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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도 팔아먹는 중국재벌

미야자키 마사히로 지음 | 모색
1. 거대한 중국의 인맥과 돈줄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은 '붉은 자본가'의 효시가 된 룽이런 전 국가부주석의 장남인 룽즈젠 중신타이푸그룹 - 국무원 직영기업인 CITIC(중국국제신탁투자공사)의 홀딩컴퍼니 - 회장인데, 「포브스」에 의하면, 그의 자산은 9억 3,400만 달러로 밝혀졌다. 중신타이푸그룹은 정부가 재계의 핵심 기업을 직접 경영하고, '태자당(중국 공산당 간부의 자제를 뜻함)'이 경영 요직을 차지한 정경유착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처럼 이권과 직결되어 있는 태자당은 지주회사를 토대로 하여 상업은행, 보험회사, 증권회사, 신탁회사로 분업 경영을 실시하면서 업무 제휴를 꾀하고 있다.

즉, 자본가가 있어서는 안 되는 사회주의 국가에, 자본주의 체제의 '주주'라는 직업이 존재하는 셈이다. 이 구조는 '공산주의적 구조'가 아닌 '공산당주의적 구조'의 성격을 띠며, 권력 자체가 회사를 운영하므로 까다로운 인(허)가를 받지 않고도, 돈이 되는 분야로 곧바로 진출할 수 있고, 국가의 지원체제와 국유은행의 금융지원이 있기 때문에 도산할 위험도 없다.



한편, 중국 당국은 〈2003년, 중국 유명 브랜드 평가〉를 발표했는데, 이 평가에서 1위를 차지한 브랜드는 장루이민이 이끄는 하이얼이다. 2위는 위시홍타담배유한책임회사의 홍타산이고, 3위는 술 제조회사인 우량예그룹의 우량예이며, 4위는 렌샹그룹의 렌샹인데, 해외에서는 '레노보(Lenovo)'로 알려진 세계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한 컴퓨터 제조회사이다. 5위는 디이자동차, 6위는 TCL, 7위는 창훙전자그룹의 메이더이다. 9위는 칭다오맥주, 10위는 베이징의 옌징맥주다. 가전제품의 경우, 중국의 4대 가전 - 하이얼, 하이신, TCL, 거란스 - 외에 홍콩 화교와 연관이 깊은 캉자그룹, 창홍그룹이 있고, 에어콘에 전문화되어 있는 광둥메이더그룹, 춘란 등이 유명한데, 이 기업들의 공통된 특징은 순수한 민간기업이 아니고, '국유기업 개혁 성공형' 혹은 '지방정부 기업의 개량형'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하이테크산업이라 해도, 중국 사회에서는 '꽌시(인맥)'의 정도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인맥이 없는 외국기업은 중국에서 사업을 할 때 반드시 벽에 부딪혀, 중국 돈을 대부받을 수 없고, 전력이나 수도공급도 원활하지 않다. 따라서 순수한 민간 경쟁사회가 아직 탄생하지 않은 단계에서 정치가와 접촉하기를 꺼린다면 차라리 사업을 포기하는 편이 낫다.



또 중국에서는 일선 관리가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되는 일은 있어도, 거물은 결코 체포되지 않는다. 권력의 대금업자끼리 제멋대로 사업을 하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부동산투기나 주식투기를 하고 때로는 마카오에서 거액을 탕진한다. 이때의 '대금업자'는 권력자의 비호를 얻어 독점으로 권리를 행사하고, 벌어들인 돈의 일부를 권력자에게 상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덩샤오핑의 차남인 덩즈팡은 현재 주하이에서 부동산투기를 하고 있고, 장쩌민의 두 아들은 통신사업의 이권을 장악했다. 리펑 전 국회의장의 두 아들은 수력발전과 연관된 각종 사업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청렴결백을 내세운 주룽지 전 총리 경우도, 두 아들이 국제금융 대기업의 간부로 일하고 있다. 이렇게 '태자당'의 화려함을 예증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그럼 이제 중국 재벌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공산혁명 직전까지 중국의 상업은 계산이 빠르고, 뱃길 수송의 혜택을 맘껏 누린 저장 상인의 천하였다. 저장 상인은 매우 적극적이어서 앞에 무엇이 있든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곧바로 진격한다. 그 적극성과 강인한 힘은 유대인 사업가조차 무색할 정도다. 또 상하이는 예로부터 중국 전역에서 우수한 인재가 몰려들고, 엘리트가 많은 고장으로, 상하이인은 익숙한 유연성과 세련미, 교묘한 화술, 똑똑한 처세술을 지녔다. 이 때문에 타 지역 사람들은 이들을 질투와 시기의 눈초리로 '하이파' 혹은 '상하이방'이라 하여 미워하고 있다.



