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지성의 흐름으로 본 경제학의 역사

로저 백하우스 지음 | 시아출판사
지성의 흐름으로 본 경제학의 역사

로저 백하우스 지음

시아출판사 / 2005년 12월 / 496쪽 / 23,000원



고대와 중세의 경제학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묘사된 사회는 기원전 1400~1100년경 트로이의 미케네(청동기)적 세계는 물론 호메로스 자신의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그 당시 사회는 질서정연하고 위계적인 사회로, 시장적 관계가 아닌 전쟁에서의 약탈, 시합에서의 승리에 대한 보상, 선물, 정복자들에게 패배한 도시의 공물 등을 통한 부(富)의 분배를 기반으로 한다. 호메로스의 눈에 교역은 부를 획득하는 이차적이고 열등한 방법으로 보였다. 영웅들은 귀족 전사로서 계급에 따라 엄격히 보상받았다. 이들의 경제적 기반은 지주와 그의 가족 및 그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서 일하는 노예들로 이루어진 가구(家口)였다. 호메로스가 보기에 번영은 유복한 가구에 소속된 결과였다.



헤시오도스가 쓴 「노동과 나날」은 가장 실질적으로 경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는 두 개의 창조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나는 유명한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이야기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질병과는 거리가 멀고 힘든 노고도 없는" 신들의 황금시대로부터 노동과 비참이 나날의 현실인 "철의 종족"으로 전락한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기본적인 경제문제가 희소한 자원 때문이라는 점을 인식했다. 헤시오도스의 두 시는 모두 인간의 안전이 토지에 묶여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



BC 7~4세기에는 위대한 문학적 과학적 철학적 업적들이 나타났다. 탈레스는 물이 모든 생명형식을 규정하는 원소라는 사상을 제시했고, 아낙시만드로스는 최초로 세계 지도를 그렸다. BC 6세기말 피타고라스는 이론과 관조를 영혼을 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BC 5세기에는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의 극작가와 헤로도투스, 투키디데스 같은 역사가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발전이 크세노폰(BC 485~354)과 플라톤 시대의 배경이다. 크세노폰이 쓴 '오이코노미코스(oikonomikos)'는 'economics(경제학)'와 'economist(경제학자)'라는 단어의 어원이다. 이는 글자 그대로 '가계 운영'을 의미하며 좀더 엄밀하게 '소유지 관리자' 또는 '소유지 관리'라고 번역할 수 있다. 'oikos'는 '가계'를 뜻하는 그리스어지만 확대하면 '소유지'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그 시대 또한 농경에 기반을 둔 토지소유가 부의 주요 원천이었다. 크세노폰의 「오이코노미코스」는 사실상 농지 경영에 관한 논문이다.



정의와 교환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후대에 다양한 학문 분야에 너무나 커다란 영향을 끼친 '철학자'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Ethika Nichomacheia 제5권)에서 정의(justice)의 개념을 분석했으며, 『정치학』(Politika, 제1권)에서 가계와 국가의 본성에 대해 논함으로써 경제적 문제를 거론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교환과 상품의 분배에 대해 세 가지 유형의 정의를 구별했다. 첫째, 분배적 정의다. 상품들은 각 사람의 공적에 비례하여 분배되어야 한다. 둘째, 교정적 정의다. 손해를 본 사람들에게 보상해줌으로써 이전의 부정의(injustice)를 교정하는 것이다. 셋째, 호혜적 정의 또는 교환에서의 정의이다. 화폐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근본적으로 중요했지만 그는 상업활동의 역할에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크세노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포함한 소크라테스적 철학자들은 시민들이 선한 생활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립된 도시국가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자원이 필요했고, 이 자원은 그들의 토지에서 나왔다. 부를 취득하는 자연스러운 방법이란 선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재화의 양을 늘리는 것이었다. 토지 관리가 근본이었지만 가정에서 생산될 수 없는 재화를 얻기 위한 교역과, 잉여생산물을 필요가 더 큰 어떤 것으로 교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의 교환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부의 정당한 취득과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교환을 제한하는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과 부합했다. 상업에 있어서 정의와 도덕은 17세기까지 경제적 문제에 관한 토론을 지배했다. 17세기에 비로소 시장경제와 상업적 사고방식의 존재가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중세

통상적으로 로마제국의 붕괴까지를 고대세계라고 한다.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지만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인들에게 함락된 1453년까지를 중세라고 한다. 중세는 유럽 역사에서 거의 1천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거대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일은 이후 중세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2년에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테오도시우스 황제 하에서 기독교는 로마의 공식 종교가 되었고, 비기독교와 이단들은 박해를 받았다. 종교와 정치는 오랫동안 서로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는데, 이는 지배 엘리트층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비정통 기독교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중세의 경제사상은 그리스와 로마의 사상뿐만 아니라 유대주의와 초기 기독교를 이해해야만 한다.



