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왜 신용불량 국가가 되었을까?
찰스 R. 모리스 지음 | 예지
미국은 왜 신용불량 국가가 되었을까?
찰스 R. 모리스 지음
예지 / 2008년 8월 / 294쪽 / 13,800원
CHAPTER 01: 자유주의의 종말1980년이 되자 독일과 일본이 공작기계산업을 석권했고, 미국의 철강과 섬유는 파국을 맞았는데, 외국 기업의 침공에 대해 보여준 대응은 미국 기업들이 얼마나 무능해져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알려준다. 예로 디트로이트가 '계획적 진부화'(소비자들이 심리적으로 기존 제품을 진부하게 느끼도록 유도하여 대체 수요를 유발한다는 마케팅 이론) 이론에 도취되어 있을 때, 도요타와 폴크스바겐은 작고 튼튼하며 연비가 우수한 자동차를 미국인들에게 광고했는데, 1973년에 석유파동이 절정에 달하면서 소형차 판매가 급증했고, 결국 미국 차들은 완전 실패작으로 드러났다. 미국 기업들의 안주와 무능만으로도 사태가 충분히 악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인구변화 추세까지 가세해서 이중고를 안겼다.
경제학자에게 1970년대 미국의 생산성 추락에 대해 물어보면, 투자 감소가 원인이라고 지적할 것이다. 그런데 인구학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청년노동자 계층의 급증을 원인으로 지적할 것이다. 왜냐하면 베이비붐 세대가 1970년대에 20대에 진입하면서 미숙련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노동시장에 유입되었고, 그 결과 생산성이 하락하고 임금은 하향 고착화되었는데, 노동력이 싸고 자본이 비쌀 때에 투자를 줄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한편 1970년대 연방정부 적자는 존슨 때만큼이나 규모가 컸다. 더군다나 달러까지 문제였다. 당시 미국은 달러 가치를 금 1온스당 35달러로 고정시켜 놓았는데, 이 제도는 전 세계의 통화 안정성을 유지하는 근간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금 보유고는 점점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화 트레이더들은 달러를 투매하기 시작했고, 미국 정부의 해결 능력이 시험대에 올랐다. 결국 1971년 8월에 닉슨은 감세 정책, 경제 전반에 걸친 임금과 물가통제 그리고 모든 수입품에 대한 증세와 함께 달러 금본위제의 무효화를 발표했다. 정치적으로는 엄청나게 획기적인 조치였다. 하지만 닉슨은 노동조합의 압력과 공급가 인상과 외국 기업의 경쟁으로부터 대기업들을 구해냈고, 소비자들은 안정된 물가에 흡족해했다.
1970년대 '대인플레이션'을 촉발한 OPEC의 급격한 유가 인상은 달러 가치 변동이 낳은 결과였다. 1973년이 되면서 OPEC 국가들이 유가를 세 배나 인상했을 때, 달러 가치는 금 1온스당 100달러 수준, 즉 종전 가치의 3분의 1로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1979년에 OPEC가 다시 유가를 세 배 올리자, 달러는 온스당 233달러에서 578달러 사이에서 변동했다. 또 달러가 1980년에 온스당 850달러로 급락했을 때 금으로 환산한 유가는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는데, 문제는 바로 미국이 자국 통화의 가치를 형편없이 절하했다는 데 있었다.
아무튼 케인즈식 자유주의의 시절은 가고,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전혀 다른 패러다임의 시대가 왔다. 바로 밀턴 프리드먼의 '통화주의'다. 케인즈주의가 거의 전지전능한 기술 관료를 맹신한 것이라면, 프리드먼주의는 아무런 제약 없이 작동하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숭배한 것인데, 1980년 레이건의 당선은 케인즈식 자유주의가 종말을 고했다는 신호였다.
CHAPTER 02: 월스트리트의 새로운 종교카터가 1979년에 폴 볼커를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으로 임명했던 시기는 월스트리트와 국제 금융당국이 비상 경고음을 내고 있던 때였는데, 볼커는 중요한 직무 -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일과 금융 질서를 회복하는 일 - 를 수행해야 했다. 참고로 볼커는 프리드먼의 통화주의(인플레이션은 오직 통화량을 조절함으로써만 통제 가능하다는 주의)가 워싱턴에서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던 시점에 의장으로 취임했는데, 의장직을 몇 개월 수행한 뒤에는 통화주의 전략을 공식적으로 채택해서 인플레이션을 종식시키고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했다.
