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의 위기와 미국
로버트 루빈ㆍ제이콥 와이스버그 지음 | 지식의날개
21세기 최초의 위기1995년 1월 10일, 나는 재무장관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멕시코 금융위기를 다룰 긴급회의에 참석했다. 멕시코 위기는 신속하게 지원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었다. 미국의 세 번째 교역상대국인 멕시코의 경제가 부도나면 많은 미국 기업들과 노동자들이 손해를 보게 될 것이고, 불법 이민이 30%는 증가할 것이며, 마약 밀매도 늘어날 것이었다. 나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멕시코 통화 붕괴와 경제몰락을 피할 수 있도록 수십억 달러의 대규모 개입을 지원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개입이 실패할 경우 미국의 신뢰도에 엄청난 피해를 미칠 것도 염두해야 했다.
'개입'은 미국과 유럽의 부유한 투자자들을 '긴급구제'하는 행위로 비판받을 수 있으며, 이들이 다음 차례의 비슷한 위험에서도 공적개입을 기대하고 이른바 '도덕적 해이'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때의 위험이 조치를 취할 때의 위험보다 훨씬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 1월 10일, 우리는 대통령에게 250억 달러를 지급보증해 주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불과 9주전 선거에서, 민주당은 40년 만에 처음으로 상하 양원에서 의석수를 빼앗기는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즉, 클린턴 대통령은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판에 큰 위험부담을 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클린턴은 멕시코 원조 제공을 결심했다.
대통령이 상하 양원 원내 지도자들을 모이도록 했을 때, 그들 모두는 대통령의 지급보증 요청을 지지했으나, 앨런과 내가 의사당에 가서 계획을 설명했을 때의 반응은 압도적으로 부정적이었다. 몇몇 의원들은 미국 국민의 세금을 그런 위험한 일에 투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미국 여론 또한 79% 대 18%의 압도적 차이로 반대의견이 많았다. 우리는 최종 시한을 잡고 의회의 지지를 받기 위한 노력을 가속화했다. 그리고 멕시코의 개혁의지를 알아보기 위해 재무부 직원 두 사람을 비밀리에 멕시코의 신임 대통령 제디요에게 보냈다. 제디요 대통령은 경제개혁을 굳게 맹세했고, 우리는 의회의 동의를 받아냈다.
구제자금이 지원된 후, 몇 개월 동안 페소화 가치는 극적으로 떨어졌고 시장은 큰 진전이 없었다. 그런데 1995년 말이 되면서 중앙은행을 비롯한 정부의 개혁 프로그램이 효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이 조금씩 돈을 투입하면서 외환보유고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환율이 안정되고 금리가 내렸다. 그리고 1996년 초에 멕시코 경제는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멕시코는 미국과 국제통화기금에 예정보다 3년이나 빠른 1997년 1월에 상환을 마쳤다. 멕시코는 미국에 14억 달러의 이자를 지불했으며, 환율안정화기금은 5억 8,000만 달러의 이익을 남겼다. 이것은 재무부가 단기 채권에 투자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많은 액수였다.
