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경제학자의 유쾌한 에세이
폴 크루그먼 지음 | 부키
1장 일자리, 일자리, 일자리
어설픈 이론가상상해 보자. 오로지 단 두 가지 품목, 핫도그와 롤빵만을 생산하는 경제를. 이 경제권의 소비자들은 핫도그 하나에 롤빵 하나, 또는 롤빵 하나에 핫도그 하나의 교환을 고수하고 있으며, 노동이 생산에 들어가는 유일한 투입이다. 이 글의 포인트는 한 가지 패러독스를 설명하는 데 있다. 즉 기꺼이 놀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경제학을 진지하게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경제학 이론이란 권위 있는 인물들이 내놓은 금언 모음이 아니다. 그러면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우리의 가상 경제는 처음부터 1억 2,000만 명의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어 거의 완전 고용에 도달해 있다고 하자. 그리고 핫도그든 롤빵이든 하나를 생산하는 데는 2인일(人日,2인×하루)이 걸린다고 가정하자. 이 같은 경제가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을 생산한다고 한다면, 매일 핫도그 3,000만 개와 롤빵 3,000만 개를 생산할 것이며, 두 부문에는 각각 6,000만 명의 노동자가 고용되어 있을 것이다.
자, 그 다음에 기술 개선으로 노동자 한 사람이 이틀이 아니라 하루에 핫도그를 하나씩 생산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이 경제는 이 같은 생산성 증가를 소비 증가에 활용하여 하루에 4,000만 개의 핫도그를 롤빵과 교환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노동의 재배치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즉 4,000만 명의 노동자가 핫도그를 생산하고, 8,000만 명의 노동자가 롤빵을 생산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유명한 저널리스트가 무대에 등장한다. 그는 최근의 역사를 살펴보고 나서 아주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고 선언한다. 즉 핫도그를 생산하는 2,000만 개의 일자리가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사태를 깊이 살펴본 그는 실제로 핫도그의 생산량이 33% 증가하면서 고용이 33% 하락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전 세계를 순방하며 경영진, 정부 관리, 노조 지도자들과 논의하는 2년 동안의 조사 사업에 착수한다. 그에게 사태는 한층 명확해진다. 즉 공급은 위험천만의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데 비해 소비 수요는 그에 상응할 만큼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기술 혁명이 그 일자리도 파괴해 버릴 것이다. 요컨대 글로벌 캐피털리즘(global capitalism)이 위기 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심상치 않은 결론을 500페이지짜리 책으로 써낸다. 그 책은 박식함과 현란함으로 널리 호평 받고, 저자는 토크쇼 프로그램의 명사가 된다.
한편 경제학자들은 좀 어리벙벙해진다. 왜냐하면 저자의 요점을 전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술 변동으로 고용의 산업적 구조에 변화가 초래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자리의 순수한 상실이란 없으며, 미래에도 그 같은 상실을 예상할 이유는 전혀 없다. 가령 롤빵 부문에서의 생산성 역시 핫도그 부문에서만큼 두 배가 된다고 가정해 보자. 왜 경제가 그 높아진 생산성을 6,000만 개의 핫도그와 롤빵을 소비하도록 촉진하고 각 부문에 6,000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데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인가? 아니면 각도를 달리 하여 말해 보자. 한 부문의 생산성 성장은 아주 간단하게 해당 부문에서의 고용을 감소시킬 수 있다. 그러나 생산성 성장이 경제 전체에서의 고용을 감소시킨다고 가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가상 경제에서 핫도그를 만드는 노동자의 수의 감소는 핫도그 부문에서의 일자리 수를 감소시키지만 감소된 만큼의 수를 롤빵 부문에서 창출하며, 그 역도 성립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 또는 명백해야 한다.
