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제국
존 스틸 고든 지음 | 황금가지
1장 황무지에서 부의 제국을 꿈꾸다
기회의 땅, 신세계를 찾아서
15세기 후반 콜럼버스와 다른 초기 탐험가들이 신대륙을 발견하자 서유럽의 모든 해양 세력이 탐험을 지원했다. 스페인은 엄청난 양의 금, 은, 보석들을 스페인으로 가져가 유럽의 지배세력이 되었고, 포르투갈은 설탕을 생산하여 막대한 수익을 얻게 되었다. 영국은 신세계 탐험에는 뒤늦게 뛰어들었지만 다수의 합자 회사가 설립되면서 신대륙의 여러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런데 영국의 초기 이주정책은 당시 정부의 골칫거리를 해결하려는 정책과도 부합했다. 16세기 영국은 토지 소유를 기반으로 하는 종래의 봉건제가 급격히 부패되어 가고 있었다. 농경지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던 귀족들이 수익성이 좋은 양 목장을 경영하기 위해 소작농에게서 토지를 빼앗다 보니 수많은 농부들이 실업자가 되어야 했다. 게다가 스페인의 정복 활동 덕분에 유럽 경제에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이 유입되면서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이 또한 도시의 실업자를 양산했다.
땅을 빼앗긴 농부들과 일자리를 잃은 직공들이 거리로 나앉았으며, 이 걸인들이 도시나 항구로 모여들었다. 일련의 런던 상인들이 설립한 버지니아 합자 회사는 이처럼 굶주림이나 법망을 피해 온 사람들을 모집하여 신대륙개발에 나섰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황금에 대한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에 황무지에 농사를 짓는 중노동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굶어 죽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제임스타운의 경우 220명의 영국인이 겨울을 지내고 봄을 맞았을 때는 60명만 살아남았다. 그런데도 버지니아 회사는 계속해서 이주민들을 실어 날랐고 이번에는 식민지의 숲과 풍부한 모래를 영국으로 가져가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충분한 수익을 내지 못했고, 인디언의 공격, 질병, 기아 등이 겹치면서 큰 위협에 처하게 되었다.
버지니아 회사에 무엇보다 큰 위협이 된 것은 아직 식민지에서 수익을 창출할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초에 있었다. 콜럼버스가 연초를 가져온 이후 담배는 유럽 전역에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영국의 서늘하고 습한 기후는 담배를 재배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버지니아는 담배를 재배하여 영국으로 보냈고, 매년 수확량이 늘어나면서 서유럽의 주된 담배 공급지가 되었다. 담배의 인기 덕에 버지니아는 구원을 받았지만 버지니아 회사까지 구원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심각해진 채무 상태, 인디언의 대공격 등의 문제가 회사의 능력 한계에서 벗어나 버린 것이다. 1624년 영국 왕 제임스는 파산한 회사의 독점권을 취소하고 버지니아를 왕령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국왕은 이 특수한 무역 품목의 독점으로 조세 수입의 4분의 1을 벌어들였다.
담배는 버지니아의 풍경과 경제를 바꿔놓았다. 담배 농장이 확장되자 본국으로부터 여성 이주민들이 유입되었다. 이들이 담배 농장의 남자 노동자들과 가정을 꾸리면서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버지니아 하원'이라 불릴 대표회의도 구성되었다. 버지니아 하원이 첫 모임을 가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 배 한 척이 들어왔다. 그 배에는 담배 농장에서 일할 노동자들이 실려 있었는데, 이제까지처럼 자발적으로 배를 탄 사람들이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팔려 온 흑인들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노예가 아니었다. 그들은 영국의 계약제 하인들과 마찬가지로 기한제 계약을 하고 온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노예제에 인종 문제가 얽혀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흑인 노동자의 수가 늘어나자 폭동에 대한 두려움과 더 많은 노동력을 얻어야 한다는 경제적 필요가 증가하면서, 흑인들의 활동에 대한 구속이 늘어났다. 이로 인해 흑인과 백인의 사회적 격차가 벌어지고 서서히 인종주의가 굳어져 갔다.
