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상들의 시대
와키모토 유이치 지음 | 한스미디어
거상들의 시대
와키모토 유이치 지음
한스미디어 / 2008년 2월 / 392쪽 / 18,000원
프롤로그
에도시대(1603~1868, 선조36년~고종5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통일하고 에도(도쿄)에 막부(幕府)체제를 연 약 300년 동안의 시기를 말한다. 막부체제는 장군(쇼군)에 의한 무인들의 통치체제로, 도쿠가와 막부는 이전의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에 이은 세 번째 막부체제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사농공상의 신분제를 적용하고 게다가 쇄국정책까지 단행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화라는 꽃을 피워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대중소비사회 중심의 시장경제시스템을 형성했다. 그런데 이러한 상품경제를 성립시키고 이를 전국으로 확산시켰던 주역은 신분제의 가장 하위계층에 속하는 상인들이었다. 당시에는 실물경제시스템뿐만 아니라 신기전 개간, 해운과 선운 같은 수상교통 그리고 도시건설 등 많은 분야에서 상인들의 아이디어와 에너지가 많이 투입된 '민간 활력의 시대'였다. 특히 거상들의 상업자본이 상품경제의 밑거름이 되어 에도시대는 300년 가까운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다. 이렇듯 인간 활동의 집약체인 '경제'를 앞세워 평화와 안정을 구축했고 그 중심에 상인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에도시대 거상들의 활약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제1장 일본인과 '바다의 유전자'
아시아의 바다를 마주 대하는 하카타는 한반도의 문물을 받아들였던 요충지였고 대형선박인 주인선을 통해 해외교역이 활발했던 일본 최초의 국제무역도시였다. 당시 해외교역은 난파와 침몰, 해적의 습격 등과 같은 리스크를 무릅쓰더라도 한차례 항해하면 투자금액의 10배 이상 되는 이익을 올렸다. 따라서 무역상인들에게 '바닷길'은 죽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무역의 거점이며 전략적 요충지를 당대의 권력자들이 그냥 내버려둘 리 없었다. 1587년(선조2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규슈를 평정한 후 하카타 상인들을 우대하는 9개조의 규정을 발표했다. 상인들에게 영업의 자유를 보장하고 토지세를 면제하며, 무사들이 마을 중심가에 집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하카타는 상인의 마을'이라고 약조한 것이다. 이 약조는 곧 깨지게 되지만 아무튼 이로 인해 장군과 하카타 거상들의 유착이 시작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시마이 소시쓰와 가미야 소탄이었다.
시마이 소시쓰는 조선무역 전문가였고, 가미야 소탄은 중국무역 전문가였다. 이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유착하여 많은 이권을 차지했다. 그러나 얼마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침략을 계획하자 유착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선침략은 조선과의 무역으로 지탱되고 있는 하카타의 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었다. 특히 조선무역상인 시마이 소시쓰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조선과의 전쟁을 막아야 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에 있는 상인들과 힘을 합쳐 조선 침략 중지 공작을 펼치고 조선으로 건너가서는 전쟁회피 공작을 펼쳤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곧 허사가 되고 도요토미는 조선으로 출병하게 된다. 이로 인해 시마이 소시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시나브로 반목하게 되는데, 얼마 후 쇄국정책이 시행되자 아예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고 만다.
