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산업을 주도하는 세계 자동차 전쟁
마에마 다카노리 지음 | 시아출판사
미래산업을 주도하는 세계 자동차 전쟁
마에마 다카노리 지음/박일근 옮김
시아출판사/2004년 8월/390쪽/12,000원
1. 부흥, 약진, 그리고 일본차의 등장
1949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일본 전체가 디플레이션의 폭풍을 만나 중소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대기업들조차 도산 직전의 위기에 처했다. 도요타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많은 인원을 정리함으로써 겨우 살아남았다. 그런데 도요타가 인원 감축을 단행한 지 2주 후, 한국에서 625전쟁이 일어나자 사태는 완전히 돌변했다. 미국이 일본 업체에 군용 트럭을 대량으로 주문함에 따라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거액을 만지게 된 것이다. 도요타는 여기서 얻은 이익금으로 설비 근대화 5개년 계획에 착수했다.
이때 공장의 근대화를 단행해 나간 사람이 도요타 생산방식 - 간판방식, Just in time 방식이라고도 함 - 을 탄생시킨 오오노 다이이치다. 일본 시장은 미국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작아 다종 소량생산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미국식 생산방식을 그대로 모방하다가는 재고만 쌓일 뿐이며, 결국은 자금이 융통되지 않아 경영에 압박을 받게 된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간판방식이었다.
당시 자동차 공정은 앞 공정에서 만든 것을 뒷 공정으로 밀어 넣는 소위 ‘밀어넣기식 생산’이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미국의 포드 시스템도 이 방식에 따라 대량생산을 하고 있었다. 오오노는 이와 반대로 뒷 공정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필요한 때에 필요한 양만 앞 공정에서 인수하는 방식을 착안해 냈다. 이 때 간판은 인수하는 부품의 수량과 시간 등 작업이나 운반에 관한 정보전달 수단과 물품관리 기능을 수행한다. 간판의 규칙대로만 생산된다면 재고가 산더미처럼 쌓일 수 없다.
이는 필요한 양만큼 생산하는 주문 생산과 같은 것으로, 오오노는 여기에 ‘다공정 담당’ 방식도 도입했다. 생산 대수가 적은 일본의 경우 작업자 한 사람이 한 공정에서 손을 멈추고 있다면 시간만 낭비하는 셈이다. 그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인원을 줄이고 한 사람이 여러 개의 공정을 다루도록 했다. 다공정 담당이라면 생산량의 변동에 따라 작업의 종류를 바꾸어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
패전 이후 서민들은 마이카를, 기업가들은 미국처럼 대량생산 공장을 갖기를 원했다. 그리고 관료들은 하루라도 빨리 일류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국내 자동차 공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3자 3색의 자동차에 대한 꿈이 한없이 부풀어오르는 가운데 오오노는 끈기를 갖고 현장으로 뛰어들었으며 결국 일본적인 생산방식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경이적인 고도 성장을 이루고, 또 하나의 자동차 공업국을 탄생시키는 원천이 되었다.
한편, 독일은 엄청난 기술 진보로 산업을 발전시켰지만, 6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국토는 폐허가 되고, 이념 대립으로 동서로 분단되었다. 하지만 대량생산을 앞두고 있던 프로토 타입의 카데프와 총연장 35만 킬로미터의 아우토반은 히틀러의 유산으로 남아 독일 모터리제이션을 견인하였고, 산업은 보란듯이 급속하게 일어섰다. 그 견인차 역할을 담당한 것이 바로 자동차 공업이었다. 그 선두에는 고급차를 생산하는 벤츠, BMW와 양산형 대중차를 생산하는 폴크스바겐이 있었으며, 특히 폴크스바겐의 비틀은 월드카의 지위를 획득했다. 1950년대 중반, 독일은 이미 영국과 프랑스를 앞질러 미국의 뒤를 이은 세계 제2의 자동차 생산국으로 약진했다. 한편 미국의 경우, 종전으로 전시 가솔린 배급제가 폐지되자, 미국민들은 앞다투어 자동차 딜러에게 달려가 새 차를 주문했다. 전쟁 전 GM과 포드는 일본과 유럽에 진출하여 한때는 세계 시장을 제패할 듯한 기세였으나 종전 후에는 국내 수요를 감당하기에도 벅찼다. 자신감을 얻은 ‘빅3(GM, 포드, 크라이슬러)’는 그 교만함이 가격을 결정할 때나 생산하는 차에도 단적으로 나타났다. 이는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 버블기를 맞이했던 일본 자동차 업체와 비슷했다.
