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움직이는 10인의 CEO
홍하상 지음 | 국일증권경제연구소
중국을 움직이는 10인의 CEO
홍하상 지음
국일증권경제연구소/2002년 3월/324쪽/12,000원
제1장 중국의 IBM, 롄샹(聯想)의 양위안칭(楊元慶)과 류촨즈(柳傳志)
중국인들은 롄샹을 가리켜 ‘중국의 IBM' 혹은 ’중국의 자존심‘이라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롄샹은 중국 최대의 컴퓨터 제조회사로서 서버, 마더보드와 같은 주변기기에서부터 정보 서비스, 소프트웨어 운영, 시스템 통합 및 전자상거래, 노트북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컴퓨터 관련 상품을 제조하는 기업이기 때문이다. 그 명성답게 롄샹은 2000년도에 262만 대의 컴퓨터를 생산, 284억 위안(약 4조 5,000억 원)의 매출액을 올리며 중국 컴퓨터업계에서 1위를 기록하였다.
양위안칭의 등극
2001년 4월 20일. 중국의 IBM이라는 롄샹집단유한공사에 약관 37세의 청년 양위안칭이 총재로 취임했다. 양위안칭의 등극은 중국 IT 업계에서 이미 예상된 일이었다. 양위안칭이 1989년 롄샹에 입사한 후 불과 5년만에 마케팅 담당 사장에 취임하였고 1998년 부총재의 자리까지 오르자 머지않아 그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업계는 전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험 부족을 우려하여 IT 산업의 원조라 불리는 류촨즈 총재가 향후 몇 년간은 롄샹의 경영을 이끌어가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류촨즈 총재는 불과 57세로 경륜과 체력이 모두 절정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류촨즈 총재는 “급변하는 IT시장에는 좀더 젊은 사람이 경영을 책임져야 한다.”, “IT기술을 따라잡기에는 너무 늙었다.” ,“롄샹의 3/4은 양위안칭의 노력이다.”라며 전격 사퇴를 선언하고, 양위안칭을 후임 총재로 지명했다.
“앞으로 롄샹의 경쟁 상대는 IBM, 마이크로소프트, 컴팩 등이 될 것이다.” 취임 연설에서 그가 던진 이 말은 롄샹이 본격적으로 세계 시장 공략에 나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이 말에 IBM이나 휴렛패커드,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세계적인 컴퓨터 회사들은 촉각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휴렛패커드와 IBM을 중국 시장에서 각각 3위, 4위로 밀어낸 장본인이 바로 양위안칭이기 때문이다.
중국 최초의 컴퓨터 개발
1989년 롄샹은 중국 최초로 286 컴퓨터를 출시했다. 오늘날 롄샹의 영문상호인 ‘레전드 홀딩(Legend Holdings)'의 유래가 된 286 컴퓨터 ’레전드 PC‘는 출시되자마자 중국 컴퓨터 시장의 80%를 장악하며 단숨에 천하통일을 이루었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90년 중국 정부는 컴퓨터 기술의 개발이라는 목표 아래 선진국의 컴퓨터 메이커에 대한 시장 개방을 선언했다. 복잡한 회사 설립절차를 간소화시키고 관세를 대폭 인하하는 특혜도 주었다. 그러자 미국의 IBM이나 델, 에이서, 컴팩 등이 대거 중국에 상륙하여 신생 기업인 롄샹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신기술과 마케팅 전략으로 중국 시장을 공략했다. 1990년, 결국 개방 첫 해에 롄샹이 개발한 ‘레전드 286 컴퓨터’는 IBM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델, 에이서, 컴팩 등이 중국 시장을 점령해 버렸다.
1994년 3월, 롄샹그룹은 컴퓨터 부문을 따로 떼어 독립법인을 만들면서 초대 사장으로 양위안칭을 전격 발탁했는데 그를 발탁한 사람은 역시 그룹 총재인 류촨즈였다. 양위안칭은 사장으로 취임한 후 외국 제품에 대항할 수 있는 기술과 제품 개발에 힘썼다. 그 결과 양위안칭은 중국 시장에 보급형 PC인 E 시리즈를 내놓았고, 1995년 11월에는 중국 최초로 펜티엄 기종을 개발, 출시했다. 그러나 롄샹의 PC 제품은 완전히 실패했는데 그 이유는 이미 세계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PC에 비해 한 세대 늦은 제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양위안칭은 제품의 성능을 해외 대기업 제품과 동일하게 올려놓은 뒤 시장 탈환을 위해 할인 판매작전을 폈다. 업계에서는 롄샹의 저가 판매전략을 자살행위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 힘입어 1996년까지 시장점유율이 6.9%였던 롄샹은 1997년 들어 10.7%로 시장점유율이 상승하면서 결국 1위 자리를 탈환했다.