전국을 통일하고 에도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1603~1605, 선조36년~38년)는 집권 초기에 '대형선박 건조 금지령'을 내렸다. 그리고 서쪽 지방 영주들의 배를 아와지 섬 앞바다에 모아놓고서 모두 물속으로 가라앉혔다. 이는 사실상 무역을 금지하는 것과 같은 조치였다. 앞서 설명했듯이 해외교역은 많은 이윤을 안겨주었으며 이로 인해 탄생한 거상들이 해당지역의 영지들과 유착되어 있었다. 거상들은 쌀 500섬을 실을 수 있는 배부터 쌀 3,000섬을 실을 수 있는 초대형 범선인 '주인선'을 통해 무역을 했다. 에도시대 전기(1603~1690)에는 이러한 주인선이 보통 350척 이상 바다를 건너 중국에서부터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도항했고 항해를 통해 얻은 이윤 중 상당부분을 해당 영지에게 바쳤다. 이로 인해 영주들의 힘이 커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새로 들어선 막부에게는 이렇듯 힘을 지닌 비주류의 영지들이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영주들의 대형선박 소유를 금지하여 에도를 공격할 가능성을 차단시키고 그들의 힘을 무력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대형 선박이 사라짐에 따라 주인선 무역상들이 점차 전면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바다를 떠돌아다니는 끼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에도시대 후기(17820~1868), 각 지역의 영지가 재정난에 허덕이자 소형범선을 이용한 밀무역이 성행했다. 이때는 대마도로 건너가는 배가 이상하게 많아지고, 조선에서도 표류를 가장한 무역선이 많이 밀려왔다고 한다. 밀무역 상인들은 영주의 묵인하여 여러 번 도항했고, 그 대신 엄청난 길미를 상납했다. 이로 인해 영지의 재정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는데 이렇듯 암암리에 이루어진 밀무역도 오사카 서부 민정칙임관에게 그 내용이 알려지게 되면서 종말이 찾아왔다. 1836년 밀무역에 관련된 상인과 영지의 관료들이 처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죽은 지 20년 후에는 결국 쇄국의 빗장이 열리게 된다.
제2장 '천하의 경제도읍' 오사카 구축
하카타의 유전자가 '바닷길'이라면 오사카의 유전자는 강이 도시의 허리를 동서로 흐르는 '수상도시'였다. 오사카는 이 수로를 통해 전국의 수요와 공급의 매개체 역할을 하면서 전국의 중앙시장으로 기능했다. 거시적으로 보면 오사카가 민간도시로 성장하도록 길을 터놓았던 사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온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성을 축조하고 병농(병사와 농부)분리와 토지 조사 등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1583년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도시건설을 구상했는데, 그 중심이 오사카였다. 그는 오사카에 영주와 무사들의 집을 짓고, 다른 영지에서 상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대규모 성곽도시를 건설했다. 그리고 성이 완공된 15년 후에는 성과 도시를 에워싼 외성을 쌓고 뉴타운을 조성하여 성곽 안에 있던 저택과 절을 이주시켰다. 그 숫자는 어림잡아 7만 채였다고 하는데 그렇게 조성된 뉴타운이 지금의 오사카 도심부인 센바였다.
센바를 시작으로 오사카에는 북부 성인 덴마라는 시가지가 조성됨으로써 성내와 센바 그리고 덴마라는 '오사카 3향'이라 불리는 대규모 도시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1615년 오사카는 '오사카 여름의 전투'라 불린 내란으로 인해 초토화된다. 이후 오사카는 다시 재건되는데, 이때부터 오사카는 막부권력의 상징이자 '군사도시'와 '경제도읍'이라는 양면성을 지닌 도시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오사카가 대도시로 성장하자 각지에서 오사카로 이주해 온 상인들에 의해 1619년부터 10년 동안 많은 운하가 건설되었다. 그들은 강의 굴착 과정에서 나온 흙모래를 이용하여 양쪽 기슭에 길을 내고 집을 짓기 위한 땅을 조성했다. 그리고 이 땅을 판돈으로 공사자금을 충당했다. 또한 건설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은지폐라는 개인 지폐를 발행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건설채권으로 향후 각지의 도시경제를 떠받치는 지역화폐로 발전했다.
오사카 상인들이 토목산업에 뛰어든 것은 개발이익만을 노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토목공사를 통해 권력을 쥐고자 했다. 당시 오사카 최고의 거상이 되었던 요도야 가문의 예를 들면, 이들은 막부로부터 저습지개발을 허가받자 제방을 건설하여 여러 이권사업을 차지했다. 그리고 쌀시장과 야채시장을 여는 등 오사카가 유통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는 밑바탕을 구축했다. 또한 각 영지의 창고저택을 오사카에 짓도록 유도하고 그곳에 저장된 쌀과 특산물을 독점하여 엄청난 이익을 보았다. 뿐만 아니라 저장미를 통해 영주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저장미담보대출'을 해주어 영주들을 손아귀에 넣었다. 하지만 이들도 하카타의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주역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요도야 가문 5대조에 이르러 재산몰수라는 벌을 받게 된 것이다. 이 벌은 사형 · 귀향 · 추방형에 덧붙여 내리는 형벌로서 모든 재산을 막부에 몰수당하는 것이었다. 죄목은 상인의 본분을 벗어난 사치스러운 행동을 했다는 것이었지만 상인들의 영향력에 두려움을 느낀 무인정권의 위기감에서 비롯된 처벌로 여겨진다.