이 간단하기 짝이 없는 우화는 숱하게 많은 조사 보고서들조차 밝혀 주지 못하는 가능성을 밝혀 준다, 그것은 특히 어설픈 논평자에게는 당연한 결론같이 보이는 것 - 만일 철강 산업의 생산성 성장이 철강 노동자들의 일자리 수를 줄인다면, 전체 경제의 생산성 성장은 전체 경제의 고용을 줄일 것이라는 것 - 에 결정적인 구성의 오류가 내재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잠깐, 나는 어떤 근거로 소비자의 수요가 모든 추가 생산을 흡수하는 데 충분할 만큼 증가할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는가? 그 한 가지 좋은 답변은 왜 안 그러냐는 것이다. 만일 생산이 두 배가 되고 생산된 것이 모두 팔린다면 전체 수입도 또한 두 배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왜 소비가 두 배가 되지 않을 것인가? 즉 경제가 좀더 생산한다고 해서 왜 소비에 부족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하지만 여기서 다시 좀더 심오한 질문이 나온다. 경제가 수요의 전반적인 불충분함으로 말미암아 - 경기 후퇴가 발생함에 따라 - 고통을 겪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침체는 본질적으로 화폐적인 것이다 - 경기 후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실제 유통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현금을 보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리고 경기 후퇴는 화폐를 더 많이 발행함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서 이야기는 완전히 끝난다. 생산 능력의 전반적인 과잉(무엇에 비해서 과잉인가?)은 전혀 관계가 없다.
속류 케인스주의자모든 지적 활동이 그렇듯이 경제학도 제자 체감의 법칙(law of diminishing disciples)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위대한 혁신자에게는 어느 정도 시적(詩的)이라는 평가가 따르게 된다. 그의 사상이 처음에는 얼마간 거칠다고 해도, 또 자신의 비전과 종래의 것 간의 불연속성을 과장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혁신자의 사상을 글자 그대로 추종하면서 그 정신을 오해한 결과 정설을 따르는 정통파보다 더욱 독단적이 되어 극단으로 흐르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사상이 전파됨에 따라 점점 더 단순화되어 간다. 케인스 경제학의 운명도 그러하였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본인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묘하고 혁신적인 사상가였다. 그렇기만 그가 의도하지 않은 불행한 유산 중의 하나는 오늘날까지도 경제학 상의 논의를 혼란되고 몽롱하게 만든 사고 스타일 - 이것을 속류 케인스주의라고 하겠다 - 이었다.
1936년에 케인스의『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 이론』이 출간되기 전까지 거시 경제학은 대공황을 전혀 해명하지 못한 탓에 발전이 정지된 상태에 있었다. 이른바 고전 거시경제학은 경제에는 완전 고용으로 복귀하는 장기적인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장기적이란 것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이 학설의 두 가지 중심 교리는 화폐 수량설 - 가격의 전반적인 수준은 유통 중인 화폐 수량에 비례한다는 주장 - 과 이자율은 총 저축과 총 투자가 동등하게 되도록 상승하거나 하락한다고 주장하는 이자의 '대출 가능 기금(loanable funds)' 이론이다. 케인스는 어느 정도 충분하게 장기적일 경우에는 이러한 이론이 과연 타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정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기적으로 이자율은 완전 고용 상태에서 저축과 투자 간의 균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유동성 선호(liquidity preference)' - 덜 안전하고 덜 편리한 자산에 투자하는 데 충분한 인센티브가 제공되지 않을 경우 그냥 현금으로 보유하려는 대중들의 요구 - 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그는 강조하였다. 저축과 투자는 여전히 필연적으로 동등하지만, 완전 고용 상태에서 요구되는 저축이 요구되는 투자를 초과하는 것으로 드러나면, 하락하는 것은 이자율이 아니라 고용과 산출물의 수준이다, 만일 투자 수요가 어떤 이유 - 이를테면 주식 시장의 붕괴 같은 경우 - 에서든 하락하면, 그 결과는 경제 전반의 침체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을 탁월하게 재구성한 그림으로서, 당시의 뛰어난 젊은 경제학자들로부터 즉각적인 반응을 받았다. 사실 일부 학자들은 아주 초기부터 케인스의 그림이 지나치게 단순화되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고용과 산출물의 수준은 통상적으로 이자율과 피드백의 관계에 있는 만큼 자칫 커다란 차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케인스주의에서 하는 이야기를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하자면 이자율이 고용과 산출물의 수준과는 별개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연방준비이사회가 고용이 너무 낮다고 생각하면 이자율을 내리고, 경제가 과열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올리는 등 적극적으로 이자율을 관리한다.
