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탄생
윌리엄 번스타인 지음 | 시아출판사
제1부 무엇이 성장을 낳는가번영에 꼭 필요한 4가지 요소국가적인 번영은 한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문명의 발달이나 천연자원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며 제도, 즉 인간의 사고·상호작용·사업 활동의 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근대 이전의 성장은 순전히 조방적(粗放的)인, 즉 인구 성장에 의해 국민 경제 규모가 확대된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성장은 개인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성장으로 변화하였다. 다시 말해서 부(富)가 창출되었음을 의미한다. 부(富)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요소가 갖춰져야 한다.
재산권 : 개인의 재산은 국가나 범죄 혹은 독점가들로부터 지켜질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다른 모든 권리에 대한 보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재산권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싱가포르나 홍콩처럼 경제적으로 가장 자유주의적인 정부들도 일정한 세금을 부과하고 일정한 형태의 수용권을 강제하며, 사업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과학적 합리주의 : 경제적 진보는 사상의 발전과 상업화에 달려 있다. 사상을 싹 틔우기 위해서는 지적인 틀, 즉 수학적 도구와 경험적 관찰에 기초한 합리적 사고라는 인프라가 필요하다.
자본시장 : 계획과 생각을 구현해내는 데는 자본이 필요하다. 즉 기업들은 혁신제품을 대량 생산하기에 충분한 돈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자본을 유입하지 못한다면 그 성장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통신과 수송 : 생산된 상품을 알리고 공급하기 위해서는 통신과 수송이 필요하다. 기업이 재산권과 지적 도구 그리고 충분한 자본을 확보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제품을 소비자에게 신속하게 전달할 수 없다면 그 혁신제품은 잠식되고 말 것이다.
이 네 가지 요인 - 재산권, 과학적 합리성, 효과적인 자본시장, 효율적인 수송과 통신이 모두 정착되기 전까지는 어떤 나라도 번영을 누릴 수 없다. 그 중 하나라도 빠지면 경제적 진보와 복지가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네 가지 요인이 처음으로 일어났던 네덜란드는 16세기부터 1세기 정도는 번영을 누렸지만, 18세기 영국의 해상 봉쇄로 인해 수송을 잃게 되면서 그 번영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공산권에서는 재산권의 결여로, 중동의 여러 곳은 자본과 과학적 합리성의 부재로 인해 번영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사하라이남 아프리카는 이 네 가지 요인 모두를 전혀 확보하지 못한 국가가 대부분이다.
재산권의 등장과 확립북한은 99%의 문해율(文解率)을 자랑하는 훈련되고 열심히 일하는 사회지만 일인당 GDP가 9백 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모로코는 문해율이 43.7%밖에 되지 않고 하루종인 커피만 마시며 관광객들에게 양탄자를 팔지만 일인당 GDP가 3,260달러이다. 무력하고 배고픈 국민들은 국가의 의지에 굴복하기 쉽다. 재산권은 번영의 네가지 기초 중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고대 세계에서도 있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기록이나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 기록을 보면 기원전 2500년경부터 토지거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서의 모세5경에 보면 고대의 재산 거래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
기원전 700년경 그리스에서는 평균 10에이커 크기의 농지를 소유한 소농민(게오르고스)이 약 10만 명 정도 있었다. 그들은 노예를 한두 명쯤 소유했고, 평등주의를 소중히 여겼다. 그래서 토지 보유에 따라 투표권을 할당하는 금권정치(timocracy)를 행하다가, 나중에는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도시 빈민에게까지 투표권을 부여했다. 이 투표권을 만들어냄으로써 그들은 법적 틀도 확립하여 생명과 자유, 재산에 대한 권리를 보호했다. 그리고 마을마다 50~60명 단위로 장갑보병의 전사를 구성하여 재산을 지켰다. 그러나 고대 사회의 재산권은 독립된 사법체계하의 권리로서는 그 개념이 약했다. 더구나 그리스와 로마 공화정 때 잠깐 꽃피웠다가 제국의 붕괴이후 사라지고 말았다.