독립을 꿈꾸는 북아메리카의 대영 제국
경제 학습 곡선의 좋은 점은 한 사회가 보통 한 번만 오르면 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일부를 형성할 다른 식민지들은 경제적 생존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버지니아만큼 고된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 포토맥 강 북쪽에 형성된 메릴랜드는 비옥한 토양과 따뜻하고 습한 기후조건을 지니고 있어 담배를 재배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더구나 해안선이 안쪽 깊숙이 들어와 있는 체서피크 만에 길게 면해 있었기 때문에 저렴한 화물 운송 수단에 힘입어 대농장 경제가 발전했다. 또한 남부의 캐롤라이나는 당시 유럽에서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설탕 공급을 위한 사탕수수 농장이 확산되었고, 소나무가 많아서 목재와 타르 같은 해군 용품의 원천이기도 했다. 더욱이 풀이 우거지고 늪이 많아 가축 농장이 성행했으며, 저지대의 간석지로 인해 쌀이 많이 재배되었다. 또한 산업 혁명의 단초가 된 직물 산업에 수요가 많았던 푸른색 염료, 인디고가 많이 재배되어 캐롤라이나는 빠른 시간 안에 부흥을 이룰 수 있었다.
뉴잉글랜드를 건설한 사람들은 대다수가 청교도였다. 이들은 지주, 상인, 기술자, 변호사, 성직자 등으로, 중산층의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족들을 데려와 마을을 건설했다. 또한 마을이 생겨날 때마다 교회와 학교를 지었는데, 도착한 지 불과 6년 만에 대학(하버드)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뉴잉글랜드는 돌투성이 토양 때문에 담배와 같은 수익성 높은 환금 작물을 재배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곳의 이주민들은 가능성을 주변의 바다에서 찾았다. 뉴잉글랜드 해변에서는 유럽인들의 주요 먹거리였던 대구가 많이 잡혔다. 그들은 대구를 가공해서 유럽으로 수출하고 가공 과정에서 남게 되는 생선껍질, 뼈, 머리, 내장 등을 농지에 뿌려 토양의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뉴잉글랜드인들은 회계 장부 위쪽에 '하나님과 이익을 위하여'라는 구절을 써놓고 그 신념을 행동에 옮기고자 했다. 그들은 대구 외에도 목재, 돛, 비누, 버터 치즈와 같은 잉여 생산품을 수출했으며 자체의 대규모 어선단과 조선업도 갖추었다. 또한 '삼각 무역'을 발전시켰는데, 뉴잉글랜드의 제재목과 어류와 육류를 서인도 제도의 설탕과 소금과 교환했고, 이것을 다시 영국으로 가져가 직물과 철물 등의 제조품과 교역했다. 또한 서인도 제도의 당밀을 수입하여 증류과정을 거쳐 럼주로 만들고, 이것을 아프리카로 보내 노예와 교환했으며, 노예를 다시 서인도 제도에 팔았다. 이러한 무역활동으로 부유해진 뉴잉글랜드의 상인들은 항구 곳곳에 웅대한 저택을 지어 그 부를 과시했는데, 그것들은 지금까지도 남아 그 성공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식민제국이 팽창하면서 아메리카 경제는 날로 번영하고 있었다.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농산물 및 원료 수출지, 선박 건조지, 무역 거점으로서 중대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제조품에 대한 수요도 점차 자체적으로 충족시키고 있었다. 경제는 다각화되었고, 인구 또한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식민지의 거주 지역은 영국의 1.5배에 달하는 넓이로 확장되었다. 그러자 아메리카인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더 이상 모국에 의존하는 식민지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급속히 퍼져 나갔다. 이에 따라 식민지 이주민들은 영국이 부과하려고 하는 세금과 무역규제 강화에 격렬히 저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여전히 아메리카 식민지를 죄인 및 무뢰배를 처리하는 장소이자, 본국의 경제적 실리를 보호하는 곳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2장 원하는 대로 만들어진 부의 역사
해밀턴식 재정 정책의 탄생
1776년 7월 4일, 미국은 독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여전히 영국군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그로 인한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직 실질적인 의미의 중앙 정부가 없다 보니 과세권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대륙 회의는 각 주에 지원을 요청하고 프랑스와 네덜란드로부터 자금을 빌려 조달했다. 그리고 부족한 재원 확보를 위해 화폐를 제조했다. 하지만 화폐 발행의 증가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야기했다. 그러던 중 필라델피아 출신의 거상 로버트 모리스가 책임자로 나서면서 정부의 물자 조달과 재정에 질서와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효과적인 전술을 펼칠 수 있었고, 프랑스 군과 함께 요크타운에서 영국군을 봉쇄하게 되었다. 영국은 주력부대가 함락 당하자 마침내 협상을 제안했고, 1783년 미국의 독립을 공식 승인하기에 이른다.
