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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은행 100년사

이영훈 외 지음 | 산하
제1장 전통 금융업의 실태와 개항기 외국은행의 진입



조선왕조의 경제체제

한국의 사회조직과 인간관계의 원리가 가장 뚜렷하게 작용하고 있는 부분이 금융시장이다. 금융시장은 사회적 신뢰와 그 조직형태가 크게 문제시되는 분야이다. 한국에서 근대적 금융시장이 성립된 것은 1876년 개항 이후, 특히 20세기 전반 식민지기였다. 즉 자본주의적 경제부문이 성립한 것은 개항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이식됨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순수한 이식이란 경제사에서 있을 수 없다. 그에 적합한 토양이 전제조건으로 성립해 있지 않으면 오늘날 제3세계의 국가들처럼 빈곤의 늪을 빠져나오기 힘들다. 따라서 이 책이 한국의 100년에 걸친 일반은행의 역사를 서술하고, 그 시작을 17~19세기 전통 조선경제에서 출발하는 것은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



15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조선왕조의 경제체제는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의 자연경제에 기초하였다. 그러나 시장경제도 불가결하였다. 제사를 지내는데 빠질 수 없는 명태 같은 어물이나, 재배가 쉽지 않은 면포 등은 시장을 통해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보부상 등의 행상이 촌락을 방문하여 이루어지는 거래도 장시거래의 비중을 능가했다. 이러한 장시가 안정적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원격지간의 교역을 중계하는 도매 시장의 성립도 필요했다. 그래서 도 단위로 주요 포구에 대규모 시장이 성립되었다. 그곳에는 객주라는 중개상인이 존재했는데, 도매 유통을 조직하고 객상들에게 재화의 구입 자금을 선대하는 일종의 금융업을 담당했다.



시장경제가 전체 경제체제의 주요 일환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후반부터였다. 중요 요인으로는 대외 교역환경을 들 수 있다. 중국을 새롭게 장악한 청 제국은 명나라 유민들의 저항 근거지인 대만을 봉쇄하기 위해 바다에서의 자유항행을 금지하였다. 이 때문에 청의 실크가 일본으로 수출되기 위해서는 조선상인의 중계무역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가 일본과의 교역을 원했던 것은 당시 일본이 세계 제2의 은(銀) 생산국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이 수지맞는 중계무역으로부터 벌어들인 은의 양은 막대하였다. 이처럼 유리한 대외교역 환경이 조선의 시장경제 발전을 촉진하였다.

전통금융업의 실태

조선왕조의 경제정책은 농업을 으뜸으로 하는 농본주의 정책에 충실하였다. 왕조는 농서를 제작하여 새로운 농법을 보급하였으며, 수리시설을 확충하고 일정기간 조세를 감면함으로써 개간을 장려하였다. 특히 한발이나 홍수와 같은 재해가 발생하면, 정부는 비축한 식량을 무상으로 방출하거나 다른 지방에서 옮겨와 농가경제를 지원하였다. 또한 중앙정부의 대신들이 여러 지방에 종장을 설치하고 춘궁기에 농민들에게 쌀을 꾸어주고 가을 수확기에 50% 이자와 함께 곡식을 회수했는데, 그러한 대차관계를 장리(長利)라 하였다. 장리는 이자율도 높았지만, 18세기 이후 동전이 유통되자 더욱 문제가 발생하였다.