시장학습나는 하버드에 지원했으나, 성적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고 공립고등학교 출신이었기에 다른 학생들과 많은 차이점을 느꼈다. 2학년 때까지도 하버드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라파엘 드모스 교수의 철학입문 과목을 들으면서 학업에 몰입하게 되었고 내 의사결정관을 정립하게 되었다. 라파엘 교수는 '모든 의견과 해석은 항상 고쳐지고 발전하게 마련'이라며, 어떤 정리도 최종적으로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불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이런 생각들이 내 정곡을 찔렀다. 즉, 문제를 표면가치로 매기지 않고, 듣고 읽은 모든 것을 평가하고 질문하고 의심하는 자세는 내 습관처럼 되었다. 참임을 증명할 수 있는 진리가 없다면, 확률을 정제(整除)하고 남은 유일한 방법은 좀더 많은 지식과 이해력을 통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졸업할 무렵, 파이 베타 카파 클럽(미국 최고 엘리트들의 사교모임) 회원이 되었으며, 졸업논문 차석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하버드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1년 동안 런던 경제대학에서 공부했다. 1961년 미국으로 돌아온 후, 나는 하버드가 아닌, 예일 법대 대학원에 등록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하버드 법대는 계약에 관해 토론하는데, 예일 법대는 선과 악의 의미를 토론한다는 차이가 있었다. 당시 법실증주의라고 불린 법률적 분석방식은 예일 대학의 윤리를 형성하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법조문의 단어는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법조문의 사전조정이 반드시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예일 대학의 이런 분위기는 나의 지적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법대를 졸업한 후 잠깐 동안 법률회사에 근무했으나, 내게는 법률을 시행하는 것보다 시장에 대한 분석과 판단, 그리고 훈련을 복합적으로 거치는 일들이 훨씬 재미있었다. 그래서 28세가 되던 해, 골드먼삭스사의 재정거래 부서에 입사했다. 골드먼삭스에 내가 채용되었을 당시 거의 신화적 존재가 되어 있었던 인물이 구스 레비였다. 구스는 가난한 환경 때문에 가족을 부양하느라 대학을 중퇴했다. 그리고 월스트리트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다가 대공황 중 골드먼삭스사의 채권 부서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렇게 보잘 것 없는 출신에서 골드먼삭스사의 최고경영자가 되었고, 뉴욕 증권거래소 회장, 많은 시민 문화시설의 창립자가 되는 등 뉴욕에서 신화적인 존재가 되었다.
구스는 성격이 매우 급했는데, 하루 종일 고함을 지르는 것으로 일과가 이루어졌다. 10년 전만 해도 구스는 하루 일이 끝날 무렵이면 사무실 직원 모두를 해고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면 모두들 돌아와서 아무 일 없는 듯이 일했다. 괴팍한 성질에도 불구하고, 구스는 뛰어난 지도자였다. 우리가 벡턴 - 유니버스 거래에서 50만 달러 이상을 손해보았을 때, 구스는 우리가 위험에 따른 보상을 받고 확률에 근거한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것이 골드먼삭스사에서 우리가 합리적으로 위험을 떠안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나는 1971년의 첫날, 골드먼삭스사의 경영파트너가 되었고, 1980년에는 골드먼삭스사의 최고경영진 중의 한명이 되었다. 취임과 동시에 나는 골드먼삭스사에서 매입한 J. 아론사 문제를 책임지게 되었다. 아론사는 가족 소유의 매우 성공적인 일차 산품 거래회사였는데, 1981년 6,000만 달러였던 아론사의 이익이 1982년에는 3,000만 달러로 떨어졌고 1983년에는 전혀 없었다. 아론사가 살아남지 못하게 되는 것은 골드먼삭스사에서의 내 경력에 타격을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걱정도 과신도 하지 않고 단지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을 하는 데만 주력했다. 나는 우선 2~3개월 동안 노란 공책을 들고 걸어 다니며 아론사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아론사는 통화나 금 같은 일차산품을 사고파는 고전적인 재정거래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거래에는 위험이 거의 없었으나 지나치게 위험을 회피한다는 결점이 있었다. 이러한 관행은 수익기회가 적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종 사업체나 개인이 변화를 주목하지 못하거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함으로써 끝내는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론사의 몇몇 기본적인 틀을 바꾸기로 했다. 우선 나는 회사의 경영진을 바꾼 뒤, 고정소득(채권)부서에 있는 마크 윙클먼에게 보고 책임을 맡겼다. 그는 채권과 외환의 관계거래 사업을 발전시킨 사람으로 아론사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배경과 직원들이 올바르게 처리하도록 돕는 경영기술 모두를 가지고 있었다.
