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역사
권홍우 지음 | 인물과사상사
부의 역사
권홍우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08년 6월 / 416쪽 / 16,000원
Ⅰ장 황금제국과 유대인역사의 갈림길,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492년은 서구인들에게 매우 상징적인 의미로 기억되는 해이다.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미국의 탄생이 콜럼버스에 의해 시작됐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해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 즉 '레콘키스타(Reconquista)'의 완성과 '유대인 추방령'이 서구 경제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레콘키스타'는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왕국들이 이슬람세력으로부터 영토를 되찾고자 했던 국토회복운동을 말한다. 로마제국 멸망 이후 사분오열된 유럽에는 이슬람 세력이 들불처럼 번졌다. 다행히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742?~814, 샤를마뉴)의 정복으로 유럽 영토는 거의 회복되었지만, 지금의 이베리아반도는 여전히 옴미아드 왕조(756~1030)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8세기경부터 이베리아반도에서도 이슬람 축출을 시작하는데, 그 속도는 매우 느렸다. 13세에 이르러서야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하게 되며, 그나마 높은 과학기술과 문화 수준을 지닌 그라나다 왕국이 200년 이상 남아 애를 태웠다. 하지만 그라나다도 15세기에 이르러 결국 축출되고야 마는데, 이러한 레콘키스타의 완성에는 바로 '세기의 결혼'이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이베리아반도의 3대 기독교 세력 중 두 왕국, 즉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공주(Isabel Ⅰ, 1451~1504)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자(Fernando Ⅱ, 1452~1516)가 공동 통치를 조건으로 결혼을 하면서 통일 카스티야 왕국을 세웠다. 그리고 1492년 1월 2일,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를 함락시켰다. 그라나다의 왕 보아브딜은 이슬람교도의 종교와 재산권 등을 유지해달라는 조건으로 순순히 그라나다를 내주었다. 덕분에 무혈 입성한 공동 국왕은 아름다운 궁전과 거대한 도서관 등, 이슬람의 유산을 그대로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해 3월, 공동 국왕은 '알람브라칙령(Alhambra Decree)'이라고도 불리는 '유대인 추방령'을 선포하여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슬람종족인 무어인까지 강제로 추방했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종교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경제적인 계산도 깔려 있었다. 유대인과 무어인들 중에는 높은 학문과 기술을 지닌 많은 인재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슬람과 기독교 양국의 환대 속에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공동 국왕은 이들이 가진 풍부한 재화를 레콘키스타를 완성하는 데 공을 세운 영주와 기사들에게 나눠주고자 했던 것이다.
에스파냐에서 추방당한 유대인 대부분은 이슬람지역으로 갔다. 하지만 약 6만여 명은 조세수입 증대를 위해 이들을 받아들인 포르투갈로 갔다. 그러나 포르투갈 역시 불과 5년 만에 에스파냐와 똑같은 방법으로 이들을 추방했고, 다시 유대인들은 네덜란드로 향했다. 네덜란드는 종교보다는 재능을 중시하는 실용주의적 사고로 모든 이방인들을 받아들였다. 이렇듯 종교와 사상이 자유로운 환경은 렘브란트나 고흐 같은 세계적인 화가를 배출시켰고, 17~18세기 번영을 구가하게 된다. 또한 그 번영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며, 일본에도 전파되어 그들이 강대국으로 도약하는 데 기여한다. 한편 레콘키스타 완성과 알람브라 칙령으로 거대한 영토와 재화를 얻게 된 에스파냐는 강대국으로의 도약이라는 에너지를 탐험에 투자하여 그해 10월 신대륙을 발견하게 된다. 이에 유럽 국가들이 잇따라 나서면서 아시아와 이슬람에 뒤져 있던 유럽이 세계 경제를 주도하게 된다. 이렇듯 1492년은 레콘키스타의 완성과 알람브라 칙령 선포, 그리고 신대륙 발견으로 서구가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레콘키스타의 완성과 계속된 정략결혼으로 인해 얻은 광활한 영토, 그리고 신대륙에서 들여오는 대량의 보물은 에스파냐의 호전성과 종교적 자부심을 더욱 키웠다.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에스파냐 왕들은 가톨릭의 수호자로서 모든 전쟁에 관여했다. 하지만 그로 인한 재정 악화는 필연적으로 세금인상을 야기했고, 특히 다른 곳보다 부유한 부르고뉴 지역(네덜란드)에 중과세를 부과했다. 그러자 에스파냐의 압제와 수탈에 대항한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장장 80년 (1568~1648)에 걸친 이 전쟁을 치르면서도 에스파냐는 오스만튀르크, 영국 등과 전쟁을 벌이면서 신대륙에서 들여오는 막대한 금과 은을 모두 소비했다. 