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움과 나눔을 넘어서
정덕구 지음 | 21세기북스
1부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과 정책결정구조
한국의 경제정책다른 나라와 차별화되는 한국 고유의 성장요인들을 추출하면 세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그 첫 번째가 박정희 대통령이 구축해 놓은 '내자-외자-기업가정신'이 결합한 압축 경제발전이다. 박정희 정부 초기만 해도 장기간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여파로 자본주의 발전에 필요한 초기조건, 즉 자본은 물론 투자를 통해 자본형성을 주도할 기업가그룹과 이들을 유인할 시장조차 형성되지 않은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정부가 시장을 창출하고 단기적으로 기업가 역할을 맡는 것이 최적의 경제발전전략이라고 판단했다. 정부는 직접 해외차관을 들여와 산업화에 필요한 금융자본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또한 외자도입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자본을 조달하기 위해 내자동원 정책의 기틀을 확보했다.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을 정부 통제 아래 두고 민간이 소유하던 은행지분을 회수한 후 특별법을 제정했다. 그리고 정부가 지배하는 민간은행을 설립해 정책금융의 기반을 마련했다. 아울러 동원된 자본을 투자하고 운영할 기업집단을 경제발전의 동반자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국내 기업들에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차관에 대한 지급보증 등을 통해 투자에 수반되는 위험비용을 대신 부담해주면서 기업의 투자의욕을 높여나갔다. 이로써 당시의 경제 수준으로는 기대하기 힘든 대규모 투자가 유도되었고, 대외 지향적인 수출 주도 전략도 탄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기업집단의 경제성장에 대한 기여를 단순히 정부지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1960년대 이후 정부 주도 아래 경제개발계획이 실행된 국가는 수없이 많지만, 민간 기업을 중심으로 급속한 경제발전에 성공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자본과 다른 생산요소는 차용할 수 있지만, 리스크를 감내하고 과감한 투자를 실행하는 기업가정신은 외부로부터의 이식이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업집단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기업가정신을 발휘하여 국민들에게 '경제하려는 의지'를 자극하는 사회혁신의 선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아울러 합리성과 도제정신, 그리고 혁신적 사고를 기반으로 정부의 경제발전계획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사회구성원들이 좌절과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자리와 삶의 터전을 제공했다.
한국의 두 번째 성장 동인은 '관료-정치권-기업집단(재벌)'을 축으로 하는 3각 경제정책결정구조다. 이중 가장 중요한 행위자 집단은 관료권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과거 정권의 경제정책이 실패한 원인을 관리능력 부재로 파악하고, 군부의 발전된 기획관리 기능을 관료사회에 이식하고자 했다. 이러한 인식은 경제기획원 신설로 연결되었다. 그는 예산에 대한 전권과 검열·계획·조정에 관한 지배적 권한을 경제기획원에 부여함으로써 경제정책결정 전반을 독점적으로 장악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관료집단은 주요 정책 소비자인 기업들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즉 관치금융과 재정투융자 등 다양한 정책수단을 통해 대기업들이 불균형 성장전략에 편승하여 축적한 부(富)가 사적 욕구로 소비되는 대신 국가 경제발전에 재투입되도록 기업을 통제할 수 있었다.
