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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를 이긴 중국 간디를 넘은 인도

로빈 메레디스 지음 | 이솔
마오를 이긴 중국, 간디를 넘은 인도

로빈 메레디스 지음

이솔 / 2008년 7월 / 371쪽 / 17,000원



1장 마오쩌둥이 중산층을 만나다




1949년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을 선포했다. 그는 중국을 자신이 꿈꾸는 유토피아로 바꾸는 작업에 착수했다. 공장 노동자에 중심을 두었던 마르크시즘과 달리 농민에게 초점을 맞춘 마오쩌둥은 1955년 집단 농장체제를 구축했다. 농부들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고, 개인이 생산한 것을 사고팔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식량이 부족한 나라에서 생산량은 몇 년 만에 40%나 줄어들었다. 공산주의 국가의 이상과 국민들의 호구지책이 충돌한 싸움에서 패자는 순박한 국민들이었다. 그러는 동안 마오쩌둥은 중국을 산업 강국으로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농민들은 모든 사유재산을 내 놓고 추수 대신 철강 생산에 나서야 했다. 그의 정책은 전국적인 기근을 야기했고 1952~1962년 사이에 3~4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마오쩌둥은 괴상하고 비극적인 방법을 통해서 중국 공산화라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다. 국영기업이 경제의 77.6%를 차지했고 집단농장이 모든 것을 소유했다. 마오쩌둥이 집권한 27년 동안 중국은 정치적 노이로제와 경제적 재앙에 휩싸인 나라였다.



1976년 마오쩌둥이 죽고 덩샤오핑이 새 지도자로 부상했다. 덩샤오핑의 농업개혁은 중국의 계획경제를 시장경제 쪽으로 밀어 붙였다. 집단농장 토지는 개별 가족에 분배되었고, 농민들은 각자의 수확량에 근거해 보수를 지급받기 시작했다. 1978~1984년 사이 농촌 연 평균 소득이 15%씩 증가했다. 경제적 변화로 인해 농민 생활은 풍족해졌고, 삶의 선택권도 넓어졌다. 개혁이 시작된 지 25년 지나자 무려 2천 2백만 개의 소규모 사업체가 생겨나서 중국 경제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덩샤오핑은 농업개혁에 이어 산업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경제특별구역을 만들어 외국 기업을 유치했다. 외국 기업들은 특별구역 내에서는 자유롭게 공장을 짓고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했다. 처음에는 홍콩, 대만 화교들이, 나중에는 미국, 유럽, 일본, 한국이 경제특별구역에 공장을 세웠다. 1992년 덩샤오핑은 국민들에게 "사업의 바다로 뛰어들라"고 격려했고, 이를 계기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데 무척 조심스러웠던 중국 본토인들도 앞을 다투어 회사를 차리기 시작했다.



경제특별구역 실험이 성공을 거두자 중국은 더 많은 외국 기업들이 공장을 짓게 하였다. 이를 위해 광활한 공업단지를 만들고 세제상 특전 등 다양한 투자유인 정책을 제시하고 IT 기반시설을 구축했다. 정부 관리들은 중국의 새로운 정책을 "중국적 특성을 가진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그것을 뭐라 부르든 공산주의로부터 시장중심 경제로의 변환이 정치적 소요 사태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은 놀랍다. 중국이 공산주의로부터 살금살금 걸어 나온 것은 어떤 혁명보다도 중대한 사건이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정신을 저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마오쩌둥이 일으킨 당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중국 지도자들은 이중의 목표를 성취해야 한다. 하나는 중국을 현대화시키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으로 고통 받는 국민들을 잘살게 해주는 것이다. 그들은 연 8%의 경제성장을 이루지 못할 경우 국민들의 반란으로 당이 전복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이어지는 드래곤 경제를 만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지난 사반세기 동안 중국 GDP는 연 평균 9.6% 증가했다. 같은 기간 인도는 5.7%, 미국은 3%씩 성장했다. 중국에서는 몇 년 안에 1억 명이 중산층 수준의 구매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우리 곁에 현대화된 중국이 성큼 다가서고 있다.



