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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관한 마지막 충고

마티아스 호르크스 지음 | 스마트비즈니스
미래에 관한 마지막 충고

마티아스 호르크스 지음

스마트비즈니스 / 2008년 1월 / 350쪽 / 15,000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가



알라미즘의 공간

'알라미즘(Alarmism)'이란 미래에 대한 두려움들이 유행병처럼 주민들 사이에 만연하는 사회적 · 문화적 현상을 말한다. 이런 두려움들은 위험의 순간을 특정적으로 해석할 때 생긴다. 이때의 해석은 반드시 실제의 본질(또는 부분적인 면)을 제시한다. 그렇지만 이 위험들은 상징적으로 과장되고 불길한 모델로 간략하게 단순화된다. 알라미즘적인 유행병은 언제나 똑같은 전형에 따라 진행된다.



잠복기 : 하나의 위험이 포착되고 중간과정에서 활성화된다. 그 위험은 노골적이고, 듣기에 좋으 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을 얻는다. '산림의 죽음', '방사능에 의한 죽음', '광우병', '조류독 감', '기후에 의한 재앙', '고령화', '문화 전쟁',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새로운 하층민' 등이 그것 이다.

열병 단계 : 이제 폭포가 쏟아지듯 생산이 시작된다. 전문가들이 등장하고 갑자기 유명해진다. TV 에서는 이 주제에 대한 방송이 넘쳐나고, 신문의 머리기사는 갈수록 더 큰 활자로 인쇄된다. 책들 이 재빨리 시장에 나온다. 한동안은 모두 '그것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누구나 그에 대한 의견 을 갖고 있다. "벌써 들으셨군요! 분명히 갈수록 더 위협적으로 변할 것입니다!"

제의 단계 :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 예컨대 특정 상품의 구매행위를 거부하고, 어떤 지 역들은 회피한다. 책임을 전가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음조는 더욱 신경과민으로 변한다.

소멸 단계 : 그 현상이 정점을 넘어선 단계다. 이제 그 현상을 좀 더 객관적이고 복합적으로 바라 보고 좀 더 의미 있게 분류한다. 게다가 합리적인 해결 제안을 하는 일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물 론 이것들은 거의 인지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벌써 다음 순환 과정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알라미즘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첫 번째는 미디어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구온난화 문제의 경우 지구온난화의 '진실' 여부는 문제가 아니다. 미디어들이 '선택-극단화-구조화' 공식에 따라 특정 현상들에 대해 열광하고 여론 속에 닻을 내리는 메커니즘이 문제다. 이런 식으로 소위 팩토이드(factoid, 활자화됨으로써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이야기)가 만연돼 거대한 루머가 생기는 것이다. 이에 대한 평가는 이미 오래전에 진부한 것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영향력을 잃지 않은 채 인지 과정에서 여과기능처럼 작용하고 있다.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틀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모두 걸러져서 인지되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선의의 목적이 외부에 의해 가해지는 경제적 강요와 재미있는 핑퐁 게임을 하게 된다. 그래서 미디어들은 강압적인 경쟁구도에 더 많이 놓일수록 기회주의적 원리가 더 많이 통용된다. 한 사람이 쓰거나 송고하면 모두 그것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차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알라미즘은 특징 없는 '정보 비만'의 증상으로 나타난다. 고대 사바나 초원에서 단계적으로 높은 칼로리를 섭취하도록 훈련받았던 우리 신체가 지속적인 칼로리 과다 제공에 대해 '신진대사 증후군'으로 반응하듯이, 우리의 뇌는 미디어의 과잉에 직면해서 일종의 '타성'으로 반응한다. 우리는 결국 '정말 강한 신호'가 아니면 통과시키지 않는다. 세상이 몰락하는 가운데 미디어라는 기계까지도 더 이상 작동되지 않을지 모른다.

