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장보고 대한민국을 말한다
장기영 지음 | 삼각형프레스
의문의 사나이어느 날, 역사 관련 월간지를 출간하는 잡지사의 편집국에 전화벨이 울렸다. 이은혜 기자가 통화를 하다가 멈추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자기가 장보고라고 하면서, 지난번에 원고 보냈다고 하는데요. … 정말 자기가 장보고라고 막무가내로 주장하는데요?" 우리보고 어떻게 좀 해달라는 눈치다. "은혜 씨, 저한테 넘기세요." 나는 말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는데요. 선생님 저희가 무척 바쁘거든요. 다음에 전화 주시면 안 될까요?" 장보고라고 주장하는 사내가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진노했다. 나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지방의 작은 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쳤던 교수라고 했다. 이제 나이 칠순이 넘어 언제 죽을지 몰라 죽기 전에 이 이야기를 꼭 남겨야 한다고 했다. 나는 겨우 수습을 한 뒤에 전화를 끊었다. 편집국 직원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몇 달 전에 '대륙은 바다를…' 이런 제목으로 들어 온 원고 있나요?" 정영욱 주간이 뭔가 생각났는지 자신의 서랍을 뒤지더니, "여기 있네. 필자가 장보고로 되어 있어 누가 장난친 거라 생각하고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정 주간님, 그 원고 저한테 주시죠. 심심할 때 한번 읽어보게요." "그러지. 하지만 동북공정을 끝내고 읽어야 해." "역사전쟁은 결국 경제전쟁 아닙니까?" 그 순간 모두 동시에 말했다. "경-제-전-쟁?" 두말할 필요 없이 다들 장보고가 순식간에 떠오른 것이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5부를 복사해서 읽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으로 온 까닭은안녕하시오. 청해진의 장보고 대사입니다. 1200년 전의 인물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왜 왔는지 무척 궁금해하실 겁니다. 이미 많은 분들의 노력에 힘입어 나와 청해진에 대한 역사적 복권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여한은 없습니다. 다만 청해진과 1200년 전의 교훈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노 교수의 육신을 빌려 이렇게 잠시 환생한 것입니다.
나는 요즘 두 권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한 권은 『대한민국 희망보고서 유한킴벌리』이고, 또 다른 한 권은 『10년 후, 한국』이라는 책입니다. 전자는 대한민국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고, 후자는 대한민국의 암울한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비를 이룹니다. 또 전자는 유한킴벌리라는 회사를 통해 인간존중·윤리경영·합리적 분배·공동체의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반면 후자는 무한경쟁·세계화·개인의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권의 책에서 이야기하는 주제는 같습니다.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와 '한 배를 탄 공동체에 관한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전자가 상생과 분배를 통해 공동체의 먹고 살 길을 제시하고 있다면, 후자는 민족과 공동체를 넘어 세계화와 무한경쟁을 통해 선 성장, 후 분배를 통해 먹고 살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이 책에 관심을 갖느냐고요? 그것은 1200년 전 동북아시아 정세와 지금의 한반도 정세 - 즉 남북국(발해, 신라) 시대와 지금의 남북한 시대 - 가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동체가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가 모든 것의 근원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828년 청해진 설치 이후 내가 염장에 의해 생을 마감하는 841년까지, 13년 동안 동북아시아 해상무역을 주도한 장보고 세력이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하고 한번쯤 이런 의문을 가져본 적은 없습니까? 후손들은 '장보고의 딸을 문성왕 차비로 삼는 것에 대한 진골귀족의 반발 과정에서 장보고를 제거한 것'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당시 한반도 이북과 만주지역을 장악한 발해가 건재해 있었고, 신라의 경우 한반도 이남에서 당의 영향력을 축소시켜 나갔으며, 백제계 신라인들은 중국, 한국, 일본 등에 광범위하게 분포하여 막강한 해상무역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최치원의 진언대로 신라가 골품제를 폐지하고, 백제계 신라인과 고구려계 신라인을 등용하며, 동시에 발해·일본과의 외교를 강화하면서 백제계 신라인들의 광범위한 해상무역을 적극 육성·발전시켰다면, 신라는 당나라의 외압을 벗어나 동북아시아 최강국으로 변모할 잠재력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내가 21세기 대한민국에 나타난 것은 1200년 전의 청해진의 운명처럼 우리 민족의 현재가 미래에 슬픈 설화로 탄생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나는 왜 죽음을 피하지 않았는가만일 내가 염장의 암살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왜 저항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고심을 해왔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운명이라 해야 하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160여 년이 지났음에도 서남해안 주민들에겐 미천한 해도인(해적떼)이라는 편견이 늘 따라다녔습니다. 그런 편견 속에서 견디지 못한 나는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던 당나라로 향하는 무역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 곳의 백제 후손들은 등주, 초주, 양주, 명주 심지어 일본 큐슈의 하카타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해상무역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겉으로는 재당 신라인으로 행세를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신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라고 여겼습니다. 반면 고구려계는 고구려인으로 살아가려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평로, 치청에는 고구려 유민 출신 이정기 장군의 세력이 당에 맞서고 있었고, 만주 지역에는 고구려 유민들이 건국한 발해가 건재해 있었습니다.