2장 물레에서 광섬유 케이블로



인도의 경제적 변화는 중국보다 10년 늦게 다른 형태로 찾아왔다. 1991년 인도는 완전히 파산상태였다. 인구의 40%가 빈곤선 이하로 떨어졌고 정부재정은 무너졌으며 17%에 달하는 인플레를 기록하고 있었다. IMF는 인도가 일련의 개혁조치에 동의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구제 금융에 나서려 했다. 인도 정부는 신속하고 단호하게 대응했다. 국민에게 위기를 알리고, 통화 평가절하, 수입규제 해제, 수출장려를 위한 구조개혁을 발표했다. 국영 기업을 민간 투자자에 공개하고, 무역과 산업을 통제하던 관료적 형식주의와 부패를 잘라냈다. 소득세를 내리고 기관투자자들이 주식시장에서 인도 회사의 주식을 살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인도 전체로 볼 때 효과는 극적이었다. 경제는 빠른 속도로 발전했고 회사들은 사람들을 고용하기 시작하였다. 인플레는 통제 가능한 한 자릿수로 떨어졌고 외환 보유고는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1991년까지 인도는 경제적 유배상태에 놓여 있었고, 국민들은 가난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인도는 독립 이후 두 가지 고질적 망령에 시달려왔다. 하나는 간디의 반산업화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네루의 사회주의이다. 간디는 인도가 산업화된 서구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물레 같은 전통적 생산방식을 옹호했으며, 인도 국민들에게 수입품을 쓰지 말라고 했다. 그의 경제정책은 상징적 의미는 풍부할지 모르지만 비실용적이었다. 수많은 인구가 가뜩이나 빈약한 자원을 나누어 써야 하기 때문이다.



1991년의 변화는 인도 전체에 경제적 호황을 불러왔다. 하지만 개혁 작업은 불과 몇 년 만에 바지직 소리를 내며 꺼져 버렸다. 1996년 대규모 부패 스캔들 이후 인도 정부는 계속 불안정했다. 경제 개혁은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되어 느리게 진전되었으며, 후퇴하는 경우도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인도 지도자들은 중국의 부상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인도는 연 3.5%의 성장률에 기록했는데 이는 중국 발전 속도의 1/3에 불과한 수치이기 때문이다. 인도 정부 관리들은 "우리가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중국이 곧 우리를 침몰시킬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도의 개발계획은 진척되다가 멈추기를 되풀이했다. 그것은 인도가 아직도 현대 세계의 일원이 되고 싶은지를 결정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방갈로르 공항이 좋은 예다. 방갈로르 공항은 1942년 처음 지어졌고 60년이 넘도록 변한 것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일단 공항을 나서면 인도 제3의 도시 방갈로르에서는 후진적인 광경을 볼 수 없다. 인포시스, 위프로 등 인도를 대표하는 IT 기업은 방갈로르에 엄청난 규모의 사옥을 갖고 있으며, 인도 생명공학 산업의 절반이 그곳에 자리잡고 있다. GE, 필립스 같은 세계적인 회사들도 이곳에 사무실을 갖고 있으며 이들 기업의 직원들은 초고속 인터넷으로 세계경제와 연결된 채 일하고 있다.



인도에는 이런 농담이 있다. 덩샤오핑이 차를 타고 가는데 운전기사가 물었다. "공산주의로 가려면 좌회전, 자본주의로 가려면 우회전을 해야 하는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 그러자 덩샤오핑이 말했다. "그냥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하면 돼." 반면 인도에서는 개혁으로 가는 길이 실제 도로만큼 울퉁불퉁하다. 인도 정치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있는 것으로 보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2004년 경제가 호황임에도 물러나야 했던 바지파이 총리의 전철을 밟아야 할지도 모른다. 인도의 나스 상무장관은 말한다. "우리의 정책은 적자생존이 아니라 약자의 부활입니다. 하지만 인도가 개혁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일반 대중이 느끼기 시작했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입니다."



