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컬러 오브 오일

마이클 이코노미데스 지음 | 산해
1. BLOOD RED(석유와 전쟁 :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기까지)



석유는 붉다. 20세기 1·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여러 전쟁에서 죽은 수백만 명이 흘린 피 색깔만큼이나 붉다. 그 모든 전쟁의 원인과 경과의 한복판에 석유가 있었다. 천연자원과 전쟁 사이에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분명한 사실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가장 흔한 원인은 천연자원의 확보 그리고 부에 대한 열망이다.

러시아는 유럽 최초로 석유 개발의 효과를 본 국가였다. 존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이 생산에서 정제, 소매까지 미국의 석유 산업의 근간을 수립하는 동안, 유럽의 가장 저명한 상인 가문인 로트실트 가와 노벨 가는 제정 러시아의 석유 개발권을 획득했다. 1880년까지 유럽에서 쓰는 석유의 대부분은 러시아 내에 있는 카스피 해의 바쿠 주변 지역에서 생산되었다. 그리고 다음 30년 동안 로트실트 가와 노벨 가는 러시아에서 생산을 독점했다.

그 이후 로열더치 사를 경영하는 헨리 디터딩이라는 네널란드인이 런던의 마커스 새뮤얼이 이끄는 셸 무역회사를 끌어들여 로열더치셸이 탄생했다. 로열더치셸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수마트라와 보르네오에서 석유를 캤다. 1911년, 러시아에 혁명의 전운이 감도는 와중에 로열더치셸은 러시아 내의 노벨 가와 로트실트 가 기업을 사들여 석유로 유럽 대륙을 주무르는 큰 세력으로 부상했다. 러시아와 아시아와 미국에 이르기까지 로열더치셸은 세계의 이권을 놓고 스탠더드 오일과 한판 벌일 수 있는 세력으로 떠오른 것이다.

1차 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인류 역사상 획기적 사건이 되었다. 이 전쟁에서 오로지 석유만 사용하는 내연기관이 말과 인간과 경쟁했고, 전쟁이 끝나기 전에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는 장갑차와 새롭고 강력한 비행기가 등장했다.

석유 사용은 군사적 하드웨어를 넘어 모든 분야에서 기술 진보를 가져왔다. 그 발전 속도가 너무 눈부셔서 계속되는 혁신들도 순식간에 구닥다리가 될 정도였다. 풍부한 석유 자원을 가진 미국이 전쟁의 막바지에 참전하면서 독일 패망은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으며, 영국은 대륙 밖의 석유 자원을 봉쇄하고 루마니아에 있는 유전 접근을 차단하여 독일의 목을 졸랐다.

1차 세계대전에서 앵글로색슨을 승리로 이끈 것은 자원, 특히 석유에서의 우세였다. 그리하여 전쟁이 끝난 후 이념적·문화적·경제적 패권을 놓고 경쟁하기 위해서는 어느 나라든 경제적 자원, 그 중에서도 필수적으로 석유에 접근할 수 있어야 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중간 휴식기 동안 석유 산업은 급격히 발전했고 새로이 풍부한 석유 생산지가 등장했다.

2차 세계대전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부터 시작해서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까지 계속된 2차 세계대전 동안 4,600만 명 이상의 군인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1940년 9월 동맹을 맺었다. 이것은 분명 미국이 중립을 지키리라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일본은 미국에 대부분의 석유 공급을 의존하고 있었고, 처음에 루스벨트는 전쟁을 피하려는 생각에서 석유 금수조치를 내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적대감이 고조되면서 마침내 일본이 진주만 공격을 감행했다.

이로써 석유 공급이 중단되었고, 일본은 비축해 두었던 석유를 쓸 수밖에 없었다. 1941년 6월, 독일군은 930마일 전선을 넘어 소련을 침공했다. 소련이 선택한 주된 전략은 초토화 작전이었다. 엄청난 수의 러시아 국민이 일치 단결하여 침략군에 저항했다. 히틀러는 석유 공급원을 확보하기 위해 남쪽을 공격했다. 1942년 8월 드디어 카프카스 산맥에 위치한 마이코프의 거대한 유전에 도착했으나 그곳에서 본 것은 폐허가 된 석유 설비와 유정이었다. 히틀러는 결국 석유를 장악하는 데 실패했다.

