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개혁, 끝나지 않았다
다마키 타다시 지음 | 현대미디어
「삼성」의 개혁2003년 1월 16일, 서울의 중심부에 있는 삼성본관 3층 기자실에서 늘어 선 방송 카메라 앞에서 삼성전자 주우식 상무는 말문을 열었다. "사상 최고의 이익을 기록했습니다. 세계 주요 IT(정보기술)기업을 압도하는 실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날, 삼성전자가 발표한 2002년 결산 실적은 실로 놀라운 내용이었다. 매출액이 전년 대비 25% 증가한 40조 5,650억 원, 순이익은 2.4배 증가한 7조 518억 원으로 모두 사상 최고치였다.
하이테크 세계 2위2002년은 세계 IT업계가 판매 부진으로 고전을 면치 못한 해였다. 그럼에도 이처럼 실적이 큰 폭으로 개선된 IT기업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삼성의 실적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세계 주요 IT기업과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삼성전자의 순이익을 달러로 환산하면 대략 54억 달러이다. 삼성전자가 실적을 발표하기 바로 전날에는 세계 최대 반도체 메이커인 미국의 인텔이 2002년 결산 내용을 발표했다. 세계 IT기업을 대표하는 고수익 기업으로 일컫는 인텔의 순이익은 31억 달러로 삼성의 실적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일본경제신문이 세계 주요 하이테크 기업의 2002년 결산(순이익)을 비교한 자료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실적은 수위인 마이크로소프트의 78억 달러에 이은 2위를 기록했다. 특히 삼성의 주요 4개 사업 부문은 모두 흑자를 기록했으며 영업이익은 7조 2,500억 원이었다.
DRAM으로 세계를 압도하다삼성은 2000년에 사상 최고의 이익을 계상하던 시점에 이미 미래의 불황에 대한 대응책 마련에 착수했다. 범용 DRAM에 의존도를 낮추는 대신에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생산을 늘려 사업구조를 개선해 나간 것이다. DRAM 부문에서 범용제품의 생산을 줄이는 대신 정보처리 능력이 뛰어난 제품의 비중을 늘리고 휴대전화용으로 수요 증가가 예상되는 플래쉬 메모리 생산을 대폭 확대했다. 2002년 9월 16일, 삼성전자의 황창규 메모리반도체 담당 사장은 서울의 신라호텔에서 열린 회견에서 말했다. "무어의 법칙을 대신하는 새로운 성장이론을 제창하고 싶다."
'무어의 법칙'이란 인텔의 설립자인 고던 무어 씨가 1965년에 발표한 반도체산업의 성장이론인데 '반도체의 집적도는 1년 반마다 2배가 된다'는 내용이다. 간단히 말하면 반도체는 일 년 반에 한 번 꼴로 '세대교체'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황 사장이 이 무어의 법칙을 뛰어넘는 반도체 집적도를 매년 2배로 늘릴 수 있는 '신성장론'을 제창한 것이다. 기술개발로 대형 웨이퍼에 더 가는 회로를 그려 넣음으로써 한계로 느껴졌던 무어의 법칙을 깨트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300밀리미터 웨이퍼를 사용한 나노 메모리반도체를 양산할 경우, 생산성이 기존의 2배로 향상된다고 한다. 시황이 악화되더라도 그 정도로 생산성이 높아지면 손익분기점이 내려가고 사업을 추진하기 쉬워진다. 삼성이 경기후퇴기인 2002년에도 거액의 이익을 창출한 것은 이러한 기술력으로 생산성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이건희 폰'의 대히트삼성이 사상 최고의 이익을 기록한 두 번째 원인은 반도체에 필적하는 수익원을 육성한 데에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휴대전화다. '애니콜(Any Call)'이라는 상품명으로 알려진 삼성의 휴대전화가 약진을 시작한 것은 2000년 후반부터다. 휴대전화는 메이커 간의 상품개발 경쟁이 치열하다. 소형화, 컬러화, 메일 기능, 카메라기능 내장, 그리고 더 작은 휴대전화에 더 큰 액정을 집어넣는 기능 경쟁도 치열하다. 더욱이 세계 통신규격이 통일되지 않는 와중에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기술력, 브랜드력, 마케팅력, 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삼성전자의 2002년 대히트 상품 중에는 사내에서 '이건희 폰'으로 불리는 휴대전화가 있다. 2002년 4월에 발매한 'T100'이다. 이 휴대전화는 삼성전자 제품과 타사 제품을 직접 써 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조언을 참고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회장이 개별사업에 이처럼 엄히 지시하는 일은 드물었다. 회장 특명 사업으로 막상 휴대전화를 판매했으나 불량품이 나와 소동이 벌어졌다. 보고를 들은 이 회장은 판매한 모든 제품을 회수하라고 명령하고, 전 종업원과 간부를 불러모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모두 소각 처리하게 했다. 타오르는 휴대전화 앞에서 전 종업원이 두 번 다시 이런 불량품을 만들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한다. 이 소각사건을 계기로 삼성은 휴대전화 사업 부문을 더욱 강화해서 7년 남짓한 기간에 세계 3대 메이커로 부상하는 데 성공했다.