3장 Made by America In China



전 세계 무역의 많은 부분이 중국과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외국 회사들이 중국에 공장을 짓게 하려고 중국 정부가 온갖 장려 정책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은 현대화 운동을 통해 개도국 특유의 저임금 노동력을 최첨단 기술 및 수출 친화적 사회기반시설과 결합시켰다. 중국에서 외국 회사들은 대규모 저임금 노동력을 공급받는 동시에 엄청난 잠재력을 갖춘 대규모 신규 고객기반을 찾았다. 게다가 새로운 공장과 사무실 빌딩이 중국에 속속 들어서면서 서구 회사들은 서로 물건을 팔면서 수익을 올릴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요인이 한꺼번에 모여 중국은 인도를 비롯한 다른 개도국을 앞질러 전력 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경제의 상승세가 항상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중반 중국에 대한 외국인 투자는 급증했지만, 많은 회사들이 도중에 지쳐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된 데는 중국 정부의 정책에 일부 원인이 있다. 중국은 몇몇 산업 분야에서 외국 회사와 중국 회사의 제휴를 의무로 규정했다. 이런 정책으로 인해 합작회사를 관리하는 중국 회사들을 부패하고 무능한 경영자가 운영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또 한편으로 외국인들이 중국의 내수 시장이 엄청나게 커질 것이라고 잘못 예측한 것도 요인이 되었다. 비록 중국 내수에 대한 수익예측은 어긋났지만 오늘날 중국에 있는 미국 회사 중 80%가 수익을 내고 있다. 중국 10억 인구를 고객으로 만들겠다는 전략을 버리고 중국 공장을 수출용으로 활용하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서구 기업들은 미국, 유럽, 일본 고객들을 겨냥한 상품을 만들기 위해 중국의 저임금 노동력을 이용했고 그 과정에서 중국은 거대한 하청업체로 변모했다. 그로 인해 중국 노동자들의 소득이 올라가기는 했지만, 이익의 가장 큰 몫은 외국 회사들, 그리고 더 낮은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게 된 외국 소비자들에게 돌아갔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생산되어 수출된 신발이 미국에서 100달러에 팔린다면 그중 15달러만 노동자 임금이나 운송비용 형태로 중국에 남고 나머지 85달러는 미국 회사의 몫이 된다.



중국 경제는 워낙 성장속도가 빨라 2008년 독일을 따라잡아 세계 3위가 될 태세이다. 미국은 2006년 중국 무역에서 2,330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면 과대 포장된 중국의 경제력은 대부분 외국인들의 몫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상위 25개 수출업체 중 4개만이 중국 회사이고, 중국이 수출한 첨단제품의 88%는 외국 회사 및 외국 합작회사의 중국 측 파트너가 생산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제(Made in China)는 미국이 중국에서 만든 것(Made by America in China) 아니면 유럽이 중국에서 만든 것이다. 또한 중국에서 가장 이익이 많이 나는 사업은 중국 본토인들의 수중에서 벗어나 있다. 중국은 자기 자신의 데뷔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셈이다.



4장 인터넷 스파이스루트



인도에는 영국 사람보다 두 배나 많은 1억 명의 영어 사용자들이 있다. 이들은 수백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인도로 끌어오면서 한때 무너져 내리던 인도 경제를 극적으로 부활시키고 있다. 그 과정에서 중산층 미국인들은 자신의 직장이 보스턴에서 방갈로르로 옮겨갈까 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100만이 넘는 화이트칼라 서비스 산업 일자리가 인도로 이미 옮겨갔고, 향후 30년 동안 900만 개의 미국 일자리가 옮겨갈 것이다. 인도인들은 외국 회사 대신 전화를 응대하고, 컴퓨터 코드를 작성하며, 회계에서 투자은행 일에 이르기까지 과거 미국과 유럽 본토에서 이루어지던 정교한 일들을 떠맡고 있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 되는 동안 인도는 전 세계의 백오피스(back office)로 변신 중이다. 해외 기업들은 비용절감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올리겠다는 골드러시의 꿈을 품고 인도로 몰려들고 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수백만 명의 서구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남을 것이다.