초기 기독교 교회의 경제적 사고는 상당부분이 유대주의에 기원한다. 구약적 전통에서는 욕구 제한을 희소성의 문제를 극복하는 중요한 방법으로 생각했다.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는 적대시되었다. 구약 전체를 통해 자기 자신의 부를 증가시키는 행위는 부정한 사업 관행으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착취로 생각되었다. 또한 화폐대부자들은 장사꾼들과 더불어 정의롭지 못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보였다. 징계대상으로서의 부의 추구와 신의 명령을 따름으로써 생겨나는 부 사이에 명확한 구별이 존재했다.



신약에서는 그 강조점이 달랐다. 달란트 우화에서 예수는 집사직과 위험 인수에 대해 말했으며, 올바른 자가 보상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사도 바울에게는 예수의 재림과 현세의 임박한 종말이 중요했다. 바울은 부를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계속 보유하게 되거나 심지어 그 부를 충분히 사용할 시간을 갖게 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썼다. 그러나 12사도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종말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점이 분명해지자 교회는 경제적 발전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했던 견유주의와 스토아주의의 영향으로 세속적 재산에 대한 초연함과 가난이 고무되었으며,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한 생활로 물러난 은자와 성자가 있었다.



이 시기의 두드러진 인물은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345~430)이다. 그는 부는 신이 주는 선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부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어야 했다. 그는 재산을 전혀 소유하지 않은 것을 최상으로 생각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장사꾼과 장사행위를 구별했다. 죄는 교역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사꾼들에게 있었다. 그는 구약의 발전 관념을 확대하여 기독교 왕국에 해당되도록 만들었으며, 부상하는 서유럽 사회들에 영향을 미친 역사관을 제공했다.



12세기 르네상스와 대학교에서의 경제학

12세기에 이르러 유럽은 무어인들이 지배했던 스페인 지역의 재정복을 통해 아랍의 지식을 접할 수 있었고 이 과정을 통해 그리스의 고전을 재발견했다. 이로써 대학교라는 새로운 제도가 세워졌다. 볼로냐, 파리, 옥스퍼드에 최초의 대학들이 설립되었고, 1400년경에는 53개의 대학교가 추가로 설립되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스콜라주의'라고 불리는 경제학은 주로 윤리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경제학에 관한 최초의 스콜라적 저작들은 고해신부들을 위한 지침서에 들어 있었다. 한 예로 1215년경 토마스 오브 초범(1163~1235)이 쓴 『고백에 대한 견해』(Summa Confessorum)가 그것이다. 고리대와 금전욕이 모두 그의 일급 죄악 목록에 올라 있다. 그러나 그는 상업을 강력하게 옹호했으며, 이런 견해는 이전의 저작들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다.



스콜라주의 경제학의 주요 인물들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1200~1280)와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이다. 재산과 정당한 가격 같은 문제들을 논의하면서 스콜라주의 저술가들은 경제적 문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지지하고 해석하기 위해 자연법에 근거한 논증을 제공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이 강제에 처하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부정이나 강제의 희생자들이 보상을 받아야 할 필요성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런 문제를 논의하면서 그들은 다양한 경제적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이며 가격 결정에 있어서 경쟁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탐구하였다. 또한 화폐의 본성을 탐구했으며 새로운 상업제도의 발전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이자 지급을 정당화하지는 않았지만 기대 이윤 또는 기대 손실, 기회비용 같은 개념을 사용했다.



16세기, 근대적 세계관의 출현



종교개혁


16세기의 종교개혁으로 유럽은 정치, 사회적으로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논쟁의 여지는 많지만 종교개혁은 17세기와 18세기 동안 프로테스탄트 나라였던 영국과 네덜란드의 경제성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루터는 고리대 금지와 정당한 가격의 교의를 엄격히 고수했다. 칼뱅은 고리대에 관해서는 좀 유연한 태도를 취했지만 정당한 가격은 강하게 고수했다. 사업가들은 오직 보통 이하의 이윤만을 취해야만 하며,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되었다. 고리대와 관련해서도 칼뱅의 사고는 실제로는 스콜라적 교의에 가까웠다. 그는 이자의 지급이 합법적이라고 인정했지만 여러 가지 제한조건을 두어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즉 사람들은 화폐대부를 직업으로 하면 안 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이용해서도 안 되며 이자율에 관한 법적 제한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 등을 주장했다.

중상주의

유럽 국민국가의 출현은 경제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상주의'라는 용어는 1763년 미라보 후작 빅토르 리케티가 만들어냈지만 대중화시킨 사람은 애덤 스미스였다. 그는 1776년 『국부론』에서 자유를 제한하는 일련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그러한 정책에 중상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중상주의 정책은 산업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국가권력의 사용, 수입에 대한 수출 초과 획득 또는 증대, 귀금속의 축적이 국부(國富)를 위해 중요하다고 여겼다.



