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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제의 유태인 파워

사토 다다유키 지음 | 가야넷
드림웍스 SKG의 공동출자 경영자인 데이비드 게펜은 전미 70위의 갑부로 개인 자산 33억 달러를 소유하고 있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이다.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CBS TV의 안내원으로 입사한 뒤 전설적인 탤런트 사무실인 윌리엄 모리스 에이전시의 우편 담당자 밑에서도 일했다. 그곳에서 타고난 협상 수완을 인정받아 게펜은 곧바로 뮤지션의 매니저로 발탁되었다.



그가 이 업계에서 빠른 속도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탤런트 발굴 능력 덕분이었다. 유망한 뮤지션을 발굴하는 일에서 게펜을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1967년 게펜은 무명이던 로라 니로에게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재능을 발견하고는 본업을 뒷전으로 한 채 그녀를 키우는 매니저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CBS 레코드에서 선지급금 450만 달러라는 거액을 받고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1970년에는 레코드 회사 어사일럼(Asylum)을 설립하고 록밴드 이글스와 조니 미첼 등을 히트시켰다. 그 외에도 게펜은 뮤지컬의 프로듀서로서도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1983년에 개봉한 에서는 배우 톰 크루즈를 내세워 영화인으로서 게펜의 입지를 확고히 굳혔다. 또한 브로드웨이의 대히트작인 뮤지컬 <캐츠>도 그가 프로듀스한 작품이다.제3장 소매업 분야의 유태인



유태계 소매업의 왕자 버나드 마커스시애틀 유태인 사회와 스타벅스제4장 부동산 분야의 유태인

부동산에서 다양한 사업으로, 크라운 일가1968년 세계 최대의 반도체 업체인 인텔을 고든 무어와 함께 설립한 공동 창업자이자 현재 공동 회장인 앤디 그로브는 유태인이다. 직원 41,600명으로 2002년 포천 랭킹 65위인 인텔은 PC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미국 시장 점유율에서 85%를 차지한다. 그로브(본명 안드라스 그로프)는 유명한 조지 소로스와 같은 헝가리 태생의 유태난민으로서 젊은 시절에는 아주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956년 스무 살 때 수많은 진보적 헝가리인이 체포되는 가운데 망명을 결심하고 국경을 넘어 서쪽에 위치한 오스트리아 영내까지 도주했다. 미국에 건너온 뒤에는 친족 집에서 지내며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여 불과 4년만에 수업료가 면제되는 뉴욕 시립대학 공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에서 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0년 후반 일본기업의 공세 앞에 그 존속마저 위험했던 인텔을 세계 제1위 반도체 업체로 키워낸 그로브의 경영 수완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높다. 이 때문에 그로브는 지금까지 '미국 최강의 경영자 10걸'의 한사람으로서 종종 「포천」의 표지를 장식해 왔다. 반면 사생활은 검소하고 조신하였으며 개인 자산도 5억 달러에 불과하다.



그로브는 지적 창조를 촉진시키기 위해 자유로운 회사 분위기를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타협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엄격한 경영자세로 직원을 상대해 왔다. 이처럼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엄격한 경영 자세는 홀로코스트(유태인 대학살) 경험과 공산권으로부터 생명을 건 도피를 한 망명 유태난민의 생활을 했던 젊은 시절부터 배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텔에 성공을 가져온 그로브의 경영 방침 중 또 한가지는 사원교육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이 회사는 막대한 교육비를 사원들을 위해서 아끼지 않고 투자해 왔다. 1997년 인텔의 사원 교육비는 무려 5억 달러를 웃돌았다.뉴하우스 일가는 미디어 산업계의 유태인 갑부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재벌가족사를 가졌으며 신문, 잡지라는 전통적인 미디어를 통해 부를 축적해 왔다. 오늘날 이 재벌가족을 대표하는 사람이 뉴하우스 가의 새뮤얼 2세와 도날드 형제이다. 이들은 각각 50억 달러의 개인 자산을 소유하고 있으며, 미국 전체에서 44위에 오른 갑부이다. 이들 형제가 소유한 어드밴스 출판사는 개인 소유의 미디어업계 중에서 미국 최대 규모이다.