상하이가 공산당에 함락당한 것은 1949년의 일로, 장제스 정권이 전복하자 국민당을 지지하던 수많은 자본가들이 재산을 들고 대만과 홍콩으로 달아났다. 홍콩으로 달아난 부자들은 곧바로 섬유, 잡화, 해운사업에 진출했고, 혁명 이후에도 상하이에 남아 있던 그룹은 공산당에 재산을 몰수당하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초를 겪었으나 '개혁, 개방'을 주장한 덩샤오핑이 불사조처럼 복권함과 동시에 이들도 부활했다. 그 전형적인 성공의 예가 류샤오치 일파의 광다은행이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은 1980년대부터 '개혁, 개방'을 지원하는 자본가를 우대하기 시작했는데, 먼저 홍콩 재벌을 향해 대륙으로 들어오라고 유혹했다. '동양의 오나시스' 바오위강 등은 몇 번이나 베이징에 초대를 받았고, 결국 덩샤오핑의 편을 돌면서 '친중파'로 돌아섰는데, 이 바오위강의 전향을 계기로 홍콩 재벌들이 잇달아 대륙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한편, 대만으로 도망간 장제스 지지 그룹들은 우여곡절 끝에 찾아온 해빙기에 떠밀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륙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 저장 상인과 쌍벽을 이루는 '커자인'도 눈에 띈다. 결국 오늘날의 중국 경제를 이끌어나가는 기반과 독특한 메커니즘은 바로 역사적 배경과 인맥의 상관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홍콩이 중국을 삼켰다?

중국의 재벌이라고 하면 예전에는 '홍콩 재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홍콩이 뛰어난 갑부를 배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세제인데, 법인세 최고세율이 불과 16.5%밖에 되지 않아 갑부가 점점 덩치를 불릴 수 있는 곳이었다. 둘째, 규제 완화와 국제 금융제도의 효과라 할 수 있다. 1960년에 이미 홍콩에서는 '닝보벌'이라는 신흥 재벌이 대두되었다. 후에 해운왕이 된 바오위강은 무역 수단인 선박을 좌지우지했고, 금융을 지배한 영국계 기업을 잠식해 들어갔다.



그 뒤 부동산 바람에 편승해 갑부가 된 사람이 바로 리자청이다. 자오저우에서 홍콩으로 도망 온 리자청은 자그맣고 보잘 것 없는 '홍콩플라워'로 시작해 세계 유수의 대재벌로 성장했다. 리자청은 창장실업과 허치슨왐포아를 운영하며, 전력, 통신, 운송, 창고, 부동산 개발 등에 주력하고 있다. 리자청의 장남인 빅터 리는 현재 이 창장실업의 사장인데, 외국 기업 매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리자청은 베이징의 '개혁, 개방' 노선에 적극 동참해, 많은 홍콩 경제인을 이끌고 중국에 부동산 투자를 진행했다. 차남 리처드가 이끄는 PCCW는 신흥 벤처기업이지만, 홍콩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모아 자사보다 훨씬 거대한 C&W(케이블 앤 와이어리스 홍콩)의 매수 전쟁에 뛰어들어 당당히 성공했다.

한편 중국권 호텔업계에서 주목받는 것은 역시 말레이시아 화교 궈허녠이 이끄는 궈씨그룹이다. 궈허녠은 말레이시아 출생의 화교다. 부친은 푸젠 성에서 바다를 건너 말레이시아로 이민을 갔고, 조호르바루 근교에서 사탕수수농원을 경영해 큰 성공을 거두어 '아시아의 설탕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설탕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무역업을 시작했고, 1972년에는 싱가포르에도 주식을 상장했다. 이후 홍콩에 상륙해 해운과 은행에도 진출했다. 리자오지 핸더슨랜드 회장도 홍콩 반환 직전까지 홍콩에서 부동산사업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뒤 홍콩에서는 집값 폭락, 월세 폭락으로 부동산 시장이 다소 위축되었으나 홍콩 재벌들의 중국 대륙에 대한 부동산 투자는 예상외로 잘 돌아갔다.



