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머니 임팩트
윤광원 지음 | 비전코리아
윤광원 지음
비전코리아 / 2008년 2월 / 636쪽 / 25,000원
해방·분단·전쟁과 금융인들
해방 무렵 한국의 주요은행으로는 조선은행과 조선식산은행(현 한국산업은행) · 조흥은행이 있었다. 그런데 해방의 기쁨도 잠시, 일본인 직원들이 모두 달아나고 미군이 각 은행에 주둔함으로써 영업이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특히 미소간의 냉전은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3·8선을 경계로 미소가 남북한을 분할 점령하자 지점들과의 연락이 두절되었으며, 북한지역의 점포들이 소련군의 횡포로 많은 손실을 입었던 것이다. 조흥은행의 경우 소련군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 소련 군표를 조선은행권으로 바꿔달라고 하거나 한밤중에 몰려와서 여자를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심지어는 3·8선을 월경하여 개성지점에서 수백 만 원을 강탈해가기도 했다. 이러한 약탈행위에 견디다 못한 은행원들은 목숨을 걸고 월남했고 결국 북한지역 점포들을 송두리째 잃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금융계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느 은행이 중앙은행이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세 은행이 치열하게 경합을 벌였고, 그 결과 일제강점기에 중앙은행 격이었던 조선은행이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이 되었다. 그리고 1950년 6월 12일, 한국은행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는데, 창립 13일 만에 전화에 휩싸이고 만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이다. 한국은행은 먼저 지금은(地金銀, 순금 1070킬로그램, 은 2513킬로그램)과 현금을 진해의 해군통제부에 보냈다. 하지만 북한군이 계속 남하하자 이 지금은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보냈다. 그 후 이 금은괴는 뉴욕 연방준비은행에 기탁됐다가 1955년 대한민국이 국제통화기금 및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 가입할 때 출자금으로 충당된다. 그나마 이렇게 소개된 지금은은 당시 한은이 보유 중이던 지금은의 절반이었고, 나머지 순금 260킬로그램과 은 1만 5970킬로그램 그리고 미 발행 조선은행권 등은 고스란히 공산군 수중에 들어갔다.
당초 한은은 조선은행권을 폐기하고 한국은행권을 새로 발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전쟁발발로 미처 조선은행권을 폐기하지 못하게 되자, 대구에서 최초의 한국은행권을 발행했다. 이로써 전란 중에 한국은행권과 조선은행권이 함께 사용되었는데, 여기에 공산군이 강제 유통시킨 인민권까지 더해져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정부는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 바꿔주는 통화교환조치를 단행한다. 모두 5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통화교환 결과, 교환대상액 771억 원의 93퍼센트에 해당하는 719억 원이 교환되었다. 그런데 이 같은 교환조치는 그야말로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감행된 또 다른 전쟁이었다. 전주 · 목포 · 광주 등지에서는 현금수송 도중 모두 9차례나 공산군의 습격을 받았으며, 대구에서는 현금수송 차량이 다른 자동차와 충돌하여 한은 직원 1명이 순직하기도 했다.
전쟁은 경제혼란과 살인적인 인플레이션도 야기시켰다. 전비조달과 파괴된 시설물 복구를 위해 화폐를 마구 찍어내는 바람에 통화량이 급증했고, 물가는 해방 직후에 비해 무려 18배나 급등했던 것이다. 모든 측면에서 악성 인플레가 불가피한 상황이 되자 정부는 1953년 2월 15일 0시를 기해 '제1차 통화개혁'을 공표했다. '새로 발행된 환 표시의 한국은행권과 기존 원화의 교환비율을 환1에 대하여 원100으로 교환하며, 금융기관 예금에 대해서는 세대별로 1인당 500환씩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별도 조치가 있을 때까지 동결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돈 가치가 폭락하다보니 돈을 가마니로 싣고 다녀야 할 정도였고, 매점매석과 사재기가 횡행했다. 한편 빨치산은 자신들의 돈이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되자 은행을 습격해 신은행권을 탈취했다. 그 과정에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고 결국 통화개혁의 문제점이 거론되자 국회는 예금 동결률을 75퍼센트나 삭감했다. 하지만 이미 국민들의 경제생활과 재산권 등은 엄청난 피해를 입은 후였다.