강력한 재산권이 확립된 것은 AD 1600년경으로, 잉글랜드에서 그 꽃을 피우게 되었다. 중세의 통치자들은 교황의 봉신이었다. 통치자는 왕국의 소유권을 로마에 양도하고 세금을 바치는 조건으로 왕국을 통치했다. 이를 통해 왕은 교황에 의지하여 귀족들을 억누를 수 있었다. 영국의 존 왕은 이러한 통치체제를 벗어나려 했으나 왕권을 남용하여 신민의 원성을 샀다. 그는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귀족들의 토지를 빼앗고, 영주들의 재산을 징발했다. 또한 교회의 토지를 몰수하고 전쟁포로들을 교수형에 처했으며, 귀족들을 제압하기 위해 그들의 자녀를 볼모로 잡아두었다. 그러나 1214년 아우구스투스에게 완패 당하면서 그간의 실정에 격분한 귀족과 신민들의 협상요구에 강제로 응하게 되었다.
1215년 6월 존 왕은 63개조의 긴 헌장, 즉 영국인의 권리를 성문화하고 왕권을 제한하는 협정문에 서명하게 되었는데 이 협정문이 영국헌법의 기초가 된 대헌장(마그나카르타)이다. 대헌장으로 평등을 보장받게 된 영국인들은 1689년 신민의 자유와 권리를 규정한 권리장전 제정으로 그들의 기본권을 확립시켰다. 이는 비천한 농부에서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유민을 동등화시킨, 근대의 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의 기원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사회계급의 수평화를 통해 법치 및 재산권이 출현할 수 있었다.
과학적 합리주의의 등장과 확산근본적으로 경제학의 역사는 기술의 역사다. 즉 근대의 번영은 발명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경제성장은 기술진보의 결과물이다. 인류가 번영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은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을 분리시킨 갈릴레오의 신조를 채택하면서부터였다. 1700년경, 핼리와 뉴턴의 혜성과 일식에 대한 예측으로 새로운 과학은 유럽의 지성을 서구 기독교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태양 중심적 이론을 내세운 코페르니쿠스는 과학의 혁명을 격발시켰고 브라헤, 케플러, 갈릴레오는 그의 이론을 더욱 진전시켜 관찰과·이론적 측면에서 놀라운 진보를 이루어냈다. 한편 프랜시스 베이컨은 귀납적 체계를 내세워 지적 틀에 내재된 이론을 진단하여 논리를 도출시켰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1573년 열두 살의 이른 나이에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했다. 논쟁을 준비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그는 오직 하나의 연구 분야에만 전념해야 했던 당시의 빈약한 커리큘럼에 회의를 느끼고 그레이스 인(런던의 4개 법 학원 중의 하나)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하다가 '선입견 없이 사실이 먼저 수집된 후 분석되도록 하는 귀납적 체계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리고『신기관』(The New Organon)을 저술하여 '연구를 억제하고 중단시킨 자'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또한 2권에서는 자신의 새로운 귀납적 추론 방법을 개괄하여 과학적 진보 는 성실한 관찰과 측정에 있음을 주장했다.
망원경의 발명은 과학적 진보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발명으로 인해 인류는 창조주에 대한 외경심만 더했을 뿐이었던 생명 형태의 우주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종교와 과학은 서서히 분리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갈릴레오가 이전보다 32배의 확대력을 지닌 망원경을 개발하여 우주를 관측할 수 있게 함으로써 교회의 교의에 심각한 도전이 되었다. 이 발명으로 행성들의 규칙적인 운동이 경도 계산에 적용되어 당시의 커다란 항해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중력의 본성까지는 파악하지 못하고 태양의 궤도상에 지구를 붙잡아 두는 힘이 달을 지구에, 그리고 목성의 달을 목성에 붙잡아두는 힘과 동일할 것이라고 희미하게 인식했는데 이를 확실하게 증명시킨 사람이 뉴턴이다.