제3장 상인의 시대와 '3대 메갈로폴리스'
에도시대는 민간(상인)이 생산부터 유통 · 판매 · 금융 등 모든 분야에서 독창성을 발휘했다. 300개가량 되는 영지로 구성된 막부체제는 얼핏 보면 막부 주도의 중앙집권제처럼 보였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아주 색다른 분권사회였다. 막부는 경제활동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어떤 경제정책에 대해서도 개략적인 방침만 정할 뿐, 운용을 포함하여 그 뒷일은 민간에게 모두 맡겼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당연히 사회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벤처정신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여러 영지들은 고질적인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전매제도를 도입하고, 환금성이 높은 독자적인 특산품을 개발하는 등 산업을 일으키는 데 누구 못지않게 힘을 쏟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상인 자치의 행정구조가 큰 영향을 미쳤다. 거상들이 성주대리-칙임관-주임관-판임관이라는 역할을 맡아 영지의 행정을 다스린 것이다.
자치행정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경제적 부담이 초래되었다. 따라서 공적인 영역을 관에 맡기지 않고 민간이 떠맡는 '민간도시'의 전통이 강하게 생겨났는데, 특히 많은 자본을 소유한 상인들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당시 상인들이 맡았던 '성주대리'를 도지사라 한다면 '칙임관'은 시장이고, 주임관은 부시장, 판임관은 구청장이라 여기면 된다. 이들은 상인조합을 만들어 상거래를 체계화시키고, 야채시장 · 어시장 등을 만들어 전국의 중앙시장을 형성했으며, 교통과 소방대책까지 세워 지방행정을 운영했다. 이러한 상인들의 자치행정을 통해 오사카는 '천하의 경제도읍'으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흔히 보면 경제의 실패는 현장의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않는 탓에 생겨난다. 이런 점에서 시장의 일선에 있는 상인들에게 자발적인 운영을 맡겼던 막부는 영리했다고 할 수 있다.
에도시대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전국적인 규모를 갖춘 경제사회가 처음으로 생겨났다는데 있다. 특히 에도 · 교토 · 오사카라는 '3대 메갈로폴리스'가 다른 여러 곳의 도시경제와 결합함으로써 전국적인 시장경제를 형성했다. 우선 에도는 인구의 절반을 사무라이가 점했던 '정치도읍'으로 최대 소비도시였으며, 교토는 직물 · 염색 · 장식 등 높은 수준의 전통기술을 자랑하는 '공업도읍'이었다. 그리고 새롭게 일어났던 오사카는 단 하나뿐인 중앙시장으로서 전국경제에서 유통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이 3대 메갈로폴리스의 활기로 인해 에도시대는 '소비폭발'이라 해야 할 대중사회로 발전했다. 당시의 광고 전단지를 보면 가격할인, 점포 매매, 정가 판매, 현금 지불 등 그 대상이 이제까지 소비주체였던 특권층이 아니라 대중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대중적 구매력이 경제활동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에도시대의 물질만능주의로 인해 촉진된 것이 신용경제였다. 통화발행 여부는 막부의 절대적인 고유권한이었지만, 상품경제가 확산됨에 따라 영지 고유의 번 화폐 발행이 허가되었다. 막부 말기까지 244개 영지가 은 지폐, 금 지폐, 쌀 지폐 등의 여러 형태로 화폐를 발행했는데, 그 밖에도 환전상들이 중개하는 발행어음, 수탁어음, 환어음 등의 어음이 현금을 대신하는 결제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새로운 신용경제시스템이 형성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신용경제가 새로운 근세의식을 도출시켰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가이호 세이류를 들 수 있다. 그는 "영지가 모든 힘을 다해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킴으로써 사람들이 부유해질 수 있다"는 국부론을 강하게 주장했으며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거래관계와 동일하다'고 역설했다. 그에 따르면 장군과 영주는 영지를 주민들에게 투자하여 세금이라는 이윤을 얻는 존재가 된다.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표현만 보이지 않을 뿐이지 자본주의를 권유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논리를 이미 200년 전에 주장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상인들의 자부심이 커지다 보니 막부는 여러 차례 오사카의 경제력을 제압하고자 했다. 거상들에 대한 재산몰수와 추방 등의 처벌이 잇달았던 것이 그 좋은 사례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 추세에 대응하기 위해 오사카 상인들이 찾은 대답 중 하나가 '학문의 권유'였다. 에도시대 중기(1691~1779)부터 후기(1780~1868)에 걸쳐 오사카는 상업도시에 걸맞은 최고의 상인학자들을 잇달아 배출했는데 1724년 센바에 세워져 메이지시대(1868~1912)초기까지 140년 동안 이어진 상인들의 학습장소 '회덕당'이 그것을 증명한다. 주판만으로는 새로운 경제사회에 대응할 수 없다는 위기감에서 생긴 학교였던 만큼 경영학 외에 상도덕의 육성에 직접 도움이 되는 『논어』와 『맹자』등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배우게 했다.