1789년 4월 30일, 새로이 출범한 워싱턴 행정부에 주어진 일은 산더미 같았다. 백지상태에서 세금 제도를 만들어내야 했으며, 혁명이 남긴 빚도 처리해야 했다. 또한 국가의 주요 수입원이 될 관세를 거둘 세관도 조직해야 했고, 화폐제도도 실행해야 했다. 워싱턴 대통령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0대 초반의 알렉산더 해밀턴을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해밀턴은 열한 살 때부터 뉴욕 상인들이 운영하던 상점에서 일했고, 10대의 나이에 상점 지배인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상점 주인의 도움으로 컬럼비아 대학교의 전신인 킹스 칼리지를 마쳤으며, 이후 법학을 공부해 뉴욕 시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또한 명문가의 여성과 결혼한 후 뉴욕은행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력을 통해 경제학을 심도 있게 공부한 해밀턴은 공공 재정 분야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본성을 간파하고 있었는데, 개인의 이익만큼 강력한 동기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즉 개인의 이익 추구를 미국의 경제 발전으로 연결시키면서도, 고삐 풀린 사리 추구의 욕망으로부터 경제를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자 했다.
해밀턴은 우선 정부의 주 수입원이 될 관세율을 정했다. 이를 통해 재원이 확보되자 당시 가장 시급한 문제였던 부채 해결을 위해 국채를 판매했다. 국채에는 여러 이익들이 제시되었기 때문에 몇 주 사이에 발행된 채권은 모두 팔려 나갔다. 국채의 이자는 관세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지급할 수 있었다. 또한 정부의 채권이 은행 융자를 받는 담보로 사용되면서, 사용 가능한 자본이 증대되었다. 더욱이 1793년 루이 16세가 교수형에 처해진 후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은 해밀턴과 미국에게 행운이라 할 만했다. 전쟁에 대해 중립을 선언한 미국의 식품과 원자재에 대한 유럽의 수요가 크게 증가했고, 이에 따라 연방 정부의 관세 수입도 급증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1807년 미국 정부의 수입은 17년 전의 다섯 배에 이르게 되었다.
해밀턴의 재정정책에서 또 하나의 골자는 영국 은행을 본뜬 미합중국은행, 즉 중앙은행을 설립한 것이었다. 해밀턴은 1,000만 달러의 자본 총액을 모아 중앙은행을 설립했다. 당시 은행 세 곳의 자본 총액을 합한 것이 200만 달러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1,000만 달러는 엄청난 액수였다. 하지만 중앙은행은 해밀턴이 기대했던 기능들을 훌륭하게 수행해 냈다. 통화 공급이 유럽의 어떤 국가에서보다 원활하게 이루어졌고, 투자자들이 은행의 수익성을 높이 평가함에 따라 주식은 놀라운 매출을 기록했다. 투자 붐이 일자 투기 거품이 조성되기도 했지만 해밀턴은 신속하게 조치를 취해 시장을 안정시켰다. 그는 재무부가 증권을 직접 매수하게 함으로써 시장을 원조하고, 원래는 정화나 중앙은행 어음으로만 지불하도록 되어 있는 관세를 45일 이후에 만기가 되는 어음으로도 지불할 수 있도록 하여 자금의 유동성을 증가시켰다.
