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굴기
왕지아펑 외 7인 지음 | 크레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 블루오션을 찾아 바다로 나아가다
세계 최초의 식민 제국 건설과 세계분할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가장 먼저 해외 개척을 시도하여 근대제국을 이룩한 나라들이다. 양국의 굴기는 길지 않지만 세계 여러 나라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도 주목을 받고 있다. 포르투갈은 1415년 북아프리카 탐험을 시작으로 에스파냐보다 먼저 식민지 무역사업을 실행했다. 특히 디아스라는 무역업자가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하고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에 의해 인도가 발견됨으로써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마닐라 향료제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무역 거점을 독점하게 되었다. 또한 1500년경 우연히 브라질을 발견하여 이곳에 사탕수수를 경작하는 아메리카 최초의 플랜테이션 농장을 만듦으로써, 유럽의 주요 설탕 공급지이자 포르투갈의 주요 경제 기지를 갖추게 되었다. 포르투갈은 이렇듯 인도양을 장악하고 아프리카에 상업기지를 세우고 브라질에 대규모 농장을 세움으로써 제국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하게 되었다.
에스파냐의 식민 사업은 포르투갈보다 조금 늦었으나 곧 빠른 속도로 포르투갈을 뛰어넘었다. 1492년 8월, 3척의 범선을 이끌고 동방 탐험에 나선 콜럼버스는 1년 동안의 항해 끝에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그가 발견한 곳은 애초에 생각했던 동방이 아닌 아메리카였지만 그는 그곳이 꿈에도 그리던 동방의 인도, 중국의 어딘가라고 굳게 믿었다. 콜럼버스의 탐험이 성공하고 10여 년 뒤 마젤란이 함대를 이끌고 세계 탐험에 나섰다. 마젤란은 3년 동안의 탐험으로 인해 수많은 위기를 겪어야 했는데, 오랜 탐험을 견디지 못하고 귀국한 탐험대가 마젤란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모함하여 그의 가족들은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게다가 마젤란 역시 필리핀제도에 닿았을 때 그곳의 부족 간 전쟁에 휘말려 목숨을 잃게 된다. 하지만 마젤란의 탐험은 향료제도를 에스파냐에 안겨주었고, 지구가 둥글다는 가설을 증명시켰다.
콜럼버스와 마젤란 같은 탐험가들의 성공은 에스파냐에 방대한 영토와 부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탐험 과정에서 포르투갈과 수시로 충돌했고, 그때마다 교황이 중재에 나섰다. 1480년, 두 나라가 다시 대서양에서 충돌하자 교황은 양국 간의 조약을 체결하도록 했다. 이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은 대서양 동쪽으로, 에스파냐는 대서양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마젤란이 세계 일주 항해에 성공하면서 생겨났다. 즉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증명됨으로써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 또 다른 경계선이 필요해진 것이다. 1529년, 두 나라는 새로운 조약을 체결했다. 몰루카제도에서 동쪽으로 17도 떨어진 지점을 경계로 동쪽은 에스파냐가, 서쪽은 포르투갈이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근대 역사상 최초의 세계 분할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두 나라만의 약속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의 이웃나라들 역시 세계 팽창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제국의 쇠락이 남긴 교훈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제국의 황금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포르투갈은 1580년, 왕위계승법에 따라 에스파냐에 합병되었고, 60년 후 다시 독립하긴 했지만, 쇠락의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한편 에스파냐는 더욱 강성해졌지만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역시 쇠락하고 말았다. 탐험을 통한 식민 활동은 사회 모든 계층이 참여하는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그러나 그것의 성공은 귀족과 교회에 집중되어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게다가 에스파냐는 전성기를 이룬 시기에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여러 지역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아메리카와 필리핀 등의 식민지에서 저항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유럽 본토에서도 프랑스, 영국과의 패권전쟁, 루터의 종교개혁에 의한 종교전쟁 등에 관여했다. 이렇게 에스파냐는 30년 이상을 전쟁의 한가운데 서 있으면서 급속도로 몰락해 갔다.