경제를 어떤 정해지지 않는 손 대신에 우리에게는 2-3년에 걸쳐 인플레이션이 따르지 않는 실업률이라는 자체 기준을 향해 밀어붙이는 연준이란 보이는 손이 있는 것이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연준 이사회는 이자율을 올리거나 내려서 저축과 투자를 실업률과 보조를 맞출 수 있도록 한다. 특히 저축률의 증가는 더 높은 투자로 전환되는데,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연준이 그렇게 되도록 보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나에게는 수요의 변화가 연준의 정책에 의해 통상적으로 상쇄될 것이라는 생각 - 그리하여 수요의 변화는 평균적으로 고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 은 단순할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합리적인 것 같다. 대중들 - 뿐만 아니라 스스로 다 안다고 생각하는 많은 정책 담당 지식인들의 경우를 포함하여 - 로 하여금 이 문제를 인식하도록 만든 것은 일종의 희화화된 케인스주의인데, 그 구분 기준은 소비 지출의 감소는 언제나 나쁜 일이라는 생각의 무비판적인 수용 여부이다. 최근 들어 미국에서는 한동안 인플레이션과 예산 적자가 완화되면서 속류 케인스주의의 인상적인 복귀가 이루어지고 있다. 저축이 성장에 실제로 해롭다고 하는 주장을 정당화하려면, 연준이 무기력하다는 점 - 연준이 이자율을 인하함으로써 적정 수준 이상의 저축 증가를 더 높은 투자로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 - 을 설득력 있게 논증해야 한다. 저축이 나쁜 것이라는 주장이 의미를 가지려면, 이자율이 지출에 아무런 효과가 없다거나 잠재 저축은 투자 기회에 비하여 너무나 높아서 연준으로서는 이 두 가지의 보조를 맞추려면 이자율을 거의 제로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논증해야 한다.
저축의 증가는 경제를 감속시킬 것이다 - 연준이 이자율을 인하함으로써 투자의 증가를 유도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쩌면 그럴 것이다. 대신에 연준은 이자율을 인하함으로써 성장을 자극해야 하는데, 인하된 이자율은 투자의 증가를 유도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움직일 것이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빼먹고 있지?
2장 우파의 문제
불평등 교환뉴욕 대학 경제학과 교수인 에드워드 울프는『최상층 : 미국의 점증하는 부의 불평등 문제에 관한 연구』에서 부의 분배의 추이에 관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약술한 다음 온건한 수준의 부유세 부과 방안을 제시했다. 울프의 책은 깜짝 놀랄 정도로 보수파의 대대적인 공격 목표가 되었다. 이 책이 그 같은 분노를 일으킨 원인은 무엇인가? 해답은 그 책이 많은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토론 자체가 불가능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데 있다. 단지 사실만을 언급해도, 예컨대 미국에서는 상위 20퍼센트의 가구가 시장에 나와있는 부의 85%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면, 보수주의자들은 "20퍼센트의 가구가 부의 85%를 창출하고 있다."고 고쳐 말해야 한다고 우길 것이다. 또한 1973년 및 1989년과 같은, 연속적인 경기 순환 과정에서 동일한 단계의 소득을 비교하는 표준적이고 정치 중립적인 수단을 이용해 장기적인 소득 분배 추이를 평가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레이건의 업적을 카터의 재임기와 뒤섞어 왜곡해 보려는 괘씸한 짓을 한다는 책망이나 받게 될 것이다.
울프의 책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를 이해하려면, 먼저 다음과 같은 간단한 우화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두 종류의 사회가 있다고 하자. 한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한 가지 직종 - 이를테면 어업- 에 종사하여 생계를 유지하는데, 구성원들이 1년 동안 버는 총액은 완전히 그들의 기술과 노력에 따라 결정된다. 이 사회에서는 소득이 균등하지 않을 것이다 - 남보다 어로 기술이 뛰어난 이들이 있을 것이고, 또 남보다 더 열심히 일하려는 이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득의 편차는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고기를 많이 잡는 사람들의 경우 소득도 그에 상응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을 것이다. 다른 사회에서는 주 소득원이 금광에 있다. 이 사회에서 몇몇 사람들은 광맥이 풍부한 금광을 찾아내 부자가 된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별 볼 일 없는 금광밖에 찾아내지 못하고, 그에 따라 열심히 일함에도 불구하고 소득이 너무 적다고 생각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대단히 불공평한 소득 분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결과는 부분적으로 노력과 기술의 차이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도 있고 근면함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고, 소수만이 엄청난 부자가 될 것이다.