급속한 경제발전이라는 시대적 명제와 정권의 정당성을 시급히 복원해야 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입장에서 볼 때, 정치는 비생산적이고 '공해'에 가까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붕당정치는 민족의 존망을 위협하는 주요인으로 여겨졌다. 그는 국회의원에 대한 공천권을 장악하고 당정협의제도를 형식화시켰다. 또한 국회의 회기를 제한하고, 국회의 국정감사권과 국정조사권을 박탈했다. 이러한 다각적인 노력으로 국회의 기능은 '행정부의 시녀'이자 통법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즉 당시의 정치권은 패권주의 정치체제의 정당성 위기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제왕적 대통령이 추진하려는 경제정책의 정당성을 홍보하거나 국민의 대의기관이란 이름을 빌려 인준하고, 대통령의 의중을 시민사회에 침투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기업집단은 정부의 집행도구 파트너로 활용되면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 정부는 산업화전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기업들의 협조가 절실했고, 이를 이끌어내기 위해 외국에서 들여온 자본을 특혜라는 방식으로 기업에 제공했다. 또한 기업이 정부의 경제정책을 좇는 과정에서 겪는 위기를 각종 정책금융으로 해결해 주었다. 이로 인해 기업들은 정부정책에 최대한 협조했다. 게다가 박정희 대통령은 정부의 실적과 지원을 교환하는 실적조건부 지대contingent rent를 제시했다. 즉 정부지원과 실적의 교환관계 속에서 기업집단은 한국사회의 경제적 가치를 놀라운 속도와 규모로 증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 경제성장 동인은 유목민과 정착민의 속성, 그리고 반도민성(半島民性)이 농축된 한국 국민의 기질과 행동체계다. 우리민족은 역사적으로 해양기질과 대륙기질이 모두 녹아있었다. 그런데 삼국통일이후 점차 농경민적·정착민적 기질이 뿌리내렸고, 이어 조선왕조 500년 동안의 사대부 통치가 소극적인 농경민 기질을 강화했다. 그러나 이후 일제강점기와 광복 직후의 심각한 좌우대립과 한국전쟁,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냉전 등 숱한 시련을 겪고 또 극복하면서 우리 민족은 변화에 대한 강한 적응력과 악착같은 대륙적 · 유목민적 기질이 되살아났다. 곧 지난 50년의 경제성장은 끊임없는 저항의식이 침전되어 있다가 어려울 때 엄청난 반발력으로 작용한 민족성이 발현된 결과였다.
고도성장기의 3각 경제정책결정구조: 박정희 모델의 특징 그리고 한계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정책이 정치자금 수수 등을 둘러싼 정치권과 관료권, 기업집단의 영합게임으로 종결되지 않고, 장기적으로 시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3각 경제정책결정구조의 룰이 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박대통령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같은 국정운영의 청사진을 관료, 정치권, 기업, 국민 모두에게 제공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부여함으로써 행동노선과 상호작용의 규칙을 정립했다. 또한 경제기획원과 청와대 비서실과 같은 조직을 통해 상충하는 이해관계의 최종 심판자이자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다. 예컨대 이러한 조직을 통해 공천권과 정치자금 배분권, 인사권, 예산배정 등 다양한 자원을 통제하는 권한을 손에 쥠으로써 종국적으로 게임의 룰을 제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집권의 시나리오에 따라 의사결정을 수행했기 때문에 단기적인 비용과 장기적인 편익을 비교 평가하는 데 지나치게 과감했다. 예컨대 정치적 자신감으로 인해 사회갈등에 대한 조정을 경제성장 이후로 미루도록 하였는데, 이는 후에 막대한 정치적 비용이 발생하는 단초가 되었다. 실제로 1960년대 말부터 불거져 나온 노동 및 빈민 문제를 유신체제로 돌파했고, 이후에는 매우 온정주의적인 갈등 해소책만 일부 제기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1980년대 중후반을 계기로 대외환경이 급격히 변하면서 고도성장기의 3각 정책결정구조는 외적 적합성을 잃어가고 서서히 변화의 압력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는 동서냉전이 종식되면서 체제 간 경쟁이 경제시스템간 경쟁으로 재편됨으로써 정치적 변수가 지니는 중요성이 감소했다. 즉 글로벌 경쟁체제로 재편되기 시작한 국제정세의 변화는 전략적 유치산업 보호와 같은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전략이 사실상 한계에 이르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국내적으로도 권위주의체제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1987년 민주화의 물결로 연결되면서 정치적 민주화가 우선적인 국가과제로 귀결되었다. 따라서 과거와 같은 일원적인 경제정책의 수립과 추진은 불가능해졌다. 뿐만 아니라 기업의 성장과 경제 규모의 증대로 인해 정부 재량에 따른 권위적인 자원배분 및 직접적인 성과관리도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경제구조의 변화에 따라 고도성장기의 3각 정책결정구조는 시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조정수단으로 재편되어야 했다.