결국 펠리페 2세에 이르자 요즘의 모라토리엄(Moratorium, 국가부도)에 해당될 채무불이행 선언이 일어났고 이후에도 계속된 재정악화로 에스파냐는 결국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에스파냐의 실수는 경제학의 기본 논리로도 간단히 설명된다. 생산의 3대 요소인 토지와 자본, 노동 가운데 앞의 두 가지, 즉 토지(광대한 국토)와 자본(신대륙의 금과 은)은 넘치도록 갖췄지만 양질의 노동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선진적인 기술과 근면성을 지닌 유대인과 무어인을 내쫓은 데서 경제 기반이 무너졌던 것이다. 이런 에스파냐와 달리 네덜란드는 종교와 사상에 관계없이 유대인뿐 아니라 신교도와 가톨릭교도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로 인해 유대인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그들의 재능과 근면성이 네덜란드의 실용주의와 조우하면서 16~17세기의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 네덜란드도 하강기에 접어드는데, 이 역시 사람의 이동으로 설명된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네덜란드의 총독 오라네 공 빌렘 3세(Willem Ⅲ, 1650~1702)와 메리 2세(Mary Ⅱ, 1662~1694)가 영국 왕위에 오르게 되자 3만여 명의 네덜란드인들이 영국으로 따라갔다. 그리고 이들이 가져간 금융기법과 무역, 조선기술이 대영제국 번영의 초석이 되었다.
유대인의 유랑과 부의 이동
명예혁명 전후에 대거 영국으로 유입된 유대인들은 점차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귀족 작위를 받거나 정계에도 입문했다. 그러한 유대인들 중에 정점에 올랐던 사람이 벤저민 디즈레일리(1804~1881)다. 그는 영국 수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는데 그만큼 출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가톨릭으로 개종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성 '디즈레일리(Disraeli)'에서 앞뒤로 한자씩 빼면 '이스라엘(Israel)이 될 정도로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다. 영국 정치인으로서 그를 뒷받침한 것은 유대자본이었다. 그의 최대 공적으로 꼽히는 수에즈 운하 매입도 친구인 라이오넬 로스차일드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단기간에 마련해야 할 400만 파운드라는 자금이 없었다면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차지할 수도, 프랑스와 독일의 팽창을 막을 수도, 인도의 지배권을 다질 수도 없었다. 거대 금융제국을 이뤘던 로스차일드가의 선조는 디즈레일리의 선조들과 같은 곳, 에스파냐에서 알람브라 칙령으로 쫓겨난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의 유랑 과정을 살펴보면 뚜렷한 흐름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이 부의 이동 경로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에스파냐를 떠나 머물렀던 포르투갈 · 네덜란드 · 영국은 하나같이 경제적인 번영을 이루었던 곳이다. 이러한 사실을 우연으로 보기에는 미국의 예가 더 있다. 미국의 유대인은 독일과 러시아 등, 동유럽의 박해를 피해 19세기 말 대규모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아무것도 없는 브라질 땅에서 하얀 황금으로 불렸던 설탕산업을 일으켰고 브라질 식민지에서도 쫓겨나자 서인도제도에 사탕수수밭을 만들었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삼각무역을 개척했다. 이러한 유대인의 이동과 풍요의 상관관계를 보면,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면 사람들이 몰리고 경제는 크게 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오늘날 유대인의 모습은 예전과 다르다. 압제에 항거해 경제적 풍요와 종교의 자유를 갈망했던 그들이 이제는 오히려 다른 민족에게 강제하며 압박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Ⅱ장 광기와 탐욕, 팽창과 거품의 시대17~18세기 '버블 쓰리'
신대륙 발견과 신항로 개척으로 축적된 자본은 산업혁명의 불씨를 지폈다. 그러자 경제가 급성장하는 구도 속에서 탐욕과 투기 같은 인간의 본성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물질에 대한 탐욕은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했으나 투기 광풍은 개인은 물론 사회와 국가까지 뒤흔드는 거대한 파도를 낳았다. 최초의 투기는 자본주의가 최초로 싹튼 네덜란드에서 발생했다. 이스탄불에 주재하던 한 외교관이 들여온 튤립이 어느 식물학자에 의해 변종을 탄생시키자 희귀종에 대한 알뿌리(구근) 확보 경쟁이 일어났다. 17세기 중반에 이르자 알뿌리를 소유한 모든 사람이 돈을 벌었고, 이러한 튤립 불패 신화는 모든 사람을 투기에 끌어들였다. 하지만 거품은 곧 꺼지기 마련이다. 가격 곡선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알뿌리 하나는 황소 45마리의 가격과 맞먹는 5200길더에 팔려나갔다. 하지만 가격이 한번 꺾이자 공황심리가 가세해 불과 4개월 사이에 95퍼센트나 가격이 하락했다. 역사상 최악의 폭락세였다.
