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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유혹, 광기의 덫

로버트 멘셜 지음 | 에코리브르
1장 경기과열, 거품 그리고 붕괴



주식시장은 탐욕과 두려움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서 번갈아 오르내리는 시소와 같다. 장세의 오르막 끝에 이르면 합류하지 않은 사람은 낙오자가 될 것 같은 불안감에 빠진다. 그래서 마지막 바보까지 모두 올라타면 거품은 터지고 심판의 날이 도래한다. 최근에 터져버린 인터넷 시장은 거품의 주요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예고하는 듯한 신기술이 바로 그것이었다. 굴뚝산업의 낡은 회사들은 모두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고, 모든 회사가 가상의 공간으로 자리를 옮겨 방향을 전환하고자 했다. 금융회사들마저도 하루에 열두 번씩 공모주를 발행해서 새로 등장한 회사에 자금을 모아주는 것처럼 보였다. 거품을 부풀리는 상황을 뒷받침해 주는 하부구조가 거의 전무했는데도 말이다.

거품시장은 아이들이 쌓는 벽돌 탑과 같다. 벽돌 하나 하나를 쌓아가면서 탑은 점점 흔들리게 되고 결국 어느 순간 무너져 내린다. 마지막 얹은 벽돌 때문에 탑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탑을 무너뜨린 건 한 층, 한 층마다 더해졌던 불안정성이 원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탑의 꼭대기가 아니라 탑을 지탱한, 아니 지탱하지 못한 하부구조인 것이다. 군중들은 석학이니 애널리스트니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며 떠들어 대지만 실패의 원인은 결국 나 자신에 귀착된다. 돌아가는 상황은 파악하되 자신의 직감을 현장에서 시험해봐야 한다.



튤립 열풍 : 네덜란드를 뒤흔든 황금의 구근

인간이 사고팔 의향이 있는 것이라면 뭐든 시장이 형성될 수 있다. 거품시장 역시 거래 종목에 관계없이 발생한다.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는 아름다운 자연의 선물이자 전혀 의외의 물건이 최초의 대규모 거품시장 한복판에 놓이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튤립이었다. 튤립은 1550년경에 터키를 거쳐 서구 유럽에 처음 소개되었다. 이후 집약적으로 재배하고 품종을 개량하면서 튤립은 더욱 아름다워졌다. 17세기가 되자 튤립은 부유층, 특히 독일과 네덜란드 부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구근을 선발하는 대회가 열리게 되고 많은 상금이 걸렸다. 우승을 차지한 구근은 이종교배를 위해 비싼 값에 팔려나갔다.



이처럼 튤립의 가치가 올라가게 되자 1630년 경에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튤립 재배와 매매에 사로잡혔다. 튤립을 키우는 사람이 늘어나자 특별히 인기가 있거나 대회에서 우승할 만한 품종의 구근 값이 뛰기 시작했다. 뒷마당에 얼마 안 되는 땅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너나 할 것 없이 구근을 재배하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다들 돈을 벌었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멀쩡히 직장을 잘 다니던 사람들이 사표를 내고 튤립을 재배하는 일에 전념했다. 튤립 열풍이 정점에 이른 1634년~1637년에는 튤립 상등품의 값이 지금 가치로 거의 11만 달러까지 치솟았다. 이는 웬만한 집 두 채를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새로운 부가 발생하면서 통화의 공급이 팽창했고, 모든 것들의 값이 덩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잉글랜드와 유럽 등지의 돈까지 몰려들었다. 열기가 고조되면서 사회의 조직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농부들은 튤립 투기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가축을 내다 팔고 집과 토지를 저당 잡혔다. 어떤 사람들은 밤에만 몰래 튤립을 가꾸기도 했다. 다들 누군가 튤립을 훔쳐 갈까봐 전전긍긍했다. 노테르담에 잠시 정박했던 한 영국인 선원은 양파인줄 알고 튤립 구근을 뽑아 먹었다가 감옥에서 10년을 보내야 했다. 레이덴 대학에서 식물학을 가르치던 에바드르 포르스티우스 교수는 재앙에 이른 이러한 현실에 심사가 뒤틀린 나머지 튤립만 보면 지팡이로 냅다 내리쳤다가 정신이상자로 취급되어 지하 감옥에 갇혔다.



