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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위기와 개혁

이진순 지음 | 21세기북스
한국경제 위기와 개혁

이진순 지음

21세기북스/2003년 4월/347쪽/15,000원



제1장 경제위기에 대한 신고전학파적 진단

지표 속에 숨어버린 문제

IMF라는 경제위기가 발발할 때까지도 한국경제의 거시경제적 근본 조건은 양호해 보였다. 1996년과 1997년 정부의 통합재정수지는 계속 균형상태에 있었고, 경상수지 적자의 대(對) GDP 비율은 2% 이하였다. 소비자 물가상승률도 5% 이하 수준이었으며, 경제성장률도 6%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총저축률은 30% 이상의 높은 수준이었고, 실질 실효환율도 IMF 위기발발 전 3년 동안 큰 변화가 없었다. 이처럼 거시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경제는 잘 관리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국의 대외지불부담은 1994년부터 매년 30%가 넘는 속도로 증가하여 1997년 대외지불부담의 대 GDP 비율이 33% 수준까지 상승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높은 성장 잠재력을 고려할 때 그 수준 자체가 위험수위에 육박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상대적으로 높은 단기외채 비중과 만기불일치로 인한 심각한 대외 유동성 위기의 가능성에 있었다. 총 대외지불부담 중 단기 대외부채의 비중이 계속해서 50%를 웃돌고 있었던 데 비해, 외환보유고는 단기 대외부채 수준에 크게 미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제적 금융 패닉으로서의 외환위기

1997년 한국경제의 위기는 피상적으로 보면 정부의 환율정책과 금융 감독정책의 실패로 인한 외환유동성 위기로 보이지만, 사실은 단순한 외환위기의 차원이 아닌 외환위기, 금융위기, 기업위기가 겹친 총체적 경제위기였다. 1997년 말의 환율 급등과 급격한 자본유출은 외환위기의 전형이었으며, 이어진 금융기관의 연쇄파산은 금융위기의 특징을, 그리고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기업부실 사태는 기업위기의 양상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7년 11월 외환보유고의 급감은 원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 때문이 아니라, 국제채권자들의 인출 사태와 은행 부도를 막으려던 정책 당국자의 외환 공급 때문이었다. 이처럼 한국의 외환위기는 국제금융시장에서 전개되었던 한국 금융기관에 대한 대규모 자금 인출 사태, 즉 금융패닉 현상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이러한 금융패닉은 잠재적 유동성 부족, 최종 대부자의 부재 혹은 역할 미흡, 신인도 급락이라는 세 조건이 동시에 충족될 경우에만 발생한다.

① 잠재적 유동성 부족

1997년 한국의 외환유동성 부족은 관치경제 패러다임을 신봉하던 경제 관료들이 두 가지 측면에서 정책 실패를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첫째는 1996년 교역조건 악화에 신축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환율 정책의 오류와 그로 인해 막대한 경상수지적자가 누적되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1994~96년 중 감독정책 부재 속의 금융자유화로 국내 금융기관 해외지점의 단기성 외화부채가 급증함으로써 대외지급능력지수(단기외채/외환보유고)가 1997년 말에 300%를 상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② 최종 대부자의 부재

국제금융시장에서 최종 대부자로서 IMF의 무력함은 이미 중남미의 외채위기에서 드러난 국제금융시장의 구조적 허점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외국 채권 은행들이 한국 금융기관에 대하여 만기 연장을 거부하며 상환을 집중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 정부가 IMF 구제금융을 요청한 이후였다. 1997년 11월 마지막 주간에만 약 100억 달러 이상의 외채상환 요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국제금융시장에서 IMF를 금융패닉을 진정시킬 최종 대부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③ 한국 금융기관의 신인도 급락

90년대 초반 이후 한국 금융기관의 건전성은 비록 지표상으로는 감춰져왔으나 실상에 있어서는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었다. 위기 이전 한국 금융기관의 자산건전성 분류 기준과 대손충당금 적립 기준은 국제기준에 비해 대단히 느슨했다. 정부가 발표한 공식통계에 따르면 은행의 총자산 대비 자본비율과 BIS 자기자본비율은 1997년까지 지속적으로 저하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기업과 금융의 숨겨진 부실