뉴턴은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데카르트 수학을 배웠다. 그는 '달을 궤도상에 붙잡아두는 힘이 나무에서 사과가 아래로 떨어지도록 한다.'는 생각을 증명하기에는 해석기하학의 계산법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미적분법을 발명했다. 그러나 그는 잘못된 지구 반지름 값(지구 중심으로부터 사과나무까지의 거리)을 사용함으로써 중력을 부정확하게 추정했다. 그래서 그는 그 잘못된 계산을 접어두고 다른 연구에 몰두하여 운동의 세 가지 법칙과 수열을 탄생시켰다. 또한 프리즘을 사용하여 빛의 색채 구성론을 추론함으로써 근대 광학을 창안해냈다.
뉴턴이 접어둔 잘못된 계산을 밝혀낸 사람이 에드먼드 핼리이다. 는 천문학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는데 핼리는 <행성은 그 질량에 비례하고 태양과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으로 태양에 이끌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뉴턴이 잘못 계산한 지구의 반지름 값을 발견하고 그것을 정정해 정확한 방정식을 찾아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핼리는 개기일식의 경로와 지속시간을 여러 관찰자들의 보고서를 통해 정확하게 예측했는데 이는 '관찰하고 가설을 수립하며 검증하는 '베이컨의 귀납적 방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핼리는 1682년에 그의 이름이 붙은 혜성을 발견했고 유럽의 신대륙 발견 착수에도 기여했다.
자본시장의 활성화서구 사회번영의 압도적인 부분이 극소수 천재들의 머릿속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소박한 진리다. 그들의 생각을 경제적 실제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자본이 필요했고 그 자본은 신뢰가 강건한 금융시스템에 의해서만 공급될 수 있었다. 에디슨은 부자였지만 자기 자본만으로는 백열전구를 시장에 공급시킬 수 없었다. 공장을 짓고 노동자를 고용하며 대량의 원재료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구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력이 공급되어야 했다. 그래서 발전소와 송전망을 먼저 갖추어야 했다. 에디슨은 존 피어폰트 모건이라는 자본가의 도움으로 발명을 활성화시킬 수 있었다. 당시 신기술에 대한 투자는 엄청난 비용 때문에 대부분 실패했다. 그러므로 모건이 에디슨의 발명에 투자를 한 것은 자본공급과 더불어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돈에도 비용이 있다. 이자율이 그것이다. 이 이자율을 정하는 많은 요인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다. 대부자는 많은데 차입자가 적으면 이자율이 낮아지고 반대로 차입자가 많으면 이자율이 높아진다. 또한 사업의 위험 정도도 그 자본의 가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신용도가 높은 차입자에 대한 대부는 신용도가 낮은 차입자에 대한 경우보다 이자율이 훨씬 더 낮다. 미국 재무성 채권은 트럼프 카지노 채권보다 훨씬 수익률이 낮다. 때문에 한 나라의 이자율은 그 나라의 경제적 ·사회적·군사적 상황에 대한 '체온표'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자본이 아무리 싸고 풍부하더라도 거래를 위해서는 기업과 투자자를 연계시켜줄 자본 시장이 필요하다. 그리고 효율적인 자본시장이란 차입자와 대부자가 거의 동일한 가격으로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대량의 거래를 행하는 시장을 말한다. 15~16세기 동안 북유럽의 금융 중심은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단기채권이나 종신연금 등의 이자 수익 등이 활성화되어 있어 거의 모든 사람이 자본시장을 활용했다. 그리고 낮은 이자율 덕택에 약동적이었던 네덜란드 상업과 더불어 북유럽의 상업의 활성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당시의 첨단 기술 즉 배수 및 매립 프로젝트, 운하 건설, 조선 등의 사업은 대개 값싼 자본 덕택에 가능했다. 일반 시민들도 주택이나 농장을 구입하는데 혜택을 입었다. 네덜란드인들은 화폐를 효율적으로 거래했고, 그 덕택에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금융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투자자를 보호할 책임을 갖는 규제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1770년 이후 네덜란드의 금융시장은 점차 약해졌다. 더구나 서서히 부상하던 잉글랜드의 금융적, 군사적 힘이 네덜란드를 압도하여 자본시장을 빼앗기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금융 강국의 탄생에는 네덜란드의 자본이 큰 기여를 했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영국의 내전이 종식되자 네덜란드의 금융엘리트들이 잉글랜드로 건너갔고, 종교재판을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했던 포르투칼계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런던에 정착했다. 그들과 더불어 네덜란드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네덜란드의 금융이 모방되었는데 이는 네덜란드의 자본시장을 압도할 정도로 성장했다.