또한 학문의 변화도 한몫을 했다. 수세기 동안 학문은 자유롭고 자율적인 정신의 공간으로 여겨졌다. 학문이 보편주의적 세계 인식의 요구에 영향을 받고 있었던 고대에는 사원과 신탁소가 지식의 성스러운 공간으로 기능했다. 하지만 글로벌한 지식세계에서는 학문과 학자의 지위가 근본적으로 변화된다. 학자는 이제 힘겹게 혼자 싸우지 않고 복합적인 국제적 협력에 의지한다. 학자가 지식의 생산을 위해 필요한 테크놀로지는 터무니없이 값비싸진다. 적당한 유전자 실험실 하나를 1,000만 달러 이하에는 가질 수 없다. 학문이 조직되고 구조화되는 대학연구소들은 갈수록 철저하게 지식이 평가의 대상으로 변질되어가는 글로벌한 경쟁구도에 이르렀다. 투자자, 스폰서, 고객들은 가능하면 지체 없이 뭔가를 보여주기를 원한다. 수년 동안 줄기세포 연구결과를 조작했던 한국의 유전자 연구가 황우석의 경우와 물리학자 러시 테일야르칸의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저온 핵융합'은 이와 같은 여론의 생산욕구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연구소와 학술지에서 조작이 계속 발생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학문이 보여주는 새로운 '생산방식'인 것이다.



알라미즘의 영향

그렇다면 알라미즘이 위험한 이유는 무엇일까? 알라미즘적 소문의 첫 번째 폐해는 무감각 효과다. 누군가가 어느 마을에서 계속해서 화재경보를 울리면, 진짜 화재가 났을 때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미디어의 알라미즘은 이러한 면에서 이미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이에 무엇이든 신뢰하지 않게 된 것이다. 모든 미디어 보도에 대해서 무관심한 태도를 보일 뿐이다. 두 번째 폐해는 우리 태도에 대한 피드백에 있다. 우리가 부정적 사실을 믿게 되면, 우리는 또한 그 사실을 반복해서 계속 확인하는 반응을 보인다.



1976년 7월 10일 이탈리아 북부 세베소에서 호프만-라로쉬 화학그룹의 자회사인 익메사 공장의 보일러가 폭발해 유기 염소화학의 가장 심각한 독극물 중의 하나인 다이옥신이 유출되었다. 이는 미디어가 아무리 강조해도 지치지 않을 만한 '슈퍼 독극물'이었다. 환경단체들은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동안 그 오염이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탈리아 북부 전체를 강타하여 수없이 많은 세대들의 유전자는 돌연변이가 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그러나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장기간에 걸쳐 의학적 진단을 받았지만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다. 치료는 되었지만 부분적으로 흉터가 남은 400건의 피부손상 기록만이 있었다. 림프종과 백혈병이 부수적으로 몇 사람에게서 나타났다. 그렇지만 다이옥신으로 고통받았던 사람들의 사망자 수는 통계적으로 늘어나지는 않았다. 낙태된 태아의 조사에서는 유전적인 손상 사례가 확인되지 않았다. 이 사고의 필연적 결과로써의 손실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제3세계'였다. 염소화학은 그 사고로 말미암아 완전히 신용을 잃어버렸다. 염소화학에서는 또 하나의 성분이 나오는데, 그것은 해충퇴치에 많은 효과가 있는 DDT였다. 습지 지역은 DDT로 말라리아를 매우 효과적으로 퇴치할 수 있다. 하지만 DDT는 1979년 독일에서 금지되었고 그 이후로는 국제적으로도 추방되었다. 그 사이에 아프리카의 많은 구호조직들이 수많은 말라리아 질병을 이유로 다시 사용할 것을 요구했지만, 환경보호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저지하고 있다. 세베소는 많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건강문제를 야기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더 끔찍한 것은 개발도상국의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것이다. 제도화된 환경 알라미즘 때문에. 알라미즘은 열차의 차량기지처럼 두려움을 정리 배열하는 기능을 한다. 우리는 직접적인, 실제로 '정당한' 두려움을 멀리 있는, 부풀려진 위험으로 대체한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벌써 다시 편안함을 느낀다.