거짓풍요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1637년 초, 가격의 붕괴는 느닷없이 시작되었다. 몇몇의 사람들이 다른 형태의 자산을 갖기 위해 튤립을 팔려고 했다. 그러나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거의 모두가 튤립을 재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를 느낀 사람들이 너나없이 튤립을 시장에 내놓았다. 팔려는 사람들이 공황 상태에 빠지자 가격은 갑자기 주저앉았다. 그제야 사람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게 진정한 자산이 아니라 구근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짧은 기간 생의 초라함을 벗고 화려함을 맛봤던 많은 사람들은 원래의 보잘것없는 삶 속으로 다시 내동댕이쳐졌다.



희대의 사기극

탐욕이 지닌 힘만으로도 주식 매수 열기를 일으키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지만, 능란한 사기꾼이 가세하고 정부의 공식 승인을 얻은 듯한 분위기까지 조성한다면 엄청난 거품시장을 만들 준비는 완벽하게 끝난 셈이다. 이 사건은 1700년대 초, 영국에서 일어났다.



1711년 옥스퍼드의 백작 로버트 할리는 사우스시 컴퍼니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9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영국 정부의 채권을 자사의 주식과 교환해 주겠다고 나섰다. 국채를 회수해 주려는 이런 애국적인 행위에 감동한 왕실에서는 그에게 사우스시 제도(필리핀, 보르네오, 팔라우 등 태평양의 적도를 경계로 남북에 걸쳐있는 섬들)와 남미의 무역독점권을 허가해 주었다. 하지만 당시 남미의 대부분을 식민지로 거느리고 있던 스페인이 영국과의 무역을 극도로 제한했기 때문에 그 독점권은 생각했던 가치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할리와 그의 일당들은 소문을 퍼뜨렸다. 잉글랜드와 스페인이 '남미에서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협상 중'이라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의회에는 '3,1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국채를 회수하기 위해 정부채권을 보유한 사람들에게 전환주식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제안을 했다. 그것은 의회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로버트 월풀(Robert Walpole, 나중에 영국 초대 수상이 됨)은 '주가를 인위적으로 올리려는 술책'이라며 하원에서 비난했지만 이미 퍼진 황금빛 소문 앞에 그의 반대는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결국 의안은 통과되었고, 투기가 시작되었다.



1720년 1월에 주당 128과 2분의 1파운드였던 사우스시의 주가는 8월에 1,000파운드까지 치솟았다. 지위고하를 막론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 시장에 올라타려고 맹렬히 돌진했다.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던 로버트 월풀마저도 한 다발의 주식을 구입하고야 말았다. 사우스시의 주가가 폭등하는 것을 지켜본 다른 사기꾼들도 덩달아 수백 개의 거품 회사를 설립했다. 이들은 50배의 배당금을 주겠다는 장밋빛 약속을 내세웠고 이에 혹한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나라 전체가 주식 투기꾼으로 넘쳐나는 것처럼 보였다. 사우스시의 거품은 1720년 8월에 마침내 터지고 말았다. 회사 간부들이 보유 주식을 매각했다는 소문이 흘러나오면서 주식을 팔겠다는 주문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1,000파운드를 호가하던 사우스시의 주식은 315파운드까지 곤두박질쳤다. 수천 명의 살림살이가 바닥났으며, 의회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대공황, 검은 목요일

1927년 봄, 잉글랜드 은행에서는 침체된 산업을 부양하기 위해 금리를 인하했다. 그러자 투자가들은 더 나은 수익률을 찾아 미국으로 몰려갔다. 국부의 해외유출을 막기 위해 잉글랜드 은행은 미국 연방 준비제도이사회에 금리를 낮추도록 설득했고, 그렇게 시작된 인플레이션의 사이클은 사람들을 주식 투기장으로 향하도록 했다. 1927년~1929년까지 불과 2년 만에 다우존스산업지수가 무려 250퍼센트 가까이 상승했다.



주식시장에 급브레이크가 걸린 날은 1929년 10월 24일이었다. 그날은 지금도 검은 목요일로 기억되고 있다. 그날 아침 시장은 전날과 큰 변동 없이 안정세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초반에 2만 5,000주 정도의 매물이 나오면서 30분 만에 시세가 하락했다. 11시쯤, 전국에서 팔자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하더니 대표적인 활동성 주식들의 시세가 한 번 거래될 때마다 2, 3, 5 심지어 10포인트씩 빠지기 시작했다. 시장이 붕괴되었다는 소문은 눈 깜짝할 사이에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갔다. 12시가 되자 증권거래소가 있는 교차로에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운집했다. 사진기자와 카메라맨들까지 금융가를 가득 메운 인파로 인해 주변 일대에 교통 대란이 일어났다.