다음은 서로 다른 일차산품이나 통화들 간의,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상품간의 가격 관계의 왜곡을 찾고 금리나 다른 요소들을 이용하여 적절한 상대가치를 추정하기로 했다. 예를 들어 시황이 안 좋을 것 같으면 단기 금 선물을 사고 장기 금 선물을 팔기로 했는데 이는 아론사 직원들이 위험을 떠안게 되는 것을 뜻했다. 이전의 순수한 재정거래 활동을 상대가치 재정거래로 전환하면서, 명백한 포지션(position, 매매 약정은 이루어졌으나 대금 결제가 되지 않은 약정 증권의 수량)을 설정하고, 고객 사업을 증대하는 등으로 사업을 크게 확장했다. 이런 변화와 함께 아론사는 재가동했고 사업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첫해에는 1억 달러 목표에 미치지 못했으나 다음해에는 이를 초과달성했고, 그 뒤부터는 골드먼삭스사가 엄청난 이익을 올리는 밑거름이 되었다.
나는 여러 번의 위기관리를 경험하면서 다음과 교훈을 얻었다. 첫째, 위기를 관리하는데 있어 위험을 최소화하는 한 가지 방법은 위기를 다루는 소규모 팀을 구성하는 것이다. 둘째, 위기 중 밖에 나가서 고객들을 만나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다. 고객들은 많은 질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언론이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기 쉽기 때문에 자체 직원들과 자주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아론사의 경영에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자체사업을 평가하는 생각이 대부분 직원들로부터 나왔다는 점이다. 직원들을 대할 때는 과민반응을 보이지 않고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론과 정치적으로 뒤따르는 회오리바람과 함께 기분을 어떻게 다룰지 아는 것은 고위 경영자가 갖춰야 할 매우 중요한 자질 중의 하나이다.
정치학습1992년, 나는 빌 클린턴의 유세본부 내부에서 경제성명서의 초안을 잡고 재정적자 감축 문제 등을 작성하는 보좌관 팀에 소속해 있었다. 클린턴이 승리한 뒤 2~3주 뒤에 나는 대통령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클린턴은 경제정책을 조정하는 경제안보회의 창설을 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통령직 인수 팀장인 워런 크리스토퍼가 전화를 걸어 국가경제협의회 직책을 공식 제안했다. 26년을 보낸 골드먼삭스사를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인수기간 중의 가장 급한 과제는 경제 프로그램에 관한 대통령의 의사결정 과정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금융시장과 경영에는 경험이 있었으나 대통령 행정조직의 내부과정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재정거래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골드먼삭스사에 일하러 갔던 때처럼 노란 공책에 질문들을 적기 시작했다. '다른 대통령들은 경제정책을 조정했는가? 무엇이 작동했고 무엇이 작동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해야 장관들과 백악관 보좌관들을 국가경제협의회 업무에 끌어들일 수 있는가?' 나는 공책을 손에 들고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기록된 노란공책은 워싱턴 방식에 대한 흥미로운 입문서가 되었다.
1992년 12월 말에 의회 예산실이 발표한 많은 적자 감축은 클린턴의 공약과의 관계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예산 규모가 일정한 수준보다 훨씬 적으면 부처가 효과적으로 일할 수 없다. 따라서 잠재적으로 많은 비용이 드는 클린턴의 모든 공약들, 즉 단일 의료보험, 복지개혁, 중산층에 대한 세금 감면, 교육과 직업훈련프로그램 등을 악화되고 있는 재정상황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출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우리 그룹은 재정적자의 정확한 감축 수준, 예산 배분의 우선순위, 세금 관련 공약의 세부사항 등을 확정하기 위해 몇 주 동안 루스벨트실에 모였다. 클린턴은 회의에 참석하여 재정적자 목표수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것은 내가 대통령의 의사결정에 관해 겪은 최초의 실질적인 경험이었고, 클린턴에 대한 존경심을 심어주었다.
사실 우리의 재정적자 감축 프로그램에는 세금 증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재정적자 감축의 절반은 지출 삭감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세금 인상이었다. 그러나 세금 인상은 4인 가족 당 1년에 겨우 36달러로 평가되는 소득세와 휘발유세 인상이었다. 게다가 소득세 인상은 미국인의 최상위 1.2%에만 영향을 미쳤고, 중산층 미국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아주 적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우리의 프로그램이 실업증가, 재정적자 확대, 불황 등을 불러올 것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했으나, 다음날 첫 예산안이 의회에서 가까스로 통과됐고, 이후 국가는 사상 최장기간의 성장과 대규모 고용 창출, 낮은 물가 상승 등, 종국적으로 재정흑자를 달성했다.