자유당 정권의 권력형 부정대출
해방이후 정부의 가장 큰 과제는 귀속주 불하였다. '귀속주'란 해방 전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주식으로, 자유당 정부는 모든 귀속주를 환수하여 이를 불하한다는 요강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 조건이 까다롭고 사정가격이 너무 비싸 여섯 차례의 공개입찰이 모두 유찰됐다. 결국 정부는 불하방식을 분할매각방식으로 전환하고 입찰계좌 수 제한을 철폐했다. 그런데 이 같은 조치는 정권과 유착된 재벌들에게 은행소유의 물꼬를 터주는 것이었다. 저축은행의 예를 들면, 최고의 입찰가를 써낸 조선제분의 윤석준이 낙찰을 받았으나, 그는 1년이 다 되도록 매수계약을 체결하지 못했다. 겉으로는 자금부담 때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4순위 응찰자였던 삼호방직에 낙찰권을 넘기라는 정부의 외압 때문이었다. 결국 가장 낮은 가격을 써낸 삼호방직의 정재호가 저축은행의 주인이 됐다.
다른 시중은행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표면적인 공매 결과와는 무관하게 권력과 유착된 재벌의 손에 은행소유권이 귀착되었던 것이다. 당시 삼성그룹의 창업자 이병철은 흥업은행과 조흥은행 그리고 상업은행을 불하받았는데 이병철의 후원자는 절대권력 그 자체였던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삼성은 이렇게 4개의 시중은행 중 세 곳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1950년대 말 거대 계열기업군을 거느린 재계 정상이 되었다. 이와 같이 당시 귀속주를 불하받았던 재벌들은 모두 권력 핵심과 유착돼 있었다. 하지만 불하를 받지 못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좀더 상위의 권력과 유착되어 있느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초창기 재벌의 전형적인 코스는 일제로부터 되찾게 된 적산(敵産)의 불하와 원조달러 지원, 정권과의 유착 그리고 그것을 통한 불법대출 등이었다. 특히 산업은행의 연계자금 대출은 큰 말썽을 일으켰다. 연계자금이란 한국은행의 돈을 산업은행이 지목한 기업에게 시중은행창구를 통해 대출해주는 자금을 말한다. 즉 산업은행은 돈 한 푼 없이 한국은행의 돈을 가져다 원하는 기업에 대출해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계자금은 거의 친자유당계 기업에 지원됐고 이들은 대출금의 30퍼센트를 미리 자유당 정치자금으로 제외한 후에 받았다. 당시 이 사건이 폭로되면서 여야의원들은 난투극을 벌였고, 재무장관과 한국은행 및 산업은행 총재에 대한 불신임안이 제출되었다. 정부는 국가기간산업체에 대출해주었다고 변명했지만 대출기업에는 계란과 쇠고기 및 건빵 군납업체와 영화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동림산업은 연계자금을 가장 많이 받은 기업으로, 건빵 단 한 품목으로 7대 기업이 된 이른바 '건빵재벌'이었다.
자유당정권의 부정대출은 엄청난 국고의 손실을 가져왔다. '현대판 봉이 김선달 사건'이라는 황당한 대출 사건을 예로 들면, 이 사건으로 인해 산업은행은 수억 원의 대출금을 떼어야 했다. 사건의 주인공은 문창숙이라는 인물로 전매청의 추천서 한 장과 더불어 총 9억 원의 염전사업계획서를 산업은행에 제출했다. 이에 산업은행은 재무부의 허가를 얻어 5억을 우선 대출해주고 나머지 4억은 차기 지급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창숙은 대출을 받자 목포 앞바다에 방파제를 쌓고 염전 자리만 잡아놓은 채 3년이 넘도록 방치했다. 그리고 대출이자마저 불입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이 국회에서 폭로되었고 그 결과 국정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담보는 전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있다면 갯벌과 바닷물뿐이었고, 문창숙이라는 인물과 주소도 모두 가짜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사기놀음에 정부가 아예 떼일 것을 알고도 거액을 빌려줬으니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 목포 앞바다 물을 팔아먹었다는 얘기가 나올 만도 했다.