아시아에서 일본이 인도네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침략한 것도 석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석유 수송은 해로로 이루어졌으므로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 승리 이후부터 미국이 우세해진 것이다. 미국은 특히 유조선을 목표로 삼았다. 일본의 석유 수입량은 1년 전에 비해 50퍼센트 수준으로 떨어졌고, 1945년 초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수입이 완전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일본 해군의 전력은 급격히 약해졌다. 일본 공군의 비행 시간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일본의 항복을 재촉한 것은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대한 원폭 투하이다. 하지만 일본은 석유 부족 때문에 이미 항복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석유 패권과 팍스 아메리카나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일어난 걸프 전쟁은 원활한 석유 경제를 보호해 나가려는 미국의 의지를 드러낸 본보기이다. 사담 후세인은 1990년 9월, 작지만 석유가 많이 나는 이웃 나라를 침공했다. 석유 시장은 즉각 반응을 보였고 유가는 폭등했다.

미국은 다른 나라들과 다각적인 제휴를 하고 사담의 군대와 싸워 1991년 초 쿠웨이트에서 이라크를 철수시켰다. 부시 대통령은 걸프 전쟁을 새로운 세계질서를 "명확히 하는 순간"이라고 묘사했다. 메시지는 명백했다. 석유 공급 및 거래를 교란하고 위협하는 세력은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세계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일용품이라 할 수 있는 석유는 미국에게 힘과 책임을 부여했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석유의 힘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지배권을 확립해 왔다. 지금은 석유의 세기다. 함축적으로 말한다면 지금은 미국의 세계, 팍스 아메리카나의 세기이다.

2. Red, White and Blue - 석유 제국, 그 정복과 확장의 역사



석유 산업에도 물론 난관은 있다. 하지만 그 난관은 호황과 불황의 무자비한 사이클 탓으로 돌려지곤 한다. 그 첫 사이클은 1859년 드레이크 대령이 펜실베이니아에서 유전을 발견한 후 2년이 못 되어 나타났다. 남북전쟁으로 등유 공급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펜실베이니아 원유에서 등유를 추출하는 새 산업의 길을 열어 주었다. 클리블랜드와 피츠버그 주변의 석유 정유소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아갔으며 배럴당 15달러로 공급하였다. 하지만 1861년 말, 엠파이어 유정에서 하루 3,000배럴씩 등유가 쏟아지면서 가격은 배럴당 10센트로 곤두박질쳤다.

석유의 낮은 가격은 새로운 석유를 찾으려는 동기를 감퇴시키고, 기존 유전에서의 생산을 감소시킨다. 그래서 모든 공급 과잉이 사라지면 예외 없이 다음은 석유 부족 사태가 찾아온다. 이것은 가격 인상 압력을 불러온다. 이렇게 사이클이 반복된다.

이런 호황과 불황 사이클 때문에 석유 산업 역사 내내 생산자들은 극단적인 고난을 겪었다. 또 소비자, 공공분야, 산업계에 대한 석유 시장 개발도 지체되었다. 그러나 1860년대, 이 혼란스럽고 제멋대로인 미개척 산업에서 한 거부가 부상해서 석유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했다. 바로 존 록펠러였다. 그는 호황과 불황 사이클을 거치면서도 단 한 해도 손해보지 않았다. 록펠러는 석유를 넘어서 미국식 자본주의를 창조했다.

살아있는 전설, 록펠러



1855년 열여섯 살의 존 록펠러는 경리 보조원으로 직업 세계에 첫발을 디뎠다. 그리고 1858년 4월 록펠러는 상업학교 동기생 모리스 클라크와 함께 농산물거래 합작회사를 차렸다. 두 사람은 각자 2,000달러를 출자했고 '클라크 앤드 록펠러'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1863년 '클라크 앤드 록펠러' 사는 석유 정제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얼마 후 록펠러는 이리 호와 곧 완공될 철도에 접근하기 쉬운 수송로 교차점인 엑셀저워크스에 첫 정유소를 건설했다. 록펠러는 원료용 석유 시장의 축소와 공급 과잉, 정유소의 빈번한 화재, 철도 수송의 개선과 시장의 확대, 그리고 주요 정유소와의 경쟁이라는 까다로운 환경에서도 번창했다. 그는 곧 정유소를 세 곳으로 늘렸고 사업장을 계속해서 통합해 나갔다.

