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퍼 머니
애덤 스미스 지음 | W미디어
페이퍼 머니
애덤 스미스 지음
W미디어 / 2007년 2월 / 448쪽 / 15,000원
경기가 좋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꺼림칙한 걸까?인플레이션에는 두 가지 단순한 요인이 연관되어 있다. 첫째는 물건을 살 때 돈을 더 많이 내야하며, 그 돈을 다른 누군가가 챙긴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미국 경제는 이미 어느 정도는 '지수화'되어 있는데, 완벽한 지수화 상황에서는 임금, 물가, 이자 등 모든 것이 정확히 같은 비율로 상승하게 된다. 따라서 문제는 하나가 다른 것들보다 더 많이 상승할 때, 뒤처지는 쪽이 골치가 아파진다는 것이다. 둘째는 물가가 더 이상 과거처럼 오르락내리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물가가 오로지 상승하기만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상승하다가 잠시 멈추어 상황을 살피고는 다시 상승한다. 이는 경제학자들의 표현을 빌자면, 임금과 물가가 경기 변동에 대한 민감도를 상실한 것이다.
한편 경기가 부진할 때 물가는 경제 용어로 '하방 경직적'이다. 달리 표현하면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가격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경기가 살아나면 물가는 다시 풀려나 상승하는데, 물가가 하방 경직적인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설명은 이것이 대공황 이후 우리가 누린 번영과 안정의 대가라는 것이다.
과거 10년간, 인플레이션뿐 아니라 인플레이션에 대한 전망 또한 늘었다. 수치만을 들여다보는 경제학자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상황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그와 정반대이다. 예를 들어보자. 1960년대는 낙관론의 시대였고, 1970년대는 비관론이 팽배했다. 그렇다면 1960년대는 번창하고 있었고, 1970년대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게 맞는 얘기인가? 1960년대가 호황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실질 소득이 30퍼센트 상승했다. 그렇다면 1970년대는 어땠을까? 실질 소득이 28퍼센트 증가하여 1960년대와 거의 비슷하다. 게다가 백인과 흑인, 도시와 농촌, 남성과 여성 사이에 소득이 고르게 분배되었다. 물론 손해를 본 집단도 있었다.
만약 인플레이션이 '제로'가 된다 하더라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볼 때 소득은 고르게 분배되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꺼림칙한 걸까? 로즈 장학생으로 이름을 날렸고, 현재 MIT 경제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레스터 서로우 교수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 이유는 '화폐의 환상'이다. 1970년대 명목 임금은 134퍼센트 인상되었지만,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실질 임금은 28퍼센트 인상에 그쳤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134달러를 더 받자마자 106달러가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셈이다. 이 돈을 도둑맞았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즉 사람들은 임금 인상의 대부분이 인플레이션 때문이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미국인들의 청교도적 사고방식이다. 손에 들어온 것은 모두 자신의 소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134달러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즉 134달러 전부 다 자신이 가져야 마땅한 돈인데, 보이지 않는 손이 그것을 가져가 버린다는 것이다. 활기차고 열정적인 MIT 경제학과 로버트 솔로 교수는 또 다른 이유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동일한 상품을 만들기 위해 이전보다 더 많이 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페이퍼 머니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요소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임금, 물가, 하방 경직성, 화폐의 환상과 같은 요소들을 다시 언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참고로 '화폐의 환상'이란 돈은 많아지는 데 만족은 줄어들 때 느끼는 공허함을 뜻하는데, 이 책에는 인플레이션의 주범으로 몰리고 있는 두 가지 요인이 더 등장한다. 첫째는 연방의 재정 적자다. 즉, 정부가 벌어들이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통화주의자)에게서 인플레이션을 일으킨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둘째 요인도 마찬가지로 정부에 속해 있는데, 바로 연방준비제도이사회다.