이들 형제의 아버지인 새뮤얼은 빈곤한 러시아계 유태 이민족의 아들로서 뉴욕 시내의 로워 이스트사이드 지구에 위치한 집합주택에서 태어났다. 새뮤얼은 몸이 약했던 아버지 대신에 열세 살부터 같은 유태인인 하이먼 라자러스 판사의 법률사무소에서 잔심부름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근면한 모습을 보고 라자러스는 망해가는 뉴저지주의 일간지 「베이영 타임스」의 재건을 열여섯 살의 새뮤얼에게 맡긴다. 이것을 정상궤도로 끌어올린 그는 라자러스의 호의로 이 작은 신문사의 경영권을 아주 헐값에 넘겨받았다. 이를 계기로 새뮤얼은 신문 사업에 진출하게 되었다.



새뮤얼이 신문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매수 대상으로 매력적이고 수익성이 높은 신문을 찾아내서 몇 번이고 매수를 시도해 결국 수중에 넣는 집요한 사업수완 덕분이었다. 이러한 매수 비즈니스를 전개할 때 그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은 큰 장애였다. 이때 새뮤얼이 생각해 낸 것은 '나무랄 데 없는 와스프'(WASP : 와스프란 미국 사회의 엘리트이며 앵글로 색슨계의 백인 신교도를 가리키는 말이다)를 내세우는 작전이었다. 새뮤얼은 반유태주의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정작 자신은 동포들의 고난에 매우 인색했다. 시오니즘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고, 이스라엘에 보내는 다른 유태계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결코 이해하려 하지 않았으며 헌금에도 응하지 않았다.



새뮤얼은 항상 검소했고 절약을 생활화했다. 이 절약 정신이 그에게 성공을 가져다준 두 번째 비결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엄격한 경비 절약을 위해 오랫동안 본사 건물을 두지 않았다. 계열 신문사에서 보내오는 재무 보고서가 들어 있는 서류가방을 들고 있는 자신이 바로 '걸어다니는 본사'였던 것이다. 그 뒤로 새뮤얼이 맡았던 '걸어다니는 본사'는 '검은색 캐딜락 승용차 뒷좌석'으로 바뀌긴 했지만 그는 은퇴할 때까지 이러한 경영 방침을 일관했다.



새뮤얼이 성공한 세 번째 이유로는 시장 독점 전략을 들 수 있다. 그가 자주 쓴 전략은 기존의 신문을 모두 매수하여 그 후에 합병시키든가, 아니면 한 가지 신문만 남겨두고 다른 신문을 폐간해 버리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해서 시장을 자사 독점 상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의 네 번째 성공 비결은 자금 경영에 있어서 은행에 의존하지 않아 재무 내용을 비밀에 붙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의 오랜 비즈니스 인생 중에서 은행에서 돈을 빌린 경우는 겨우 다섯 번 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유태계 소매업자를 대표하는 사람은 32억 달러의 개인 자산을 보유한 버나드 마커스이다. 그는 세계 최대 규모의 가정용 건축자재 유통회사인 홈 데포의 창시자이며 자사 주식의 18%를 소유하고 있다. 홈 데포는 1998년 1,300억 달러 규모의 이 업계에서 18%의 점유율을 지켰다. 홈 데포가 놀라운 성장을 지속하는 비결로는 창업자인 마커스의 뛰어난 생존 감각을 꼽을 수 있다.



마커스는 어려운 형편에 처한 가운데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49세에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한 그의 성공담은 대기만성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희망이 될 것이다. 마커스는 손님이 자신의 가게에 와서 원하는 물건이 없다고 하면 손님이 원하는 상품을 바로 주문해서 다른 가게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고객의 집까지 배달해 주었다고 한다. 홈 데포의 성공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마커스는 기존의 상품들을 파는 방법을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소비시장을 창조했다. 1979년 홈 데포 설립 이전에는 주말에 집 단장이나 수리를 하려면 여러 종류의 가게를 돌아다니면서 쇼핑을 해야 했다. 게다가 집을 단장하는 기술을 친절히 가르쳐 주는 가게도 없었다. 홈 데포는 각 점포의 판매장에서 집수리의 기술을 가르쳐 주면서 마케팅을 펼쳤다.별 모양의 장식을 단 왕관을 머리에 쓴 인어를 트레이드 마크로 하는 커피 체인점 스타벅스의 이름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현재 스타벅스의 직원은 2만 6천명, 매출액은 26억 4,900만 달러로 2002년 포천 랭킹 550위로 커피 전문점으로는 세계 최대이다. 또한 스타벅스의 사주 겸 회장인 하워드 슐츠는 유태인으로서 '미국을 대표하는 50명의 CEO'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된 인재이다.