인플레이션은 다행히 1982년 중반에 잡혔고, 소비자 물가지수는 그해 후반기 내내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연말에는 연방기금금리가 8.7%라는 합리적인 수준으로 떨어졌다. 성장률은 4분기에 양의 수치를 기록했고, 1983년에는 4.5%를, 1984년에는 7.2%를 기록했다. 달러 가치도 상승했다. 월스트리트는 결국 납득했다. 이때부터 미국에서 물가안정 우선주의는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런데 자유 시장 통화주의자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 하나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기존의 통화 공급량을 줄이는 조치를 취하면, 이윤을 추구하는 은행들은 그러한 계약을 회피할 수 있는 새로운 금융기법의 개발을 시도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은행들은 그렇게 했다.
한편 레이건은 경제학적으로 시카고학파의 핵심 원리(낮은 세금, 자유 시장, 최소한의 규제 등)를 신봉했는데, 현실을 보면 그 성과들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예로 1980년대의 두 가지 중요한 경제적 사건, 차입매수 붐과 저축대부조합 위기를 보면 시장의 힘과 한계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먼저 차입매수 붐은 대략 1982년부터 1989년까지 지속됐는데, 처음 4년간은 자유시장의 구조 조정 능력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였다. 하지만 1986에 이르러 PER은 비정상적으로 평균 3배나 상승했고, 시장은 점점 미쳐만 갔다. 그런데 일단 이 과열 상태가 폭발하자, 시장은 단 몇 달 만에 붕괴했다. 두 번째 사례인 저축대부조합 위기는 순전히 경제적 낭비였다. 아무튼 차입매수 붐과 저축대부조합 위기의 상황을 보면 금융시장에 대한 느슨한 규제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참고로 클린턴이 취임했을 무렵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전 세계적 경기침체를 예견하고 있었다. 당연히 클린턴은 선거운동 당시, 경제 활성화 계획의 세부안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그는 로버트 루빈으로 대표되는 민주당의 아주 이상한 노선의 저항(재정적자야말로 모든 경제적 해악의 근원이며 그것을 해소해야만 경제 회복이 가능하다는 주장)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클린턴은 자신의 주장대로 끌고 가는 데 실패했고, 루빈이 이겼다. 그리고 루빈이 기약한 것처럼, 클린턴은 기적과도 같이 자신의 임기 동안 호황을 이끌어냈다. 소위 닷컴버블로 알려진 호황이었다. 그런데 반규제주의자인 그린스펀은 자산버블이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관여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기술주 버블의 폭발은 클린턴이 백악관 열쇠를 후임자에게 건넨 뒤에야 일어났다.
아무튼 1980년대와 90년대의 경제적 경험은 각각 성격이 너무 다르긴 하지만, 두 가지 핵심 원리에 대한 보수주의적 신념을 공고히 했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1980년대 초와 90년대의 경제회복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자유시장이 지니는 위력이다. 둘째는 사실상 탈규제 상태의 금융시장이 지니는 중요성인데, 이는 여러 버블 사태가 강력한 반례가 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CHAPTER 03: 신용버블의 3가지 전조1980년대부터 9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세 가지 서로 다른 희비의 주기를 경험했다. 1987년의 주식시장 붕괴와 1994년 모기지대출 사고 그리고 1998년의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 위기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사태는 모두 컴퓨터 성능의 획기적 향상, 수학박사들의 월스트리트 진출과 더불어 등장한 새로운 투자기법에서 연원한다. 새로 등장한 이 '퀀트'(quant. 금융상품을 계량적, 수학적 기법으로 분석하는 전문가)들은 전통적인 투자 자산들을 보기 좋게 다듬어서 투자자의 요구대로 설계했고, 복잡해지고 구조화된 투자기구들이 광범위하게 등장하면서 법인 도매금융 관행도 혁신적으로 변했다.
