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실제로는 이렇게 움직인다
박광희 지음 | 바다출판사
중국 실제로는 이렇게 움직인다
박광희 지음
바다출판사/2002년 11월/367쪽/12,000원
1부 천안문에서 티베트까지 - 중국의 정치, 이렇게 움직인다
건국 후 중국 공산당의 권력 계승 사례
중국 정치를 논하면서 우리측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제 몇 세대(世代)’라는 표현은 중국어의 티뚜이(梯隊)라는 말을 옮긴 것이다. 제1티뚜이의 핵심 지도자였던 마오는 무소불위의 절대적 권위를 내세워 거의 독단적으로 후계자를 지목했다. 그러다가 부각된 후계자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한순간에 그의 정치적 생명을 끊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예를 들어 마오 자신이 주창했던 대약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1960년대 초반에 국가 주석으로 등장하여 한창 성과를 올리던 리우샤오치(劉少奇)를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이(走資波)’로 몰아 문화혁명의 첫 번째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임종 무렵에는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에서 자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화궈펑(華國鋒)을 후계자로 지목하고는 사망했다. 그러나 마오는 결코 합리적이지 못한 후계자 선정 사례를 남겨 놓았다. 마오는 자신이 언젠가는 권좌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자신에게 버금가는 후계자를 예비시켜 놓을 엄두를 내지도 않았던 듯하다. 즉 자기말고는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가 등장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듯하다.
이에 반해 제2티뚜이의 핵심 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은 출발부터 달랐다. 덩샤오핑은 마오처럼 권력을 장악하는 것에 대해 그다지 연연해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치가로서의 여정에 있어서 ‘3전 4기’를 이루어 오뚝이라는 별칭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건국 이전 혁명시기부터 자신이 최고의 권력을 향유하던 시절까지, 시대가 자신을 버리는 듯하면 조용히 물러났고, 또다시 시대가 자신을 원하면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이와 더불어, 덩샤오핑은 권력의 평화적 인계의 필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며, 또 언젠가는 권력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할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덩샤오핑은 세 명의 후계자를 선택했다.
덩샤오핑은 1976년 문화혁명이 끝나고 나서 이듬해에 중앙 정계에 복귀했다. 이는 마오가 후계자로 선택한 화궈펑이 이에지인엥(葉劍英)의 말을 듣고 덩샤오핑을 권력의 반려자로 선택한 덕분이었다. 그런데 화궈펑은 마오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옳다는 ‘범시론(凡是論)’을 주창하면서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했다. 결국 화궈펑은 최고의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자신이 중앙 무대로 복귀시켰던 덩샤오핑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그렇지만 덩샤오핑은 결코 제도적 최고위직인 당 주석에 오르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아예 당 주석직을 폐지하고 그보다 아래 수준인 당 총서기직을 만들어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을 차례로 그 자리에 앉게 했다. 그러나 덩 역시 자신이 내세웠던 최고지도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노선에서 벗어나고 지도부 내에 반대 여론이 비등하면 가차없이 무대에서 끌어내렸다. 1980년대 중반, 대학생들의 소요 사태로 후야오방이 먼저 옷을 벗었고, 그 뒤를 이어 자오쯔양도 1989년에 일어난 천안문 사태로 하야했다.
자오쯔양의 뒤를 이어 당 총서기로 덩의 낙점을 받은 이는 장쩌민이다. 그런데 덩샤오핑이 상하이에 있던 장쩌민을 중앙 무대로 불러 올린 점이 이채롭다. 당시 베이징에도 천시통(陳希同)이라는 유력자가 있었지만, 덩은 장을 선택했다. 그 배경에는 아마 장쩌민이 천안문 사태가 전국으로 번지는 것에 대비하여 상하이에서의 소요 사태에 강경 대응했고, 또한 장쩌민이 혁명 열사의 자제로서 당 원로들의 사랑을 받고 있던 점,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그가 결코 중국식의 야심가로 보이지 않았다는 점 등이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결국 장은 당시 최고의 능력자였다기보다는 당 내 관계에 두루 원만했으며, 어느 누구도 그를 대단한 인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그를 최고의 권좌에 오르게 했다. 장쩌민은 총서기직에 오른 뒤에 승승장구하여 최고 핵심지도자의 지위를 굳건히 했다.