하워드 슐츠가 커피음료의 소매업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에스프레소 커피를 제공하는 이탈리아의 카페라테 방식에 재빨리 눈을 돌려서 그것을 최초로 미국에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결단이었다. 그 당시 업계 종사자들은 한결같이 "미국인들은 진한 에스프레소를 즐기지 않을 것이며, 한잔에 1달러 50센트나 하는 고급 커피를 마실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슐츠는 그런 업계의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주변인의 시각'을 가졌기에 틈새시장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사업의 기회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렇게 남들이 쉽게 보지 못하는 곳을 볼 줄 아는 '주변인의 시각'을 가진 사람 중에는 유태인이 많다. 유태인은 사회 중심부에서 소외되고 주변으로 쫓겨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변에서 중심부를 향한 비판적인 시각으로 계속 관찰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슐츠가 성공을 거둔 또 하나의 이유는 복리후생을 보장함으로써 직원의 애사심을 붙잡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인텔 창업자는 유태 난민 출신제2장 오락 미디어 산업의 유태인

구 미디어 세력의 강자 뉴하우스 형제할리우드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정보통신 산업에서 활약하는 유태인들 중 단연 선두에 있는 사람은 개인 자산 580억 달러로 2000년 전미 부호 순위 제2위인 동시에 세계 제2위의 대부호 래리 엘리슨이다. 엘리슨의 자산은 현재 세계 제1위인 빌 게이츠의 630억 달러를 급속하게 따라가고 있는데 엘리슨이 창업주로 있는 오라클 역시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 소프트에 이어 세계 제2위의 PC 소프트웨어 제조업체이다. 1977년에 직원 4명과 함께 만든 오라클에 엘리슨이 출자한 자본금은 1,200달러였고 주가는 1센트였으나 불과 23년만에 오라클의 직원은 36,802명으로 늘어났고 매출액은 71억 4천만 달러에 달했으며, 포천 랭킹 234위인 세계적인 기업으로 급성장했다.



그의 전기를 집필한 마이클 윌슨은 "계산이 빠른 에고이스트, 협박, 과대 선전을 이용한 정치적이며 계략적인 수완으로 사업에 성공을 거뒀다.", "적을 멸망시키는 것만으로 부족해서 치욕을 줘야만 했다."라며 혹평을 했다. 엘리슨이 이러한 성격의 소유자로 성장한 배경에는 과거 부모에게 버림받고 양부모에게 구박받았다는 사실이 숨겨져 있다. 이 같은 배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성공하여 인정을 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윌슨은 말한다. 엘리슨은 컴퓨터에 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전문적인 엔지니어가 아니었다. 그러나 기술 전반을 순식간에 파악해 그것을 비즈니스 기회로 만드는 데는 남다른 재능을 발휘하였다.



