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입고 있는 나라는?
켈시 팀머맨 지음 | 원앤원북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나라는?
켈시 팀머맨 지음
원앤원북스 / 2009년 8월 / 388쪽 / 15,000원
1부 나의 미션 : 우리 옷을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다
세계화 속의 소비자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텔레비전에서 캐시 리 기포드가 우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그녀의 의류 라인이 어린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이었다. 디즈니 또한 이와 유사한 비난에 휩쓸렸다. 미국에서 떠난 일자리를 대체하게 된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이 착취를 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세계화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지역의 공장들이 떠나고 친구들의 아버지가 일자리를 잃게 되는 것을 보고 막연히 세계화에 반대할 뿐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한 후, 노동력 착취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하게 되면서 세계화의 양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방바닥에 벗어 놓은 내 옷 더미들을 바라보면서 '이 옷들을 만든 사람들을 만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욱이 인류학을 전공하고 지질학을 부전공한 나는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어졌다. 결국 나는 학우들이 취업을 준비하는 동안 세 번의 여행을 떠났다. 수천 달러를 들여서 해외여행을 간 이유가 고작해야 티셔츠가 생산된 곳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면 나를 정신 나간 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무모한 도전으로 내 자신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라보는 견해를 바꾸게 되었다. 나는 노동자들의 너무나도 가혹한 삶을 보았고, 어린이들의 노동 현장도 목격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어린이의 노동이 항상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나와 아밀카르의 거리감내가 가장 좋아하는 티셔츠는 1970년대 미국 TV쇼 프로그램 <환상의 섬>의 등장인물 '타투'가 새겨진 옷이다. 약간의 노스탤지어와 또 약간의 유쾌한 유머가 담긴, 그야말로 멋진 이 티셔츠에는 '메이드 인 온두라스' 라벨이 붙어있다. 나는 이 옷을 생산한 산 페드로 술라 남쪽 도시 빌야누에바를 첫 번째 여행 목적지로 삼았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공장을 견학할 수도, 그곳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마치 경고라도 받은 듯 나를 기피했다. 내가 입고 있는 셔츠를 생산한 이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내 모습이 마치 투론같았다. '투론(touron)'은 내가 쓴 칼럼에 종종 등장하는 단어로, '관광객(tourist)'과 '얼간이(moron)'의 합성어이다. 투론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들은 것은 여행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키웨스트에서 스쿠버 강사로 일할 때였다. 그 지역 사람들은 스쿠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물이 섬 일대를 모두 지나가나요?" 따위의 바보 같은 질문을 해대는 관광객을 일컬어 투론이라고 불렀다.
나는 한동안 신문과 잡지에 기재할 여행 칼럼과 기사거리를 얻기 위해 돌아다녔다. 그리고 결국 온두라스를 떠나기로 결정할 무렵 다행히 한 노동자를 인터뷰하게 되었다. 그는 아밀카르라는 청년으로 의류 공장에서 일한 지는 1년이 채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7학년까지 학교에 다녔으며 공장 인근 마을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었다. 그의 나이를 물으니 스물다섯 살이라고 했다. 당시 나는 스물여섯 살이었고, 백수였다. 마이애미 대학교를 졸업한 수천 명의 동창생들 가운데 오직 나 혼자만이 '자발적인 실업자'였다. 하지만 나와 아밀카르의 다른 점은 내게는 선택권이란 게 있다는 점이었다. 미국에 살며 대학 교육을 받은 백인남성으로서 나는 원한다면 일 년 중 여덟 달은 일하고 네 달은 쉴 수 있다. 하지만 온두라스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겨우 일자리를 얻은 아밀카르와 같은 노동자의 하루 일한 대가는 내 타투 티셔츠 가격의 25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아밀카르에게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일하는 공장이 노동착취 공장이라면 차라리 모르고 지나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그곳을 떠나기로 결정했는데, 그와 헤어지면서 우스꽝스러운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메이드 인 온두라스 라벨이 붙은 내 타투 티셔츠를 벗어서 아밀카르에게 줘버린 것이다. 그곳에서 만들어진 옷을 그에게 입혀주고 나는 웃통을 벗은 채로 그와 사진을 찍었다. 그런 내가 마치 미치광이 '그링고(gringo, 미국인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말)' 같았다.