이제 화폐를 따라 해외로 나가보도록 하겠다. 이 책은 경제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치, 국제 정세, 나아가서는 전 세계를 넘나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요인들을 통제하기가 훨씬 힘들어진다. 아예 통제할 엄두를 낼 수 없는 것들도 많다. 그러니 OPEC의 실체를 이해하고, 에너지의 경제적 의미와 오일 달러의 재순환을 파악하는 것은 시급한 일이다.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보자. 방금 살펴본 바로는 우리의 기분이 엉망일 때라도 데이터는 정반대 얘기를 할 수 있는데, 경제학의 유용성은 이런 경우에 빛을 발한다. 참고로 경제학은 '일화(逸話)적인 증거' 또는 '상식'을 검증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거대 정부의 지출이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가? 참고로 독일 정부는 국가 지출 비율이 미국보다 높지만 물가 상승률은 더 낮다. 그렇다면 통화 공급이 인플레이션의 원인인가? 스위스와 독일의 통화 공급은 미국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했지만 물가 상승률은 더 낮다. 다시 복잡성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앞에서 나는 경제학의 유용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두 명의 교수 서로우와 솔로의 주장도 들어보았다. 하지만 이제 정반대 입장에 서려고 한다. 즉 경제학자들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가운을 차려 입은 의사에게 찾아가듯 경제학자에게 찾아가 '인플레이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라고 묻곤 한다. 그러면 사방에서 갖가지 대답이 쏟아진다. 모두가 너그러움에서 비롯한 것이며, 선함과 진실함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호의를 베푼 그 손을 부드럽게 꼬집어주고자 한다.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가 늘상 경제학자를 불러대기 때문이다.
더 이상 경제학자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이유윌 로저스의 해답경제학이 완전한 과학이라면 우리는 경제학자를 불러 문제를 내주고는 며칠 내로 해답을 가져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은 딱 떨어지는 학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올해의 조세와 내년의 조세가 서로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제학자에게 해답을 요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사방에서 갖가지 대답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다. 코미디계의 대부 윌 로저스는 "경제학자란 무슨 말이든 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주어진 조건 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말해줄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죠"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두 가지를 지적해야겠다. 나중에 이야기할 둘째는 전략적인 측면으로, 대이론의 종언에 대한 것이다. 첫째는 전술적인 측면으로, 다음의 짧은 일화를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자네는 외생 변수만 들이댄단 말이야
아더라는 친구가 있다. 아더는 수학을 좋아했지만, 자신이 훌륭한 수학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경제학을 전공했다. 아더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 컴퓨터 모델을 만들어 판매하는 곳에 취직을 했고, 지금까지 만족스럽게 일하고 있다. 나는 아더를 방문한 적이 여러 차례 있는데, 우리는 그의 컴퓨터 앞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곤 했다. 예로 "유가가 배럴당 15달러가 되면 물가 상승률이 얼마나 될지 알아봐 주게." 내가 이렇게 말하자 아더는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기 시작했고, 모니터 화면 위에 해답이 표시된다. "다른 조건이 모두 같을 경우 인플레이션은 9퍼센트라네." "그러면 주택담보대출의 금리는 어떻게 되겠나?" 딸가닥하는 키보드 소리. "10퍼센트라?" 아더가 머리를 갸우뚱했다. "너무 높은걸. 이럴 리가 없어. 주택 건설에 대한 가정을 추가해봐야겠군." 딸가닥 딸가닥, 또 딸가닥 딸가닥. … 참고로 그 후에도 수년간 정기적으로 아더를 방문했지만 그가 알려준 정보에 따라 행동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편 당시 나의 관심거리는 중동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해, 할리드 국왕에 대해, 그리고 유전 동부 지역의 시아파에 대해 얘기를 하곤 했는데, 아마 내 이야기가 아더에게는 콩고에서 목격한 사건을 다룬 콘래드의 소설 '측량할 수 없는' 『어둠의 심연』처럼 들렸을 것이다. 이란의 혁명 세력들이 왕정을 타도했고, 유가는 두 배로 뛰었으며, 금값은 최고치를 경신할 참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더의 회사가 만든 모델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불평을 늘어놓았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결과는 하나도 내놓지를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결국 아더는 화를 내면서 "자네는 외생 변수만 들이댄단 말이야!"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호메이니가 등장할 줄 누가 알았겠냐?, 러시아의 밀 농사가 흉작이 될 줄 누가 알았겠냐고?, 사우디 동부 지역이 누가 살든 무슨 상관이람?" 그래서 내가 말을 받았다. "하지만 삶 자체가 외생변수 아닌가."