'IMF위기'가 개혁의 기회삼성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렇게 강해졌을까? 첫 번째는 1997년 통화경제위기로 대우와 현대그룹이 부진의 늪에 빠진 탓에 상대적으로 삼성의 사업영역이나 점유율을 늘릴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우그룹의 가전과 증권사업, 현대그룹의 반도체사업은 삼성의 라이벌이었는데 이런 기업들이 그룹의 실적악화로 경영위기에 빠진 것이 삼성에는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두 번째는 환율이 비교적 원화약세를 유지해 준 것이다. 해외생산이 빠르게 확대된다고는 하지만 원화약세는 삼성의 수출경쟁력 강화에 직결되는 문제다. 하지만 그런 '순풍'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른 기업에도 같은 상황이었을 텐데 어떻게 일본계 기업 등 경제기업들이 'IT불황'의 직격탄을 맞은 반면, 삼성은 수익성이 높은 회사로 기업체질을 바꿀 수 있었을까? 삼성전자의 CEO인 윤종용 부회장과 인터뷰할 때 이렇게 질문하자 "IMF위기라고 불리는 통화경제위기 직후에 구조개혁과 합리화 작업의 효율이 확실히 나타났다."라고 말했다.
윤종용 부회장은 1998년 7월 말에 있던 일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그날 오후 당시 윤종용 삼성전자 사장과 이윤우 반도체사업 총괄사장 등 삼성그룹의 수뇌는 서울 시내의 신라호텔로 긴급 소집되었다. 회의의 명칭은 '생존대책회의'였다. 회의석상에서는 긴급대책으로 대폭적인 고정비 삭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최저 30%의 인건비 삭감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었다. 회의에서 정한 대로 전 부문에서 인원을 30% 삭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인원 삭감과 병행해서 사업부의 정리도 단행했다. 호출기 사업과 전력용 IC사업과 같은 적자사업과 흑자를 내더라도 장래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34개 사업을 매각 혹은 정리했다. 그룹에서도 삼성중공업의 설비기계사업을 볼보에 매각하는 등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한편, 삼성전자는 반도체, LCD, 휴대전화 세 분야에 경영자원을 집중시켰다. 이 세 분야는 수년 후, 모두 삼성전자의 수익원이 되었고 사상 최고의 이익을 창출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삼성'식 권한이양IMF위기 이후, 삼성전자의 경영 스타일 중 크게 바뀐 것이 권한이양이다. 삼성전자에는 반도체, 정보통신, 디지털미디어(PC, TV 등), 생활가전(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등)의 네 가지 사업 부문이 있는데 각 부문에는 별도의 '사장'이 있다. 일상 업무는 이들 '사장'의 책임 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사장들도 자신의 부하들에게 일부 권한을 위임하지만 삼성전자에는 절대로 위임할 수 없는 톱 경영자의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사 제품을 타사 제품과 비교하는 일이다. 미국 델컴퓨터의 노트북컴퓨터, 소니의 비디오카메라와 오디오 제품, 샤프의 액정TV, 노키아의 휴대전화 등과 함께 삼성전자의 제품들이 회의실에 펼쳐졌다. 담당 사장들은 각각의 제품가격과 판매상황, 시장조사 결과, 제품기능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회장이나 CEO, 그리고 다른 사장들은 제품의 기능을 실제로 확인하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델의 PC화면은 우리 것보다 밝은가?", "소니 비디오카메라의 조작 버튼이 누르기 편한데 왜 우리 제품은 그렇지 못한가?", "샤프의 대형 액정TV 추정 생산단가는 얼마인가?" 합숙회의에서는 열 가지 이상의 제품을 놓고 비교했다. 이날 당면의 전략제품과 구체적인 개선목표가 정해졌다. 삼성은 20년 가까이 이처럼 철저히 제품을 비교하기 위해 사장단 회의를 열었다.