후진타오를 필두로 한 차세대 주자들의 등장
앞서 보았던 것처럼, 이제까지 중국의 권력 이양은 예측 불허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력한 후계자로 지목됐던 린뱌오의 몰락이라든지, 화궈펑의 실권, 그리고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몰락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현재 제4티뚜이의 강력한 리더로 떠오르고 있는 후진타오는 어떻게 될 것인가?
후진타오는 문화혁명이 개시되기 직전 칭화 대학 학생 신분으로 입당했다. 따라서 항일전쟁이나 혁명전쟁에서의 공적은 전혀 없다. 그렇지만 그가 당의 최고위층에 진입한 것은 쏭핑(宋平), 후야오방, 덩샤오핑 등 당 원로가 이끌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후진타오가 언젠가는 장쩌민의 뒤를 이어 최고의 권좌에 오를 수 있을지는 제3티뚜이 정치 세력이 그의 충성과 재능을 인정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즉 그들은 후진타오에게 권력을 이양한 뒤에도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고 자신들의 노선을 이어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순순히 정권을 물려 줄 것이다.
이제 후진타오가 차기 핵심 지도자로 등장하기 위해 지난 5년여 간 준비해온 길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횡령액 32억 위안이라는 건국 이래 최대 횡령 사건이 1993년에 지앙쑤성 우시에서 발생했다. 이 사건에는 당시 베이징 시 당 서기였던 천시통이 연루되었는데,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장쩌민, 차오스, 류화칭, 리루이환 등은 베이징 빵(北京幇)과 관계가 깊지 않은 탓에 천시통을 끌어내리는 데 쉽게 동의했다.
사실 둘 사이의 갈등은 1989년 6․4 천안문 사태가 진압된 뒤 천시통(당시 베이징 시장) 보다 한 단계 낮은 서열의 장쩌민(상하이 시장)을 덩샤오핑이 당 총서기로 끌어올리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뜻밖의 인사에 불만을 품은 천시통은 은연 중에 장쩌민을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그 후 장쩌민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장춘윈과 우방궈를 베이징으로 불러들여 중앙서기처 서기직과 각각 농업과 공업을 주관하는 부총리직까지 맡겼다. 아울러 장쩌민은 상하이 시 당 서기 겸 시장인 황쥐(黃菊)를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승진시켰다.
이에 따라 천시통은 장의 약점을 공격하는 식으로 불만을 표출하며 장쩌민이 능력도 없는 상하이 빵들을 중앙 무대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식의 노골적 야유도 서슴지 않았다. 천시통이 장쩌민 등 상하이 빵 간부들이 부패에 연루된 사실이 있는지를 내사하는 움직임이 장쩌민의 측근에 의해 포착되자 장쩌민은 그를 왕바오선(王寶森) 횡령 사건에 연계시켜 제거하기로 작정했고 이 임무가 후진타오에게 맡겨졌다. 왕바오선은 결국 권총으로 자살했으며, 1998년 7월에 열린 최종 재판 결과 천시통은 16년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의 처리과정에서 후진타오는 천시통이 이끄는 베이징 빵을 제거하는 데 앞장서 장쩌민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장쩌민의 확고한 신뢰도 얻게 되었다. 한편 장쩌민은 제4티뚜이 지도자 그룹의 교육과 핵심 지도자 양성에 주력했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의 5년간은 후진타오에게 후계자 승계의 기초를 닦는 기간이었다. 이 시기에 후진타오는 정치적으로 덩샤오핑 이론을 치켜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장쩌민의 정치적 권위를 인정하고 따라야 했다. 이러한 두 가지 처세술은 장쩌민이 안심하고 그에게 권력을 물려주게 하려는 계책에 따른 것이다. 후진타오는 이와 같은 정치적 책략을 구사하면서 위태로운 정치 현실을 조심스럽게 헤쳐 나갔다.
1998년 3월 후진타오가 국가 부주석 자리에 오른 것은 그가 제4티뚜이의 핵심 지도자로 부상했음을 보여주는 조치였다. 후진타오는 국가 부주석이 되면서 외교 업무에서 후계자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그가 중국 공산당의 외교대변인과 정책 결정 참여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후진타오가 국가 부주석이 된 뒤에 취한 외교 활동의 영향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후진타오가 국가 원수와 정치 수뇌의 외교 의전에 익숙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외교류 경험을 통해 국제적 지명도와 국제 정치 관계의 인맥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장쩌민은 후진타오를 제4티뚜이의 핵심으로 키우겠다는 뜻을 분명히 내비쳤다. 그리고 당 중앙에 의해 국가 부주석 자리에 낙점을 받은 후진타오는 그 뒤 1998년 3월에 제9기 전인대 1차 회의 표결 과정을 거쳐 공식적으로 국가 부주석에 올랐다. 그러면서 후진타오는 당 중앙을 대표하여 주요 회의를 주관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연설 및 발표 기회도 점점 늘어났다.