자본주의의 거품은 바다를 건너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발생했다. 17세기 중반 두 나라는 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국채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버블 역시 국채 해결을 두고 이루어졌다. 영국의 남해회사와 프랑스의 미시시피회사는 회사의 주식으로 국채를 떠안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두 나라 왕실은 국채를 해결해준다는 말에 각기 식민지무역의 독점권을 내주었다. 그러자 두 회사는 각종 루머를 퍼뜨려 주가를 부추겼다. 하지만 주가를 끌어올린 재료가 루머로 확인되면서 거품도 꺼졌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파산을 했는데, 이때 땅을 친 개미들 중에는 『로빈슨 쿠루소』의 저자 대니얼 디포(Daniel Defoe, 1660~1731)도 끼어 있었다. 주식시장에 관한 기사와 사설을 빈번하게 실었던 그는 이때 재산을 모두 잃고 10년 뒤 가난과 무관심 속에 죽었다. 정부의 공식문서에서 '버블(Bubble)'이라는 용어도 이때 처음 쓰였다. 프랑스에서도 투기광풍의 파장은 컸다. 버블이 꺼지면서 정부의 재정도 바닥이 나자 재무총감들은 세금제도를 개혁해 재정난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귀족층에 의해 번번이 무산되며 계층 간 위화감이 깊어지고 프랑스대혁명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미시시피회사에 대한 불신이 프랑스의 식민지 '루이지애나는 쓸모도 없고 골치 아픈 땅'이라는 그릇된 인식으로 이어져 결국 헐값으로 미국에 팔아버리게 된다. 당시 루이지애나는 미국 중부 지방의 통칭으로, 오늘날 미국 국토의 3분의 1에 해당되었다.
대항해와 금을 향한 행진곡
유럽은 로마제국 멸망이후 수없이 많은 국가가 생성 · 소멸하는 동안 금 부족에 시달렸다. 금화는 기념용으로 소량 제작됐을 뿐 상업목적으로 유통시킨 나라는 없었다. 그런데 작고 특별한 기반도 없는 포르투갈이 금화를 주조하기 시작했다. 15세기부터 본격적인 원정활동을 시작한 포르투갈이 번영하던 무역도시, 아프리카 북부의 세우타를 점령하여 금을 들여왔던 것이다. 여기에 자극받은 에스파냐가 곧 탐험에 나서면서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포르투갈은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노다지를 거뒀고, 에스파냐는 서인도제도와 신대륙에서 횡재를 했다. 이러한 두 나라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 등도 경쟁에 뛰어들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 후발주자들은 마땅한 선박도 없고 자본도 취약했다. 게다가 교황이 대서양 한복판을 기준으로 동쪽은 포르투갈에게, 서쪽은 에스파냐에게 우선권을 준다는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까지 인정한 상태였다.