쌀값의 계절변동이 그 원인이었다. 예를 들어 쌀값의 평균가격을 100이라 할 때, 쌀값이 가장 높은 6월의 가격은 141이고, 가장 낮은 9월의 가격은 81이었다. 따라서 쌀값이 높은 봄에 돈을 대부하고, 쌀값이 낮은 가을에 원리금을 회수하면, 쌀로 계산된 실질 이자율은 50%를 훨씬 넘게 마련이었다. 그러자 숙종은 이자율을 20%로 낮추었다. 그런데도 18~19세기 동안 시장거래에서 실질적인 장리의 이자율은 여전히 50%로 지속되었다. 이자율이 개선되지 않았던 이유는 영세한 소농과 상인들의 금융 수요에 비해 금융의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시변(市邊)은 장시를 무대로 하여 이전 장날에서 다음 장날까지 5일을 대부기간으로 한 단기금융이었는데, 이자율은 통상 2%였다. 시변과 달리 달수로 대부기간을 정한 대차거래는 월수(月收)였다. 월수의 이자율은 월 3%로서 시변보다 싼 편이었는데 대부의 규모가 시변보다 커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기한을 날수로 정한 일수는 원리금을 매일 균등하게 분할 상환하는 방식이었다. 기한은 보통 120일부터 240일까지였는데 특이한 점은 기한의 장단과 무관하게 이자율이 일률적으로 20%였다는 점이다. 한편 낙변(落邊)은 특히 개성상인들 사이에서 행해져 온 독특한 방식의 단기금융이었다. 낙변은 결제를 반드시 월말에 행하는 것으로, 이자율은 월말에 가까워질수록 떨어졌다. 그래서 落邊이라 하였다. 이자율은 월초 1~5일에 빌리면 1%, 11~15일에 빌리면 0.75&, 이런 식으로 5일마다 0.25%씩 떨어졌으며, 26일 이후에는 이자를 물지 않았다.



사채에 못지 않게 중요한 전통 금융업의 한 형태는 계( )에 의한 금융, 곧 계채였다. 전통 농업사회에서 계의 기능은 지금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계는 기금을 회원이나 주변의 농민들에게 대부하고 이자를 수취하는 금융활동을 하였다. 18세기 계의 자산은 논 81두락과 밭 3~4두락으로 크게 확장되었고, 계채의 이자는 연 50%정도였다. 주목되는 점은 불량채무자가 상당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계채가 다른 사채에 비해 계원 상호간의 생존윤리에 충실하였지만 시장원리에 충실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환거래는 17세기 후반 대동법의 시행에 따라 산간지방의 결세를 서울로 운송 상납하기 위해서 주로 이용되었다. 당시의 동전은 성인 남자 한사람이 100냥 정도밖에 들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그래서 무거운 동전을 대체할 다른 지불수단으로 생겨난 것이 바로 환(煥)이었다. 환거래는 수송비용을 줄이고, 지방의 금전유통 고갈을 막고, 상인이 대규모의 상업자금을 융통할 수 있는 등, 여러 가지 이점이 있어 활발하게 이용되었다.



환과 더불어 또 하나의 주요 신용화폐는 어음이었다. 환은 발행인과 지불인이 달랐지만, 어음은 발행과 지불이 동일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어음은 두 가지 용도로 발행되었는데, 하나는 오늘날의 상업어음 또는 진성어음과 같이 상품 구입자가 판매자에게 연지불 수단으로 발행한 것이었다. 또 하나는 오늘날의 어음대부 또는 융통어음처럼 돈을 빌리기 위한 목적으로 발행한 어음이었다. 즉, 자금이 필요한 상인이 어음을 발행하면 대금업자가 선이자를 떼는 방식으로 거래되었다. 신용이 없는 사람은 어음을 발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유통이 실로 놀랄 만했다고 한다.



객주대(客主貸)는 객주와 영세 상인들과의 대차관계였다. 앞서 잠깐 서술하였듯이 객주는 포구에서 위탁 중개업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중개업 외에 부업으로 거래 상인들에게 금융을 제공하기도 하였는데 상품을 담보로 하여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상인들이 상품을 구입할 돈을 선대해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차관계를 객주대라고 하였다. 객주는 영세 상인들에게 자금을 선대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애경사까지 보살피기도 했다. 이렇게 성립한 객주와 상인간의 두터운 신뢰관계는 식민지시대는 물론 해방 후까지도 도매시장의 주요 유통경로로서 크게 역할 하였다.



개항기 외국은행의 진입

1876년의 개항으로 조선의 수출입 무역량은 급속히 증가하여 국민총생산의 13.5%에 달했다. 따라서 폐쇄적이었던 농업사회가 개방사회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개방은 일본과 청나라 그리고 러시아 등 외국과의 불평등조약을 통한 식민화의 과정이기도 하였다. 동시에 자본주의 경제부문이 확대 성장되었고, 수출입 무역의 급격한 성장으로 근대적 금융시장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시장 환경에 부응하여 조선에 진출한 은행은 주로 일본 은행들이었다. 그 선두에 선 것이 일본 제일은행이다.

