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난마 한국경제
장하준, 정승일 지음 | 부키
1부 우리의 과거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개혁 강화는 종속 심화라는 아이러니
이 겉으로 보기에 한국 사회는 꽤나 번영을 누리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회적인 분열도 격화되고 있고, 대기업은 승승장구하는데 중소기업은 몰락하고 있으며, 노동자 계급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양분되는가 하면, 심지어 수출과 내수 사이에도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일들이 1997년 말의 외환 위기와 김대중 대통령의 개혁 이후 발생하고 있는데, 두 분께서는 이에 대해 일찍부터 분석해 오셨고, 또 경고도 많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경고들은 현 재 실제로 들어맞고 있고요. 이런 대화 자리를 마련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오늘의 한국 경 제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헤어날 방법은 없는 것인지 등을 종합적이고도 심층적으로 알아보자는 것이지요. 우선 이런 현상은 일시적인 것일까요? 정부는 곧 좋아진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의견은 어떠신지요?
장 지금의 우리 경제는 무척 역설적인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외환 위기 이후 한국의 경제 정책을 이끌어 온 김대중ㆍ노무현 정부는 박정희 모델을 '수출 의존형' 또는 '대외 의존형' 등으로 비판 하며, 경제 개혁을 부르짖던 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분들이 개혁을 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외 의존은 더욱 심화되고 말았거든요.
정 외환 위기와 경제 개혁을 거치면서 수출 의존도가 높아졌고 외부 충격에 취약해진 거죠. 어떻게 보면 더 종속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혹시 현재의 내수 침체가 '종속'이라는 '구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두 분의 입장 과 반대로 정부 측에서는 '일시적 현상을 위기로 호도하지 말라.'며 '곧 좋아진다.'고 주장합니다.
장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최근의 현상은 한국 경제가 신자유주의적 구조로 바뀐 결과입니다. 신자 유주의의 기본 특징이 바로 저투자, 저성장, 고용 불안이에요. 우리나라 보수 언론들은 경제 성장 을 위해 신자유주의적 정책, 즉 탈규제와 노동 시장 유연화(고용 불안)를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합 니다. 그런데 실제로 신자유주의는 저성장주의이며 저성장을 위한 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드린다면, 신자유주의는 금융 자본을 위한 자본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금융 자본의 입장에서는 경제 성장이 그리 달가운 현상이 아닙니다. 경기를 안정시켜 물가상승률을 낮 춰야 (투자한 돈에 대한) 자본 이득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금융 자본은 또 장기적 투자엔 관심이 없습니다. 이 회사에 갔다가 안 되면 다른 회사로, 이 나라 갔다가 신통치 않으면 다른 나 라로 이동하면 되니까 장기 투자에 대한 안목이 없을 수밖에요. 여러 나라들이 경제 성장률을 높 인다며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는데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개혁 이후 경제 성장률이 높아진 나 라가 거의 없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정 정말 이상한 분들이 한국의 진보 성향 경제학자들입니다. 지금가지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한 나 라들에서 거의 저성장, 저투자, 빈부 격차 심화 등의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분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 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가다 보면 경제 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재벌의 과잉 투자를 저지하는 것이 된다는 점입니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의 김상조 소장 같은 분들은 저투자를 일시적인 경기 순환의 문제라고 보시 는 것 같습니다. 또한 경제개혁만 잘 하면 투자가 다시 활성화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서 울대 정운찬 총장께서도 시장 개혁을 더욱 철저히 해야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고 주문하고 있습니 다. 그런데 보십시오. 지난 1990~1997년의 평균 투자율이 37%였습니다. 반면 2000년 이후 투자율 은 25~26% 수준입니다. 경제개혁 이후 투자율이 줄곧 이 수준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경 기 순환입니까? 이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입니다. 투자 부진이 구조적 문제라는 점이 확인 되어야 합니다.
장 정 박사님처럼 이야기를 하면 '예전의 한국 경제에서는 재벌들이 항상적으로 과잉 투자를 해 왔기 때문에 요즘 투자율이 내려간 것은 오히려 좋은 거다.'라는 반박들이 나옵니다. 따라서 1997년 이 전의 한국 경제에서 정말 '항상적으로 과잉 투자'가 이뤄졌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 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과잉 투자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 때문에 생산물 공 급이 너무 많아 판매가 안 되고, 경제가 급속히 침체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정 말 '항상적 과잉 투자'가 있었다면, 한국 경제는 지난 40년간 '항상적 공황 상태'를 겪어야 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항상적 과잉 투자'라는 개념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정 재벌 개혁론자들의 이야기는, 우리나라가 항상적인 과잉 투자를 해 왔고 그 때문에 항상적인 부실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실이 안 터지고 부자연스럽게 버텨 오다가 1997년에 이르 러서야 비로소 터졌다는 거죠. 그렇다면 1997년 이전엔 왜 터지지 않았을까요. 그분들은 정부가 부실을 막으려고 보조금을 엄청나게 쏟아 부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논리가 성립되려면 한국 정부는 1997년 이전에 엄청난 재정 적자를 지고 있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한국만큼 외환 위기 이전에 재정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던 나라는 없었습니다. 외환 위기 이후 엄청 난 공적 자금을 투입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고요.