쇠락의 원인은 이교도 탄압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에스파냐에는 상당수의 무어인(이슬람교도)과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상공업과 수공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추방함으로써 상공업의 미래는 더욱 암울해졌다. 또한 이교도 탄압수단의 하나로 이루어진 마녀사냥은 수많은 부녀자들의 목숨을 앗아감으로써 부정적인 사회분위기를 조성시켰다. 게다가 에스파냐는 수공업과 농업 등 일상용품을 생산하는 노동을 천시했다. 이런 사회분위기는 국민들의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능력 개발을 제한시켰다. 반면 영국과 네덜란드는 에스파냐를 위해 일상용품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이처럼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에스파냐 제국은 몰락하고 말았다.
'안전'까지 사고팔았던 바다의 상인 : 네덜란드
전통 농촌 개혁
네덜란드의 근대 굴기 역사 중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아주 많다. 네덜란드는 열악한 자연조건과 부족한 지하자원 그리고 주변국들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강인한 민족성으로 끊임없이 분투하여 굴기를 이루었다. 그들은 처한 환경에 맞추어 적절한 대책을 세우고, 자원을 적절히 배분하고 활용하는 데 뛰어났으며, 치밀하고 철저한 계획하에 경제 이윤을 극대화하여 막대한 부를 창출해냈다. 이러한 요인들이 가장 크게 적용된 분야가 바로 어업, 수공업, 농업이었다. 네덜란드는 이 세 가지 분야의 발전을 기반으로 재력을 갖춘 다음 해외 팽창을 시도하여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우선 어업의 경우를 보면, 당시 네덜란드에서 청어 포획은 '금광'으로 통할 정도의 큰 이익사업이었다. 청어 가공에는 고기 잡는 사람, 내장을 발라내는 사람, 생선을 소금에 절여 통에 넣는 사람 등의 분업 체계가 존재했다. 이러한 체계는 생산력을 증대시켰고, 그로 인해 많은 도시 상인들의 자본이 투자되면서 청어 가공 산업은 대규모 생산 공정을 갖추게 되었다. 게다가 효율적인 어업관련법규는 청어산업을 더욱 발전시켰다. 청어산업의 중심 도시인 5개 항구에는 어민들로 이루어진 '대어업위원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 위원회는 의회로부터 일련의 법적 권리를 부여받아 엄격한 심사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는 어선은 출항을 금지시켰다. 이러한 시스템은 청어의 국가경쟁력을 높여 유럽 시장에서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농업 역시 어업에 못지않은 놀라운 발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는 지형적인 특수성으로 인해 물난리가 매우 잦았다. 그래서 마을마다 둑과 제방을 쌓아 바다와 호수, 습지 등을 육지로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땅은 '폴더(Polder)'라 하는데, 폴더를 경작한 농민은 5년에서 길게는 20년까지 면세 혜택을 받았다. 농민들은 경작지가 처한 자연환경에 맞추어 업종을 선택했다. 예를 들면, 점토 지역에서는 곡물을 생산하고, 작물을 경작할 수 없는 곳에서는 목축업을 발달시켰으며, 교통이 편리한 도시근교에서는 부식품과 원예작물을 집중 재배했다. 또한 같은 업종이라도 지역에 따라 중점분야가 달랐다. 목축업을 예로 들면 어떤 곳에서는 버터 생산에 중점을 두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유제품, 양털, 소고기를 생산했고, 또 다른 지역에서는 도시에 공급할 신선한 우유를 생산했다.
네덜란드 농업에서 무엇보다도 주지할 점은 그들이 언제나 시장의 경쟁력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농민들은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시장경제 관념을 키워 나갔다. 당시 대학 교육을 받았고, 비교적 재산이 넉넉했던 한 농장주의 장부를 보면, 그는 자신의 농장에서 생산한 밀과 보리를 시장에 내다 팔고 호밀을 사들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밀은 부유한 사람들의 주식으로 가장 비싼 곡식이었고, 맥주 원료였던 보리는 인기가 매우 높았다. 반면 호밀은 주식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데다 발트 해 주변지역에서 생산된 호밀이 대량 수입되면서 가격이 더욱 폭락했다. 이런 시장의 흐름을 읽은 농장주는 자신이 생산한 밀과 보리는 외국에 내다 팔고 대신 싸게 사들인 호밀을 일꾼과 하인들의 식량으로 공급하여 가계 지출을 최소화했다. 이러한 경제관념은 당시로서는 매우 앞선 생각이었다.