아무리 보수적이라고 해도 절대 다수의 미국인들은 본능적으로 두 번째의 가상 사회와 유사한 나라가 첫 번째의 가상 사회와 유사한 나라보다 나쁘다고 느낄 것임은 확실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개략적이나마 그려보자. 미국의 최빈곤층 10퍼센트에 속하는 가구의 생활수준은 한 세대 전에 비해 대폭 하락해 있다. 중간층에 속하는 가구의 경우에는 근소하게나마 나아진 정도이다. 오직 상위 20퍼센트의 미국인들만이 거의 모든 국민들이 194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절에 맛보던 수준과 비슷한 비율의 소득 증가를 누린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상위권 가구의 소득은 극적으로 상승하여, 최상위 1퍼센트 가구의 경우에는 실질 소득이 두 배로 뛰었다.
울프는 소득보다는 재산 - 현금 흐름보다는 자산 - 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은 연간 소득을 특정 가구의 경제적 지위의 척도로 삼는 것에 비해 장점이 있다. 특히 부유층을 대상으로 할 때는 그렇다. 고소득자의 경우 유례 없이 벌이가 좋은 시기가 있어 고소득을 올리게 된 것일 수도 있다. 또한 부유층이라고 해서 투자에 실패해 마이너스 소득을 올리는 일이 아주 없지는 않다. 어느 경우라고 해도 그들의 자산은 그들이 서열상 어디에 위치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지 알려 주는 좀더 적절한 기준이 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른바 성공한 계층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알려 주는 데 모든 측면에서 재산이 소득보다 더 나은 지표라는 점이다 - 소득은 그 범위가 아주 좁다는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가령 1989년의 경우 최상위 1퍼센트의 가구는 부의 39%를 소유하였지만 소득은(여전히 인상적인 수치인데) 16%에 그쳤을 뿐이다.
1989년 현재 미국은 1973년보다 더욱 불평등한 사회가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사실을 말하는 것이지 로널드 레이건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어부와 금광 개발자에 비유한 우화를 생각해 보자. 금광 개발자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불공평이 더욱 심화되는 것은 지도자가 못났기 때문이 아니라 살고 있는 환경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환경의 변화가 중산층 어부들의 사회를 빈부 격차가 심각한 사회로 바꿔놓을 수도 있는 일이다.
소득 분배는 정치적 쟁점이다. 이유는 명백하다. 불공평의 범위는 정책 결정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부들의 사회라면 구성원들이 노약자와 과부 및 고아들만큼은 당연히 공적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불평등한 금광 개발자 세계에서는 운 좋게 금광을 발견한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거둔 성과의 상당 부분을 불운한 사람들과 나누어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광범위한 공적 요구가 제기될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실제로 그 같은 재분배 정책이 인기를 끌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가 아메이의『자유의 혁명』에 대해 고찰해야만 하는 까닭은 바로 이와 같은 - 일반 대중이 실상을 알게 되면 재분배 정책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게 될 것이라는 - 가능성에 있다. 이 책이야말로 의회 다수파 지도자의 지적 사고방식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전직 경제학 교수인 아메이는 심화되고 있는 불공평 문제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또 해서도 안 된다고 논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보다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 미국은 여전히 중산층 어부들의 사회이다 라고- 주장하고자 애쓸 뿐이다. 우선 아메이는 1980년대가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진 시기였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그러나 그는 관련 자료와 해당 구절을 고의적으로 면밀히 조작했다. 아메이는 바보가 아니다. 자신이 수치를 날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어쩌면 그는 더 중요한 진실에 이바지하기 위해 사소한 거짓말을 정당화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믿어서 정치적으로 편리해지는 것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객관적 사실을 구분하는 이중적 사고의 경지에 이른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최종적인 결과는 다음과 같다. 그의 책은 불공평이 심화되고 있는 준엄한 현실을 모호하게 가리려는 역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