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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밑의 경제학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지음 | 이콘
제1장 영미의 세계 지배는 '음식'을 통해



산업혁명이 전부는 아니다 : 영국은 과거 일곱 개의 바다를 지배한다고 불리던 대영제국이었습니다. 영국이 초강대국이 된 이유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우수한 공업제품을 대량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업혁명 이전부터 제국에 많은 부를 가져다주었던 중요한 수입원은 바로 '식(食)'입니다.

영국은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을 식민지화하여 식량의 생산과 유통을 지배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 경영의 기본은 플랜테이션으로 노예와 외국인 노동자 등을 투입하여 토지를 개간하고 대규모 농장을 만들어 단일 상품작물을 재배함으로써 비용을 줄이고, 그 무역을 지배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손에 넣었습니다.



영국의 가난한 식문화 : 영국은 식량으로 세계경제를 재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우수한 음식문화를 발전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홍차의 문화를 이룩했지만 기후가 맞지 않은 탓에 와인도 만들지 못하고, 영국의 빵도 별 맛이 없습니다. 오히려 요리가 가장 맛없는 나라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영국은 세계의 식량 생산과 무역을 제패했지만 자기네 땅에서 농산물을 길러 스스로 소비하는 지산지소(地産地消)에는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요리 또한 영국의 독자적인 요리를 발전시키려 하지 않고 프랑스 요리 등 다른 나라 요리를 즐기면 그만이라는 태도였습니다. 원래 플랜테이션은 농작물의 대량생산입니다. 공업적인 발상인 것입니다. 영국인은 '식'을 문화가 아닌 자원으로 보는 관점이 강한 것이 아닐까요? 그러한 그들이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에 의한 대량생산 시스템을 성공시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은 왜 발전하였는가 : 미국 식민 지배자들이 영국에서 독립한 계기는 홍차였습니다. 미국 독립의 계기가 된 '보스턴 차 사건'은 홍차의 관세가 원인이 되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홍차 무역을 영국이 독점하여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있다는 사정이 있었고, 그에 대하여 미국 측이 관세 자주권을 추구하며 반기를 들어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미국의 독립도 홍차라는 계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후에 미국을 홍차 문화에서 커피 문화로 바꾸는 계기가 됐습니다.



미국이 세계경제의 헤게모니를 쥐게 된 이유도 역시 식량 생산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미국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1920년대를 '롤링 트웬티즈(Rolling Twenties)'라고 하는데 그 물꼬를 트게 한 것이 농업이었습니다. 특히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은 농업 생산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고 미국은 이 시기에 유럽에 농산물을 수출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본으로 농업과 제조업의 공업화를 달성하고 그것들을 전 세계에 수출함으로써 강대국이 되어갔습니다.



세계공황은 '식(食)'에서 시작되었다 : 미국이 두각을 나타내던 1920년대가 저물면서 이번에는 세계경제가 미국으로 인한 세계대공황 때문에 오히려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 대공황의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 대륙에서의 농산물 가격 하락 때문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유럽이 안정을 되찾자 유럽의 농업 생산량이 다시 증가하여 신대륙으로부터의 농산물 수입이 줄게 됩니다. 그 결과 미국의 농산물 재고량이 늘어나게 되고, 그것은 농산물 가격을 폭락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자 미국은 대량생산 기술을 강화함으로써 본격적인 공업화시대에 들어가게 됩니다. 미국은 그 공업력을 농업에까지 투입하여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대량생산, 대량판매라는 방식을 통해 식품을 공업화합니다. 미국은 햄버거로 대표되는 패스트푸드, 콜라 등의 탄산음료, 그리고 브로일러 등의 가축 대량생산 시스템, 슈퍼마켓이라는 대량판매 소매시스템까지 새로 만들어 냅니다. 이는 세계를 한순간에 변화시킬 정도의 힘을 가진 '혁명'이었습니다.