중국 경제를 이끌어나가는 산업 가운데 빠질 수 없는 것이 부동산이다. 중국 부동산 산업의 선두에 서서 완커그룹을 이끌어나가는 사람이 왕스다. 참고로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땅은 국가 소유로 개인 소유는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토지에 대한 '50년 사용권'을 사고팔 수 있게 하였다. 마침 1989년의 천안문사건을 전후로 홍콩의 부동산 가격이 절정에 달해, 홍콩과 대만 기업은 높은 부동산 가격을 이기지 못해,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했고, 홍콩의 기술자들도 공장을 따라 대륙으로 이동했다. 완커그룹은 당국이 보유한 토지를 매수하여 아파트단지와 공장특별구 등을 지어 성공했다.

완커그룹은 세 가지 행운 - 완커그룹의 부동산 개발 과정과 땅값 폭등 순서(선전-샤먼-상하이-베이징)가 일치했다는 점, 때마침 주식 바람이 불어 중국에서 가장 힘들다는 자금조달을 예상 외로 쉽게 받을 수 있었다는 점, '고층'빌딩이 중국인의 사랑을 받았다는 점 - 을 잡아 성공할 수 있었다. 최근 완커그룹은 홍콩 재벌인 화룬그룹의 출자를 얻어 비약에 비약을 되풀이하고 있다.



한편 1997년 홍콩 반환을 계기로, 공산당의 입성과 지배를 우려한 홍콩 갑부들은 일제히 캐나다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의 수법도 만만치 않았다. 먼저 사업을 보장한다면서 홍콩 재벌을 안심시켰다. 또 언론의 자유도 일단 표면상 보장해주었다. 하지만 그 뒤에서 신문의 광고주와 후원기업에 무언의 압력을 가했기 때문에 기업들은 광고내기를 꺼려했다. 결국 중국 공산당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신문은 홍콩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홍콩을 평화롭게 회수한 중국 정부는 자본주의의 상징인 주식시장에 대해서는 방임주의로 일관했다. 국제 금융제도도 그대로 남겨두고, 외자계 기업 활동도 규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홍콩을 외자를 쉽게 불러들이는 장치로, 정부 간부들의 자금을 세탁하는 기구로, 부를 통과시킬 목적의 명목회사를 등기하는 장소로 반드시 살려두어야 할 곳이었기 때문이다.



캐나다에서는 반대로 중국인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다. 이민과 함께 흘러들어온 광둥의 마피아가 날뛰어 치안도 나빠졌다. 사실 이러한 사태는 캐나다의 기묘한 과세 체계에서 비롯되었다. 캐나다는 시민권을 취득한 홍콩인들에게 '홍콩에서 벌어들인 소득'에도 세금을 부과했다. 그러자 홍콩 사람들은 약 3년 전부터 힘들게 취득한 캐나다 시민권을 반환하고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참고로, 홍콩은 1980년대 후반부터 공업지대는 폐허로 변했고, 옛 카이탁 공항도 휑하게 건물만 남았다. 또 홍콩 반환 후에는 1국 2제도의 희생양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본래 홍콩의 번영을 지탱하던 사업은 금융, 부동산, 서비스업이었는데, 이 금융업조차 일본의 은행과 증권이 일제히 철수하면서 활력을 상실했다. 24만 명도 더 되는 홍콩의 직장인들이 선전이나 광저우에 아파트를 구입하고, 그곳에서 홍콩으로 통근함으로써 홍콩의 땅값도 폭락했다. 하지만 암전 상태에서 다시 불이 들어오듯 홍콩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주요 원인은 얄궂게도 인민폐가 강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홍콩의 실업률은 7.5%를 기록했지만, 도시에는 활기가 일어났다. 특히 토산품 가게와 식당이 바쁘게 움직였다. 중국에서 막대한 관광 인파가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홍콩 재벌은 투자로 사업을 확대하고, 홍콩은 대륙에서 온 관광객들이 뿌린 인민폐와 대륙에서의 투자, 금융으로 먹고 살고 있는 것이다.