출세를 위해 당나라로 건너간 내가 목표를 달성하는 가장 빠른 길은 당나라 군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결국 지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입대를 선택했습니다. 내가 소속된 무령군은 이정기 장군 일가를 토벌하기 위해 존재하는 군대였습니다. 지도부는 대부분 한족이었지만 일반 군사는 다민족 출신으로 구성된 용병부대였습니다. 무령군을 중심으로 신라에서 원정 온 신라 군사 3만 명 등 나·당 연합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던 이사도는 그의 부하 도지 병마사 유오에게 예상치 못한 죽음을 당합니다. 이로써 이정기 장군의 고구려 부활 프로젝트는 55년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운주성에 남은 이사도의 군사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 헌종으로부터 '반당의 결과가 어떤지 본보기를 보여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당 헌종의 명령이 떨어지자 내가 속해 있던 무령군은 무려 1,000명이 넘는 이사도의 패잔병들을 그 자리에서 무참하게 살해하였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처참한 광경을 잊지 못합니다. 한 뿌리 한 핏줄이며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고구려인들을 내 손으로 처형해야만 했던 나의 선택을 처음으로 후회했고, 20대 초반의 젊은 치기와 출세욕으로 시작된 군 생활을 어떻게든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신라인인가, 백제인인가, 한족인가 하는 정체성에 대한 의문도 밀려왔습니다. 내가 841년 11월 염장의 암살을 거부하지 않고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당시 청해진은 신라 조정의 암살 계획을 저지할 충분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만일 신라 조정의 암살 계획을 군사력으로 대응했다면, 성공이나 실패에 관계없이, 한반도에 당나라와 일본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자초했을 겁니다. 내가 당나라의 무령군 군중소장 출신이라는 점에서 당나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이정기 장군의 잔존 세력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깨닫게 된 백제계 신라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 또 청해진 활동과 신무왕 옹립을 지원하게 된 그 모든 결과들이 결국은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던 내 운명을 만들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집 떠나 고생하면 집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가족을 떠나 고생하면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고향을 떠나 고생하면 고향이 그리워지는 법입니다. 조국을 떠나 타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게 되고, 특히 타 국민들에게 핍박을 받거나 조롱을 받게 되면 조국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법입니다. 지금 아무리 세계화가 촉진되는 시대라 할지라도 나의 가족, 나의 고향, 나의 동포, 나의 조국이라는 정체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 진리를 깨닫게 해준 사람이 바로 이정기 장군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이정기 장군의 세력을 완전 토벌하는 핵심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아, 이정기 장군!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 신라나 백제계 재당 신라인들이 거국적 차원에서 고구려계의 이정기 장군과 손을 잡았더라면 우리의 운명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한국의 한 경제학자는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역사적 원리에 대해 무지에 가까운 주장을 합니다. 공병호 박사는 『10년 후, 한국』이란 책에서 '민족은 없다'는 극단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런 발언은 당시 신라 조정의 고구려계, 백제계에 대한 인식과 맥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고구려 유민 출신 이정기 장군은 732년 영주에서 태어나, 젊은 혈기를 억제하지 못하고 당나라 군사가 되어 '안녹산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부각된 인물입니다. 그런데 안녹산의 난을 계기로 당나라는 사회·경제적으로 많은 변화를 거치게 됩니다. 예로 당나라 초기의 균전제를 근간으로 하는 조·용·조 제도가 대토지 소유를 허용하는 양세법으로 바뀌고, 부병제가 모병제로 바뀌게 됩니다. 이런 사회·경제적 변화는 안녹산의 난을 평정한 뒤 산둥반도의 평로·치청 절도관찰사와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를 겸직하게 된 이정기 장군에게 고구려 재건을 꿈꾸게 하는 물리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이정기 장군이 고구려 재건을 위해 한 첫 번째 프로젝트는 고구려 유민들이 많이 살고 있던 산둥성을 장악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761년, 평로의 절도사로 있던 왕현지가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왕현지의 아들을 절도사로 임명하려 했는데, 이정기는 왕현지의 아들을 제거하고 대신 그의 사촌형 후희일을 절도사로 옹립합니다. 765년, 후희일은 이정기 장군의 인기가 높아지자 그를 강제 해임시켰습니다만, 군사들은 오히려 후희일을 추방하고 대신 이정기 장군을 옹립합니다. 당황한 당 조정은 이정기 장군을 회유하기 위해 평로·치청 절도관찰사와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라는 관직을 주며 무마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등주를 장악한 이정기 장군은 산둥성 일대를 치청에 복속시키는 등 10개 주로 확대하여 통치 범위를 넓히게 됩니다.