그러나 공식 통계에는 잡히지 않았지만, 막대한 잠재 부실채권이 은행에 누적되어왔다. 부실채권여부를 판정하기 위한 단순한 기준으로, 기업의 이자보상배율(지급이자와 영업이익 그리고 감가상각충당금의 합계를 지급이자로 나눈 비율)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만일 이자보상배율이 1 이하라는 것은 경상현금흐름으로 금융이자조차 납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부감사를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6,000개의 법인을 표본으로 해서 이자보상배율이 1 이하인 기업의 비율이 1997년에는 무려 전체 기업 중 43.1%에 달했으며 그 기업들의 차입금 총액은 205조원에 달하고 있었다. 1990년대 내내 금융기관의 자산건전성은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었으나, 은행들은 부실기업 여신에 대해 만기 연장을 실시함으로써 사실상 부실을 은폐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1990년까지만 해도 6개 사에 불과했던 종합금융사가 1994년 실시된 금융자유화 조치로 진입장벽이 낮춰지고 업무 영역이 크게 확대되면서 1997년에는 30개 사로 증가하였다. 그런데 종합금융사에 대해 금융감독 당국은 은행들에 비해 최소한의 감독 규제만을 적용하여왔다. 이와 같이 느슨한 규제 때문에 종금사들은 점점 위험한 영역에 투자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는 위험한 역외의 신용도가 낮은 국가와 관련된 부외거래도 일삼았다.

그리고 이러한 은행과 종금사들의 건전성 악화의 이면에는 부실기업의 누적부채가 숨겨져 있었다. 즉 수익성의 악화로 금융부채의 이자 부담조차도 감당하지 못하는 기업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는데, 특히 이들 부실기업들은 시장 기능에 의하여 퇴출되지 않고 계속 잔존하면서 ‘빚 얻어 빚 갚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면서 금융기관의 잠재부실의 규모를 눈덩이처럼 불려왔던 것이다.

드러난 부실과 신인도 급락

1997년 1월 한보사태가 발생하면서 한국 재벌의 경영 행태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추락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3월에는 삼미, 4월에는 진로, 5월에는 대농과 뉴코아, 7월에는 기아 등 30대 재벌 중 8개 재벌들의 연쇄부도가 발생하면서 그 동안 누적된 기업 및 금융 부실이 표면화되었다. 또한 부도는 아닐지라도 경제위기 이전 30대 재벌 중 그룹 전체로 손실을 경험한 재벌이 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이들 거대 부실재벌들에게 막대한 여신을 제공했던 은행과 종금사 등 국내 금융기관의 신인도는 대외적으로 급속히 하락함으로써 일부 금융기관들의 외환유동성 부족 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국내외 금융 시장은 크게 출렁였으며, 마침내 정부는 부도유예협약이라는 극약 처방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결국 태국을 시작으로 하여 동남아에 외환위기가 급속히 확산되는 조짐을 보이자, 외국 금융기관과 투자자들은 한국의 대외지급 능력을 의심하여 급격히 대출금과 투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하였고, 국내 금융기관의 외화채무 만기연장 비율이 급속히 하락하게 되면서 일부 금융기관들이 외화부도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정부는 이들 금융기관에 외환보유고와 외화 자금을 공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이는 가용 외환보유고의 고갈이라는 위기를 부채질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환율이 급등하는 등 외환위기가 촉발되었으며, 정부는 마침내 11월 21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다는 발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제2장 경제위기에 대한 질서학파적 진단

관치경제

시장경제는 ‘자유경쟁과 자기책임 원칙’에 입각하고 있는 데 반해, 관치경제는 ‘보호와 통제’를 그 기본 원리로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낙후된 농업경제를 기반으로 급속한 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사유재산제도에 기초한 중앙관리 경제 질서, 소위 관치경제를 도입하였으며, 이에 기초하여 고도성장을 이룩하는 데 성공하였다.