정치체제 변동과 경제정책결정구조의 변화<전두환 정부시기: 관료권의 퇴조와 정경유착> - 전두환 대통령 시절부터 관료권은 경제성장 견인차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전두환 정부는 정부의 인위적인 시장개입을 축소하고 경제정책을 전폭적으로 자유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방향은 경제기획원의 위상을 크게 약화시켜 부처 사이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없도록 하였다. 즉 물가안정을 위해서는 긴축 예산편성이 불가피했고, 그 결과 경제기획원이 각 부처에 행사할 수 있는 예산증액의 폭이 거의 전무하다보니 결국 경제기획원의 경제부처 전반에 대한 장악력이 현저하게 저하되었던 것이다.
관료권의 퇴조는 인사정책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른바 신군부는 학자 출신 외부 인사를 기용하여 경제정책의 주도권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지식은 갖춘 반면 경제행정조직 전반에 대한 관리능력에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이로 인해 개별 부처 내부에서조차 원활한 정책조정이 어려웠고, 결국 경제정책 부처 전체의 할거주의가 심화되었다. 특히 제왕적 대통령은 경제수석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여 경제부처의 국장급 이상 고위관료에 대한 인사권의 상당 부분을 청와대 경제비서실에 몰아주었다. 각 부처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비서실이 주도하는 인사는 관료사회에 기회주의적인 정치 마인드가 침투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두환 정부 들어 심화된 정경유착도 경제정책구조 변화의 원인이었다. 제5공화국에서는 정부의 산업구조조정과 부실기업 정리 과정에서 대통령에게 막대한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경제정책을 담당하는 개별 부처 간 이해관계의 대립과 정책갈등이 심화되어 경제정책 전반의 조정력이 취약해졌다. 표면으로 크게 부상하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정격유착은 한국 경제가 전환기로 접어들면서 상당한 시련에 직면할 단초를 제공했다.
<노태우 정부 시기: 리더십 부재와 권위의 실종> - 노태우 대통령의 재임 시기는 정치체제의 민주화와 개방화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던 한국사회의 전환기에 해당한다. 이때의 국내 외 여건은 우리 경제가 서둘러 개방화된 시장경제체제로 변화 할 것을 촉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정책임자인 노태우 대통령은 분명한 비전과 종합적인 마스터플랜을 제시하지 못한 채 정책결정 권한과 책임을 관료사회에 일임하는 방임형 리더십을 보였다. 관료사회에 새로운 인센티브를 부여하지 않은 채 오히려 책임을 전가하는 무책임한 리더십은 관료들로 하여금 정책성공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관료권의 가치체계는 창의와 개혁적 성향보다는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쪽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노태우 대통령의 방임형 리더십은 특히 여소야대 정국으로 연결되면서 정치권 내부의 규율체계를 무너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주도권을 잡은 야권은 억눌려 있던 소외된 국민들의 피해의식을 이용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는데, 이러한 계산은 결국 '5공 청문회'와 '국정감사'로 가시화되었다. 그러나 5공 청문회는 과거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야기했다. 즉 6공화국이 전임 정권과의 차별성을 부각하려는 움직임이 오히려 집권세력의 분열과 대통령의 지지기반 약화로 이어졌던 것이다. 더욱이 패권주의적 정당체계가 구축된 것처럼 보였던 민자당 내부에서조차 대권을 겨냥한 계파 간 다툼이 치열해짐으로써 정치권은 더 이상 대통령의 국정장악을 위한 지지집단일 수 없었다. 이러한 정치권 내부의 분열과 혼선은 기업집단의 자율성을 강화시켜 대권 도전으로 표출되었으며, 분열된 정치권과의 유착을 더욱 심화시켰다.