이정기 장군이 고구려 재건을 위해 수행했던 두 번째 프로젝트는 청주에 있던 수도를 운주로 옮긴 것,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운주는 당시 당의 수도였던 장안과 직선거리로 200km에 불과했습니다. 이정기 장군이 그들의 심장부 근처로 수도를 옮겼다는 것은 당과 결판을 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781년, 이정기 장군은 당 조정과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일대 격전을 벌입니다. 이정기 장군은 이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마침내 용교의 운하를 점령하고 맙니다. 식량과 물자 공급이 끊긴 장안은 일대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장안까지 쳐들어가 당나라를 몰락시키는 일만 남은 셈입니다.
하지만 그해 여름, 이정기 장군은 악성종양으로 어이없이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이정기 장군의 죽음을 맞게 된 군사들은 좌충우돌 혼란에 빠졌고, 어쩔 수 없이 용교에서 퇴각을 하고 맙니다. 782년, 이정기의 아들 이납은 회서의 이희열과 연합하여 운하를 재탈환합니다. 그 후 이납은 당 조정으로부터 제(齊)의 국호를 받고 그들과 화해를 하게 됩니다. 792년, 제나라의 왕위에 오른 이납은 10여 년 간 당나라와의 평행선을 유지하지만, 그 역시 3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맙니다.
813년, 이납이 죽고 그의 아들 이사고가 제나라 왕위를 이어받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나라를 번성시켰으나 이사고 역시 38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맙니다. 그 뒤 이사고의 이복 동생 이사도가 뒤를 이었지만 이미 제나라의 국운은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 819년, 이정기 장군이 꿈꾸었던 고구려 재건 프로젝트는 운주성에서 나·당 연합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그렇다면 이정기 장군이 15개 주를 거느리며 10만 대군과 540만여 명에 달하는 백성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바로 이정기 장군이 당나라의 주요 물산지를 모두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라는 관직을 활용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라는 관직은 당-신라-발해-일본을 오가는 모든 왕래와 거래를 관할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무역이든 사무역이든 이 곳을 통과하기 위해선 반드시 세금을 물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정기 장군은 이 과정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이때 축적한 자금은 이후 당나라와 싸울 수 있는 중요한 물적 기반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정기 장군의 고구려 재건 프로젝트는 55년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만, 그는 재당 신라인들에게 많은 것을 남기고 갔습니다.
첫째, 운명 공동체에 대한 비전입니다. 이정기 장군은 처음에는 고구려 유민을 중심으로 고구려 재건과 부흥을 모색했지만 15개 주를 통치하면서부터 백제계 재당 신라인까지 포괄했습니다. 그 후 사후에 산둥반도에서부터 명주에 이르기까지 많은 수의 신라방과 신라소가 생겼습니다. 둘째, 지정학적인 물류·유통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혜안입니다. 당-신라-발해-일본으로 이어지는 동북아시아 물류의 흐름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해상무역을 육성·발전시켰습니다. 이 점은 그가 정치인으로서만이 아니라 경제인으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거점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가 가장 먼저 거점으로 삼은 것은 산둥성이었습니다. 산둥성은 고구려 멸망 후 20여만 명의 고구려 유민들이 끌려와 노예 같은 생활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이정기 장군은 발해가 있는 요동지역을 피해 산둥반도를 거점으로 고구려의 재건을 꿈꾸었던 모양입니다.
우리의 시대정신, 법화원왜 이정기 장군은 당 조정의 관료로 출세할 수 있었음에도 고구려 재건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을까요?이정기 장군의 이런 선택은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왔던 고구려 유민의 비참한 삶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당에서 잘 먹고 잘살 수 있음에도 고구려 유민들이 천대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정기 장군이 그랬듯이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민족이라는 공동체입니다. '운명 공동체가 함께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시대정신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200년 전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신라인 노예가 공공연하게 거래되었습니다. 그 거래를 주도한 세력은 중국인도 있었지만, 사실 대부분 재당 신라인과 신라 지방의 호족과 관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조정은 이런 불법적인 활동을 막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자식까지 팔아먹는 신라의 백성들이나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재당 신라인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 나는 이정기 장군으로부터 얻은 경험과 지혜를 어떻게 펼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나는 이정기 장군이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라는 직위를 활용하여 해상무역에 눈을 뜨게 된 것을 생각해냈습니다.
생각이 거기에 다다르자 나는 곧바로 왕지흥 장군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장군께 두 가지 청이 있습니다. 하나는 등주의 신라소에서 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 후임으로 정년을 추천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