알리미즘의 최대 염원은 타협과 균형, 그리고 매우 중요한 지속력을 가진 문명사회의 섬세한 조직망을 파괴하는 것이다. 알라미즘적인 실존주의는 근본적으로 정치적 분별력을 없애고 그 자리에 적나라한 경악만을 대신 갖다놓는 힘을 갖고 있다. 알라미즘은 포퓰리즘, 즉 21세기에 실제로 정치적 위험을 만들어내는 배양소다. 알라미즘은 미래를 위한 여러 정치적 논의들을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게 한다. 전형적인 예가 외국인 통합문제다. 2006년 초 베를린의 주요 학교들이 학교에서 학생들 사이에 서로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독일어를 '학교언어'로 선언했을 때, '비판적 여론'은 통상적인 파시즘 소동으로 반응했다. 이민 가정의 배경을 가진 대부분의 학생들에게서 환영받았던 그 합의가 민족주의적인 강제조치라고 비난받은 것이었다. 알라미즘은 결국에는 늘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아니면 세계관적이든) 숭고한 요구 뒤에 자신을 숨길 수 있는 특권체제를 가져온다. 알라미즘은 부유 계층의 호화롭고 안락한 생활규범을 생존의 문제로 표를 바꿔 달아서 공격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다. 모든 것이 친환경적인 비오톱(biotop,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이동하는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인공적 · 자연적 생태 지역)이 되어야 하며, 유기비료만 주고 손으로만 만들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멸망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알라미즘적 포장지 위에 굵은 글씨로 분명하게 적은 경고문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위험을 과장하거나, 극적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왜곡해서 연관을 짓는 사람이 정신적 · 정치적으로 위험스럽게 발전되어 가는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이다. 흡연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한계치는 없다. '약간의 알라미즘'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완전 마취상태만큼이나 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약밀매처럼 그것을 전달하는 자도 공동의 책임이 있다. 남의 말을 되풀이하고 무비판적으로 불확실한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부정적인 전형이나 왜곡된 공포 분위기를 함께 확산시키는 사람 또한 미래의 손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스크립트



'사악한 세계화'에 관한 동화

아직까지 우리의 별에 있는 모든 지역이 더 살기 좋아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몇 지역은 분명하게 나빠졌다.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콩고와 같은 '쇠락해가는 국가들'은 머리기사 제목이 되고 있으며, 그들의 혼란스러운 사진들은 세계가 갈수록 더 안 좋아지고 있는 것으로 우리의 지각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남는다.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

끝없는 노력 끝에 (그리고 UN의 착실한 원조로) 수십 년 독재와 소름끼치는 내전에서 회복한 가장 가난한 나라인 '시에라리온'에 대해 누가 보도를 하고 있는가? 아직까지 평화가 위협받고 공공기관들도 건실하지 못하지만,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희망의 징표들이 많이 보인다. 시에라리온에 가는 사람은 에너지가 넘쳐 기대감에 충만한 사람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20년 동안 냉전을 대표하는 내전을 겪으며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10년 전에 내전이 종식된 앙골라와 모잠비크의 경제 성장이 지난 수년 동안 계속 10퍼센트를 넘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고 있을까? 더욱이 2002년에 있었던 대규모 엘베 강 범람 후에 모잠비크에서 자선 콘서트가 개최되고 독일인들을 위해서 30만 달러를 보내주었다는 사실을 누가 알고 있을까? 루안다에서는 전 사회가 일종의 '풀뿌리 정의'로 종족말살을 어떻게 감동적으로 이겨내고 있는지 누가 알까? 사하라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참할 정도로 가난하지만 광범위하게 민주적으로 통치되고 있는 나라인 부르키나파소가 지난 10년 동안 초등학교 수를 300개에서 5,500개로 늘리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까? 과연 이런 사실들이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는가? 100년 전까지만 해도 끔찍한 기아의 본고장이었던 나라가 지금 1인당 재산을 따져서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저개발국가였으며, 민요를 부르며 맥주를 마시는 농업국가로 여겨졌던 이 나라는 바로 아일랜드다. 경제성장과 함께 비상하고 있는 '아시아의 호랑이' 한국은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1인당 국민소득이 평균 500달러였던 개발도상국이었다.