시장의 발달과 해상운송 혁명
네덜란드의 황금산업들은 모두 발트해 무역과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서유럽 국가의 선박은 발트해의 관문인 외레쥰드(Oresund)해협을 반드시 지나야 했다. 당시 이 해협을 장악하고 있던 덴마크는 이곳을 지나는 선박에 통행료를 부과했다. 그런데 당시 통행료 산정방식이 매우 특이했다. 선박의 중량이 아닌 갑판의 너비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즉 갑판이 좁을수록 통행료를 적게 낼 수 있었다. 이러한 산정방식은 네덜란드 조선업 발달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대량 무역을 하게 된 네덜란드인들은 통행료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갑판을 좁게 만드는 대신 대부분의 시설을 선체 아래에 집중시킨 플류트선(Fluit)이라는 화물수송선을 만들었다. 이런 모양 때문에 플류트선은 뚱보선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이 화물선을 계기로 시작된 조선업의 발달로 네덜란드는 해상운송사업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조선업이 발전하자 네덜란드는 발트해 무역을 통해 국내 경제발전을 확대시키는 한편, 원양항해를 통해 대외 확장을 꾀했다. 당시 유럽의 신흥 자본 계급들이 앞 다투어 세계로 진출했듯이 네덜란드 역시 동서 두 방향으로 나누어 해외무역 확장을 진행했다. 동쪽으로는 아시아 대륙 및 인도양과 태평양의 무수한 섬나라를 겨냥했으며, 서쪽으로는 아메리카 대륙을 중심으로 무역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러한 대외활동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해외무역 전문 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이다. 사실 네덜란드의 아시아 무역은 포르투갈, 에스파냐와 비교할 때 1세기가량 뒤늦은 것이었다. 그리고 영국은 이미 동인도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주목되는 것은 그것이 근대 주식회사의 시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1595년 4월, 암스테르담 상인 7명이 모여 원거리회사를 설립하고 동방 탐험을 위한 함대를 파견했다. 첫 항해에서 인도양 탐험에 성공했고, 다음해 인도네시아 자바에 상업 도시 반탐을 건설했다. 이러한 성공은 국내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새로 생겨난 수많은 동방무역 회사들이 줄지어 아시아로 진출했다. 그런데 난립하는 동방무역 회사를 관리하고 조정해 줄 통일된 지휘 체계가 없었다. 게다가 상품 확보를 두고 벌어지는 과다경쟁은 여러 가지 손실을 가져왔다. 그러자 무역회사들은 서로 힘을 합해 '연합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동인도회사에는 거대 자본이 모여들었고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가 뒷받침되었다. 의회는 동인도회사에서 수입하는 상품에 면세권을 부여했고, 식민도시에 대한 행정과 사법, 국방의 권리까지 부여했다. 한마디로 동인도회사가 네덜란드의 대사관 역할을 한 셈이었다.