2부 나의 속옷 : 메이드 인 방글라데시
내 사각 팬티의 징글벨 문구온두라스를 떠난 후 나는 내 옷에 붙은 원산지 라벨들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여자 친구 애니와 약혼을 하게 되면서 어떤 조바심이 일었다. 집을 사고 융자를 받고 가전제품을 구입하고, 즉 평범한 미국인의 삶에 합류하기 전에 궁금증을 해소해야만 했다. 결국 2차 담보 대출을 받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 사각팬티를 만든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짐을 꾸렸다. 내 사각팬티는 다양한 컬러의 크리스마스 장식이 프린트되어 있으며, 허리 쪽에 '징글벨'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나는 이 팬티가 좋아서 크리스마스 시즌이 아니라도 다른 속옷과 번갈아 입는다. 그래서 닳아 희미해진 라벨에는 '메이드 인 방글라데시'라고 인쇄되어 있다. 전 국민의 83퍼센트가 이슬람교도인 나라에서 크리스마스를 특별히 여길 리 만무하다. 하지만 내 팬티는 분명히 그곳에서 만들어졌다.
방글라데시는 내가 살고 있는 아이오와 주보다 약간 작다. 아이오와 주의 인구가 300만 명인 데 비해 그곳의 인구는 1억 3천 500만 명으로,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방글라데시의 거리를 돌아다니기란 무척 힘든 일이다. 특히 수도 다카는 칙칙하고 먼지투성이며, 거리를 가득 메운 릭샤(인력거)의 벨 소리는 귀청이 따가울 정도다. 약 60만대의 릭샤가 운행되는 그곳에 내가 찾는 회사도 있었다. 내 속옷을 만든 공장은 2005년 리앤펑(Li&Fung)에 매각되었다. 리앤펑은 40개국의 브랜드 기업과 백화점의 공급망을 관리하는 바잉하우스다. 내가 뉴욕 본사로 전화하자 그들은 공장 연락처를 가르쳐주는 걸 회피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공장을 찾아야 했는데 우연히 알게 된 방글라데시인 친구가 그 일을 도왔다. 그 친구는 리앤펑 지사의 리셉셔니스트에게 나를 속옷 바이어라고 소개했다. 나는 내 신분을 속이는 것이 불편했지만 어쨌든 그의 기지로 사베르(Saver)시에 있는 공장을 견학할 수 있게 되었다.
방글라데시의 놀이공원사베르는 내가 전에 가보았던 도시였다. 나는 그곳에서 인상 깊은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판타지 킹덤이라고 하는 놀이공원이 있는데 이곳을 찾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1인당 입장료가 3달러로 그들에게는 큰 금액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미국 디즈니월드의 1인당 입장료는 67달러이다. 즉 미국에서 한 사람의 놀이공원 입장료가 이곳에서는 20명이 즐길 수 있는 돈이 되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방글라데시 아이들에게 롤러코스터를 타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통역의 도움을 얻어 판타지 킹덤 입구에서 20명의 아이들을 모았다.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열여덟 살짜리 소년은 5년째 의류 공장에 다니고 있었고, 그보다 어린 소년 다섯 명은 폐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잘모니(jalmoni, 양념 넣은 밥 종류)를 파는 상점주인, 열 네 살짜리 '한의사', 야채 장수, 이발사 등, 아이들은 갖가지 일을 하고 있었다. 일행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아홉 살짜리 소녀는 귀걸이만 했을 뿐, 셔츠도 입지 않은 채 맨발이기까지 했다. 나는 그 소녀에게 판타지 킹덤이라는 문구가 박힌 연푸른색 셔츠를 사주었다. 1달러짜리 그 셔츠에는 '메이드 인 방글라데시' 라벨이 붙어 있었다.