자동차는, 단순한 수송 수단의 영역을 넘어 생활의 풍요로움과 즐거움을 제공하는 필수품이 되면서, 미국인들의 의식 속에 크게 자리잡게 되었다. 나아가 자동차를 자신의 특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의식하면서부터는 가능한 한 호화스런 차를 갖고 싶어 했다. 이런 경향을 반영하여 당시 미국의 자동차는 대형화되고 호화롭지 않으면 차별화에서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자동차 산업이 국가 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큰 만큼, 아무리 미국이라도 이런 대형화사치화 경향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1957년 무렵 경기가 조금씩 후퇴함에 따라 좀더 작고 실용적인 마이카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전히 ‘빅3’만은 대형차만을 앞다투어 생산했는데, 그 틈을 노려 ‘빅3’에 버금가는 아메리칸 모터스가 그동안의 노선에서 탈바꿈을 시도했다. 이후 미국인들은 아메리칸 모터스의 콤팩트카보다 더 작은 소형차에도 차츰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특히 유럽에서 수입되는 소형차가 인기를 끌었다.
당시 매우 빠른 속도로 판매 실적을 올리던 차는 경제성뿐만 아니라 승차감과 성능이 우수한 폴크스바겐의 비틀이었는데, 1959년에는 무려 61만대가 판매되었다. 또 1960년대 미국에서는 자동차를 여러 대 소유하는 사람이 늘어나, 용도 또는 세대에 따라 차가 급속도로 다양해졌다. 특히 여성들과 젊은이들이 세컨드카나 사이드카로 소형차를 구입했다. 수입차 중에는 여전히 폴크스바겐이 선두 자리를 지켰는데 블루버드, 코로나, 카롤라 등의 일본 차도 급증했다.
2. 기업의 사회적 책임
1955년 1월, 도요타에 새 시대를 열어 준 크라운이 첫 선을 보였다. 크라운은 유럽과 미국에서도 통할 수 있는 일본산 승용차라고 여겨져 일본 국민에게 대호평을 받았으며, 드디어 1957년 8월 크라운 샘플카 두 대가 마침내 태평양을 건너게 된다. 하지만 미국으로 건너간 크라운의 결과는 엉망이었다. 크라운은 고속도로도 없고 비포장도로가 많은 일본 도로에는 적합하지만, 시속 100킬로미터가 넘는 스피드로 장시간 달리는 것이 일반적인 미국의 고속도로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비록 크라운이 기술면에서는 실패를 맛보았지만, 당시 일본의 어느 기업도 엄두를 못 내던 미국 수출을 감행한 것은 나중에 큰 도약을 마련해 주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크라운이 출시될 무렵 일본 통산성은 외국 자본에 대한 대책도 겸하여 ‘국민차 구상’을 발표하였다. 일본의 국민차 구상은 업계의 맹렬한 반대로 취소되었지만 이후 소형차와 경자동차 개발에 큰 자극을 주었다. 그 뒤 도요타는 체념하지 않고 다시 코로나를 가지고 미국에 상륙했다. 그리고 닛산의 블루버드와 함께 서서히 미국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어 카롤라와 서니가 출시되고, 1960년대 후반에는 대미 수출이 대폭 늘어나, 미일 자동차 마찰이 일어나기 전까지 일방적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빅3’ 쪽은 일본 시장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미국 내의 왕성한 수요를 만족시키는 것이 급했고, 일본은 미국에 비해 국토가 좁고 도로 사정이 열악해 미국의 대형차가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수요도 많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의 자동차 산업은 통산성의 산업 정책과 외국 기업의 소극적인 태도에 힘입어 고도 성장의 물결을 타게 되었다.
한편, 당시에는 운전자의 안전에 대한 의식도 희박했다. 그것은 사고로 인한 손해보다 차를 손에 넣고 싶은 열망이 훨씬 강했기 때문이다. 다만 벤츠나 스웨덴의 볼보 등 유럽의 일부 기업들은 이 무렵부터 안전에 대한 진지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특히 벤츠는 다른 기업과 차별하기 위해 안전에 중점을 두는 경영전략을 채택했다.