이 1997년 말의 외환 위기는 재벌들의 과잉 투자가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 아닙니까.
정 그건 일부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외환 위기가 1970년대 이후 이뤄진 '항상적 과잉 투자'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1993년 금융 시장 개방 이후 한동안 외국 자본이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오는데, 그로 말미암아 과잉 투자가 3~4년 동안 진행되다 결국 1997년에 터 진 겁니다.
장 어떤 분들은 재벌들이 정부를 믿고 돈을 마구 가져다 쓰다가 과잉 투자가 일어났다고 주장합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정 박사님 말씀대로 우리나라의 경우는 금융 자유화의 결과 과잉 투자가 일어났 던 겁니다. 그런 식의 금융 자유화로 자본 시장을 개방한 뒤 금융 위기를 겪은 나라는 우리나라뿐 만이 아닙니다. 세계적으로 투명성이 가장 높은 편에 속하는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나라들조차 1980년대 말 금융 시장을 개방하여 금융 위기를 맞아 여러 해 동안 고생을 겪었으니까요.
이 과잉 투자론에 대해 많은 비판을 하셨습니다. 저투자의 원인을 구조적인 측면에서 좀 더 심층적으 로 논의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정 저투자 현상의 구조적 문제점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본시장, 즉 주식 시장의 압력이라고 봅 니다. 심지어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주주의 권익을 대폭 강화하는 방향, 즉 주주 자본주의로 한국 경제가 바뀌어 가고 있고 그것이 저 투자의 원인이란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 주주 자본주의란 것에 따르면 재벌은 당연히 해체되어야 하겠지요. 재벌 가문들은 실제로 가진 주식은 얼마 되지 않으면서 그룹 전체를 부당하게 지배하고 있으니까요.
정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삼성전자가 삼성그룹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 기업이 되면 과연 투자가 늘어 날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소버린 같은 투기 자본이 대주주가 되는 경우 오히려 지금보다 훨 씬 더 주식 시장의 압력에 노출될 것이고, 그 경우 삼성전자는 수익금을 재투자하기보다는 배당률 을 높이거나 아니면 주가를 올리기 위해 지금보다 더 많은 자사주를 사들여 소각하는 데 몰두하게 될 것입니다. 또 현재의 장기적 경영도 포기하게 될 가능성이 높고요. 현재 재벌 개혁이 경제 민주 화인 것처럼 논의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재벌 개혁은 경제 민주화와 무관합니다.
이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개혁 세력들이 그릇된 판단으로 주주 자본주의를 수용했고, 그 결과는 불평등과 대외 의존의 심화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으로 정리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대외 의존의 심화'는 이 대담을 시작할 때 나온 용어인 '종속'을 가리키는 것이겠지요. 여기서 이야기가 더 진전되기 전에 먼저 그 '자본 종속'이란 것에 대해 정의를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
장 자본 종속이란 자본의 소유가 외국으로 넘어가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경제 자 체가 넘어갔다는 이야기지요. 이게 바로 외국인 직접투자와 차관의 차이입니다. 차관은 이자만 주 면 됩니다. 외국인들이 기업 운영에 간섭할 수 없는 거죠.
정 1997년 이전에는 대부분의 외국 자본들이 소유권을 지향하는 주식 형태가 아니라 은행 대출(차관) 형태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엔 대부분 주식 형태로 들어오고 있는데, 주식은 바로 소유권 입니다.
이 예컨대 한국 경제에서 주요 부문의 키를 모두 외국인들이 잡게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하긴 최근 몇 년 사이 국민 경제를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는 대기업들과 은행들에 대한 외국인들의 주식 소 유 비율이 급격하게 높아지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주식의 절반 이상이 외국인들에게 넘 어간 상태이기도 하고요.