상품비교도 각 사업 부문에서 직접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것은 톱의 업무라서 안 된다고 했다. 회사 경영자원을 어떤 상품에 집중 배분할지를 결정해 톱다운(Top-Down)방식으로 전 종업원에게 신속히 전달하는 일을 무엇보다 중시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삼성의 매출액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20%에 지나지 않는다. 사상 최악의 반도체 불황 속에서도 흑자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휴대전화와 PC 등 히트상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를 극복하는 기업 경영한국에서 호황을 누리는 것은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하는 삼성그룹뿐만이 아니다. 거액을 투자하여 세계 시장점유율 수위에 접근하는 기업이나 세계에서 처음으로 IT관련 산업을 시작하는 기업, 과거 최고 영업실적을 기록하는 기업이 속출하고 있다. 모두 IMF위기를 계기로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핵심사업을 키운 기업이거나 독립해서 신기술의 가능성에 모험을 건 기업군들이다.
선택과 집중의 전략"세계 시장점유율 1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LCD의 신 공장을 건설할 계획입니다." 2003년 2월 4일, 서울의 그랜드인터컨티넨탈 호텔 회의장에서 LG필립스LCD의 구본준 회장은 이렇게 발표했다. 그의 옆에는 공장 건설 예정지인 경기도의 도지사 손학규 씨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설비 도입은 몇 단계에 걸쳐 이루어지지만 총 투자금액은 100억 달러에 이른다고 LG필립스와 경기도 측이 설명했다.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IT관련 투자인 셈이다. LG필립스는 이런 엄청난 투자로 LCD분야 세계 최대 기업으로 부상했다.
미국의 조사기관 디스플레이서치가 발표한 2002년 4분기(10월∼12월)의 회사별 세계시장 점유율을 보면, LG필립스의 시장점유율은 19.7%로 2위인 삼성전자(18.2%)를 제치고 염원의 1위로 등극했다. 이러한 일련의 투자는 'LCD 분야만은 삼성에게 지지 않겠다'고 하는 LG필립스의 비장한 각오를 나타낸다. LG필립스가 엄청난 투자를 계속하는 데에는 'TV가 바뀐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LG필립스는 앞으로 가격을 크게 낮출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본격적인 보급 시기는 아직 불투명하지만 업계에서는 2005년에는 수요가 1천만 대를 넘고, 그 후 단기간에 전 TV의 50%를 LCD-TV가 차지할 것으로 예측한다. 이런 유망시장에 대비해서 미리 투자해 둔다는 것이 LG필립스의 전략이다.
구조개혁으로 일본계 기업을 추월하다흔히 LCD 사업은 유력한 '포스트 반도체(반도체 이후의 성장산업)'라고 한다. LCD분야는 과거 일본이 투자와 상품화 경쟁에서 선두를 달렸고, 세계 시장점유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분야다. 애널리스트의 설명에 따르면 일본의 쇠퇴는 미래 사업에 대한 전략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일률적으로 투자를 줄인 탓'에 있다고 한다. 시장 성장률이 둔화되고 생산코스트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 향후 중국 기업과의 경쟁에서 '사양 제품'과 LCD와 같은 '유망 제품'을 구별하지 못하고 '축소경영'을 계속한 결과라고 밖에 할 수 없다. LCD 분야에서는 특허취득 건수와 최신기술의 개발 면에서는 일본계 기업이 여전히 세계를 이끌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실력이 사업과 연결되지 못하는 이유는 경영전략이 없어서다. 여기에 비해서 LG그룹은 IMF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철저한 선택과 집중', '해외 유력 기업과 제휴에 따른 유망산업 강화'라는 기본 방침을 정했다. 이 때 종래의 '중점사업은 자체적으로 육성한다'는 기존 방침을 바꿔 해외 유력 기업과 제휴를 맺고, 자본을 유치해 합병회사 형태로 운영하기로 했다. 그 결과 해외의 유력 기업과 투자 리스크를 분담하고, 세계시장의 동향을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합병회사가 되면 자연히 경영의 투명성이 높아지고, 그렇게 되면 장래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원활히 조달할 수 있는 것도 해외 유력 기업과 제휴를 맺은 이유다. LG가 필립스와 함께 50%씩 출자해서 설립한 LG필립스는 이러한 LG그룹의 '선택과 집중' 전략의 모델 사업이다.