제일은행은 1878년 부산에 지점을 설치한 후 1885년까지 원산, 인천, 서울로 지점망을 확대하였다. 1882년에는 조선 해관세의 취급권을 장악하고, 1886년부터는 조선의 금을 대량으로 매수하는 일본은행의 창구 역할을 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시에는 군용금을 취급하였고, 1902년에는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는 특권을 취득하였으며, 나중에는 대한제국의 국고를 취급하고 화폐정리 사업을 맡음으로써 사실상 중앙은행으로 기능하였다. 이처럼 제일은행은 일제의 조선침략에 있어 첨병 역할을 하였다. 일본은 제일은행 외에도 제102은행, 제18은행, 제58은행 등을 조선에 진출시켰다.



일본 외의 외국은행으로는 1896년 영국 선박회사 홈링거와 1898년 러시아의 노한(露韓)은행이 개설되었다. 특히 노한은행은 한국의 세수 및 기타 국고에 관한 사업 및 화폐주조와 같은 업무도 기획하여 잠시 대한제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외국의 항의와 독립협회의 반대운동, 러시아 극동정책의 변화로 인해 1898년 4월 철수, 폐점하고 만다. 따라서 일본 은행들이 가장 적극적인 금융활동을 하게 되었다. 일본은행들이 조선의 경제시장을 장악하자 이들의 금융적 지원을 받은 일본상인들이 조선에 대거 진출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전통 상권과 유통경로를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의 민족은행들이 설립하기 시작한 데에는 이 같은 시대적 상황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2장 대한제국기 민족은행의 설립



화폐제도의 혼란과 일본화폐의 유통

개항이후 정치적·경제적 혼란과 서구 문물 도입으로 재정의 궁핍이 가중되었다. 그러자 임오군란 때 청에서 파견되었던 재정고문 멜렌도르프는 보통의 엽전(當一錢)보다 5배의 가치를 지니는 당오전을 발행하여 재정난을 해결하자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숙종 조부터 발행되어 온 상평통보가 있었다. 상평통보 엽전 1문(닢)은 동 73%, 주석 13%, 납 14%로 만들어졌는데, 당오전은 그에 비해 액면가가 5배임에도 불구하고 실질가치는 2배 정도에 불과한 악화였다. 그러니 당오전 발행은 조정에 큰 주조수익을 안겨 주는 것이었다.



결국 멜렌도르프는 민비를 중심으로 한 수구파의 지원을 받아 1883년 당오전(當五錢)발행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악화의 통화남발로 경제적 혼란과 불황이 가중되었다. 더구나 당오전은 경기도를 포함한 일부 지역에서만 유통되도록 함으로써 유통경로를 교란시켰다. 이와 같이 폐단이 심각해지자 당오전 발행은 잠시 억제되었다. 그러나 1888년 수출이 다시 호전되면서 통화량이 부족해지자 1890년까지 2년 동안 대량 발행되었다. 이후 당오전은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1894년 일본의 지원으로 집권하게 된 개화파 정부는 은(銀)본위제도에 기초한 신식화폐제도를 수립 하였다. 요컨대 5냥 은화(1원)를 본위화로 하고 보조화로 1냥 은화, 2전 5분 백동화, 5분 적동화, 1분 황동화를 발행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 가운데 본위화폐 5냥 은화는 조금도 주조되지 않았고, 1898년까지 소량의 백동화와 적동화만이 주조되었다. 게다가 1899년부터는 백동화를 대량으로 발행하였다. 대한제국 재정이 관료들의 봉급조차 제때에 지불하지 못할 정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액면가치 2전 5분의 백동화 1매를 주조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고작 1전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백동화의 주조는 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고 거대한 수익을 안겨주는 사업이었다.



백동화 발행의 또 다른 이유는 기본적으로 통화량 부족이라는 경제적 요인 때문이었다. 1895년에 조선의 총 통화량은 약 1,700만 원 정도였다. 이 가운데 대략 600만 원 정도는 청일전쟁을 위한 군용금으로 살포된 일본 화폐였는데, 1897년 일본에서 화폐제도를 개혁하자 일본으로 대거 환수되었다. 한편 이때는 대한제국의 수출입 무역이 급속하게 확대되고 있어 남은 1000만원의 통화량만으로는 이에 대처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정부는 통화량 부족을 보충하면서 화폐주권을 회복하고 아울러 상권의 헤게모니를 구축하기 위해 백동화를 대량 발행하였다.