대이론의 종언리카도 학파의 부상은 위대한 인물의 대단한 저작물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존 메이나드 케인즈의『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인데, 이것은 신념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즉 대공황은 체념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기근이나 자연 재해와 분명히 다르며, 공공 정책을 동원하면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었다. 케인즈 학파의 승리로 인해 강단 경제학자들은 강의가 끝나자마자 오후에 출발하는 의원 전용 특급열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가 정부에 자문을 제공하곤 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은 반세기 중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다. 일반 이론 덕분에 예측이 가능해졌고, 정부는 경기 순환에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예측의 힘은 더 커졌다. 이제 정부는 효과가 있는 일뿐 아니라, '정당'한 일을 할 수도 있게 되었다. 예로 농업의 위험이 너무 커지면 사회가 그 위험을 떠안을 수 있었고, 주택 공급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으면 사회가 주택 공급을 책임질 수 있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경기 순환은 기근, 홍수, 화재와 마찬가지로 길들일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길들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매우 정교하게 조정할 수도 있게 되었다. 1960년대 초반 물가 상승률은 미미했고 실업률은 최저였으며, 생산량은 기록을 경신했다.
하지만 그때가 절정이었다. 인플레이션과 실업이라는 용이 동굴에서 꿈틀대고 있었고, 인플레이션과 불황의 흉측한 괴물 스태그플레이션도 천적 없이 배회하고 있었다. 참고로 비평가들은 케인즈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분명한 징표가 있었다고 말하곤 하는데, 《타임》지(紙)가 케인즈 사후 34년 만에 그를 표지 인물로 실은 것과 리처드 닉슨이 "나는 케인즈 학파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케인즈 학파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들곤 한다. 그런데 경제 수치는 양호한데, 우리는 왜 기분이 좋지 않은 걸까? 불안의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교과서계의 새로운 베스트셀러 『거시경제론』의 공저자인 소장 경제학자 스탠리 피셔는 "불안은 수치 때문이 아닙니다. 무언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아직도 믿고 있습니다. 난국에 처했을 때, 정부는 통화 정책과 재정 정책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이죠. 하지만 이런 정책을 쓸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정책 자체가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거든요. 이는 신중하게 판단한 정책도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1930년대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1948년에서 1973년 사이의 기간이 매우 특이하고 고유한 시기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경제학자들이 어느 정도 신뢰를 얻은 때였죠. 지금 상황에서는 훨씬 더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책 오류를 가려내기가 매우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제가 알고 있는 소장 경제학자 대부분은 이전 세대보다 더 우파적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경제를 이끌어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고? '대이론'은 확실성을 보장했다. 이에 대해 피셔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확실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학생들은 작은 문제를 원합니다. 경제학자들은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싶어하죠. 이제 큰 그림은 없습니다." 큰 그림이 없다니! 옛 신념은 사라졌으나, 새로운 신념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관찰된 사실을 연결하던 과거의 개념 도식은 누더기가 되어 버렸고, 그 뒤를 이을 만한 이론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케인즈 학파, 신(新)케인즈 학파, 후기 케인즈 학파, 반(反) 케인즈 학파는 모두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그 둘 사이의 수많은 계보로 흩어졌다. 즉 인간이 책임감과 능력을 갖추고 선의의 이기심에서 행동하는 존재라고 여기는 낙관적 신조는 빛을 바랬고, 더 사소하고, 덜 확신하며, 더 냉혹한 세계관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만 것이다.