백악관 생활 내가 대통령 집무실이나 비서실장의 방에서 정규적으로 앉는 좌석은 회의탁자 끝자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내세우는 경향이 있는 환경에서 그런 물리적인 거리감이 편하기도 했지만, 이 거리는 클린턴과 행정부 안팎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 견해를 분명하게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클린턴은 남의 얘기를 잘 듣는 뛰어난 재주를 지녔었다. 그는 어떤 사람의 관점을 단지 듣는 것이 아니라 이해했다고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연결시킬 줄 알았다. 이것은 빌 클린턴이 사람들을 매혹시킨 부분이기도 하지만 상당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클린턴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나중에 그가 자기 입장과 반대로 나오면 종종 사기당한 것으로 여겼다. 1995년 중요한 예산안 협상에서 당시 하원의장이었던 깅그리치는 클린턴의 포용과 연대를 동의로 오해했다.
백악관에서 내가 다루는 쟁점사항들은 자주 심야 뉴스나 신문에 나왔다. 골드먼삭스사에서는 하루 일과를 끝내고 귀가하면 사무실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워싱턴에서는 늘 여론의 초점과 집중조명을 받으며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집중조명은 비판적인 경향을 띄었다. 사람인만큼 우리 중의 누구도 언론이 가한 비판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는 없었다. 어떤 이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인식되는지에 대해 매우 집중하며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는 워싱턴 방식을 별로 몰랐던 것에 대해 감사했다. 그로 인해 나는 내 단점을 자각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갖추게 되었다. 언론에 대처하는 내 솜씨도 자주 보강되었다.
경제계획을 통과시키려고 애썼던 1993년 5월, 나는 상원 예산위원회에서 손꼽히는 공화당 의원 피트 도미니치에 대항하여, '맥닐레르 뉴스시간'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나는 재정적자 감축을 위해 신탁기금 조성을 제안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그러자 도미니치는 '세금을 신탁기금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을 바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반격했다. 나는 그의 다양한 질문에 친절하고 자세한 대답으로 응수했는데, 도미니치는 계속해서 우리 계획이 세금 인상이라는 구호만 되풀이 했다. 그러나 도미니치의 발언은 단순한 메시지가 텔레비전에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지를 일깨워 주었다. 그 일이 있은 직후, 나는 텔레비전에 매우 노련한 언론코치로부터의 조언을 구했다.
언론코치 마이클 쉐헌은 내게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언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몇 가지 기본사항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질문을 공격할 수는 있으나 질문자를 공격하면 안 되고, 요점을 압축하고 길고 산만한 대답은 피할 것이며, 일상적인 대화보다 더욱 활기를 띠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완수하기를 원하는 일에 대한 명확한 감각을 갖고 그런 관점에서 대답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배우고자 한 것은 내 요점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해시키고자 함이었다. 나는 누군가 내게 인신공격을 하더라도 인신공격성 논평을 하지 않고 정치가 아니라 정책에 대해 얘기하겠다는 규칙을 세웠다.
내가 행정부에서 이룩하기를 원했던 것 중에 하나가 의료보호제도 개혁이었다. 행정부가 출범할 때 나는 의료보호 개혁 전망이 좋아 보인다는 통상적인 견해를 가졌었다. 그러나 내가 개입하는 데에는 힌계가 있었고,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GDP의 14%를 쓴다는 점이었다. 공공정책이 복잡하면 할수록 불쾌하게 만드는 특수한 이해관계가 있었다. 이 경우에도 우리의 노력에 대항하는 엄청난 세력이 몰려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해관계에 얽혀 있었다. 반대자들은 대통령의 노력을 억누르기 위해 1,000만 달러의 광고료를 지불하기도 했다. 의료보호제도 개혁에 대한 양당의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