1970년 3월, 엄격한 배기가스 규제에 관한 대기 정화법 개정안(훗날의 머스키 법안)이 미국 의회에 제출되자 일본 자동차 업계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미국에서 판매되는 모든 차가 적용받는 것이므로 일본도 예외가 아니었다. 각 일본 업체들은 기술력과 자금을 배기가스 대책으로 집중시켜, 1974년 무렵, 머스키 법안의 규제치를 그럭저럭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머스키 법안 발효 3년 후에 일어난 석유 파동으로 1975년 미국에서는 연비 규제를 목적으로 하는 에너지 정책과 절약법이 수립되었는데, 절약 에너지와 연계되는 저연비 엔진 개발에서도 일본이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이처럼 일본이 예상보다 목표를 빨리 달성한 것은 연구에 몰두한 기술자들의 노고와 그들을 뒷받침해 준 일본식 기업의 풍토, 업종을 초월한 관련 그룹의 협조가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고 전문성을 중시하는 유럽과 미국에서는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 공동으로 연구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일본 기업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주어졌을 때 전문 분야의 벽을 넘어 서로 협력하고, 전력을 기울여 집중한다. 그 결과 아주 짧은 기간 내에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일본 특유의 간판방식은 계열의 하청 업체나 부품 업체와의 연합에 의해 보다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그 효과는 원가 절감과 품질 향상 면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빅3’처럼 컨베이어 시스템에서는 작업자가 단순 기능공이 되어 오로지 주어진 작업만 처리하면 되지만, 유사시에 현장의 사기가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 이에 반해 일본은 현장 작업자에게 책임을 부여해, 작업 개선에 대한 제안권을 줌으로써 생산의 효율성을 도모했다. 특히 전원 참가의 소집단 활동에 의한 TQC(Total Quality Control)를 도입, 추진함으로써 고장이 적은 고품질의 차를 만들 수 있었다.
배기가스 대책이 대두되자, 공냉식 엔진을 탑재한 폴크스바겐 비틀의 운명이 힘들어졌다. 15년간 미국 수입차의 수위 자리를 지켜온 비틀은 연비를 향상시킨 일본의 저공해 소형차, 즉 도요타의 카롤라와 혼다의 시빅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1974년 폴크스바겐은 비틀의 생산을 중단하고, ‘골프’의 생산을 개시했으며, 1976년 5월에는 일본 기업에 앞서 미국 현지 생산까지 결정했다. 일본은 1968년 생산량에서도 서독을 따라잡아 세계 2위로 약진했다.
결국 미국의 ‘빅3’는 유럽에서 건너온 고급차와 일본에서 건너온 값싼 차의 양면 공격을 받게 되었다. 더구나 석유 파동으로 가솔린 가격이 급상승하자, 연비가 좋은 일본 저공해 소형차가 맹위를 떨쳤다. 이로 인해 대형차 생산이 주류를 이루던 ‘빅3’도 위기감을 느끼고 생소한 소형차 개발을 서두르게 되었다. 환경 문제와 석유 파동으로 인해 그동안의 기계 기술 위주의 자동차 기술은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문명사적 전환점에서 일본이 가장 먼저 이를 타개하는 데 선봉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유렵과 미국의 자동차 업체들이 자부하고 과시하는 전통이나 기술을 그들만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빅3’ 경영진들 중에는 기계 기술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문 기술을 고집하고 전자공학 기술의 도입을 주저하다가 발상의 전환이 늦어진 것이었다.
3. 위기의 ‘빅3’와 버블 일본
1970년대 초 석유 파동이 찾아왔다. 석유 파동으로 인해 미국은 소형차 수입이 급증했고, 미국인의 차 구입 기준도 많이 달라졌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의 물결과 새로운 경향에도 ‘빅3’ 수뇌부의 생각은 쉽게 변하지 않아 여전히 대형차 위주의 생산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때, 전륜구동 방식의 소형차 개발과 생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로 결심한 포드의 아이아코카는 부하직원 스패릭에게 반 년 정도 유럽을 순방하며 전륜구동 방식의 소형차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실제로 시승해보고 올 것을 명했다. 아이아코카의 지시에 따라 유럽을 시찰하고 돌아온 스패릭은 전륜구동의 소형차를 계획, 설계했다. 하지만 기업 내부에서 막강한 힘을 갖고 있던 재무 담당에게 단번에 거부당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소형차는 대당 수익률이 낮으며 판매처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 소형차 계획은 무산되었고, 재무 담당자나 포드와 사사건건 대립했던 스패릭은 해고를 당하고 만다. 이 과정에서 아이아코카와 포드의 대립도 심화되었다.