제2장 프랑스의 대단한 식문화 전략



"음식이 맛없는 나라의 사람은 믿을 수 없다" : 영국이 '음식'을 '자원'으로 파악하고 식량을 지배함으로써 세계경제를 지배하였다면 프랑스는 음식을 '문화'로 파악하여 식문화로 패권을 추구하고자 한 나라입니다. 2005년 프랑스의 시라크 대통령이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자리에서 영국인을 빗대어 "음식이 맛없는 나라의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발언하여 물의를 빚은 일이 있습니다. 사실 그러한 사고방식은 프랑스라는 나라의 전통이기도 합니다.



프랑스인들은 프랑스 요리 이외의 독일 요리, 영국 요리 등은 상류사회 요리가 아닌 농민 요리로 치부합니다. "독일 요리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영국 요리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프랑스인들의 주장입니다. 자신들이 세계 음식문화의 중심이라는 프랑스인의 강렬한 자의식, '식(食)의 중화사상'에는 때로 소름끼치지만, 그만큼 자기네 음식에 대한 열정이 특별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와인으로 상대의 격을 매기는 프랑스 외교 : 파리의 엘리제궁에서는 요리와 와인을 무기로 전략적인 외교를 펼칩니다. 흥미로운 것은, 내놓는 메뉴와 와인을 통해 프랑스 정부가 상대의 문화 수준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음식이나 와인에 대한 지식은 몇 세기 전부터 유럽의 귀족이나 왕족이 갖춰야 할 교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인이 특히 더하기는 하지만, 음식에 대한 화제는 유럽인들에게 기본적 교양인 것입니다. 따라서 외교에서도 식문화의 수준은 중요합니다. '외무성이 기밀비로 고가의 와인을 사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지적을 종종 받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느 정도 그 필요성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메디치가와의 결혼이 프랑스 요리의 시작 : 15세기 백년전쟁부터 부르봉 왕조 탄생에 이르기까지 절대왕정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이탈리아로부터 우수한 식문화가 건너옵니다. 프랑스 요리에 관한 한 역사책을 찾아보면 "1533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앙리 2세와 결혼하여 피렌체의 요리사를 동반하고 프랑스에 도착한 시점을 근대요리의 기원으로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나이프, 포크를 사용하여 음식을 먹게 된 것은 메디치가의 아가씨가 시집오고 나서부터입니다. 지금처럼 사람들이 개별 접시에 음식을 먹는 스타일도 메디치가로부터 들어왔습니다. 카트린이 데려온 요리사들은 수프와 베사멜 등의 소스류, 트뤼프, 그린피스, 아티초크, 브로콜리 등의 요리법을 전해주었고, 잼과 케이크, 마카롱, 프랑부아즈, 프티푸르 등의 설탕과자 그리고 아이스크림까지도 프랑스 왕궁에 들여왔습니다. 또 와인 마시는 법도 프랑스 왕실은 카트린의 매너를 채용하였습니다.

왕궁에서 시민사회로 : 부르봉 왕조는 사치와 낭비가 심했습니다. 이로 인해 국고가 바닥나고 급기야 1789년에 프랑스혁명이 일어납니다.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왕족과 귀족들의 요리를 담당하던 요리사들은 고용주를 잃고 파리에서 레스토랑을 개업합니다. 궁정의 문화가 시민사회로 나오게 된 것이지요. 파리는 세계 최고의 미식의 도시가 되었고 1803년에는 유럽 최초로 미식 정보지 『미식가의 연감(Almanach des Gourmands)』이 발행되었습니다.



빈 회의에서 요리를 외교의 수단으로 : 부르봉 왕조 이래 프랑스에서는 요리가 권력의 과시와 외교의 수단으로서 이용되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부터 왕정복고 시대까지 외교관을 지낸 탈레랑은 요리를 외교의 수단으로 활용한 대표적 인물입니다. 프랑스는 당시에도 이미 요리를 외교의 무기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당시 프랑스 요리의 수준은 그만큼 다른 나라보다 훨씬 뛰어났던 것이지요.