이처럼 걷잡을 수 없는 소동이 일어나자, 은행장들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회의실에 모여들었다. 6개 은행의 수뇌들은 각각 4,000만 달러씩, 총 2억 4,000만 달러를 출연해서 주식시장에 투입했다. 하지만 확산되는 공황심리 앞에서는 안쓰러울 만큼 무기력했다. 밀려드는 숫자에 증권시황판 위에서도 심각한 체증이 벌어졌다. 오후 1시 30분이 되자 시황판의 표시는 2시간 가까이 뒤쳐졌고, 그날의 종료가는 장이 마감되고도 4시간 8분이 지난 저녁 7시 8분에야 찍혀 나왔다. 그날 하루에만 서류 상에서 40억 달러가 증발했고, 수많은 계좌와 투자자들이 사라졌다. 1929년 10월 24일은 월스트리트의 권위와 힘이 크게 실추되고 금융계에 중요한 이정표를 낳은 날이 되었다.



경제의 움직임은 본질적으로 군중심리에서 동인을 찾기 마련이다. 물론 그래프와 사업비율 등의 정보는 온갖 위험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우리의 암중모색에 없어서는 안 될 도구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개인으로 존재할 때에는 이성적이고 분별이 있지만, 군중의 일원이 되는 순간 바보가 되고 만다.

모든 사람이 정신을 잃을 때 제정신을 유지하는 법

주식시장의 오름세와 내림세를 황소와 곰에 비유하기도 한다. 뿔로 치받는 황소 장이든 내리치는 곰 같은 장이든 그 몰아치는 흐름에 휩쓸리지 않기는 쉽지 않다. 혼자 뒤처지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나 다른 투자자들의 의뢰를 받아서 40년 넘게 자산을 운용해오는 동안,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 몇 가지 원칙을 갖게 되었다.



첫째 - 탐욕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는 큰 차액을 남길 기회가 사라지고, 두려움의 정점에서는 오히려 좋은 기회가 널려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시장이 주저앉더라도 늘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둘째 - 투자 범위를 설정한다. 이를테면 '이 안에서만 놀겠다'는 터를 정해놓고 그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영업실적과 수익성, 경영진의 철학, 영업망의 집중력 등을 고려해서 20~25개 정도의 회사를 정한다. 그 회사들 중에서 주가 이익비율(수익 실적에 대비한 주가 적정도)이 합리적인 수준일 경우에만 구입을 결정하고, 새로운 회사를 추가할 경우에는 가장 취약한 회사의 주식을 매각한다.



셋째 - 구매전략을 정해서 고수한다. 나는 구매하고자 하는 회사의 가격이 일정 범위 안에 들어오면 조금씩 사들인다. 다시 말해서 사고자 하는 물량의 25퍼센트를 먼저 사고, 가격이 떨어졌을 때 또 25퍼센트를 사는 식이다.



넷째 - 아는 것에 집중한다. 할인유통업이나 가정용품, 기본식료품, 의약품, 화물운송, 청량음료, 주류 그리고 금융서비스 업계의 수위를 달리는 회사에 집중한다. 이유는 실생활에서 늘 확인해볼 수 있는 업종이기 때문이다. 내가 기술 분야를 기피하는 이유는 그러한 회사들은 너무 급박하게 변화하다가 결국에는 상품 판매로 돌아서는데, 막상 그렇게 하면 영업망이 오래 버텨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탄탄한 영업망을 갖춘 회사가 아니면 투자를 하지 않는다.



다섯째 - 거래소 시장이나 브로커의 사무실에서 투자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그런 곳에서는 군중의 소음에 휩쓸리기 때문이다. 언론이나 군중의 요란스런 호들갑으로부터 안전한, 완전히 혼자가 된 상황에서 투자 결정을 내린다.