<김영삼 정부 시기: 관료와 기업집단의 시장신뢰 약화> -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던 당시는 대내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제도화해야 한다는 국민적 열망이 분출되고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시장개방이 가속화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개혁의 우선순위를 '역사바로세우기'와 '민주화'에 둠으로써 정치개혁에 비해 경제개혁을 소홀히 하는 우를 범했으며, 정치와 경제의 유기적 연관성을 무시한 설익은 개혁을 실행하고 말았다. 예컨대 경제 관료를 자주 교체하여 정책 혼선은 물론이고 경제정책 목표가 표류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의 경제기획원장관 겸 경제부총리의 경우 재임기간에 모두 7명이 교체되었다.
당시 지배력이 확장된 기업집단에 대한 대처도 문제였다. 김영삼 정부 당시의 기업집단은 사회의 상부구조를 장악하고자 언론사와 연구소 등을 소유하고, 막대한 차입경영을 통해 엄청난 규모의 과잉 중복투자에 나서고 있었다. 이처럼 기업의 도덕적 해이가 가중되는 상황에서 정부는 갑작스럽게 OECD에 가입하여 경제운용의 원리를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겠다고 천명했다. 결국 기업의 위기와 관계없이 정부는 정부대로, 구조조정을 반대하는 노조는 노조대로 '자기 몫 챙기기'에만 몰두하면서 모두 기업과 같은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한국의 고도성장을 주도해 온 3각 경제정책결정구조의 정합성은 상실되고 말았다.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김영삼 대통령은 새로운 경제정책결정구조 형성을 모색했지만 대부분 제도화되지 못한 채 구호에 그치고 말았다. 그는 '신경제 구상' 및 '세계화 전략'을 통해 경제정책의 비전과 철학을 제공하고자 했으나, 양자 모두 구체적 아젠다agenda가 결여되어 있었다. '문민정부'의 기치를 내세우고 출범한 그는 군사 통치에 대한 반감과 함께 전임 대통령들의 부정부패, 기업집단과의 정경유착, 관치금융 등에 강한 개혁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회' 해체 등으로 군사문화의 잔재를 짧은 시간 안에 청산했으며, 공직자윤리법 개정을 통해 1급 이상 공직자들의 재산공개를 법적으로 명시하도록 했다. 그러나 경제정책에 대한 전문성 부족과 지나친 정치적 접근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김대중 정부 시기: 경제위기 극복과 선도집단의 재편성> - 김대중 대통령은 사회적 약자 우대, 노동자 복지증진, 중소벤처기업 육성발전, 사회안전망 구축 등과 같은 정책 우선순위에 대하여 나름의 확실한 사유체계가 정립되어 있었다. 따라서 분배와 형평을 중시하는 '대중참여 경제론'과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이라는 확실한 경제정책에 관한 비전을 가지고 취임했다. 그러나 집권당시 한국은 국가부도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결국 김대중 대통령은 침몰해 가는 한국호를 위기에서 건져내고자 본인이 평생에 걸쳐 정립한 '대중참여 경제론'을 포기한 채 IMF의 요구조건에 순응하여 강도 높은 구조조정정책을 추진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위기에 빠진 한국을 IMF체제에서 빨리 벗어나도록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구조조정에서 완전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예컨대 금융부문과 기업 부문의 경우에는 부실기관의 퇴출과 은행들의 자본금 증액 및 기업집단의 채무비율 하락 등으로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공공부문에서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고 공기업 개혁도 지지부진했으며, 노동 부문에 있어서도 비정규직의 양산과 함께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사회적 대타협 시도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또한 정부의 벤처산업 육성정책은 분명히 지식정보화 사회를 앞당기는 기반을 마련했으나 투자에 대한 사후관리 소홀과 벤처기업의 도덕적 해이 현상이 겹치면서 벤처버블venture bubble이 초래되었다. 2000년 이후부터는 무너진 기업을 대신하여 가계부문을 선택했으나, 결국 이는 가계부채를 키우고 신용불량자를 양산하게 만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가장 실패한 부분은 정치권 개혁이다. 그는 IMF 조기극복과 남북화해조성이라는 가시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마이너리티minority 대통령이란 태생적 한계로 인해 구체제 통치기반을 그대로 온존시킨 결과를 초래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외환위기의 원인제공자로 지목된 기업집단과 관료권을 개혁의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정치권을 동반자로 설정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