1960년대 초 군사 정부는 ‘거대한 투자에 의한 권력 극대화’를 목표로 투자지배를 위한 각종 중앙관리적 경제 질서를 도입하였다. 물론 한국은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전형적인 중앙관리경제인 명령에 의하여 움직이는 경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1960년대 이후 한국 정부는 민간 부분에 강제적으로 의무를 부과할 수 있는 능력과 중앙계획을 달성하는 방향으로 행정적 재량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자본 부족 상황에서 권력 극대화를 위한 주요 목표인 고도성장의 기반이 되었던 것은 소수 대기업 부분의 계획사업에 대한 원활한 자금 공급이었다. 이를 위해 5.16 직후 군사 정부는 금융기관의 인사 및 금리결정, 신용배분 등 경영권을 장악하기 위해 한국은행법 및 은행법의 개정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1961년 말에는 일반은행을 국유화함으로써 모든 은행을 정부의 강력한 통제 하에 두었다.

또한 정부는 해외차관 도입을 촉진하기 위해 산업은행 등 특수 은행과 일반 은행 등이 국내 차입자의 채무이행을 보증하는 지급보증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는 정부가 민간기업의 외채에 대해 실질적으로 지급을 보증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정부가 민간기업의 투자에 책임을 지는 ‘정부․민간 위험공유 체제’를 출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우리 나라 금융조직은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실물적 계획 목표들을 차질 없이 수행하기 위한 하위 정책 수단의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금융기관은 독자적으로 금융서비스를 생산, 판매하여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상업적 조직체로 인식되지 않았으며, 단지 실물 부분의 투자, 생산 및 수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지원하는 부차적 역할만 하면 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관치경제의 강화 : 효율성 저하와 분배의 원천적 악화

1972년 8월 3일의 ‘경제성장과 안정을 위한 긴급명령’과 1973년 이후의 무리한 중화학공업화 추진과정을 통해 관치경제는 더 한층 확대 강화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긴 각종 시장의 왜곡이 초래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규제가 새로운 규제를 불러오는 규제의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1980년 이후 이러한 관치경제적 요소는 다소 완화되기는 했으나 그 기본 구조는 1997년까지 유지되었다.

한편 지난 30여 년 동안 금융 중개에 있어서 압도적 역할을 담당해온 은행에 대한 정부 통제는 관치경제의 핵심적인 수단이었다. 우리 나라 기업들은 운영자금뿐만 아니라 투자자금까지도 정부 통제 하에 있는 은행에 크게 의존하여왔다. 은행의 기업에 대한 대출은 많은 부분이 형식적으로는 단기대출이었으나, 수차에 걸쳐 경신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장기자금화 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어왔다.

융자의 경신은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 중앙관리 당국에 순응하는 기업의 경우, 융자의 경신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졌으나 그렇지 못한 기업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민간기업의 신규 투자재원 역시 대부분 국내 은행의 대출이나 혹은 은행의 지급보증에 기초한 외자를 통해 조달되었는데, 이와 같은 신규여신 역시 중앙관리 당국의 심사와 승인을 받은 후에야 이루어졌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중앙계획 당국은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금융통제를 한층 더 강화하기 시작했다.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정책금융이 본격화한 계기가 되었으며, 정책금융비율(정책대출/총 대출액)이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40%를 넘어섰다. 은행의 운용자산 중 정책금융 비중의 증대는 대출자산에 대한 은행의 통제력 상실을 초래하여 대출심사 기능의 발전과 경영의 효율성 제고를 억제함으로써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980~1990년대의 불완전한 경제개혁 : 탈(脫)보호 없는 탈(脫)통제

지속적인 고도성장 결과 우리 경제는 규모가 커졌을 뿐만 아니라 구조도 복잡다기화 됨에 따라 관치경제의 유효성은 급속히 저하되고 도덕적 해이와 부정부패가 만연되었다. 당시까지 연평균 8%의 성장률을 기록하던 한국경제가 1980년 -3.7% 성장을 계기로 이제 관치경제는 수명을 다했고, 보다 시장 지향적인 경제 질서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또한 이미 1980년대에는 국내저축률이 1960년대에 비해 두 배로 상승하여 투자재원을 자립하는 것이 가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공적인 재벌기업들은 국제금융시장에서 독자적으로 자본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정부의 지급보증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또한 경제구조의 복잡다기화로 정부가 수익성 있는 투자 기회를 발굴하고 개별 기업의 성과를 감독하는 것도 점점 어려워졌다.