새로운 일자리가 외국으로 옮겨가는 오프쇼어링에는 여러 방식이 있다. 다국적 기업들은 해외에 직접 사무실을 열고 그쪽으로 사무직 일을 옮기면 비용이 줄일 수 있다. 아니면 인포시스 같은 대형 인도 회사들을 고용해 사무직 노동자들을 공급해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 또한 서구 회사들이 자기의 백오피스를 IBM 같은 미국 회사에 아웃소싱하면, 이들 미국 회사들은 백오피스 업무를 인도에서 처리한다. 예를 들어 IBM은 이미 225개 고객 회사들의 IT 시스템을 모두 인도에서 관리하고 있다.

인도는 이미 전 세계 법률자문, 기업 컨설턴트, 세무사, 은행가의 본거지가 되었다. 미국에서라면 박사학위를 필요로 하고 연 15만 달러의 보수를 주어야 할 일자리까지 옮겨가고 있다. 인도가 세계 노동시장에 들어오면서 선진국 수백만 대졸 노동자들은 자신이 임금 면에서 경쟁력을 잃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도대체 왜 이처럼 일자리가 몰리는 것일까? 계산해 보면 답이 나온다. 예를 들어 IBM이 5천 개의 기술 관련 일자리를 인도로 옮기면 매년 1억 6800만 달러를 절감할 수 있다. IBM은 절감된 비용으로 가격을 낮춰 판매를 늘리거나 주주에게 이윤을 돌려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다른 회사들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해외로 일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다.



오프쇼어링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인도는 외국에서 공장들은 많이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 인도에서 제조업을 하려면 부서져 가는 고속도로, 오래된 공항, 느려터진 항만, 시대에 뒤진 통관절차 같은 문제에 부닥치기 때문이다. 외국 기업들이 인도에 생산 공장을 짓도록 설득하는데 꼭 필요한 현대적 사회기반 시설이 있었다면, 수천만 명의 인도인들이 지금과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외국인 투자자들이 서비스업 일자리를 인도로 옮기면서 일단 인도에 대해 믿음을 갖게 되자 그로 인해 인도의 제조업까지 혜택을 입게 되었다. 돈을 쓸 수 있게 된 인도인들이 점차 많아지면서 외국 회사들은 인도가 거대한 시장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어떤 회사들은 중국처럼 정치적 전망이 변덕스러운 나라에만 생산을 의존하는 것이 걱정된 나머지 인도를 대안으로 주목하고 있다.



5장 조립라인에서 분해라인으로



20세기 초 헨리 포드는 조립라인을 대중화하면서 산업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당시 미국 북부 미시간 주에서 배로 운송된 철광석이 포드 공장의 한쪽 끝으로 들어가면 반대편에서는 완성된 차가 굴러 나왔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오자 헨리 포드의 조립라인은 수천 개 조각으로 부서져 전 세계로 흩어졌다. 조립라인이라는 용어는 공급사슬로 대체되었으며 각 단계의 생산은 이제 유연한 사슬의 고리가 되어 그 다음 고리, 또 그 다음 고리로 연결된다. 자동차 한 대당 전 세계에서 만들어진 평균 5천 개의 부품이 들어간다. 심지어 값싼 장난감조차 중국의 한 성에 흩어져있는 10개가 넘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부품들로 조립된다.



공급 사슬을 따라 효율적으로 물건들을 이동시키기 위해 기업가들은 세계 각지의 모든 다양한 부품들을 추적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도요타는 공급업체에게 각 부품마다 무선주파수 인식표를 부착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사의 컴퓨터는 부품들을 하역 부두에 있는 트럭에서부터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마지막 조립라인까지 정확한 시간에 보낼 수 있다. 부품들을 조립하는 과정은 전 세계 수십만 개 공장, 본격적으로 세계화된 기업, 빠르게 진화하는 테크놀로지 등이 한데 어우러져 연출하는 현란한 댄스라 할 수 있다.



조립라인을 쪼개 전 세계에 펼쳐놓게 되면서 회사와 노동자의 기능이 극적으로 달라졌다. 사람들은 이제 포드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디트로이트로 옮겨가지 않는다. 대신 자동차 회사들이 긴 조립라인을 잘라 재구성한다. 세계로 연결되는 운송망이 인접해 있고 저렴한 노동력을 구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일거리를 보낸다. 사람 대신 일자리가 옮겨 다니는 것이다. 현대의 분해라인은 공산품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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