스콜라적 사상은 16세기와 17세기에도 존속하고 있었는데 스페인의 살라망카 학파가 대표적이다. 살라망카 학파 중 마르탱 드 아츠필쿠에타 나바로(나바루스라고도 한다)는 이윤을 위해 화폐를 교환하는 것은 화폐의 중요한 이차적 사용이라고 주장했다. 상인들이 재화를 구매하고 판매하여 적정한 이윤을 버는 것이 정당한 것처럼 화폐교환도 적정한 생계비를 벌기 위해 행해진다면 합법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고리대에 유연한 입장을 취했으며, 손해에 대한 더욱 큰 보상 범위를 인정했다.

인플레이션은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서처럼 16세기 영국에서도 심각한 문제였다. 16세기 말 밀 가격이 세기 초에 비해 4~5배가량 상승했다. 토머스 스미스(1513~1571)는 명목소득과 실질소득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했다. 그는 가격상승은 고정소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유해하다고 지적했다. 스미스는 무역수지의 중요성을 인식했으며 불필요한 사치재나 영국원료로 만들어진 재화의 수입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일자리를 창출하고 나라에 재화를 창출해줄 새로운 산업의 도입을 격려했다. 이는 모두가 중상주의적인 것으로 규정될 수 있는 정책들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이기심에 의해 추동된다고 전제하면서 가격메커니즘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주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저작 『이 시기의 영국 왕국의 공공복지에 관한 대화』는 스콜라적 경제학과는 확연한 단절을 나타낸다.

무역차액론

17세기 영국은 이른바 '중상주의' 시대와 맞아떨어진다. 에드워드 미셀던과 토마스 먼은 재화의 흐름이 환율과 지금(地金)의 흐름을 좌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화의 유출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무역수지를 증대시킬 필요가 있었다. 즉, 수입 특히 불필요한 제품의 수입을 줄이고 수출을 증가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높은 환율이 아니라 낮은 환율이 필요했다. 무역차액론자들은 화폐를 축적될 수 있는 부가 아닌 운전자본(working capital)으로 보았다. 먼의 무역차액론은 대외무역을 중심에 둔 성장이론이었다. 무역차액론이 세기말에는 보호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었지만, 원래 미셀던이나 먼 같은 창시자들은 경제적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사용했다.



18세기 프랑스에서의 절대주의와 계몽주의

프랑스 정부 정책의 골격은 1661년부터 루이 14세(1643~1715년 재위) 하에서 재무장관을 역임한 장 바스티트 콜베르(1619~1683)에 의해 세워졌다. 콜베르는 수출은 늘리고 수입은 줄이고자 했으며, 그럼으로써 국민적 자급자족을 달성하고 무역의 동인이 될 재보를 축적하고자 했다. 인구를 증가시키고 임금을 낮게 유지하려는 시도가 행해졌으며, 강제적으로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게 만들려고 했다. 콜베르는 보조금을 통해 숙련노동자들의 유입 이민을 장려함과 동시에 유출이민을 방지하려고 했다. 무역은 세심하게 규제되었으며, 종종 외국인 노동자들을 통해 새로운 산업이 일어났다.



루이 14세의 경제정책에 대한 초기 비판가들 중의 한 명은 피에르 드 부아길베르(1646~1714)였다. 『프랑스 상론』에서 부아길베르는 루이 14세 치하의 경제를 설명하면서 파멸적인 쇠퇴라고 보았다. 그는 소득이 이전 30년 동안 반감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분석의 출발점은 교환의 필요성이었다. 그는 화폐를 계속 유통하게 만드는 것은 소비이며, 이는 한 사람의 지출이 다른 사람에게는 소득이 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유방임을 주장했지만 곡물가격 안정을 위해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예외를 제안했다.



18세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란 유럽의 매우 후진 지역이었던 곳에서 두드러지게 활발하게 일어났던 지적활동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들은 기성종교의 교의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현실의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프랜시스 허치슨(1694~1746)은 애든버러에서 도덕철학교수를 역임했으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그는 가치에 대한 수요공급이론을 갖고 있었으며 이는 후에 제임스 스튜어트에 의해 수용되었다. 허치슨은 또한 노동 분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것을 로크로부터 파생된 번영에 대한 노동이론과 결합시켰다.



당시 경제학에서 추상적 추론이 가치 있는 일인지에 대해 회의적인 관점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데이비드 흄(1711~1776)은 상업, 화폐, 이해, 세금, 공적 신용 같은 '속된' 주제들에 이른바 '정교하고 치밀한' 추론을 적용하는 것을 옹호하는 에세이 시리즈를 시작했다. 흄은 상업과 부에 대해서, 노동이 부의 원천이며 사람들이 일할 유인을 갖고 있을 경우에만 노동이 공급될 것이라는 이론을 폈다. 흄은 국가의 힘이 노동과 상업에 의존한다는 것을 확증한 후 더 나아가 화폐가 부라는 주장을 논파했다. 그는 최상의 정책이란 통화량을 지속적으로 증가시키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는 '중상주의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