기 출장을 직접 수행함으로써 궂은일을 하는 데 너와 내가 따로 없으며 경영은 일의 일부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화이트헤드는 기획가로서 회사의 장기적 방향을 잡아나갔고, 와인버그는 고객을 챙기고 신규 사업을 벌이는 데 집중했다. 이렇게 하면서 그들은 골드만삭스를 세계 경제 중심지에서 활동하는 전문적인 회사로 키워나갔다.

1984년 존 화이트헤드가 골드만삭스에서 은퇴했다. 화이트헤드가 떠난 후 와인버그를 도와 스티븐 프리드먼과 로버트 루빈이 회사 경영의 중요한 직무를 맡게 되었다. 루빈과 프리드먼은 회사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두 부문을 지휘했다. 위험차익거래에 전념했던 루빈은 1981년 골드만삭스가 상품 거래 회사인 'J.아론'을 인수하고부터 이 부문을 맡았다. 'J.아론'은 귀금속, 커피, 외국환을 거래했다. 한편 프리드먼은 인수합병 분야를 맡았다.

1974년 모건스탠리가 캐나다 회사인 인터내셔널니켈(INCO)을 대신하여 세계 최대 배터리 제조업체인 일렉트릭스토리지배터리(ESB)를 표적으로 적대적 인수공격에 나섰다. 월스트리트 역사상 최초의 적대적 인수 공격이었다. 이에 ESB는 골드만삭스의 인수합병 부문을 맡고 있던 프리드먼에게 도움을 청했다. 프리드먼은 INCO에 맞서 싸울 방편으로 백기사(인수표적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매수 경쟁에 참여하는 우호적인 매수자)를 동원하거나 반독점 소송을 권고했다. 골드만삭스는 백기사로 참여한 회사를 등에 업고 ESB의 주가를 끌어올려 장애물을 쳤다. 결국 ESB는 골드만삭스의 도움을 받아 INCO의 적대적 인수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골드만삭스에게 이 일은 인수합병 분야의 순위를 단박에 끌어올리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날 이후 적대적 인수합병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골드만삭스는 피인수 표적 기업 측에 섰다. 인수합병은 그 자체로도 수익성이 어마어마했지만, 인수합병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차입매수, 고수익채권, 자사주 매입 등 여러 가지 사업으로 가지치기가 이루어졌다.

골드만삭스는 미국시장에서의 성공 여세를 몰아 영국으로 진출했다. 1987년 골드만삭스는 영국 인수합병 시장 점유율 상위 10위권에 들었고, 1990년 1위로 올라섰다. 이후 골드만삭스는 새로 진출하는 유럽 국가마다 지배적인 시장 점유율을 기록하였다. 골드만삭스가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성공 모델을 철저히 따랐기 때문이다. 첫째, 저돌적인 자세로 일찌감치 사업에 진출한다. 둘째, 정직하게 고객에 집중한다. 셋째, 팀워크의 장점을 살려 일한다. 넷째, 최고 명성을 잃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한다.

4. 1990~1991년 : 권력 개편



1990년 프리드먼과 루빈 두 사람이 골드만삭스의 파트너 대표 겸 경영위원회 공동 회장이 되었다. 존 와인버그는 5년의 과도기를 거쳐 두 사람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었다. 와인버그는 세계적인 거대 기업들을 고객으로 끌어왔고 회사의 장기적인 이익을 중시하는 경영을 했다. 더욱 중요한 공적은 그가 회사 문화를 탄탄하게 일구고 회사의 전통을 보존했다는 점이다. 와인버그가 골드만삭스를 이끄는 동안 회사 이익은 10배 늘었고 자본금은 6천만 달러에서 23억 달러로 불어났다.

와인버그를 승계한 프리드먼과 루빈의 쌍두마차 엔진은 완벽하게 돌아갔다. 이들은 골드만삭스를 투자은행업계의 최첨단을 달리는 성장 기업으로 만들겠다고 목표를 세우고 공격적인 경영을 했다. 해외 지사 확대를 중점 추진했고, 세계 주요국 정부의 자금조달업무, 특히 세계적인 물결을 타고 있는 사유화 사업에 뛰어들었다. 골드만삭스는 25개국에서 국유 자산을 일반에 매각하는 복잡한 업무를 순조롭게 처리했다. 사유화 사업은 규모도 크고 세계의 이목을 끄는 사업이어서 1990년대 중반 이 사업 분야를 장악한 골드만삭스는 새로 진출하는 국가마다 주목을 받게 되었다.

바깥세상에도 변화의 압력이 밀어닥쳤다. 투자은행 업무와 상업은행 업무 영역이 점차 모호해지자, 상업은행들이 투자은행들의 경쟁자로 변신했다. 하지만 당시 상업은행들은 제3세계 채무 위기에서 막 벗어났다가, 다시 미국 국내 부동산 여신이 탈이 나서 숨을 몰아쉬고 있던 중이었다. 골드만삭스는 새로운 경쟁자인 상업은행들이 자신의 텃밭을 치고 들어오더라도 한숨 돌릴 틈을 얻었던 셈이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골드만삭스는 경쟁자들이 먼저 물에 발을 담글 때까지 지켜보는 태도를 취했다. 물의 온도가 알맞다고 해도 사업이 될 만한 시장인지 경쟁자들을 통해 확인한 후에야 뛰어들었다. 하지만 루빈과 프리드먼이 지휘봉을 잡고 나서 골드만삭스는 혁신에 몰입했다. 골드만삭스는 기존의 대리인으로서 고객업무를 대행하는 업무보다 직접 위험을 떠안고 수익을 내는 자기자본거래 업무의 비중을 점점 높여 나갔다.

1991년 루빈과 프리드먼은 자기자본 장기투자 사업을 시작하였다. 골드만삭스는 이 사업에서 경쟁우위가 있었다. 업계 인맥이 두터웠고, 정밀한 금융지식이 있었고, 자금 조달 능력이 있었다. 투자은행으로서 업계의 흐름도 잘 파악할 수도 있었다. 골드만삭스는 이러한 장점들을 활용해서 투자 파트너들과 협상하여 우호적인 관계로 소수 지분에 투자했다. 외부 투자자를 찾는 비상장기업들에게는 면밀한 분석력과 예리한 금융 노하우를 갖춘 골드만삭스가 적합한 파트너였다. 1991년 가을 골드만삭스는 투자펀드로 골드만삭스캐피탈파트너스를 조성하여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골드만삭스의 이익은 1991년 11.5억 달러로 사상 최고를 달성했고, 1992년 14.6억 달러를 기록했다. 35%에 달하는 높은 이익률의 견인차는 통화와 상품을 매매하는 J.아론 본부였다. 루빈은 눈에 띄지 않던 이 사업 부문을 1980년 후반 트레이딩계의 거포로 바꾸어 놓았다. 일찍부터 석유선물이나 곡물선물과 같은 사업에 과감하게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석유거래팀이 본격 가동에 들어갔고 자본금을 투기거래에 활용하는 단기매매팀도 설립되었다. 트레이더들은 커피와 곡물을 대상으로 투기거래를 하는 한편, 영업 인력은 혁신적인 금융상품을 개발하여 헤징 기법에 관심을 보이는 고객에게 제공했다. 탄탄한 연구에 바탕을 둔 승부로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던 루빈은 이렇게 주장했다. "위험이 있으니 손실도 생기는 법이다. 위험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 온다면 이익도 없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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