상인들은 주자학을 교육의 기본으로 삼았지만 주자학에만 얽매이지 않고 천문학 · 의학 · 난학 · 문학 · 회화 등을 접하면서 실용주의적이며 합리주의적인 정신을 배양했다. 그런데 이러한 상인들의 정신적 받침대가 된 것이 바로 심학(실천도덕교육)이었다. 당시 유학자들은 상업적 이윤을 무시하고 상인들이 돈을 버는 것을 비난했다. 이에 대해 상인들은 "상인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나쁘게 여긴다면, 무사는 녹봉도 받지 않고 주군에게 충성할 수 있겠는가?"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렇듯 치부를 적극적으로 긍정한 후 윤리를 중시하는 석문심학의 정신이 바탕이 되었기에 전후 일본 경제가 대체로 자본의 논리에 지배받지 않은 채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4장 움직이는 종합상사 기타마에 선
에도시대(1603~1868)는 쇄국을 단행한 탓에 외항선 건조기술과 항해술 등이 전국시대(1493~1573)에 비해 크게 후퇴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쇄국으로 인해 일본은 기나긴 태평성대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자급자족에 의한 경제성장이 목표가 됨으로써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도출되었던 것이다. 특히 일본 열도를 둘러싼 연안 항로는 상품경제를 발전시켰고, 이 항로를 이용하여 홋카이도까지 광역경제 시스템을 구축했으니, 에도시대는 바람과 물살과 기업가정신이 전국경제를 발전시킨 것이었다. 조셉 슘페터가 말하는 것처럼 '기업가의 본질이 이노베이션에 있다'고 하면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찾아 북으로 나아갔던 상인들이야말로 그 전형적인 모델이었다.
에도시대 중기(1691~1779, 숙종17년~정조3년)부터 상품경제의 발달이라는 커다란 흐름이 일자, 경제구조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경영방식이 필요해졌다. 이에 따라 홋카이도에는 각 지역의 신흥 상인들이 대거 진출했다. 홋카이도는 당시 막부의 관할지역이 아니었으며 쌀농사가 부진한 대신 청어가 많이 잡혔다. 그런데 그 무렵 경제선진지역에서는 벼농사보다는 면화 · 소금 · 유채씨 등, 돈으로 쉽게 바꿀 수 있는 상품작물 재배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이들 상품작물은 화학비료를 뿌리면 수확량이 늘어났기에 생선거름과 청어깻묵의 수요가 급증했다. 홋카이도로 진출한 상인들은 청어깻묵을 생산하기 위한 어장을 개설하고 토착민인 아이누족의 노동력을 동원했다. 이렇게 홋카이도는 화폐경제에 눈이 먼 일본의 무력에 의해 막부의 영토로 편입되게 되었다.
홋카이도가 교역지에서 생산지로 전환하자 상인들 밑에서 일하던 운송업자들이 스스로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바로 '기타마에 선'의 탄생이었다. 기타마에 선은 배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비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