한편 앞서 거론한 세 가지 사태들은 1980년대와 90년대의 금융시장 지각변동의 사례이자, 새로운 대륙의 취약한 지진 단층선 몇 군데를 노출시켰는데, 가장 먼저 거론할 단층선은 이 세 가지 위기가 금융 감동당국의 시야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싹이 텄다는 사실이다. 레이건 행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무조건적인 규제완화정책 때문에 금융기관의 대출 활동은 규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대상으로 꾸준히 확대되어 갔고, 독단론에 빠진 시장자본주의자들은 규제완화 추세를 쌍수를 들고 환영했는데, 그린스펀이야말로 가장 열정적인 옹호자였다.
다음으로 언급할 단층선은 '대리인' 문제의 심화다. 대리인 문제란 피고용인이냐, 하도급업자 또는 용역을 수행하는 회사가 의뢰인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CMO(모기지담모부증권)의 성공 이후 등장한 모기지산업의 세분화가 대리인 문제를 더욱 키웠다. 참고로 그전에는 지역 저축대부조합들이 새로운 모기지 예약을 받을 때, 창구 직원은 고객에게 가장 유리한 모기지대출상품을 소개할 유인이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형태의 모기지 은행들이 출현하면서 모기지를 불과 몇 주 또는 몇 달만 보유한 뒤 팔아버림으로써, 모기지 중개인들은 그들이 받는 중개 수수료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고, 또 주로 이메일이나 전화로 고객과 접촉하는 시스템이 이를 키웠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단층선은 투자의사결정이 점점 수학적 도구에 의존하는 경향인데, 대규모의 증권 포트폴리오는 어느 정도 수학이 설명하는 바에 따라 움직일 수 있으나, 그런 유사성도 스트레스 상황이 발생하면 깨진다. 즉 금융상품의 수학적 재구성은 시장효율성 제고에 기여했고 자금 조달 비용을 감소시킨 면이 있지만, 상품에 내재하는 리스크를 잘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금융거래의 규제완화, 대리인 문제의 약화, 모든 금융 활동이 수학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착각은 함께 작용해서 2000년대의 엄청난 신용버블 사태를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CHAPTER 04: 돈으로 쌓은 둑1980년대에는 대형 은행의 자기자본 부족에 대한 우려가 팽배해지자 규제당국은 은행의 자기자본 규정을 강화했다. 그러나 은행은 주택모기지은행들이 소량의 자기자본만으로도 앞 다투어 대출을 집행(유동화 때문에 가능)하는 것을 보았고, 새로운 자기자본규제 조항이 발효되기 시작했을 때 은행들도 적극적으로 유동화에 나섰다. 즉 상업용 모기지, 기업 대출, 고수익 기업인수 대출, 신흥 개도국 대출 등을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자기계정에 보유하지 않고, CLO(대출담보부증권)나 CDO(부채담보부증권)의 패키지로 만들어서 외부 투자자들에게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은행은 자기자본 확충 부담을 피하면서도 높은 수수료를 수취할 수 있었다. 그러자 금융이라는 화려한 건물에 입주한, 온갖 하찮아 보이는 금융 사업자들조차 하루가 멀다 하고 황금알을 쏟아냈다.
자금 조달에 비용이 전혀 들지 않고 대출에 아무런 비용과 위험이 수반되지 않을 때, 정상적인 대출자라면 더 이상 돈을 빌려줄 대상이 없을 때까지 대출을 계속 집행할 것이다. 차입매수사업은 사모투자의 형태로 단장한 뒤 기세등등하게 시장에 복귀했는데, 전형적인 거래 구조는 다음과 같다. 먼저 10억 달러를 지분으로 투자한다. 그리고 40억 달러를 차입해서 쓸 만한 기업 하나를 골라 50억 달러에 매입한다. 물론 그 회사의 임원들과는 좋은 조건의 거래 계약을 별도로 체결한다. 10억 달러의 특별 배당 지분을 확보한 다음 기업인수 재료로 주가가 상승하기 시작하면 지분을 일반 투자자에게 되팔면서 몇 십억 달러를 추가로 챙기는데, 이 모든 과정에서 리스크는 하나도 지지 않는다. 이를 두고 한 은행가는 "사람들은 돈으로 쌓은 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했다. 나아가 사모투자펀드는 굳이 돈을 모으러 다닐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돈이 그들을 쫓아다녔다.