쿠데타정권의 개혁정책
5 · 16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먼저 부정축재자의 재산에 대한 환수규정을 발표했다. 재벌들이 부정 취득한 주식과 재산 등을 국고로 환수시키고 이를 적당한 시기에 민간에게 불하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조흥은행 · 상업은행 · 제일은행 · 한일은행 등의 4개 시중은행이 국영화되었는데, 이를 민정이양하겠다는 약속은 박정희 정부 시절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은행이 정부에 귀속됨으로써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관치금융의 출발점이 되었다. 군사정부는 기업의 환수주식에 대해서는 민정이양을 시행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면서 대규모 증권파동을 야기 시키게 되었다. 당시 증권 파동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윤응상이었다. 윤응상은 한국통신과 동양통신, 한국비료를 거친 기업인으로 경희증권 고문을 맡고 있었다.
군사정부는 부정축재분의 환수 규정을 발표한 직후 중앙정보부의 행정관 강소령을 윤응상에게 보냈다. 윤응상이 뒷골목 사정에 밝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윤응상은 강소령을 만난 자리에서 솔깃한 제안을 했다. 증시에서 합법적으로 돈을 벌어 공화당 창당 및 선거를 위한 100억 환의 정치자금을 마련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대신 3개월간 7억 환 정도만 융통해달라는 조건을 붙였다. 자금이 없었던 군사정부로서는 매력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윤응상은 약속한 자금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대한증권거래소 등의 대규모 주식을 헐값에 불하받고 증시 전체를 한손에 주무르게 되었다. 이로 인해 모든 상장주식이 투기 대상이 되었고 액면가의 수십 배 혹은 일백 배가 넘는 거품이 조성됐다. 여기에는 개정된 증권거래법이 한몫을 했는데, 보통거래제를 도입한 것이다.
보통거래는 매수대금을 2개월간은 내지 않아도 거래소가 대신 결제를 해주고 이자를 물리는 제도였다. 그런데 모든 주식이 폭등하자 보통거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증권거래소는 엄청난 결제자금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다급해진 거래소와 윤응상은 금융통화위원회에 융자를 긴급 요청했다. 금통 위에서는 반대론이 거셌지만 증권시장의 붕괴를 막아야만 했다. 이에 따라 20억 환과 30억 환이 열흘 간격으로 지원되었고 한 달 후 다시 230억 환이라는 거액이 지원되었으나 결국 부족 금액을 다 메우지 못해 증권파동이 일어나고 말았다. 박정희 의장은 진상을 밝히기 위해 특별감사단을 구성했다. 그러나 결과는 중앙정보부와 윤응상의 결탁 등에 대한 사건이 미봉되고, 재무장관과 거래소 이사장 경질과 6개 증권사 영업정지로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사건배후 인물로 지목된 전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외유 보내는 것으로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졌다. 당시 증시에서 빠져나간 돈 100억 환의 출처에 대해서는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베일에 싸여 있다.
박정희정권의 정치자금과 기업
군사정부에게 있어서 경제개발은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라도 꼭 실현되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경제 상황에서는 자금조달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차관 도입이었다. 외국 차관은 경제개발의 기본 원동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정부는 각 기업들의 차관 도입을 독려하면서 이에 대해 지급보증을 해주었다. 따라서 기업들은 내 돈 한 푼 없이도 거대한 공장을 세울 수 있었고, 독점적 지위 탓에 물건만 생산하면 얼마든지 비싸게 팔수 있으니 차관도입에 열을 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차관도입은 권력과 재벌의 새로운 밀월관계를 본격화시켰다. 차관금액이 정치자금과 각종 리베이트 등으로 사라져 실제 사업에는 반 정도만 투자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자 정부는 특정 재벌들에게 이른바 거액의 '편타(便他)대출'을 해주었다. 편타란 타금융기관을 지급 은행으로 하는 금융기관이 어음교환을 통하여 거래처에 편의적으로 선지급 해준다는 데서 유래한 용어다. 그 과정에서 당좌계정에 잔고가 부족해도 부도처리를 하지 않고 다른 무자원 당좌수표로 받아 메우는 경우가 발생했고 이런 편법이 계속되면서 산업은행의 지급금액이 바닥이 났다.