증기 기관과 산업 혁명 그리고 철도
중요한 새 기술이 나타나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칠 때면 언제나 경제적 시너지 효과가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은 운송, 통신, 제조업, 광업, 여행 및 상업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830년, 조지 스티븐슨이 증기기관을 활용해 철도의 실용성을 증명해 보이자, 미국은 증기 기관을 선박의 동력원으로 이용했다. 주요 산업시설이 수력이 풍부한 뉴잉글랜드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러한 운송의 변화는 지역의 경제의존도를 변화시켰다. 북부에서 남부로만 흐르던 물자가 동부로 흐르게 되자, 북부와 중서부의 교류가 빈번해지게 된 것이다. 또한 그것은 후에 남북전쟁에서 두 지역이 힘을 합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증기기관으로 인한 철도의 발달은 통신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 역무원이 마주 오는 철도차량과의 추돌 사고를 막기 위해 우연히 개발한 전신체계가 새뮤얼 F. B. 모스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발전되면서 급속도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1840년대 말에는 미국 전역의 주요 도시가 통신선으로 연결되게 되었는데, 월스트리트는 전신의 덕을 가장 크게 본 분야였다. 전신이 개발되기 전에는 주자(runner)라고 불리는 사람(주로 어린아이들)이 주문서와 최신 가격표를 들고 중개업자와 거래 사무소를 잽싸게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실시간 교신이 가능해지자 지방의 거래자들이 뉴욕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시장이 클수록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에게 더 좋은 가격이 형성되기 때문에 뉴욕은 금융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이 되었고 이로 인해 오늘날 뉴욕은 세계 금융의 중심부가 되었다.
증기기관과 철도의 발달로 산업혁명이 촉진되자 일상의 편안함은 현격하게 늘어났다. 1790년대 영국의 윌리엄 머독은 석탄을 가열하면 노란 불꽃을 내는 기체가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렇게 등장한 가스등은 야간 활동을 눈에 띄게 증가시켰다. 하지만 가스등은 질식과 폭발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개선한 실내조명이 등장했고, 이로 인해 제조업 분야의 생산성이 대폭 증가했다.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욕망은 계속해서 편의시설을 탄생시켰다. 공기를 데워 난방하는 라디에이터가 등장하면서 중앙난방 시대가 도래했고, 상하수도 시설을 설치하면서 욕실을 갖춘 집도 지어졌다. 이러한 일상의 기적들은 미국인들에게 유례없는 낙관주의와 진보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미국이 '국가'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기 위해서는 남북전쟁이라는 끔찍한 사건을 통해 단련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3장 부의 집중과 경제 거인들의 탄생
남북 전쟁
1861년 4월 15일,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이제까지 적자에 허덕이던 연방 정부의 재정은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남북전쟁은 그동안 미국이 쌓아온 많은 것을 잃게 만들었다. 수많은 산업시설이 파괴되었고, 거의 50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죽었다. 노예제도 폐지라는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인종 차별주의는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다. 남부의 백인들은 다시 정치권력을 소유하게 되었고, 그 후 100년 동안 흑인들은 선거권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미국에 새로운 역동성을 불러온 장본인은 바로 엄청난 생명과 비용을 희생시킨 남북 전쟁이라는 아마겟돈이었다. 남북 전쟁은 이전에는 문법적으로 '복수'로 취급되었던 미합중국을 여러 주의 결합이 아닌 하나의 국가, 즉 '단수'로 변모시켰다. 또한 엄청난 전쟁 자금이 국내에서 충당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미국 국민들은 자신의 조국이 얼마나 부유하고 강력해졌는가를 확신하게 되었다. 바로 그러한 믿음과 자원을 이용해 미국인들은 향후 30년 동안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다.
경제 거인들의 탄생
남북 전쟁이 끝나고, 20세기에 돌입하면서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현대적인 산업 경제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특히 철강 산업이 경제 분야에 미친 영향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는데, 사실 진정한 발명품은 강철이 아니라 바로 강철을 생산하는 비용의 절감이었다. 적정량의 탄소를 혼합해 만든 강철은 주철과 연철의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까지도 강철을 제조하는 유일한 방법은 연철에 탄소를 섞어 며칠 동안 열을 가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방법으로는 얻을 수 있는 양이 매우 적었다. 따라서 강철의 이용 범위는 높은 가격을 정당화할 수 있는 비싼 물건들, 즉 칼날이나 면도날 등에 제한되어 있었다. 그런데 앤드루 카네기가 강철 산업에 뛰어들면서 산업 분야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미국은 한층 더 부를 이루게 된다.
앤드루 카네기는 가난한 스코틀랜드계 이민자의 후예였다. 어릴 적부터 전신 기사일을 배워 성공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