정 이쯤에서 옛날 종속 이론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그 당시를 회고해 보면, 종속 이론이 우리나라 에 급속히 확산된 것이 1984년도의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당시 우리나라 외채가 400억 달러를 돌 파해 세계 4위였거든요.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한국…. 뭐, 이런 식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상위 3개국에서 모두 금융 위기가 터졌어요. 그러자 운동권에서는 (혁명적 정세를 기대하면서) 다 음은 한국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1989년도쯤 외채가 오히려 엄청나게 줄어들었어요. 3저 호황으로 돈을 벌어 갚아 버린 거지요.
장 그때 운동권의 오류는 당시 우리나라 자본 시장이 아직 개방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겁니다. 자본 종속 상태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자본 시장도 개방되지 않았고요.
정 당시 한국 경제가 종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근거는 '외국 차관을 도입해 왔다.' '기술은 모두 외국 것이다.'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장 이른바 기술 종속은 경제 개발 초기엔 불가피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정 그렇지만 현재는 오히려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수준이 세계 수위예요. GNP(국민총생산) 대비 R&D(연구개발) 투자 비율에서 보면 세계 5~6위로 영국과 이탈리아를 앞설 정도니까요.
이 그렇다면 개혁 세력의 경제관에 상당히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되나요?
장 오늘 신문을 보니까 어떤 교수님께서 아주 좋은 지적을 했더군요. '지금 정부가 기업 인수ㆍ합병 시장을 자유화하면서 노동 시장은 보호하겠다고 하는데, 이건 앞뒤가 안 맞는 소리'라는 겁니다. 사실 미국이나 영국 외의 다른 나라에서 기업 인수ㆍ합병이 자유롭지 않은 이유는 미국이나 영국 만큼 해고가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발상에서 인수ㆍ합병 시장을 자유화한다면서 또 노동자는 보호하겠다고 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는 거죠.
정 종속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면, 우리나라는 100년 전의 근대화 자체가 종속과 식민지화로 시작 되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분들이 일종의 '제2 근대화 운동'을 하 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자본주의를 합리화, 투명화하고 동시에 선진국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보기 때문이죠. 그 취지에는 저 역시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한 국 같은 후발국, 약소국의 경우 근대화 혹은 현대화라는 것이 '제2의 식민지'화와 연결될 수 있다 는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걸 경계하지 않고 근대화 그 자체만 지상 목표로 간주하면 자칫 경제 적 주권과 자립성을 잃어버리게 될 위험성이 상당히 있습니다.
장 한마디로 자본에도 국적이 있다는 말씀인데…. 제가 그런 이야길하면, 공정거래위의 강철규 위원 장 같은 분은 '1960년대식 종속 이론'이라고 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재벌의 앞잡이'라고 하는 바 람에 제가 본의 아니게 극좌도 됐다가 극우도 됐다가 그러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 죠. 설사 외국 자본이 더 합리적이고 경영을 잘한다 합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외국 자본에게 우 리 경제를 맡기는 게 우리나라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 좋은 일일까요? 글쎄요….
이 그러니까 두 분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게 되겠군요. '오늘날 이른바 경제 개혁을 추진한 결과 어처 구니없게도 한국의 경제 종속은 더 심화되고 말았다. 그 원인은 신자유주의적 구조를 맹목적으로 도입한 데에 있다.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는 금융 자본을 위한 시스템으로 저성장을 지향하기 때 문이다. 선진국으로 도약하고자 열망하는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맞지 않는 제도인 것이다. 과거의 잘못된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 불가피하다 내지는 필수적이라는 주장도 하는데, 그런 주장은 별로 근거가 없다. IMF 사태 직전 몇 년 동안의 과잉 투자는 우리나라 경제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금융 자유화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국 자본이 우리나라 기업들의 질적 수준을 높여 준다는 보 장은 어디에도 없다. 남미의 경우 외국 자본을 도입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산업 공동화만 초래하였 을 뿐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너무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빈대 잡자고 초가 삼간 태우는 꼴인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따져 보고 확인해야 할 것들이 조금 더 있는 것 같습니다.
박정희의 개발 독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이 장의 좌담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박정희라는 인물이 꼭 필요했는지는 모르겠다. 독재의 불가피성에 대해서도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경제개발이 필요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도 박정희의 경제 개발과 같은 적극적이고 목표 지향적인 방식의 경제 개발이, 그 과정에서의 착취와 저임금 구조를 피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가능했을런지 모르겠다.
재벌 문제, 과연 해답은 없는가?이 장의 좌담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재벌 시스템은 기술도, 자원도, 자본도 없는 우리나라 상황에서 산업의 고도화와 세계 시장 진출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중소기업 위주의 개발 방식은, 대만의 예에서 볼 수 있듯,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제 재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