IT강국의 본 모습필자는 2001년 9월, 한국에 부임할 당시부터 한국이 고속 인터넷 보급률이 세계 1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보급 원인은 여러 가지였지만, 가장 큰 특징은 연소자부터 폭발적으로 보급된 점이다. 숙제를 인터넷에서 찾아, 인터넷으로 회답하도록 지도했다. 이 때문에 학생이 있는 집에서는 모두 PC를 설치했고, 이것이 전체적인 보급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보급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 차례차례 IT를 이용한 새로운 서비스가 펼쳐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예를 들면, 서울 지하철은 2002년 6월부터 차량 내부의 모습이 크게 바뀌었다. 지하철 내에서 TV방송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각 차량마다 15인치 액정 TV 8대를 설치하여 뉴스나 스포츠 방송을 방영한다. 지하철 TV방송의 컨텐츠는 MBC 방송국이나 경제 전문채널에서 제공받아 화상을 디지털 처리하여 무선으로 지하철 차량에 보낸다. 각 가정에서 수신하는 방송보다 몇 분 정도의 시간차는 있지만, 대중 교통시설을 상대로는 세계 최초라고 한다. 아직은 투자액이 계속 늘어나게 하고, 광고수입 등 수익모델을 어떻게 만들까 하는 데는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지만, 열차 내 TV라고 하는 새로운 매체의 장래성에 대해서는 상당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또 휴대전화에 신용카드 기능을 접목시킨 서비스도 시작했다. 예를 들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 휴대전화를 자동 개찰기에 갖다 대기만 하면 결제가 이뤄진다. 전자투표도 실용 단계에 접어들었다. 2002년 봄,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전국 규모의 당내 선거를 실시했는데, 모두 12만 명이 컴퓨터 화면에 나온 후보자의 사진에 손을 갖다 대는 것으로 투표를 마쳤다. 개표에 걸린 시간은 몇 분에 불과했다. 미국과 유럽의 통신회사들이 경영악화로 서비스 개시를 늦추고 있는 '3세대 이동통신'도 SK텔레콤과 KTF가 2002년 초에 NTT토코모의 'FOMA'에 비해 6배나 빠른 전송속도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앞에 열거했듯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IT관련 실용 서비스'의 예는 한국 어느 곳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 아이디어나 기술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해 보느냐 마느냐'이다. 신재욱 KTF상무는 "한국에서는 본사와 SK텔레콤이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어서 새로운 서비스에 도전하지 않으면 경쟁에 승리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한국에는 온라인 게임 프로선수가 100명 이상 있다. 월드컵경기 때, 그토록 열광적인 응원을 펼쳤던 '붉은 악마' 역시 인터넷을 통해서 탄생했다. IT를 즐겁게 사용하는 것도 일상화된 일이다. 한국에 있으면 왠지 모르게 '이상한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국가 도산의 위기 IMF"현재의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IMF에 유동성조정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다. 정부, 기업, 금융기관, 노동자 등 모두가 힘을 합쳐 노력하면, 조기에 정상궤도로 복귀할 것을 확신하고 있다." 1997년 11월 21일 밤, 서울 교외의 정부종합청사에서 열린 긴급기자회견에서 한국의 임창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100여 명의 기자, 카메라맨, 관계자들 앞에서 상기된 표정으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IMF 위기한국경제가 사실상 파탄상태에 이르러 'IMF 개혁'이라고 불리는 공전의 정상화 작업을 착수하는 순간이었다. 21세기를 향해서 새 지도자를 뽑는 바로 그 시기에 한국은 '6 25 사변이래 최대 위기'에 빠졌다. 한국을 위기에 빠트린 직접적인 원인은 동남아시아를 휩쓴 통화위기였다. 12월 3일, 급거 서울을 당일치기로 방문한 IMF의 캉드쉬 총재는 임 부총리와 회동한 후, 200억 달러 규모의 긴급대출에 합의했다. IMF 외에도 세계은행과 일본이 100억 달러, 미국 50억 달러, 아시아개발은행 40억 달러 등 총 550억 달러의 긴급대출도 결정되었다. 이 합의는 'IMF개혁'이라고 불리는 고통을 동반하는 구조개혁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재정경제부의 담당자는 'IMF가 모든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해서 국가 도산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통감했다며 그 때 일을 회상했다. 모든 사항의 합의는 겨우 캉드쉬 총재가 방한하기로 한 전날 밤에 이루어졌다. '이제 겨우 마쳤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한국 담당자에게 IMF대표가 "한 장 더, 이면계약 조항을 답시다."라며 영문으로 된 문서를 내밀었다. '금융개혁 법안을 연내에 처리하고 금융기관의 구조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금융기관의 폐쇄, 합병, 매각 등에 관한 제도를 정비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전조정작업 없이 금융개혁을 단행하라는 내용이었다. 재정경제부 담당자는 깜짝 놀랐지만,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었다. 캉드쉬 총재는 부총리와 공식 계약에 임했다. 이렇게 해서 'IMF체제'가 시작되었지만 그 원인은 단순히 기관투자가들의 매도공세에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관투자가의 원화매도는 마지막 일격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경제는 1997년 초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확대지상주의에 의존했던 경제는 어느 새,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파열 직전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