집값은 왜 비싼가?
정부는 우리가 집을 사기를 바라고 있다한 편집자가 말했다. "7년 전에 5만 달러를 주고 집을 샀는데, 지금 그 집을 팔면 13만 5,000달러는 받을 수 있다. 인플레이션에 대처하려면 집을 사는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제 미국에서 상식이 되어버렸고, 주택 투자에 여념이 없는 시민들은 집값이 떨어질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집값이 오르는 게 아니라, 화폐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미국과 몇몇 서유럽 국가에서 '건축금융' 조합이 만들어졌다. 건축금융조합, 또는 저축대부조합은 3년 내지 5년의 주택담보대출을 제공했다. 하지만 1920년까지만 해도 담보대출을 전혀 받지 않은 주택이 전체의 60퍼센트였다. 한편 대공황기에 실업률은 25퍼센트에 달했다.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기간이 한 달, 두 달, 세 달 늘어나자 집집마다 시름에 잠겼고, 생산물을 팔지 못한 농부들은 농장을 잃었다. 그리고 예금주들은 앞 다투어 은행에서 돈을 인출했고, 대출기관에서는 불이행 채무에 대해 저당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또 소득이 있는 집도 기한이 만료된 대출을 갱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은행에 그럴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사회 입법의 제1의 물결은 당시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가 시작한 것이다. 이때는 후버 행정부가 몰락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집을 살 수 있도록 할 의도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빈사 상태의 저축은행을 되살리고자 했던 것이다. 후버는 연방주택대부은행 이사회를 설립했고, 은행들은 재무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경영난에 허덕이는 저축은행들에 빌려주었다. 다음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이 정책을 이어받아 더 과감히 밀어붙였다. 루즈벨트의 주택 관련 법률은 1934년 제정된 국가주택법이 핵심인데, 이 법을 읽다보면, '연방주택국은 주택담보대출을 보증한다'에서 보듯 '보증'이라는 단어가 눈길을 끈다. 다시 말해 저축은행에 예금한 사람들은 공포감에 돈을 인출하지 않아도 되었다. 연방주택국이 주택담보대출의 의미를 확대했고, 이로 인해 월 납입금과 계약금이 훨씬 낮아졌기 때문에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임대료 수준으로 집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사회 입법의 제1의 물결은 파산 선고를 받은 시스템을 되살려 놓았고, 한 세대에 걸쳐 자가 주택을 전국적인 현상으로 만들었다. 참고로 주택담보대출을 뒷받침하는 정부 기관의 보증을 통해 일단의 금융업자들이 성장했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도 집을 더 지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연간 1백만 호씩 늘려가야 했다. 한편 1960년대 중반, 주택 산업은 자금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위대한 사회'는 주택 입법의 제2의 물결을 일으켰다. 기관과 제도도 더 늘어났는데, 이번에는 귀여운 별명도 붙었다. FNMA, 또는 '패니 매'라고 불리는 연방 저당금고는 당시 이미 존재하고 있었는데, 패니 매는 정부만큼이나 쉽게 시장에서 돈을 빌려 주택 담보를 사들이는 데 쓸 수 있었다.
이제 패니 매에게는 '지니 매' 또는 GNMA, 즉 정부 저당금고라는 여동생이 생겼는데, 지니 매는 보조금으로 지은 주택에 대해 보증해주는 제도였기 때문에, 패니 매가 매입할 수 없는 저당권도 매입할 수 있었다. 한편 패니 매는 남동생도 있었는데, '프레디 맥'으로 불리는 연방 주택 대출저당공사였다. 패니와 마찬가지로 프레디 또한 공공 시장에서 채권을 팔아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는데, 패니와 다른 점은 저축대부조합에 현금이 필요할 때는 저당권을 매입해주고 자금이 충분할 때 되팔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