1814년부터 15년에 걸쳐 열린 빈 회의에서 프랑스의 외무대신이었던 탈레랑은 마리 앙투안 카렘이라는 요리사를 데려가 교섭 상대에게 음식 공세를 퍼붓습니다. 현대 프랑스 요리가 확립된 것은 빈 회의 이후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서 입니다. 19세기에는 로트렉, 알렉상드르 뒤마, 발자크, 빅토르 위고 등 미식가로도 유명한 저명한 예술가들이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보르도 와인의 등급이 매겨진 것도 19세기의 일입니다. 당시 나폴레옹 3세는 만국박람회에 출품할 보르도 와인에 등급을 매길 것을 명령하였고, 수많은 샤토 중에서 88개소가 선정되어 1급에서 5급까지 등급이 매겨져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프랑스 요리는 문화다 : 유럽이 세계를 석권하고 경제와 문화의 중심이 된 이 200년 동안은 프랑스 요리가 발흥하는 시기와 거의 일치합니다. 국제 정치의 패권은 유럽과 미국에 있었지만 식문화로서 전 세계에 영향을 준 것은 프랑스 요리였습니다.



프랑스 요리는 한마디로 말하면 '음식의 문화'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가 영국, 미국과 다른 점입니다. 음식을 단순히 영양을 취하거나 돈벌이의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문화'로서 파악하는 것이지요. 또한 와인과 요리와의 복잡한 조합에서 알 수 있듯 다양한 시도를 거듭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외교상의 미묘한 밀고 당김에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제3장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중국 · 아시아



진짜 르네상스는 중국에서 일어났다? : 식문화에서 프랑스보다 한 수 위에 있는 나라는 바로 중국입니다. 최근 150년에서 200년간을 서양의 시대라고 한다면 그 이전은 아시아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보통 역사 시간에 유럽의 르네상스만 배우지만 사실 진짜 르네상스는 중국에서 일어났다고 할 수 있지요. 중국은 4대 문명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가장 번창한 나라였고, 인구 면에서도 당 이전부터 줄곧 세계 제일이었습니다. 20세기에 몰락했을 때에도 인구만큼은 여전히 세계 제일이었고 21세기인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식(食)'의 풍부함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경제력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도 막대한 인구를 먹여 살릴 만큼 풍부한 '자원으로서의 식(食)'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음식이 곧 문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문화의 정도가 가장 높았던 것은 역사적으로 계속 중국이었으니, 중국인들이 중화사상에 젖어 있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중국의 우수한 식문화 : 중국 요리의 가장 큰 특징은 많은 이민족의 요리 문화가 혼합된 잡식의 식문화라는 점입니다. 중국의 남쪽 지방은 벼농사 문화권이지만 북쪽 지방은 기후 조건상 쌀을 재배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4대문명 중 하나인 황하문명은 사실 쌀 문화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잡곡 문명으로 오곡 중에서 특히 조와 피를 많이 먹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주식이 밀로 바뀌는데 아마도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밀을 재배한 것으로 보입니다. 면을 먹게 된 것은 한나라 때부터입니다. 한에서 당의 시대에는 이미 현재와 같은 식문화가 정착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시아는 주로 북쪽은 밀, 남쪽은 쌀을 재배합니다. '중국은 쌀 문화권'이라는 인식은 사실 정확한 것이 아니고, '중국 남부는 쌀 문화권'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지요. 그들 남북의 문화가 중국 속에서 뒤섞여 전체로서 중국의 식문화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 문명이란 음식으로 보면 '잡종의 문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민의 식문화도 높은 수준 : 중국 식문화의 두 번째 특징은 궁정을 중심으로 하는 요리 문화 외에 일찍부터 서민의 식문화도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는 점입니다. 외식 문화도 일찍부터 발달하여 소위 음식점이라는 것도 한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음식점이 있었다는 것은 서민의 음식이 풍부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궁정요리뿐만 아니라 서민의 요리 또한 기원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은 '식(食)'의 역사가 수천 년이나 되고 음식이 다양하고 풍부했던 것 이외에도 중산계급에 이르기까지 풍성한 '식문화'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입니다.