그러나 록펠러의 정유소들은 다른 정유소보다 동부 연안의 소비자들과 멀리 떨어진 클리블랜드에 있었기 때문에 불리한 입장에 놓이기 시작했다. 가장 효율적인 입지 지역은 피츠버그였다. 록펠러는 운송에 따르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같은 지역에서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운송업체들을 이리저리 이용했다. 철도회사에 운임을 할인해 주지 않으면 석유를 뉴욕까지 수송하는 경로 중, 버팔로까지는 호수를 이용하여 바지선으로 나르겠다고 위협하여 철도운임의 75퍼센트 할인협상을 맺음으로써, 다음 40년 동안 결정적인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1870년 '록펠러, 앤드루 앤드 플래글러' 합작회사는 존 록펠러를 회장으로 하는 공동출자회사 스탠더드 오일로 바뀌었다. 스탠더드 오일은 이미 미국 석유정제의 10퍼센트를 지배했다. 1872년, 당시 클리블랜드 정유업자들 대부분은 '공급과잉' 때문에 돈을 벌지 못하고 있었다. 록펠러는 40일 동안 26개 경쟁사 중 22개 사를 삼켰다. 이른바 클리블랜드 대학살이었다. 록펠러는 피츠버그도 노렸다. 1874년 록펠러는 피츠버그 정제시설의 절반과 필라델피아 최대 정유소를 손에 넣었고, 다음 2년 동안 피츠버그의 남아 있는 정유소들 21곳 중 20곳을 흡수하거나 문을 닫게 했다.

1877년 말까지 록펠러는 필라델피아, 타이터스빌, 볼티모어에 남아있는 정유소들을 모두 삼켰고, 뉴욕의 저항하는 정유업자들도 쓰러뜨렸다. 결국 록펠러는 엄청난 제국을 건설했고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는 철도회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송유관 부설과 석유 생산 사업들을 시작했고, 외국 시장까지 점령하기 시작했다. 클리블랜드 대학살 이후 5년이 지난 시점에 이르자 존 록펠러는 38세의 나이로 미국 정유의 90퍼센트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쇄도하는 반독점 소송을 계기로 1911년 스텐더드 오일은 대법원의 최종판결을 받고 해체된다.

3. PRIMARY COLORS : 석유 지배의 3 요소(돈, 사람, 그리고 테크놀로지)



돈, 테크놀로지, 사람(전문가). 이것은 석유산업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 즉 3원색과 같은 것이다. 석유사업은 태동기부터 비범한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모험가, 자본가, 식민주의자, 제국주의자, 그리고 평범한 포춘 헌터들까지 몰려들어 '홈런' 한 방을 때리려고 했다.

돈



석유 업계와 산유국은 아주 많은 돈을 번다. 과거 15년 동안 격심한 가격파동을 겪었지만 석유 회사들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업이라는 지위에 있고, 산유국들은 만약 석유가 없었더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돈을 벌어들였다. 하지만 막대한 현금을 원활하게 흐르게 하려면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다. 그 투자 규모는 활성지수라 부르는 것으로 측정할 수 있다. 이것은 새로 발견되는 석유에 접근하여 하루 1배럴을 안정적으로 생산하기까지 들어가는 총 투자액을 달러로 나타낸 것이다. 이라크는 하루 1배럴을 새로이 생산하는 데 7,500달러의 개발비용이 들며, 사우디아라비아의 활성지수는 3,500달러이다.

1999년의 세계 평균 활성지수는 배럴당 2,000달러였다. 멕시코 만 대륙붕의 개발비용이 배럴당 1,000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낮다. 멕시코 만 심해의 활성지수는 배럴당 9,000달러이지만, 기술 발전에 힘입어 앞으로 5년 내에 30~50퍼센트 정도는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게 되면 투자의 균형은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국가에서 심해 쪽으로 기울 것이다.

테크놀로지



석유 산업의 테크놀로지에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기술이 중요하며, 그 활용과 통합이 석유 산업의 성공에 필수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석유 산업의 기술은 각기 다른 필요를 가진 여러 가지 분야에 다양하게 적용된다.