차관 도입에 의한 무리한 경제개발 밀어붙이기로 인해 곪기 시작한 환부는 1960년대 후반 들어 터지기 시작했다. 외자사용 기업 중 85개사가 은행 관리로 넘어가고 123개 사가 경영 불능 상태에 빠져 경제개발계획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정권의 치적이 송두리째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부실업체에 대한 과감한 정비를 지시했다. 이에 따라 재계의 거물들이 부실기업 정리의 철퇴를 맞고 조국 근대화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반면 이들의 알짜 계열사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재계에서 급부상한 새로운 강자들도 나타났으니 동국제강, 현대건설, 대우실업, 신동아그룹 등이 그들이다. 그런데 부실기업 정리에도 불구하고 1971년 들어 기업들의 부도사태는 잇따랐다. 기업들이 차관과 은행대출도 모자라 사채에 의존했던 것이다. 당시의 보도 내용에 의하면 3만 9676개의 업체가 약 3450억 원의 사채를 짊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1972년 8월 3일,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사채동결조치가 단행되었다. 이른바 기업들을 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공표된 8 · 3조치의 골자는 기업들이 전 사채를 신고하되 신고된 사채는 월 1.35퍼센트,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조정해 줄 것이며, 2000억 원의 특별 금융 채권을 발행하여 기업의 단기대출금 중 30퍼센트를 대환 해준다는 것이었다. 경영미숙과 과욕으로 인한 빚까지 정부가 나서서 조치를 취해주겠다니 기업들에게는 그보다 더 큰 특혜가 없었다. 그런데 신고된 사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137억 원은 기업주가 자기 기업에 빌려준 사채라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그중에는 사채 때문에 부도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아우성치던 기업인도 끼어 있었다. 급기야 1973년 4월, 이들 악덕 기업인 73명의 명단이 발표됐고, 이중 14명의 기업인이 횡령 · 배임 · 수표부도 등의 혐의로 철퇴를 맞았다. 이후 박대통령은 기업공개를 강력히 촉구하는 5 · 29 특별조치를 지시했다. 하지만 전체 공개 대상 522개 업체 중 25개사의 공개만 이루어졌다.
1971년부터 박 대통령 선거 때까지 대통령 경제2수석 비서관을 지낸 오원철은 박정권의 정경유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박정희 정부 초기에는 대통령에게 밉보인 기업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아냈다. 각종 사업의 인허가를 둘러싸고 은밀히 손을 벌리는 것이었는데, 어떤 사업을 하거나 공장을 새로 건설하려면 그때마다 정치자금을 바쳐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정치자금에 시달리던 재계는 1960년대 후반 정치자금양성화법의 제정을 건의해 성사시켰다. 재계가 공개적으로 정치자금을 각출해 선거관리위원회에 헌금한 것이다. 그런데 박대통령은 1970년대 들어 정경유착의 피해를 근절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국가 정책이 정치세력들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해야 한다는 의지였는데, 대통령 자신이 정치자금 문제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72년에는 대통령선거도 없애버렸다고 한다. 이후 정부는 정치자금과 무관하게 됐으며 그 결과 정치계의 영향 없이 행정업무를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1970년대는 정경유착의 피해가 없었던 연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조치만 그대로 준수됐더라도 IMF 때와 같은 재벌기업들의 부실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5공의 정경유착과 금융사고
5공의 7년은 그 어느 때보다 심한 재계의 부침이 있었다. 정권에 밉보였다는 이유만으로 재벌이 하루아침에 공중 분해되기도 하고 재계의 뒷자리에서 변변히 얼굴을 내밀지 못하던 기업이 하루아침에 재계의 앞자리로 떠오르기도 했다. 정권의 재량이 재계의 판도를 정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5공 정경유착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전두환 비자금사건이다. 전두환은 정부 또는 정부투자기관 등이 발주하는 각종 국책사업의 사업자 선정, 금융 세제운용 등, 기업 경영과 관련된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선처의 대가로 보통 10억 원 이상 많게는 70억 원까지 정치자금을 상납받았다. 전두환은 이렇게 거둬들인 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