공자의 사치스런 식탁 : 중국의 식문화가 풍부한 또 한 가지 이유는 문화의 개방성에 있습니다. 인도나 이슬람 문화권에 가면 '이러저러한 것을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식의 일종의 금욕주의가 엿보입니다. 그런데 중국의 유교나 도교에는 그러한 금기가 없습니다. 잡종의 문화이기에 음식에 관해서도 잡식성입니다. 중국인들처럼 뭐든지 먹어버리는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위대한 철학자인 공자는 예의에는 철저했지만 음식에는 금욕적이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한시 등을 읽어봐도 술자리나 연회 장면의 묘사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역시 중국의 문화가 금욕적인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현세의 즐거움을 긍정하는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중국 요리의 종류가 무궁무진한 이유는 남과 북의 요리가 자연스레 혼합되고 세계의 식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중국 요리는 여러 가지 새로운 재료와 조미료를 받아들이면서 시대와 함께 점점 변하고 있습니다.



서양에는 없는 의식동원(醫食同源) : 또 한 가지 중국 식문화의 특징은 '의식동원(醫食同源)'이라는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도교의 관점으로 '식(食)'이라는 것이 동시에 약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음식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한방약입니다. 중국은 음양의 철학을 이용하여 몸을 덥게 하는 것과 식게 하는 것을 구분하여 음식에 균형을 취합니다.



이 '의식동원'이라는 사고방식이야말로 대식 지향의 프랑스 요리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중국의 식문화가 한 차원 높다는 것을 나타내는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음식과 건강을 결부시키는 사고방식은 당나라 때에도 있었고 실제로 그 이전인 한나라 때부터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의 식문화는 단순히 풍요로울 뿐만 아니라 매우 선진적이었던 것입니다.



제4장 서양은 어떻게 아시아를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는가?



아시아 침략을 가능케 한 것 : 가난하고 문화적으로도 뒤졌던 중세 유럽이 어떻게 부유한 선진 지역이었던 아시아를 침략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무력' 때문입니다. 유럽은 오랜 세월에 걸쳐 전쟁만 계속했기 때문에 다양한 무기와 전술, 나아가 권모술수에 능했습니다. 그러나 인도나 중국 같은 아시아의 대국은 무기만으로는 그리 간단히 정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아시아를 침략할 만큼의 힘을 기른 것일까요?



풍요롭고 문화 수준도 높았던 이슬람 : 예언자 마호메트를 시조로 하는 이슬람교가 세력을 늘려 아랍인을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제국이 8세기 말까지 서아시아 전역과 북아프리카를 지배하였습니다. 사실 중세시대에 그리스 로마의 문명을 계승한 것은 유럽이 아니라 이슬람 국가였습니다. 이슬람 국가는 유목민이 주체가 되어 돈 되는 곳을 찾아다니는 상인 국가적 성격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주식회사나 화폐경제의 원형도 이슬람 국가에서 전개되었는데, 그 이슬람과 함께 움직인 유대상인과 옛 페니키아인들로 인해 무역의 중개지도 번성했습니다.



십자군은 '라틴의 침략' : 이런 상황을 바꾸고자 한 것이 11세기에 시작된 십자군입니다. 십자군은 기독교도들이 자신들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지배하기 위해 시작한 원정이지만, 실제로는 문화 수준이 낮았던 나라들이 무력을 통해 이슬람제국을 공격하여 재화와 미술품을 수탈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 '십자군'이라는 단어는 서양에서밖에 쓰이지 않고, 터키 등에서는 '라틴의 침략'으로 일컬어집니다.

후기 십자군 원정의 배후에는 이슬람에 지배당하고 있던 여러 도시국가들이 무역의 통로를 회복하고자 했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는 십자군 원정의 배후에 있던 대표적인 도시국가였습니다. 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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