후발 국가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기득권에 끼어들되 최소한의 돈으로 교황에게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킬 수단은 '작지만 강력한 해군'이었다. 이리하여 사략선(privateer)의 시대가 열렸다. 사략선이란 국가로부터 적국의 선박을 약탈할 수 있는 권리를 위임받은 민간선박을 일컫는 말로써, 평시에는 해적으로 비상시에는 정규해군으로 편입되었다. 영국은 적극적으로 해양 경쟁에 뛰어들면서 사략선을 부추겼는데 18세기 들어 국력이 신장하고 강력한 해군을 갖추게 되자 사략행위를 엄금했다. 하지만 해적의 후예들은 사업의 분야만 바꿨을 뿐 또 다른 노획품으로 영화를 누렸다. 18세기 이후 20세기 초반까지 적어도 350여 년 동안 유럽과 미국을 살찌운 삼각무역(아프리카와 유럽과 미국으로 이어진 무역활동)은 이러한 '노획품' 때문에 번창했다. 그 노획품은 바로 흑인 노예였다. 황금에 대한 관심과 경쟁으로 생성된 약탈이라는 광기가 인간의 인간에 대한 또 다른 광기와 압제를 낳았던 것이다.
황금을 향한 욕심에서 출발한 광기의 여정은 금융에 도달했다. 노예무역과 삼각무역, 식민지 개척으로 물동량이 많아진 가운데 막 유행하기 시작한 커피가 금융회사 탄생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650년, 영국에 처음 소개된 커피하우스는 한 잔에 양초 한 자루 가격인 1페니만 내면 무한정 앉아서 토론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에 '페니 대학'으로도 불렸다. 이렇듯 커피하우스가 사교명소로 떠오르면서 520여개 업소가 밤새 북적거렸는데, 특히 런던 항구 근처는 선주, 선장, 상인, 보험브로커들이 많이 모여들면서 비즈니스 공간으로 기능했다. 그러자 한 커피하우스의 주인 에드워드 로이드가 칠판서비스를 제공했다. 선박들의 출발과 도착예정일, 도착 뒤 배당률 등의 정보를 칠판에 적어놓은 것이다. 이것이 인기를 끌자 로이드는 아예 부정기 정보지인 <로이드 뉴스>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1669년부터 발행한 이 한 장짜리 정보지에는 외국 사정과 전쟁 소식, 재판, 의회사정, 항해 정보 등이 실렸다.
1734년부터 커피하우스는 자생적인 금융시장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로이드의 커피하우스를 물려받은 사위들이 <로이드 리스트>를 창간, 항해와 해상보험 소식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그로 인해 런던 금융가의 핵심으로 부상한 로이드 커피하우스는 선박등기업무로 손을 뻗었다. 오늘날 세계 상선의 4분의 1이 등록돼 있다는 로이드 선박등기소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또한 1771년에는 로이드 커피하우스를 터전삼아 일하던 보험업자 79명이 100파운드씩 출자해 로이드 클럽을 만들었는데, 손해보험사의 대명사인 로이드해상보험이 이렇게 탄생했다. 이와 같이 영국 금융서비스 산업은 커피하우스에서 싹을 틔웠다. 그런데 금융 산업의 성장은 또 다른 투기를 낳았다. 철도와 운하가 개발되면서 투기가 일어난 것이다. 거기서 넘쳐나는 자금이 미국으로 건너가 끝없는 투기와 졸부들을 생산해냈다.
투기와 독점의 시대
초기 미국의 역사는 투기의 역사라고 불려도 좋을 만큼 투기꾼과 작전세력이 주도했다. 건국 1세대들은 대부분 부동산 투기와 관련되어 있었다. 최고의 재무장관으로 존경을 받았던 알렉산더 해밀턴은 토지와 국채를 오가는 투기로 토머스 제퍼슨의 공격을 받았다. 그런데 제퍼슨 자신도 버지니아의 투기꾼이었다. 또한 벤저민 프랭클린도 일리노이주 일대의 부동산을 단기 매매해 차익을 얻었다. 이러한 건국 초기의 부동산 투기 열풍은 골드러시와 철도 붐이 일어나자 주식으로 옮겨갔다. 거대한 자금이 몰리는 주식시장의 머니게임에는 술수와 음모가 기승을 부렸고,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돈을 번 무수한 졸부가 쏟아져 나왔다. 이들이 주가조작이나 매수, 독점이라는 수단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도둑귀족, 혹은 강도귀족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들의 부침이 반복될 때마다 미국은 주기적인 경제공황을 겪게 되었다. 사실 미국 사회를 건강하게 떠받치는 기부문화도 이들이 사회적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재산을 환원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각종 투기를 통해 모은 돈으로 기부를 하고 대저택을 사들이면서 사회적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아도 절대 가질 수 없는 게 하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