여섯째 - 장기적인 안목을 갖는다. 경영철학과 기업 문화를 갖추고 좋은 제품을 만들어 적당한 가격에 판매하는 회사를 선택한다. 수익전망이 확실하되, 수익 성장률이 50~60퍼센트 이상 상회하지 않는 회사를 주목하는 게 좋다. 연 15~20퍼센트가 넘게 주가가 오른 회사치고 안전하게 성장할 회사는 드물다.



일곱째 - 복리의 기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는 5년이라는 기간을 정해두고 복리로 계산해서 최소 연평균 15퍼센트의 수익률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렇게 30년만 하면 원금은 66배로 늘어난다. 그 정도면 충분히 빠른 게 아닐까?



2장 소문과 암시



집단 히스테리


아무리 뻔하고 엉성하더라도 대강의 줄거리는 갖추고 있는 '소문'과 달리 '암시'의 힘은 듣는 사람의 반응에 달려 있다. 우유를 나눠 마신 옆 사람이 '우유가 상한 것 같다'고 말하면 실제로 우유가 몽글 몽글 굳어지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암시다. 하품도 일종의 암시로서 전염력을 갖는다. 암시의 힘은 이런 식으로 발휘된다.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두 명에서 네 명으로 때로는 수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퍼지는 현상이다. 주가가 폭락하건, 하늘이 무너지건, 대중은 분위기에 쉽게 편승한다.

「1974년 5월, 마이애미비치에 있는 베이하버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날 아침 10시가 조금 지났을 때 플로리다 주 보건국 산하 소비자 보호원의 '조엘 니츠킨 박사' 사무실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베이하버 초등학교에서 공중보건 간호사를 파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학교에 뭔가가 새고 있는데 독가스로 뒤덮인 것 같으며, 아이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몇 명은 소방서 구급대에 의해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니츠킨 박사는 직접 가서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사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 학교 주차장엔 구급차에 소방차와 경찰차까지 온갖 차들로 꽉 차 있었다. 박사는 출장 중인 교장 대신 그의 비서실장과 얘기를 나누었다. 비서실장은 "처음으로 쓰러진 아이는 5학년인 샌디라는 아이인데 그 아이는 175명으로 구성된 합창단의 일원이며, 합창단원들은 그날 아침 9시 행사 준비를 위해 휴게실과 강당 겸 식당으로 쓰이는 카페토리엄에 모였었다"고 말했다. 이어 "한 30분이 지났을 때 샌디는 속이 메스껍다며 밖으로 나가 양호실에 갔고, 그곳에서 자리를 비운 양호교사를 기다리다가 쓰러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합창단원 중 또 다른 아이가 탈이 났고, 이어 또 다른 아이에게로 이어지면서 증상이 심한 일곱 명이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그리고 "스물다섯명은 경미한 증세를 보여 귀가 조치되었고 마흔 명 쯤은 학교에 남아 치료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비서실장의 설명을 듣고 난 박사는 아이들과 직접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증상이 좀 묘했다. 아주 다양한 증상들을 표현한 것이다. 두통에 현기증, 오한과 복통, 숨이 가쁘거나 기운이 없다는 아이도 있었다. 박사는 카페토리엄을 조사해 봤다. 카페토리엄에서는 무슨 냄새가 나긴 했는데 불쾌한 냄새는 아니었고 다만 강렬했다. 알아보니 그 냄새는 도서관에 카펫을 새로 깔면서 바른 접착제 냄새였다. 물론 접착제는 유독물질이 아니었고 게다가 카펫을 깐 건 벌써 2주전의 일이었다.



상황은 이랬다. 처음에 쓰러진 샌디는 그날 정말로 몸이 좋지 않았다. 일종의 바이러스 감염이었는데 계속 서서 노래를 부르다보니 몸에 무리가 와서 의식을 잃게 된 것이었다. 아이들이 보기에 이유 없이 샌디가 쓰러진 것은 카레토리엄에서 나는 냄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샌디는 학교에서 규범적인 성실한 아이었다. 샌디가 기절하자, 아픈 아이들이 갑자기 늘어났다. 합창 연습을 마친 학생들은 이어 소방훈련을 했는데 실제로 머리가 아프고 메스꺼움을 느꼈다. 분명 독가스는 없었지만 그것은 진짜 전염병이었다. 바로 '집단 히스테리'라는 전염병이었다.」



집단 히스테리는 많은 사람들의 대규모 질병을 유발할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의 대규모 욕구나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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