우리가 보려고 하는 것이 어쩌면 현재 진행 중인 세계화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과정은 늘 구미에 맞게만 작용하지 않는다. 이 과정은 놀랍게도 비동시적으로 일어날 수 있으며, 소동과 갈등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이 과정은 있는 힘껏 위로 발버둥치는 '향상 지향적인' 수백만 명의 땀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마피아와 갱단, 뇌물과 폭력, 기생충 같은 인간들과 도박사들을 포함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기대하는 백만 배의 꾸준한 성장도 역시 포함된다. 100년 전, 150년 전, 심지어 50년 전의 우리처럼.



세계화는 보편적인 '영원한' 과정으로, 그 근원은 인류 역사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초월적 힘이다. 그 과정을 방해하거나 적어도 상대화시키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과정은 인류의 문화 속에 있는 복합적인 진화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로 인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에게 물질적 풍요로움과 자유를 획득할 수 있게 해주는 발전의 지속성과도 연관되어 있다. 세계화는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진척되는 초자연적인 힘이 아니다. 그것은 확실한 규칙에 따라 전개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규칙의 유효성이 행정적으로도 관철될 수 있어야 한다.

'빈곤과 부유'에 관한 동화

사람이 가난은 그냥 가난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빈곤이라는 개념은 수입으로만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상이한 자원의 접근성에 따라서도 결정된다. 우선 보건 영역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혜택이 증가하고 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제4세계'의 국가들에서는 지난 50년 동안 출생률이 급속하게 낮아진 반면, 영아 사망률은 지속적으로 감소했다(우간다와 같은 몇 나라는 예외). 이는 여성들이 피임 수단을 이용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가난한 사람들의 교육 혜택이 개선되었다. 세계의 비(非)문맹률은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 바로 아프리카에서는 비록 낮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비문맹률이 평균 이상으로 증가했다. 셋째,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긴급수송 능력이 향상되고 있다. 기아나 자연 재해는 오늘날 거의 극적으로 긴장감 넘치게 진행되지 않는다. 그들은 전 세계적인 운송 능력으로 말미암아 아주 잘 관리되고 있다. 오늘날 세계 여론은 냉전 시대보다 훨씬 더 주의 깊게 반응한다. 전 지구적으로 활동하는 기구들의 힘, 숫자, 효율성이 현저하게 상승했다(가장 최근의 예는 2004년 인도양에 발생했던 쓰나미의 희생자들을 위한 구호활동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값싼 제품과 테크놀로지의 이용은 하위 소득층에게도 물질적 상황을 개선시키고 있다. 세계 경제의 엄청난 생산 공정은 갈수록 저렴한 품목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그럼으로써 소득이 매우 적은 사람들도 점차 그 품목들을 살 수 있게 된다. 대량 생산된 싼 제품들은 오늘날 개선된 분배 시스템을 통해 지구의 가장 후미진 곳까지 도달하고 있다.



모든 주민이 같은 수입을 갖는 20세기의 공산주의식 실험은 완전히 실패했다. 균형 사회는 절름발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사회는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역동적인 발전을 위한 동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능력발휘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완전히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좋고 정당한 사회란 결과의 일치가 아니라 갈수록 상승 가능성의 옵션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 지표는 사회적 상승의 유동성, 즉 x기간 내에 자신의 상황을 (자발적으로!) 개선시킨 사람들의 수다. 그런데 그 숫자는 대부분의 경우, '신 빈곤층'으로 신음하는 독일에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독일 연방정부의 빈곤에 대한 보고에 따르면 2002년 중간 정도 소득의 60퍼센트인 빈곤 경계선 이하에 있던 사람들 1/4이 1년 내에 더 높은 소득계층으로 올랐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더 긴 기간 동안에는 심지어 저소득층의 절반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부'란 나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자원이어야 한다. 폭넓게 확산되어 있는 소문과는 반대로, 누구에게서도 '무엇인가를 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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