동인도회사는 국가가 부여하는 각종 특권에 대한 조건으로 2만 5,000길드를 지불했다. 그런데 의회에서는 이 돈을 한 푼도 유용하지 않고 다시 동인도회사에 투자했다. 즉 국가가 동인도회사의 대주주가 된 셈이었다. 의회는 처음 동인도회사에 21년짜리 특허장을 발급했는데 10년에 1번씩 자산평가를 다시 하여 투자 기간을 연장했다. 이때 사전에 자금을 회수하고 싶어 하는 주주들은 암스테르담의 증권거래소에서 손쉽게 주식을 매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주식 전매로 주식 수는 그대로 유지되면서 주주만 바뀌는 오늘날의 주식 시장과 같은 형태가 나타났다. 또한 동인도회사는 주식을 최대한 작은 단위로 나누었다. 그 결과 암스테르담 시장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까지도 전 재산을 동인도회사 주식에 투자했을 정도였는데, 이렇게 동인도회사는 자금을 최대한 끌어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스템으로 인해 각종 위험 요소가 내포되는 대규모 해외무역을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가 만들어낸 근대 시장경제 체제는 주식회사뿐만이 아니라 증권거래소와 은행 시스템도 만들어냈다. 영국보다 100여 년 빨리 설립된 암스테르담 은행은 네덜란드 경제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가장 특이할 만한 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신용'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당시 전 유럽을 통틀어 신용 대출 개념을 응용한 것은 네덜란드 상인뿐이었다. 암스테르담 은행은 설립 초기 연이율 6.25%의 높은 대출이자를 산정했으나 17세기 중반에는 3~4%의 이자율로 상인들에게 대출을 해주었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 상인들은 낮은 제조원가로 선박을 제조하여 대량 무역을 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큰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결국 안정적인 신용 대출 조건, 저렴한 운송 원가가 네덜란드 상인이 새로운 기적을 창조할 수 있게 해준 셈이었다. 네덜란드는 17세기 황금시대 이후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힘을 잃어 갔으나 오늘날 다시 세계 운송 대국, 무역 대국, 투자 대국, 농업 대국, 수리(水利) 대국으로 거듭나고 있다.
변혁을 주도한 산업혁명의 기수 : 영국
17세기의 명예혁명과 정치체제 개혁
영국의 굴기 과정을 한마디로 말하면 왕권 대 귀족 간의 투쟁으로 인한 정치체제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1215년, 귀족들은 존 왕에게 대헌장에 서명하도록 함으로써 의회를 국왕과 맞설 만큼 강력한 정치기구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왕권약화는 국가 통일과 국내시장 발전을 저해하였다. 그나마 15세기 중반, 영국의 군소 귀족들이 왕위를 쟁탈하기 위해 장장 30년이 넘게 벌인 장미전쟁(1455~1485)으로 인해 많은 명문 귀족 가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결국 최후에 왕위를 거머쥔 주인공은 별 볼일 없는 가문 출신의 헨리 튜더(Henry Tudor, 헨리 7세)였다. 하지만 튜더왕조는 전제 왕권의 막강한 파워를 토대로 영국을 통일시켰다.
헨리 7세의 뒤를 이은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 부녀는 영국을 더욱 강력한 민족국가로 발전시켰다. 헨리 8세는 로마교황과 단절하고 종교개혁을 통해 가톨릭 강국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내정간섭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민족 단결력을 고취시키고, 해외 영토 확장에서도 큰 성과를 올렸다. 또한 1588년 해상 강국이었던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퇴시킴으로써 유럽 해상 패권을 거머쥐게 되었다. 이로써 영국은 세계 역사 무대에 강국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 이후에는 다시 왕과 귀족 간의 갈등이 시작된다. 특히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하고 세금을 강제 징수하는 등, 강력하게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에 의회는 당연히 반발했고, 결국 찰스는 1642년 1월 런던에서 쫓겨나고 만다. 하지만 그는 쫓겨난 이후에도 왕권을 포기하지 않고 전쟁을 선포했는데 이 내전에서 올리버 크롬웰이 승리함으로써 그는 1649년 1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크롬웰은 자신을 호국경이라 칭하고 공화국을 수립하여 잉글랜드공화국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크롬웰 역시 의회의 권력을 축소했고, 이후 새로 집권한 왕들 역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여 국왕과 의회의 주도권 싸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제임스 2세는 다시 가톨릭을 끌어들여 전제 왕권 강화에 이용하고자 했다. 의회는 제2의 크롬웰이 등장하여 의회를 장악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내전을 유보했지만 그 대신 제임스 2세의 사위이자 프로테스탄트인 네덜란드의 통치자 윌리엄과 메리 부부에게 종교의 자유와 의회의 권리를 보장하는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윌리엄이 대군을 이끌고 들어와 런던에 진입하자, 의회는 윌리엄과 메리를 영국의 공동통치자로 인정하는 동시에 윌리엄에게 권리선언을 요청하여 승인 받았다(1689년 2월).
권리선언에는 국왕이 다시는 의회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법령을 삭제하거나 세금을 징수할 수 없도록 규정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윌리엄은 이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고 윌리엄 3세로 즉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