더욱이 자유화와 민주화에 대한 국내외 압력으로 종래 정부가 민간기업에 동기를 부여하고 규율을 세우기 위해 사용하였던 정책 수단을 폐기하도록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이제 더 이상 민간기업의 의사결정에 개입하지 않는 대신 암묵적 보험도 제공하지 않으며, 단지 공정한 경기규칙의 제정과 엄정한 시행 그리고 사회안전망의 공여에 그 역할을 한정하여야만 했다. 요컨대 경제개혁의 요체는 탈통제․탈보호였다.

1980년대 탈통제 정책의 부분적인 진전으로 자본 축적은 보다 민간 주도로 이루어지게 되었지만 금융자원 배분과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필요한 제도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즉, 부분적 자유화 정책에 탈보호 정책이 수반되지 않았고, 기존의 정부․재벌 간 위험 공유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기업의 생사가 경제적 실력보다는 정치헌금을 통한 정치적 유대에 더 크게 의존함에 따라 정부․재벌 간 위험공유체제의 정치화는 더 한층 가속화되었다.

1991년 11월, 1단계 금리자유화를 시작으로 1997년 7월 4단계 금리자유화 실시로 거의 모든 여수신 금리가 자유화되었으며, 또한 대외 개방과 경쟁 촉진을 위해 금융 산업 전반에 대한 진입규제를 완화하고, 지점 증설도 1994년 자율화되었다. 업무 영역 규제완화는 은행, 증권, 보험업의 3대 축을 기준으로 각각의 핵심 업무는 유지하되 주변 업무를 중심으로 상호진입을 점진적으로 허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율화와 동시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금융기관에 대한 건전성 감독 강화와 엄격한 법 집행은 미흡하였다. 자율화에 따른 금융기관 건전성 감독 강화의 필요성은 1990년대 중반 한국은행법 개정시 거론되었으나 실패로 끝났다. 결국 재무부와 한국은행의 감독권한 이원화, 즉 감독기관들도 금융시스템의 건전성 유지보다는 주로 정부지침 시행여부 확인과 비리적발에 초점을 둔 종래의 감독 관행을 지속했다.

금융기관의 건전성 감독이 미흡한 여건에서 금융자율화와 국제화가 진전됨에 따라, 증대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위험관리 체계의 정비는 소홀히 한 채, 일부 은행들은 무분별한 자회사 설립을 통한 타 업종 진출 및 해외 진출에 몰두하는 등 외형 확장 위주의 방만한 경영 행태를 보였다. 특히 외화자금을 단기로 조달하여 중장기로 운용하는 등 외화자산과 부채의 만기불일치가 매우 심각한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재벌 감시의 공백

1980년대 후반 이후 재벌들은 더 이상 정부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지 않게 되었으나 대마불사의 신화에 의존한 암묵적 보증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80년대 들어 정부는 전통적인 산업정책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으면서, 민간 소유의 상업은행에 대한 통제권을 유보하고 있었고, 재벌들의 차입에 대한 암묵적 보증은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보였다. 이에 따라 재벌들은 정경유착을 통해 정부의 영향력을 활용하고 동시에 비은행 금융기관을 설립하여 조달한 자금으로 부도 위험을 무시한 채 야심적인 투자 사업을 벌여나갔다.

그런데 재벌 경영에 대해 종래 정부의 통제나 감시를 대체할, 정부와 재벌로부터 독립적인 금융기관에 의한 일본․독일형 기업 감시 제도나 주주들에 의한 영․미형 기업 감시제도가 전혀 갖추어지지 못하여, 재벌총수를 견제하고 감시할 기업 내외의 지배구조에 공백이 생기고 말았다. 또한 금융시스템 건전성 확보의 마지막 보류인 금융 감독 체계 역시 정비되지 않아 시스템리스크 관리체제의 공백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었던 것이다. 결국 재벌총수 중심의 내부자 통제가 일반화되어 도덕적 해이가 확대 심화되어온 것이 재벌들의 과다차입에 의존한 방만한 투자를 초래하여 부실기업이 양산되는 사태를 만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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