수송과 통신의 발달콩을 기르든 정교한 전자회로를 조립하든 무언가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동력이 필요하다. AD 1000년경까지는 농업, 공업, 토목, 군사 등 거의 모든 노동이 인간의 근육을 통해 이루어졌다. 최초의 동력 도구는 물레방아였다. 이는 기원전 150년경 헬레니즘 후기 그리스에서 등장했는데 역사를 통틀어 물레방아의 주요 역할은 곡식을 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는 상사식(물을 수차바퀴의 상부에서 낙하시키는 방법)의 물레방아로 변화하였고 1822년까지 런던에 상수도를 공급하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이외에 현대산업화의 문을 열어준 증기엔진의 발명도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0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의 헤로(Hero)는 두 개의 증기 동력장치를 개발했는데 하나는 용기를 회전시키는데 사용되었고, 또 하나는 신전의 문을 여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의 결핍으로 17세기 말까지 증기는 거의 실용화되지 못했다.
산업혁명기의 위대한 기술자와 발명가들은 예외 없이 교육받지 못한 장인들이었다. 제임스 와트도 가난한 장인이었다. 그는 글래스고 대학에서 장비를 만들고 수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증기의 물리학을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1764년 그 대학에 설치되어 있던 뉴커먼엔진(뉴커먼이 발명한 증기 양수 기관)을 수리할 기회를 맞게 되었을 때, 그 엔진의 열효율이 낮은 사실을 발견하고, 실린더와 복수기(콘덴서)를 분리시킬 것을 착상하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엔진을 대량 생산할 숙련된 작업자와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던 중 버밍햄의 산업가 매튜 볼턴과 제조업자 존 윌킨슨을 만나 산업적 규모의 엔진을 제작하게 되었다.
증기의 동력은 해상에서도 개발됨으로써 해상 운송을 진화시켰다. 마르키 쥬르루아 다방이 1787년에 최초의 외륜 증기선을 건조한 이후 이를 다시 개선하여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쾌속범선이 수천 톤의 짐을 싣고도 20노트의 속력으로 운항할 수 있게 되었다. 증기엔진과 배의 결합은 엄청난 석탄이 소모되고 연료 보충이 문제되었지만 고압 선박엔진과 스크루프로펠러가 완성되면서 석유 터빈이 출현하기 전까지 해상운송의 큰 동력이 되었다. 이처럼 증기 덕택에 선적물량이 증가하자 잉글랜드와 아메리카 사이에 토지, 노동, 자본시장이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즉 다량의 상품과 인구가 세계의 대양을 가로지르게 된 것이다. 증기는 육상 운송에도 적용되었고, 스티븐슨의 철도기관차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통신은 근대가 시작될 때까지 인편이나 전서구에 의존했다. 그러나 전기가 발견된 이래 과학자들은 그것을 정보를 전달하는데 사용하기를 꿈꾸어 왔고 1820년에는 덴마크의 한 과학자가 전류에 의해 나침반 바늘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영국의 윌리엄 쿡과 찰스 휘트스톤 그리고 미국의 새무얼 모스(Samuel Morse)가 이에 착안하여 전신기를 발명하게 되었다. 전기를 통한 통신을 사람들의 눈에 명확히 보여주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모스와 쿡은 신문과 정치인들로부터 사기혐의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그러나 1840년대 초, 쿡이 런던의 철도노선에 전선을 깔고, 모스가 볼티모어와 워싱턴 사이의 철도노선에 전선을 깔아 전신을 통해 기차 편보다 더 빨리 전달된 뉴스를 증명해 보여줌으로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로 인해 1858년에 최초의 대서양 횡단 케이블이 부설되었다.
19세기 초의 혁명적 변화는 부의 확고한 성장을 격발시켰다. 확고한 재산권 보호가 장인들에게 혁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