3. 중국, 태풍전야의 긴장감에 휩싸이다

중국 공산당 고급 간부의 아들, 딸, 친척 곧 '특권계층'은 가족을 중심으로 정략결혼을 되풀이하면서, 중국 고대 왕조의 정치 스타일까지 답습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한 집안의 이익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 특징이 근대 자본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임계점에 달한 이후에도 중국 경제가 고도성장을 지속한다는 예측은 성립하기 힘들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국에서 사업에 성공하려면 권력과 손을 잡아야 한다. 또 삼국지를 읽어보면 배신, 거짓말, 간언, 허위 보고 등이 중국에서는 거의 다반사다. 이들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유사 이래 수천 년, 중국의 체질은 줄곧 이러했고, 현대 중국인 역시 그대로 전수받았다. 물론 그랬기 때문에 장쩌민이 '부패 반대 캠페인'을 벌인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목표는 자신의 은인 즉 덩샤오핑의 가족과 공산당 고급 간부의 자제들이 경영하는 기업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부정부패 사건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중국 경제의 어두운 부분에 빛이 닿으면 얼마나 많은 부정이 천하에 공개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한편 사스 소동을 이겨낸 중국 민중의 의연함도 '무질서'란 측면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다. 2003년 사스 재난은 마치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듯했다. 이어서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중국의 4분의 3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세계 언론이 난리를 치는 동안에도 중국인들은 '이 신약은 조류독감 바이러스에 효과가 있습니다.'라고 하며 가짜 약을 팔아댔다. 서민에게 재난은 돈을 벌 좋은 구실일 뿐이다.



이런 서민과는 아예 행동하는 수준이 다른 재벌이 존재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리오바이싱(일반 서민)도 소득이 조금 오르긴 했지만, 부유층의 생활과는 인연이 멀다. 특히 9억에 가까운 농민은 여전히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국무원 빈곤대책 개발반의 루페이제 부반장은 "중국 정부는 현재 2,800만 명의 빈곤층이 있으며, 이 가운데 700만 명은 다른 지역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밝혔다.

개간보다 전출에 연연하는 까닭은 벽촌의 바싹 마른 땅에 새 도로를 포장하고 전력망을 확충하는 일이 경제적으로 수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국토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농지는 전 국토의 20%밖에 되지 않는다. 그 좁은 논밭에서 8억 이상의 농민이 서로 다투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말라버린 토지에 집착하지 않고 이동한다. 이것이 한족의 특징이다. 그런데 문제는 새로 이주한 곳의 노동조건이 본래 있던 곳보다 더 열악하고, 주택환경도 좋지 못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들이 받아야 할 '재취직비'는 지방의 공산당 관료가 제멋대로 독차지해 버린다. 극도로 빈곤한 지역에는 일반 화장실, 수도, 텔레비전도 없다. 한 집에 바지가 한 벌뿐인 농가도 있다. 이렇게 번영의 뒤에서 부패가 진행되고, 빈곤이 확대되면서 근대화의 피해가 사회적 병리로 불거져 나왔다. 현재 중국은 폭풍전야나 다름없다.

호적제도도 큰 문제다. 돈을 벌려고 베이징에 들어온 노동자는 2003년 통계상 409만 명이다. 이 가운데 80% 정도가 10대에서 30대의 젊은이다. 직종별로는 음식점에서 일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평균 급여는 500위안, 중급 요리사가 800위안 정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호적에 있다. 중국의 호적관리제도는 공산주의혁명 이후인 1958년에 도입되었다. 이 제도에 따르면 도시 거주자와 농촌 거주자가 확연히 구별된다. 지방의 호적으로는 급료도 낮고, 주거지역도 제한을 받는다. 따라서 호적 위조사업이 창궐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도시지역에 노숙자가 늘어 사회 혼란의 원흉이 되고 있다. 최근 중국의 일부 지역(허난 성, 장쑤 성, 충칭 등)에서는 '호적관리제도'를 개혁하고 있는데, 자연히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몰려들었고, 기존의 거주자들은 불만의 소리를 높였다. 지금도 중국 전체의 유동인구는 1억 3,000만 명 이상이고, 이 가운데 5,000만 명이 '임시거주자'로 등록되어 있다. 호적이 없는 사람들이 아마 1억 명은 족히 될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기업가로 성공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중국의 신흥재벌 가운데 한 사람인 다우그룹 쑨다우 사장은 베이징대학의 강연에서, 공산당의 농업 정책과 농가에 대한 금융제도를 통렬히 비판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그의 행위를 국가에 대한 반역이라 규정하고, 그의 은행예금을 동결하고 웹사이트를 폐쇄했다. 중국의 지방신문은 당 간부의 오직 적발에는 열심이지만, 중앙의 정책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비판도 가하지 않는다. 공산당 독재사회에서는 당의 연줄 없이 대성공을 거둔 경우에, 양빈, 저우정이 그랬던 것처럼, 주위에서 압력이 들어와 결국 실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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