결국 후진타오는 제15대 전인대 이후의 공작 성과를 통해 제4티뚜이 지도자 그룹 가운데 우뚝 섰고, 현재로서는 차기 핵심 지도자로 선택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 지금까지의 중국 공산당 후계자 선정에 많은 변수가 작용했음을 감안할 때, 만에 하나 그의 경쟁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제4티뚜이 지도자들 가운데 유력자의 하나인 쩡칭홍이 이끄는 태자당 세력이 될 것이다. 특히 쩡칭홍은 우리 식으로는 청와대 비서실장이라고 할 수 있는 판공청 주임 자리를 고수하는 한편, 정보 및 공안 업무를 이용해 모든 당원들의 공식적 뒷조사를 하고 있다. 이는 유사시에 후진타오 등 자신의 경쟁자들을 겨냥할 수 있는 정치적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장쩌민을 보필하고자 하는 이런 과잉 행위로 말미암아 쩡칭홍은 지도부 내부는 물론이고 인민들에게 야심가라는 의심을 사고 있다.
한편, 이와 동시에 후진타오와 정치 경력이 비슷한 우방궈, 우관중, 리창춘, 원지아바오 등 또 다른 제4티뚜이 지도자들도 후진타오에게는 버거운 경쟁 상대다. 이들은 모두 평범한 집안 출신으로 문화혁명 이전에 입당했으며, 또 몇 차례에 걸쳐 지방 정부 지도자를 역임하는 등 후진타오와 비슷한 경력을 쌓아왔다. 어쩌면 이들 중 한 명에게 후계자의 자리가 돌아갈지도 모른다.
중국 공산당의 고민을 담은 드라마
2001년 7월 1일은 중국 공산당 건당 80주년 기념일이었다. 그 탓에 한 달여 간 언론 보도 매체는 줄곧 중국 공산당의 활동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졌고, 한동안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중국 공산당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와 드라마가 심심찮게 방영되곤 했다. 당시 이와 관련된 드라마가 방영되었는데, 개혁개방 후에 등장한 민영기업과 그 내부에 설치된 당 위원회 간의 미묘한 갈등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흥미가 있었다.
중국에서는 민영기업이긴 해도 규모가 제법 큰 만큼 당 위원회가 설치되고, 당연히 당 서기도 있다. 규정상으로는 모든 딴웨이(單立:소속원들의 정치․경제․사회 생활이 공동으로 이루어지는 중국의 독특한 직장 조직)의 우두머리는 경영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당 서기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곤 한다. 그런데 그날 본 드라마는 약간 달랐다. 최고경영자와 당 서기 간에 갈등이 벌어졌다. 대면 상태에서는 최고 경영자가 물러서는 듯하더니 당 서기가 돌아가자 곧 모종의 조치를 취했다.
당일 저녁, 기업 내 공산당원들만의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최고경영자는 이를 방해하기 위해 모든 근로자들에게 야근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회의장에서 당원을 기다리던 당 서기는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때 당원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 두 사람을 통해 그 날 갑작스런 야근 지시가 있었음을 알게 된 서기는 화가 났지만 그 두 사람만을 놓고라도 회의를 하려고 했다(회의라기보다는 학습이었다). 그러자 잠시 후, 그 두 사람은 야근에 빠지면 장려금을 못 받게 된다며, 당 서기의 체면을 살려주고자 자기들도 억지로 잠깐 빠져나온 것이라서 그만 가봐야겠다고 했다. 당 서기는 더 이상 그들을 만류할 수 없었다.
국영기업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셈이다. 당 서기의 업무를 방해하고자 최고경영자가 야근이라는 칼을 빼들어 당 회의를 무산시키고자 한 점은 분명 민영기업에 대한 당의 한계를 드러내는 일이라 하겠다. 이는 돈버는 것이 이념보다 더 중요하게 된 일반인들의 의식 변화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중국 공산당의 고민거리가 된다고 하겠다.