‘빅3’가 좀처럼 대형차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유는 미국이 산유국인데다가 가솔린 가격도 쌌기 때문인데,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1975년 12월 미국 정부가 발표한 석유 절약 장기계획에 따라, 자동차의 연료 소비율을 1978년에는 1리터당 7.6킬로미터, 80년에는 8.5킬로미터, 85년에는 11.5킬로미터로 단계적으로 개량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또 1차 때와는 달리 1979년의 제2차 석유 위기 때는 미국 정부도 종전의 가솔린 가격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차에 대한 사고방식도 크게 변화되어, 단순히 신분을 상징하는 도구로서 자동차를 소지한다는 생각도 희미해졌다.
이에 따라 일본 소형차의 수출이 미국 시장에서 좋은 호평을 받아 급증했다. 차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1960년대 일본의 대미 수출 주역은 도요타와 닛산이었는데, 1970년대에는 크라이슬러와 제휴한 미쓰비시, 로터리 엔진으로 세계의 주목을 끈 마쓰다, 오토바이로 미국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 혼다가 주역이었다.
한편, 포드에서 해고당한 스패릭은 1977년 아이아코카의 소개로 포드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크라이슬러의 제품개발 담당 부사장으로 영입되어, 포드에서 거절당했던 연료 절약형의 전륜구동식 소형차(K카)를 다시 구상했다. 포드에서 쫓겨난 아이아코카가 크라이슬러 사장으로 들어온 것은 K카 개발이 본격화된 1978년이었다. 이듬해 제2차 석유 위기가 일어나자 연료 절약형 K카의 선택은 바로 적중한 셈이 되었다. 아이아코카는 개발이나 생산 부문에서뿐만 아니라 복잡하고 곤란한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처리했고, 더구나 UAW(전미자동차노조)의 반발도 지혜롭게 해결하여 재건에 성공했다.
그런데 1981~ 82년에 걸쳐 하버드 대학과 미 운수성 등이 미일 생산성을 비교조사한 결과, 의외의 사실이 밝혀졌다. 한 예로 대중차에서는 미국 차가 일본 차에 비해 2000달러(수송비를 감안할 경우 1500달러) 가까이 원가가 높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품질 면에서 미국 차의 결함이 일본 차의 배에 가깝게 나타나고 있었다. 확실한 숫자로 드러나자 ‘빅3’도 스스로 체질을 개선해야 했으며 성공한 일본의 방식을 조속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도요타 생산방식과 QC서클 등을 포함한 일본식 품질관리가 부품 업체까지 도입되었다. ‘빅3’는 생산 부문에서 체질 개선을 진행하는 한편 신차 개발에서도 역시 ‘빅3’다운 미국적인 대책을 세워 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월드카' 구상이었다. GM의 J카 구상은 50억 달러의 개발 자금을 투입하여, 엔진, 브레이크, 엑셀, 트랜스미션 등 중요한 부품들을 전 세계에 있는 GM의 생산거점에 할당하고 집중적으로 생산하도록 해 상호 공급하게 한다는 구상이었으나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또 일본의 성공이 로봇 도입에 있다고 판단한 GM은 일본 기업을 훨씬 능가하는 투자를 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일본식 생산방식의 성공은 인간과 기계의 조화로운 절충 - 장기간에 걸친 생산 현장의 까다로운 개량과 실패의 축적을 바탕으로 한 것 - 이라는 일본식 만들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꿰뚫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기가 좀 뒤바뀌지만, ‘빅3’의 소형차 실패와는 정반대로 일본차의 대미 수출 공세는 호조를 띠었다. 그러자 실업 문제를 떠안고 있던 UAW(전미자동차노조)를 중심으로 비판의 강도가 높아져, 자동차로 인한 미일 무역 마찰이 정치 문제로 발전하여 상당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1981년 UAW 등은 '로컬 콘텐츠 법안(미국에서 10만 대 이상의 차를 판매하는 업체에게 매상에 따라 90%까지 현지 부품 조달 비율을 의무화한다는 내용)'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이 가결되면 도요타나 닛산은 미국 시장에서 부득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