롄샹의 고속성장 비결
첫째, 롄샹의 기업경영은 미국이나 유럽보다 더 자본주의적이다. 모든 사업은 철저하게 수익을 목표로 전개하고 있다. 둘째, 정부 역시 국유 첨단기술업체로서 롄샹에 대한 자금대출이나 세금우대 등 자국산업 보호를 위해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셋째, 중국과학원이 대주주이기는 하지만 경영, 인사, 재무에 대해서는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넷째, 롄샹은 인재를 중시한다. 롄샹은 학력보다는 능력 위주로 직원을 채용하며, 승진 및 처우에 있어서 파격적인 전략을 시행하고 있다. 다섯째, 롄샹은 젊은 회사다. 양위안칭 회장 자신이 30대이기도 하지만 평소에도 늘 ‘젊은 경영’을 외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회사 자체가 젊다. 직원들의 평균연령은 28세, 임원의 평균연령도 35세 이하이다. 여섯째, 인사고과는 상사는 물론 부하직원에게까지 평가를 받는다. 일곱째, 롄샹은 이런 실적 위주의 경영 특징 외에 기술개발도 첨단을 달리고 있다.
제2장 가전업계의 황제, 하이얼(海爾) 그룹의 장뤼민(張瑞敏)
하이얼 그룹은 중국공산당 정부가 WTO 가입을 앞두고 벤치마킹 대상 제1호로 꼽은 업체였다. 2000년 11월 6일 「인민일보」는 ‘WTO 가입을 앞두고 격렬해질 국제 경쟁에 대비해 기업의 경쟁력을 기르기 위해 하이얼의 선진 경험을 학습하자’는 사설을 실을 정도였다. 그만큼 하이얼의 경영방식이 앞서 있다는 얘기다. 하이얼을 성공으로 이끈 총재 장뤼민은 오늘날 중국에서 가장 성공한 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품질만이 경쟁력이다
1984년 장뤼민의 나이 35세 때 공산당 정부는 그를 칭다오 냉장고라는 회사의 공장장으로 승진 발령했다. 그가 부임한 칭다오 냉장고는 독일에서 출자한 소규모 회사였는데 이익은커녕 147만 위안이나 되는 빚을 안고 있는 그야말로 형편없는 회사였다. 이 회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제품의 품질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칭다오 냉장고에 부임한 후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불량 냉장고 깨부수기였다. 완제품 냉장고를 하나씩 점검하고 불량품으로 판명된 냉장고를 모두 골라내 공장 앞마당에 쌓아 놓고, 전 직원이 보는 가운데 해머를 들고 직접 깨부쉈다. 그날 그가 깨버린 냉장고는 모두 76대였다.
그는 우선 1등품으로 판정 받지 못한 냉장고는 모두 소각하도록 회사 규정 자체를 바꿨으며, 불량품을 생산한 직원과 책임자는 피해액을 월급에서 공제하도록 했다. 또한 종업원에게 월급을 주는 것은 공장장도 아니고 사장도 아니며, 공산당 정부도 아닌 소비자라고 강조했다. 싼티에(철밥통, 철봉급, 철의자)에 익숙해 있던 중국 인민들은 자신의 봉급이 공산당 정부, 즉 나라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지 소비자가 준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소비자가 봉급을 준다는 장뤼민의 생각은 자본주의적 발상으로 공산당 치하의 국유 기업 경영자로서는 감히 하기 힘든 발상이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어디에서부터 출발된 것일까.
“誠眞到永遠(성실과 진실을 영원토록 이어나간다).” 그의 경영철학이다. 다분히 유교적인 그의 이런 생각은 그가 공자의 고향인 산둥성 출신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공자의 유교정신과 노자, 장자의 철학인 ‘노장지도(老莊之道)’를 경영에 접목시켰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즉 유학이 가르치는 윤리, 도덕의 정신이야말로 기업경영의 결정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이얼의 시스템 성공요인
하이얼은 지금 세계 500대 기업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브랜드 인지도는 이제 GE나 필립스와 같은 다국적 기업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2000년 매출은 406억 위안으로 지난 1984년 348만 위안의 매출에 비하면 1만 1,600배의 초고속 성장이다. 현재 하이얼은 160개국에 제품을 판매하고 있고, 62개의 해외 판매거점과 3만 8,000여 개의 영업망을 깔아 놓았다. 그렇다면 하이얼의 고속성장의 배경은 무엇인가.