하지만 모든 버블은 터진다. 버블이 클수록 폭발력은 크다. 2007년 늦은 가을, 버블에서 가스가 새어 나오던 소리가 마침내 거대한 폭음으로 변했다. 그런데 신용버블을 그토록 처참하게 폭발시킨 중요한 구조적 요인들로는 그린스펀 풋, 부동산 버블, 서브프라임 모기지 등을 들 수 있다. 그린스펀 풋(Greenspan Put)은 2000년대 초에 월스트리트의 유행어였는데, '풋'은 상황이 아무리 악화되더라도 자산을 특정 가격에 제삼자에게 팔 수 있는 옵션이다. 즉 그린스펀 풋은 상황이 아무리 악화되더라도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값싼 돈을 충분히 만들어서 여러분을 곤경으로부터 구해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에게는 실질적인 한계가 있다. 마이너스의 실질금리를 유지하면서 그린스펀보다 더 오랜 임기를 누린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단 한 사람(아더 번즈)밖에 없고, 그 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침체기를 겪어야 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한편 1990년대 후반기에 장기금리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추세를 보였을 때, 대형 은행들은 주택 구입자들에게 대출 교체를 홍보했다. 2000년대가 되자 소비자들은 자신이 이미 구입한 주택으로부터 돈을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더 낮은 금리를 찾아 기존 대출을 포기하고 새로운 대출로 갈아탔고, 상당수가 이를 통해 이득을 보았다. 이 와중에 서브프라임대출, 즉 전통적인 기준으로는 대출심사를 통과하기 어려운 차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높은 이자와 수수료가 부과된 상품들도 등장했다. 대부분의 금융호황은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데, 이번 상황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 전역의 주택 소유자 비율은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대략 64%를 유지했던 것이, 2005년에는 곧바로 69%로 상승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호황이 그렇듯이, 이번의 금융호황도 끝물에 도달했다. 2003년경 모기지대출기관들은 더 이상 새로운 대출 대상자를 찾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출을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대출 상환 능력이 희박한 고객들까지 찾아 나섰다.
또 초고가의 주택을 갖고 싶어 하는 비교적 재산이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대출이 실행되었는데, 이 주택들은 경제가 하락기에 접어들면 그들도 도저히 감당할 여력이 없는 수준의 것들이었다. 아무튼 2007년 말 현재 이 산업은 파국 일보 직전에 있다. 연체는 급속히 증가했고, 담보 주택이 처분되면서 쫓겨나는 빈민의 삶은 더욱 비참해지고 있다. 아울러 대출금융기관의 파산을 그에 수반되는 법적인 분규와 함께 한때 영예를 누렸던 이 산업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CHAPTER 05: 달러의 대폭락한 나라가 세계를 상대로 수행하는 활동을 알려면, 국제수지표상의 경상계정을 보면 되는데, 경상계정은 주로 무역계정(수출과 수입)에 의해 결정된다. 참고로 1890년대 중반 이후 약 75년 동안 미국의 경상계정은 항상 흑자였다. 그런데 무역계정은 1980년대와 90년대에 꾸준히 악화되다가, 1999년에 갑자기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아 2000년부터 2006년까지 누적적자는 약 4조 달러에 이르렀다. 이 돈들이 다 어디서 나왔을까? 소비자 저축으로부터 나온 것은 분명히 아니다. 공공 부문의 저축으로부터 나온 것도 결코 아니다. 또한 지금 미국의 기업들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다. 결론은 미국의 적자를 외국인들이 보전해 주고 있다. 덧붙이면 그 대부분은 외국의 민간투자자들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 비록 러시아, 중국, 걸프 국가들의 '민간 투자자' 배후에는 사실상 정부가 있지만 - 점점 더 많은 양이 외국의 공식 투자처, 주로 중앙은행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이것은 큰 변화다. 미국 재무부는 2007년에 각국 정부의 통제 하에 있는 총 잉여자금이 7조 6천억 달러에 달한다고 추정한 바 있는데, 애널리스트들은 석유수출국들이 약 2조 2천억 달러 정도를, 인도와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가 그와 유사한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