2부 상하이 주식회사 - 중국의 경제, 이렇게 움직인다
장사꾼 최고의 찬사, ‘닌 쩐 후이 마이 똥시’
내가 베이징에서 가끔 가는 보세촌은 지앤구오어먼 와이따지에 근처에 있는 씨우슈이 스흐창이다. 이곳은 원래 중국산 실크로 만든 모든 것, 즉 전통 의상부터 심지어 내의에 이르기까지 실크 제품을 주로 팔던 곳이다. 여기에 중국 민속공예 소품상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베이징 체류 외국인에게 ‘실크 시장’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위탁 가공 수출하는 보세물품 가운데 검사 과정에서 하자가 발견되어 수출되지 못한 제품들을 모아 헐값에 파는 가게들이 오밀조밀 자리를 잡아 시작하면서, 제법 규모가 큰 외국인을 상대로 한 보세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우리네 7, 80년대 이태원처럼 물건값에 비해 품질이 좋은 것이 많고, 해외 유명 브랜드이기 때문에 베이징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이곳을 많이 애용한다.
어느 날 나는 침대 커버를 사기 위해 베이징의 보세촌 구역에 있는 상점을 찾았다. 그런 대로 괜찮은 것이 눈에 들어와 나는 흥정을 시작했다. 종업원 아가씨가 처음에 480위안을 불렀다. 나는 130위안을 제시했다. 흥정은 주인이 값을 한 번 매기면, 다시 손님이 액수를 줄여 값을 대는 식이다. 종업원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더니 가장 낮은 가격이라며 400위안을 제시했다. 나는 다시 150위안이면 사겠다고 했다. 나는 ‘오늘 꼭 이것을 사지 않아도 된다는 듯’ 20여 분이나 여유를 부리며 흥정을 이끌었다. 흥정에 있어서 유리한 고지에 선 사람은 나라는 걸 과시하는 셈이었다. 돌아 나오는 시늉을 몇 번 한 끝에 그녀가 350위안까지 내려 불렀다. 그녀는 나보고 “닌 쩐 후이 마이 똥시(당신 정말 물건 살 줄 안다)”라는 표현을 쓰면서 330위안에 가져가라고 했다. 나의 이런 물건 사는 법은 중국인들에게서 배운 것이다. 저가품이건 고가품이건, 신품이건 중고품이건 간에 장사꾼에게 눈 하나 꿈쩍하지 않으면서 물건 원가의 15퍼센트 내지 20퍼센트를 불러대는 중국인 소비자들을 너무도 많이 보았던 터라 나도 이제 중국인 장사꾼을 상대로 할 때만큼은 강심장이 되었다.
나는 다시 300위안이면 사겠다고 말했다. 원래 150위안에 사려고 했는데 지금 300위안까지 올라갔으면 나는 돈을 두 배로 쓰게 되는 셈이 아니냐면서 배짱을 부렸다. 어느 틈에 들어 왔는지 가게 주인이 들어와 대충 설명을 듣더니 나에게 말했다. 10위안만 더 쓰라는 것이다. 나는 주인의 얼굴을 보니 이것마저 안 들어주면 기분상 안 팔 것 같아서 주인의 체면을 살려주는 척하며 310위안에 동의했다. 침대 커버를 싸주면서 점원은 다시 한 번 나에게 물건 살 줄 안다고 칭찬 아닌 칭찬을 했다.
중국인을 알아야 중국에서 살아남는다
요즘 한국인이 중국 투자에 실패하는 사례가 많다. 이질적인 배경을 지닌 나라에 투자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국과 상대국의 정치․사회․문화적인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중국에 대한 투자와 접근방법도 다르지 않다. 선양 정부 외사처에 근무하는 고 처장의 소개로, 따리앤 대외경제무역부의 조 처장과 식사를 나누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경제 마인드를 갖춘 공무원이었는데, 중국 내에 투자한 한국 기업들의 성공률이 왜 그렇게 낮은가 하는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원래 경제적 능력이 없는 개인 사업가나 중소기업이 자신의 능력을 부풀려 중국 측 파트너와 합자 및 합작을 시도함으로써 많은 모순점들이 나타나고 있다. 둘째, 한국인들은 성격이 급해서 투자 협의를 하면서 당장 계약을 체결하고 금방 투자를 하려고 하는데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중국을 알고 나서, 즉 시장조사가 완벽히 끝난 뒤에 투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