첫째, OEC관리법이다. OEC는 ‘Overall Every Control and Clear’의 약자로 그 내용은 ‘일사일필 일청일고(日事日畢 日淸日高)’이다. 즉 ‘그날 업무는 그날 완성하고, 마무리는 깨끗하게 하며 매일매일 점진적 성장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둘째, PDCA 시스템이다. ‘Plan, Do, Check, Action’의 약자로 계획을 세워서 일하고, 점검한 후 시장에 내보낸다는 뜻이다. 셋째, 80:20 원칙과 삼보법(三步法)이다. 80:20 원칙은 제품이나 공정에서 하자가 있어서 문제점이 발생하면 해당 라인 관리자가 80%를 책임져야 하며, 실무자는 20%를 책임져야 한다는 방식이다. 삼보법은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긴급조치 -> 과도기조치 -> 근본조치’라는 3단계 과정을 밟아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같은 문제가 반복적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넷째, 승진은 공개경쟁으로 급여는 실적에 따라 차등 지급한다. 다섯째, 아이디어를 봉급에 반영한다. 여섯째, 속도전 개념을 도입한다. 즉 스피드 경영을 중시한다.
제3장 여류불패, 우스훙(吳士宏)과 TCL 그룹
2000년 8월, 중국의 TC 그룹은 자사 TCL 이동통신의 핸드폰 광고모델로 한국의 톱 탤런트 김희선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모델료는 1,000만 위안(16억 원). 가히 천문학적인 숫자지만 김희선이 한류의 대표주자로 중국 청소년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에서 과감한 투자를 한 것이다. TCL 이동통신은 그들의 예상대로 한국의 톱 탤런트 김희선을 모델로 내세운 이후 판매가 급상승, 2000년도에 겨우 3억 위안이던 휴대폰의 매출액이 그 네 배인 12억 위안으로 껑충 뛰었다.
중졸 간호사 출신의 우스훙
현재 TCL 그룹의 총재는 리둥성이다. 리둥성 역시 중국 재계에서는 기린아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1981년 리둥성은 광둥지역이 개방특구로 지정되자 광둥성 후이저우에 TV 부품 생산업체인 TTK 가전유한회사를 설립하고 전기․전자․컴퓨터 부품을 생산했다. 그러다가 1996년 홍콩의 중견 TV 업체인 루스공사를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완제품 TV 생산에 들어갔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IT 분야에 본격적으로 투신하기로 결심, TCL 컴퓨터공사를 설립했다. 이때 컴퓨터 생산과 판매를 위해 중국 IBM 총재를 지낸 여류 경영인 우스훙을 전격 스카우트하게 된다.
우스훙의 지난 반생은 인간 승리의 드라마 그 자체였다.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그녀의 첫 직업은 간호보조사였지만 그녀의 타고난 배짱과 기지는 결코 간호보조사라는 직업에 만족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마다하지 않았고, 결국 서른이 되던 해 대학학력인정시험에 도전, 합격했다. 그때 마침 미국의 IBM이 중국에 진출했는데 그녀는 남몰래 익힌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IBM에 입성하게 된다. 처음에 그녀는 타자 비서로 발령 받았지만 낮은 학력 때문에 잡급직 사원과 마찬가지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그녀는 영업사원의 업무를 눈여겨보면서 밤을 새워 컴퓨터에 대해 공부했고, 불과 1년만에 컴퓨터와 영업의 기본 원리를 터득했다. 어느 날 회사에 홍콩 연수생 선발을 위한 컴퓨터 시험 공고가 붙었는데 결국 그녀는 홍콩 연수생의 일원으로 뽑혔고 연수가 끝나자 회사는 그녀를 영업사원으로 승진시켰다. 타고난 기지와 배짱으로 그녀는 어느 부서에서든 최고의 영업실적을 올렸다. 철저한 실적주의인 미국 회사의 경영방식은 학력에 관계없이 오로지 실적을 기준으로 그녀를 진급시켰다. 과히 파격 질주에 파격 승진의 연속이었다. 입사 9년 후 그녀는 화난지구 총경리(사장)가 되었다. 이때 얻은 별명이 남천왕(南天王)이다. 중국 남쪽에서는 당할 자가 없다는 뜻이었다. 결국 그녀는 당당히 IBM 중국 본사의 사장까지 승진했다. 그녀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다.