그러나 백동화의 남발은 악성의 통화인플레이션을 유발시켰고, 또한 정부의 허가 없이 환관이나 관리가 사사롭게 발행하거나 밀수입된 위조화도 적지 않아 그 경로에 따라 품질이 천차만별이었다. 그래서 환전시세가 크게 떨어졌고 이는 환율급등으로 이어졌으며 봉급생활자와 빈민의 경제생활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그 타격은 수입 무역을 담당하거나 대금업을 하는 일본상인들에게도 미쳤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일본화폐의 가치를 높여 일본화폐를 구축하는 효과를 발생시키게 된다.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장악하자마자 화폐정리 사업부터 서둔 것은 이 같은 경제적 배경에서였다.



조세금납화와 외획금융(外劃金融)의 발전

갑오개혁의 가장 핵심적인 개혁과제는 국가재정 부문에서 제기되었다. 개혁정부는 우선 중앙정부의 재정수입과 재정지출의 관리를 탁지부로 일원화하였다. 또한 왕실의 재정기구로서 궁내부를 설치하고 궁내부의 재정수입과 지출을 탁지부가 관리 통제하도록 함으로써 정부와 왕실의 근대적 분리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개혁의 상당부분은 개화파 정권의 붕괴와 함께 취소되거나 유야무야한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갑오개혁을 후퇴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당초 목적했던 정부와 왕실의 분리가 실패하고 오히려 왕실재정이 팽창하여 정부재정을 압박하는 사태로까지 나아갔기 때문이었다. 황실은 정부 관할 하에 있던 각종재원과 이권을 궁내부 내장원 관할로 이속시켰다. 그에 따라 황실재정의 규모는 점점 팽창하여 국가 총재정의 1/3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갑오개혁이 남긴 가장 일관되고 포괄적인 영향은 조세의 금납화였다. 갑오개혁 정부는 구래의 자연경제에 기초하였던 현물납 조세를 화폐납으로 바꾸었다. 당시 조세금으로 획급된 현물을 100㎞ 운송하는 데는 현물가의 12.5%에 상당하는 운송비용이 들었다. 그래서 당국자들은 상인들로 하여금 지방의 조세물을 획급하여 이를 현금화하여 탁지부에 납부토록 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문서가 위조되는 등의 폐단이 발생하여 이는 곧 금지되지만, 실제로는 정부의 묵인 하에 계속해서 전개되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기본요인은 운송비 때문이었다. 지방관이 조세금 상납을 상인에게 위탁하게 되면 운송비를 절감하여 이를 자신의 수입으로 확보할 수 있었고, 상인은 이를 현금화하는 과정에서의 유통수입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같이 조세금을 이용한 상업금융 내지 환금융활동을 가리켜 외획(外劃)이라 하였다.



민족은행의 설립과 특질

조선 최초의 민족은행은 1896년 6월 고위관료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大朝鮮銀行所(이하 조선은행)이었다. 조선은행의 발기인은 독립협회를 주도한 현직 고관들과 상인으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설립 초기부터 정부의 전년도 잉여금과 탁지부 국고금을 예치하는 등 호조건 속에 영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1898년 독립협회의 운동이 좌절되고, 은행장 안경수가 일본으로 망명하자 조선은행은 휴업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899년 은행명을 한흥은행(韓興銀行)으로 개칭하여 재출발하였다. 영업을 재개한 후, 경원철도의 기사 월급 등을 정부에 대출하고, 황해도의 조세금을 취급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등 영업은 다소 호전되었다. 하지만 1900년 정치적 혼란 속에 은행의 조사위원이 사형을 당하고, 정부의 지원이 끊어지면서 다음해 1월 폐점하게 되었다.



조선은행에 이어 설립된 민족은행은 한성은행(현 조흥은행)이었다. 한성은행은 1897년 2월에 설립이 인가되었고, 창립자들 속에는 황실과 밀접한 고위관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초기부터 탁지부의 조세금을 취급하게 되었다. 그러나 창립 2년 만에 조세금 취급권을 대한천일은행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로 인해 한성은행의 영업은 극히 부진한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1903년 일본 제일은행의 지원에 의해서 다시 재개하게 되었다. 일본이 한성은행을 지원한 것은 고종황제의 중앙은행 설립을 막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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