67달러란 몇몇 방글라데시 사람들에게는 한 달 월급보다도 더 많은 금액이다. 아마도 그 돈으로 아이들을 위해 뭔가 좀더 쓸모 있는 일을 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예컨대 옷이나 신발을 사줘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돈으로 아이들에게 판타지 킹덤에서의 추억을 제공하고 싶었다. 아이들은 다시 힘겨운 현실로 돌아갈 테지만 판타지 킹덤을 지날 때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다면 잠시라도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베르에 도착하니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혹시 그 아이들을 다시 만나게 되지 않을까 두리번거리며 걷다보니 어느새 속옷 공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공장에서는 속옷이 아닌 티셔츠를 생산하고 있었다. 사실 내 속옷이 생산된 공장을 찾는 일은 불가능했다. 방글라데시의 의류 공장은 3천 개가 넘으며 그들은 오늘 속옷을 만들다가 내일 갑자기 청바지를 만들고, 그 다음날에는 티셔츠를 만든다. 게다가 누군가에게 인수되거나 사라지는 일도 허다하다.
어린이 노동을 바라보는 시각들방글라데시 의류 산업은 그 나라의 연간 수출 물량 가운데 무려 76퍼센트를 차지하는 80억 달러 규모에 달한다. 2005년 개발도상국들이 수출할 수 있는 한계를 정해 놓은 다자간 섬유협정(MFA)이 철폐되면서 위기감을 갖기도 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노동력이라는 '비장의 무기'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전에는 어린이 노동자 고용으로 곤경에 처한 적도 있었다. 1992년에 NBC의 <데이트라인>에서 일곱 살 정도의 어린아이들이 일하고 있는 월마트의 생산라인을 특집으로 다루었던 것이다. 그때 미국 소비자들은 방글라데시에서 생산된 의류 제품을 전면 보이콧했다. 그러자 방글라데시 의류 제조 수출협회에서는 이미지 복원을 위해 14세 이하의 모든 어린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이로 인해 하루아침에 실직 당한 어린이들이 다카 거리에 넘쳐났다. 하지만 다행히 미국과 방글라데시 정부, 그리고 여러 국제기구들이 기금을 조성하여 그 어린이들이 근로 연령이 될 때까지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방글라데시 의류 업계에서 어린이 노동력 착취는 결말을 맺었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마음이 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2002/2003년 방글라데시 아동노동 실태조사에 따르면, 어린이 노동자의 93퍼센트가 비공식 부문에서 일하고 있었다.
의류 노동자 아리파의 삶나는 방글라데시 의류노동자의 삶을 좀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아리파라는 여인의 집을 방문했다. 출근 전에 만나야 했기 때문에 새벽 6시경에 그녀의 집을 찾았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아침을 준비하고 있던 그녀는 내게 아이들이 자고 있는 침대에 걸터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내게 다리를 들어 올리라는 시늉을 했다. 침대 아래에 있는 쌀 양동이를 잡아당기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컵으로 쌀을 퍼내기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속으로 숫자를 셌다. 그녀는 여섯 번 쌀을 퍼내 일곱 식구의 아침을 준비했다. 아리파의 가족은 여동생과 두 아들, 이렇게 네 식구였다. 나머지 삼인분의 식사는 건너편 방에 기거하고 있는 세 남자를 위해서였다. 그들은 모두 의류 노동자로 아리파는 빌린 아파트의 방을 그 노동자들에게 다시 빌려주고 있었다. 그들이 숙식비로 매달 지불하는 돈은 14.6달러이며, 아리파는 그 돈으로 온 가족의 한 달 식사를 해결했다. 그녀는 다리를 다쳐 쉬고 있었지만 다시 공장에 다니면 매달 25달러를 번다고 했다. 이것이 수입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4살과 11살 된 두 아들 외에도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다. 열여덟 살 된 큰아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매달 받는 월급 146달러의 절반을 집으로 보낸다고 했다. 아리파는 아들이 떠난 지 다섯 달이 지났으며 적어도 5년은 그곳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얘기를 하면서 슬픈 눈으로 둘째 아들을 바라보았는데, 아마도 그 아이 역시 머지않아 떠나보내야 할 일을 생각하는 듯 했다.