그렇다면 이토록 기술 의존도가 큰 석유 산업이 왜 연구개발비는 가장 적게 쓰는 것일까? 의약 부문은 매출액의 11퍼센트를 연구개발비로 쓴다. 전기전자 산업은 매출액의 5퍼센트, 화학 산업은 매출액의 4.1퍼센트를 쓴다. 반면 석유 산업의 연구개발비는 놀랍게도 매출액 대비 0.5퍼센트에도 못 미친다. 미국의 석유 산업은 세계 다른 지역의 새로운 유전들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순조롭게 버텨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유전지역이 발견되면서 성숙 유전에 필요한 기술개발은 비용 측면에서 시장을 지배할 만한 경쟁력이 없어졌다. 불행하게도 기술개발이 기존 유전에서 생산을 늘리는 데에 크게 역할을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숙 유전이 아무리 매력적이더라도 새로운 매장지에 접근하는 기술이 성숙 유전을 개발하는 어떤 기술보다 우선시된다. 멕시코 만 심해에서 회수(채굴) 가능한 석유 매장량은 460억 배럴에 달한다고 한다. 이러한 미발견 매장지들은 미국 석유 생산량을 전례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석유 산업의 연구개발비가 매출액에 비해 적게 투자되는 것이다.

사람



20세기 후반에 들어 세계가 테크놀로지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기술을 가치와 동일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술은 쉽게 입수할 수 있고 사들일 수도 있지만,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기술적 진보를 뛰어넘어 혁신을 일으키는 능력, 즉 '기술 모멘텀'이다. 이것은 단순히 기술을 보유한 사람이 아니라 독특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기술 모멘텀이 나라마다 불균형을 보이는 것은 교육격차 때문이 아니다. 예를 들어 카자흐스탄 정부의 핵심 요직은 서구의 유명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은 카자흐스탄인으로 넘친다. 그리고 국영 석유 회사들의 선임 기술자들은 모두 미국의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런 학력만으로는 무언가가 부족하다.

수익이라는 뚜렷한 경제적 목표보다는 정치적 유착에만 신경을 쓰는 국영 석유 회사들은 기업가 지망생과 기술 혁신가들에게는 무덤일 뿐이다. 이와 반대로 민간 거대 메이저 기업에서 교육받고 훈련받은 사람들은 크게 다르다. 이런 점에서 슐럼버거 만큼 성공한 회사는 없다. 이 회사는 매년 수백 명의 사원을 뽑아 이들을 철저히 '기술 모멘텀'을 갖춘 국제적인 인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4. GREEN : 세계의 부를 끌어 모으는 석유 산업



석유의 빛깔은 초록색이다. 세상의 돈들이 온갖 빛깔을 띠고 있더라도, 석유의 가치를 정해 온 것은 초록색 미국 지폐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상상에서부터 벼락부자가 된 텍사스 석유업자들, 걸프 국가들의 허장성세한 소비에 이르기까지 석유는 늘 돈을 그리고 미국의 달러를 연상시켰다.

벼락부자가 된 중동의 산유국



돈이 쏟아져 들어왔다. 1973년 10월의 중동전쟁에 뒤따른 금수조치라는 행운이 겹치면서부터 돈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1970년∼73년까지 2달러에서 3달러로 완만히 올라가던 유가가 1973년 10월, 배럴당 5.40달러로 급등했다. 11월에는 나이지리아산 원유가 배럴당 16달러로 팔리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 소문은 12월 중순 이란산 원유가 경매에서 배럴당 17달러 이상으로 팔리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다음 10년에 걸쳐 일어났던 것 같은 부의 대이동은 이전에는 결코 없었다. 몇 가지 정치적 사건과 산유국 사이의 내부 갈등으로 유가는 배럴당 40달러 이상으로 폭등했다. 메이저 석유회사들은 1980년대에 배럴당 100달러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고, 전 세계 석유 소비국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넘쳐흐르는 돈을 주체하지 못한 산유국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뿐만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모든 것들까지도 게걸스럽게 소비했다. 카라카스의 중산층 가족이 플로리다에서 주말을 보내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할 수 있었던 기회들이 서서히 무산되었다. 1983년 드디어 오일 머니가 바닥났을 때 라고스, 자카르타, 카라카스 주변의 판자촌들은 사회적·경제적 불안 상태를 겪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