1998년 2월, 마이크로소프트 사는 우스훙을 전격 스카우트했다. 직책은 마이크로소프트 중국 본사 사장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로 이적한 우스훙은 그곳에서도 역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마이크로소프트의 1년치 영업실적을 단 6개월만에 달성해 냈다. 빌 게이츠는 이 여걸을 만나고 싶어 미국 본사에서 중국까지 날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해야 할까. 그녀에게 인생 최대의 불운이 찾아왔다. 백혈병에 걸린 것이다. 그녀는 마이크로소프트에 사표를 냈다. 그러나 그녀의 투혼은 실로 놀라웠다. 1년만에 백혈병을 이겨낸 것이다.
1999년 10월, 그녀의 능력을 눈여겨보고 있던 TCL 그룹의 총재 리둥성은 그녀를 TCL 정보통신 회장으로 스카우트했다. 리둥성은 전통적인 가전제품 생산만을 가지고 기업을 운영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판단, 인터넷 접속 서비스 업체로 전환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도 정보통신업체에서 마지막 승부를 걸겠다는 각오로 스카우트에 응했다.
취임 3개월 후인 2000년 초 그녀는 리둥성 총재에게 비밀 보고서를 올렸다. “우리 그룹에서 내가 할 일은 자원과 전략을 결합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전략적 결합의 목표는 제품과 조직운용을 모두 정보화하는 것이다. TCL에게 IT는 산업이자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 보고대로 그녀는 자원과 전략의 결합을 실행해 나갔다. 그 결과물이 이자자(億家家 : www.ejiaejia.com)라는 사이트의 개통이었다. 이자자는 말 그대로 풀이하면 ‘억 개의 가정을 연결시키는 집’이다. 즉 전체 중국을 하나의 플랫폼으로 연결하겠다는 시도였다. 그 슬로건인 텐디런쟈(天地人家)가 의미하는 것처럼 정보화 물류시스템의 디(地)와 가정용 디지털 제품인 런자(人家)를 인터넷 네트워크인 텐(天)으로 묶겠다는 것이다. 그 결과 TCL의 모든 제품은 인터넷상에 판매정보가 올려지고, 판매까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우스훙은 TCL 그룹의 간부들로부터 상당한 견제를 받고 있다. 1999년부터 본격화된 중국의 전자상거래 사업이 2001년이 되면서 실패한 것으로 가닥이 잡히면서 전자상거래 업체의 총수들이 상당수 낙마하고 있기 때문이다. 급기야 2001년 9월에는 우스훙의 방출설까지 떠돌았다. 그러나 2001년 10월 30일자 「인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스훙은 “이제 물은 호수로 변하고 있다. 대세는 되돌릴 수 없다.”며 자신의 사임설을 일축했다. 오히려 정보통신 사업에서 실패하면 자살하겠다고 강조하면서 비장한 각오를 불태우고 있다. 제4장 베이다팡정(北大方正)의 대부 왕쉬안(王選)
베이다팡정은 중국 최초의 벤처기업이다. 소프트웨어와 주변기기로 중국을 평정한 기업이고, 특히 한자문자 처리기술, 지문정보 인식기술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선두업체로 꼽힌다. ‘과학기술과 문명창조’라는 회사의 사훈처럼 이 회사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소프트웨어 개발과 시스템 통합 면에서 막강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또 인터넷 업계의 정보 시스템 통합 영역이나 은행, 보안, 세무, 증권업의 대형 정보 시스템, 인터넷 접속설비에 필요한 시설 생산에서도 발군이다. 본래 이 회사는 주종목인 인쇄기술 소프트웨어로 중국 천하를 평정했다. 매일 400만 부 이상을 발행한다는 「인민일보」의 편집, 조판, 인쇄 시스템에 대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회사가 바로 베이다팡정이다.
1988년 1월 10일 저녁 웨이밍 호반. 왕쉬안은 그 호수의 한쪽에 있는 정원에서 연회를 열고 있었다. 초대받은 손님은 국가경제위원회 인쇄장비 조정조의 부조장인 선충캉이었다. 어느 정도 연회가 무르익자 왕쉬안은 선충캉에게 앞으로 베이징대학이 직접 생산단위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이 발명한 한자 레이저 시스템을 베이징대학이 직접 생산해 판매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선충캉은 그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이에 왕쉬안은 베이징대학 학장에게 보고서를 제출하고 베이징대학은 지금까지 왕쉬안이 취득한 특허를 그의 주도하에 새로 설립하는 ‘베이징대학 신기술공사’에 양도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얼마 후 베이징대학이 40만 위안, 베이징시 하이뎬구 지방정부가 420만 위안을 투자하면서 베이다팡정이 설립됐다. 오늘날 중관춘에 있는 하이테크 기업 롄샹, 쓰퉁, 베이다팡정은 모두 이런 과정을 밟고 탄생한 세계적인 기업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