엘리슨이 오라클을 세운 1977경, 당시에 대기업들은 새롭게 등장한 PC를 사무에 활용하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으나 PC를 충분히 활용하기 위해 필요한 소프트웨어가 제대로 개발되어 있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엘리슨이 소프트웨어라는 새로운 시장을 겨냥하여 제품 개발에 뛰어든 것은 당시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이러한 소프트웨어 비즈니스는 엘리슨과 같이 자금이 부족한 신규 사업자에게 이상적인 천직이었다. 소프트웨어의 경우 대규모 자금이 필요 없고, 오로지 상상력 넘치는 두뇌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품당 생산비용도 아주 낮아 제품이 잘 팔리기만 하면 엄청난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엘리슨에게 막대한 재산을 안겨 준 것은 세계 최초의 상업용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 개발이었다. IT업계의 거인 IBM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비즈니스 기회를 잡은 엘리슨은 제품화를 서둘렀고 순식간에 시장을 점유하여 자사 제품을 IT업계의 표준으로 만들었다.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하는 남캘리포니아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경제적 번영 속에서 가장 눈에 띄게 발전한 지역이다. 오늘날 남캘리포니아 최대 주택건설업자이며 '미스터 오렌지군'이란 별명을 가진 엘리 브로드는 케이비 홈의 사주 겸 회장을 맡고 있다. 케이비 홈은 직원 2,700명에 매출액이 46억 4,700만 달러로 2002년 포천 랭킹 355위인 주택건설기업으로서는 규모가 큰 회사이다. 브로드가 큰 부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첫 번째로 베이비붐 세대의 결혼과 그에 따른 수요에 맞춰 품질 좋고 저렴한 가격으로 주택을 대량 공급하였고, 두 번째로 어른이 된 베이비붐 세대를 표적으로 노후저축투자를 권유하고 그것을 위한 금융서비스 회사인 선 아메리카를 설립한 것이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또 한 사람의 유태인 부동산 왕 도날드 브렌은 원래 영화 프로듀서로 할리우드 일대의 부동산 개발에서 이름을 떨친 밀턴 브렌의 아들이다. 현재 도날드는 자기 소유의 부동산 운영관리회사인 어빙 아파트먼트 커뮤니티스를 통해 오렌지 군내에 90만 평방 마일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화장품 업체인 에스티 로더는 현재 직원 1만 5,300명, 매출액 약 46억 달러로 2002년 포천 랭킹 360위의 대기업이다. 이 회사는 전 세계 고급 화장품 시장 점유율의 약 5분의 1을 차지하고 미국 내에서는 44%의 높은 점유율로 업계 1위를 자랑한다.



회사의 회장인 레너드 로더와 동생 로날드의 어머니인 에스테 로더는 '미의 제국' 창조자나 다름없다. 그녀는 장사꾼의 딸로서 어릴 때부터 미적 감각이 뛰어났었다. 1930년에 결혼한 그녀는 남편인 조지프에게 외삼촌의 공장에서 화장품 제조를 돕게 하고, 자신은 세련된 행동과 능란한 화술로 메이크업 제품을 시범 판매하였다. 방문 판매원으로 경험을 쌓은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건 회사 '에스티 로더'를 창업한 것은 1946년이다. 이때 미국 경제는 장기적인 번영기에 접어들었고, 컬러시대가 되면서 여배우들의 화장을 모방하는 것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창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녀가 먼저 착수한 일은 고급 화장품 기업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 일이야말로 그녀의 성공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1946년 창업이래 순조롭게 업적을 쌓아온 그녀는 마침내 폭발적인 인기 상품을 출시하였다. 그것은 1953년에 회사 최초로 시판한 향수 '유스 듀'(청춘의 이슬)였다.

1958년에는 펜실베이니아 경영대학원을 수료한 장남 레너드가 가업에 참여하였다. 그는 회사와 판매 대리점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90년대에 들어선 뒤로도 에스티 로더는 순조로운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로더 일가가 가업으로 하는 화장품 산업과 유태인은 오랫동안 밀접한 관계를 가져왔다. 화장품 산업은 20세기 전반에 동구권계 유태 이민족들이 그 재능을 꽃피운 민족적인 사업이기도 했다.제5장 전통적인 유태식 비즈니스



'미의 제국'을 이룩한 에스테 로더완구 산업과 유태인전미 87위의 갑부인 레스터 크라운이 소유한 개인 자산 28억 달러의 주된 내역은 다음과 같다. 직원 2만 9천명, 2002년 포천 랭킹 166위의 군수산업 업체인 제네럴 다이나믹스 주식 6.7%와 힐튼호텔 주식 7%, 샌프란시스코 센트럴 철도 주식 17% 등이다. 소유한 부동산 대부분이 시카고 시내와 뉴욕 시내의 고층 주택군, 일리노이 주의 탄광과 대농장이다.



레스터의 아버지 헨리는 고등학교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여 모은 돈으로 형인 솔로몬과 함께 작은 건축자재점을 시작했다. 그는 철도 대신에 수로를 통해 자재를 운송하는 방법으로 운송비용을 대폭 삭감하였다. 그는 기업 매수 사업에서도 활약해 1970년에는 일약 세간의 주목을 모았다. 그것은 제네럴 다이나믹스의 주가가 하락하는 때를 지켜보다가 700만 주에 가까운 이 회사 주식을 싼값으로 사들이면서부터였다. 그 동안에도 헨리는 적극적인 부동산 투자를 반복해 왔다.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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