3부 나의 바지 : 메이드 인 캄보디아
역사를 지워버린 사람들캄보디아는 역사상 폭탄이 가장 많이 투하된 나라로 지목된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미국은 오클라호마보다도 조금 더 작은 그 나라에 무려 270만 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후 캄보디아는 크메르루주(Khmer Rouge) 정권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극단적인 '농민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170만 명이 집단학살을 당했다. 크메르루주 정부는 1979년에 전복되었지만 1990년대 후반까지 파이린 근처에 근거지를 유지했다. 그리고 근거지를 보호하기 위해 수백만 개의 지뢰를 설치했다. 이로 인해 캄보디아는 세계에서 절단 수술을 받은 사람이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다. 나는 지뢰 자문 단체(MAG)에서 일하고 있는 한 봉사자와 함께 캄보디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바탐방 서쪽 부근에 가 보았다. 그곳 아이들은 숲에서 땔나무를 줍다가 반짝반짝 빛나는 폭탄에 정신이 팔리기도 하고 농부들은 폭탄을 수집해 고철 값을 받고 팔아넘기고 있었다. 게다가 수집한 폭탄을 이용해서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 한 노부부를 만났는데, 그들의 집 앞에 '위험! 지뢰밭!'이란 경고 문구와 함께 해골 그림이 그려진 깃발이 꽂혀 있었다. 그 노부부는 발을 내딛기 전에 먼저 쓰레기 뭉치를 던져본다고 했다. 캄보디아에서 전쟁은 이미 끝났지만 그로 인한 피해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캄보디아에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거주한다. 영어 교사들뿐만 아니라 천 개 이상의 NGO들을 포함해 문 앞에 서너 자의 두문자(頭文字)로 만든 온갖 명패를 붙여 놓은 외국인들이 넘쳐난다. 크메르루주의 제로년이 이를 용이하게 만든 것 같다. 크메르루주는 정권을 장악한 1975년을 '제로년(Year Zero)'으로 선포했다. 제로년이란 '1975년 이전의 문화와 전통, 역사는 모두 무의미하므로 깨끗이 지워버려야 한다'는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 캄보디아는 '백지상태'였고 정부의 법령 또한 모두 철폐되었다. 더욱이 의사와 변호사들을 비롯해 교육을 많이 받은 이들은 모두 처형 대상이었다. 캄보디아 인구의 20퍼센트가 이때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크메르루주가 정권에서 물러나자 국제사회가 도움의 손길을 보내면서 수많은 외국인들이 밀려들었다. 돈과 관광객, 일거리가 주어졌으며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그들의 나라로 왔다. 온갖 비정부기구들과 인도주의자들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일종의 독선적인 식민주의를 퍼뜨렸다. 그러나 그들은 청바지도 가져왔다. 이로써 캄보디아 경제는 청바지를 비롯한 의류 생산에 기반을 두게 되었다. 캄보디아인들은 리바이스 국가를 위해 청바지를 생산하거나 리바이스 국가에서 만든 비정부기구에서 일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리바이스 국가에서 온 관광객들을 위해 가이드나 운전, 통역을 하며 먹고산다.
리바이스를 만드는 사람들나는 리바이스 공장에 다니는 소녀들의 집을 방문해보았다. 평균 습도가 85도까지 상승하는 나라에서 여덟 명의 소녀가 9㎡ 정도의 방에서 살고 있었다. 그중 가장 활달해 보이는 나리라는 소녀가 동료들의 이름과 맡은 공정을 소개했다. 나리를 포함해 소녀들 대부분은 다림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라는 소녀는 제품에 결함이 있는지 확인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그들은 초과 근무 시간에 따라 매달 45~70달러 급여를 받고 있으며, 그중 대부분을 고향의 가족에게 보내고 있었다. 한 소녀는 돌봐야 하는 형제가 열 명이나 있다고 했다. 방글라데시의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캄보디아 소녀들 역시 가족과의 결속력이 너무 강해서 자신들의 미래는 없는 듯했다. 더욱이 가족을 돌보기에는 그들의 급여가 너무나 적었다. 하지만 그나마 일자리를 놓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방글라데시의 경우 한때 미국의 보이콧으로 인해 거리의 아이들이 넘쳐나는 사태가 발생했다. 캄보디아에서도 비슷한 위기를 겪었다. 2000년 영국의 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캄보디아의 나이키 공장에서 어린이 노동자들이 일하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수천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이후 국제 노동기구가 노동자의 권리를 제대로 제공하는지 감독하는 '더 좋은 캄보디아 공장 만들기'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되었다. 이러한 감시 기관 덕분에 캄보디아 의류 산업은 노동 착취 공장의 이미지를 깨끗이 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