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WTO
수파차이 파닛차팍 지음 | 에코리브르
중국과 WTO
수파차이 파닛파착․마크 L. 클리포드 지음/박정숙 옮김
에코 리브르/2002년 3월/272쪽/11,000원
제1장 떠오르는 중국
중국 문호의 강제개방
수세기 동안 중국은 발전된 문명과 거대한 인구 덕분에 세계의 경제대국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1820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은 세계경제의 28.7% 이상(오늘날 미국의 점유율보다 크다)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중국은 현대적인 세계로의 도약에 무능함을 드러냈다. 서유럽이 산업화하는 동안 중국은 변화할 수 없었다. 미들 킹덤은 거대한 영토 안에 누에고치처럼 남아 있었다. 결국 중국은 억지로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었고, 외국에게 전례 없던 특권을 준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으며, 외국이 개입한 수십 년 동안 저자세를 취해왔다.
혁명의 시대 도래하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중국이 마침내 일어났다.”고 선포하고 모든 외국사업체를 철수시켰다. 마오쩌둥은 1956년까지 농업을 집단화하는 등 급진적인 농업개혁을 추진했다. 티베트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개인 농지를 폐지하였다. 토지개혁 후 첫 몇 해 동안은 생산성이 급등했지만 집단농장의 출현은 마오쩌둥이 상상하던 잉여곡물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그 뒤 1958~60년에 걸쳐 펼쳐진 대약진운동이 참담한 실패를 낳은 후 마오쩌둥은 자신의 혁명이 점점 관료화되는 것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1966년 문화혁명을 시작했는데 이는 어느 모로 보나 대약진운동만큼이나 비극적이고 파괴적이었다. 공식적인 중국 보고서에 따르면 1억 명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계급의 적’들은 원추형의 종이모자를 쓰고 행진해야 했다. 지방마다 급진적인 조직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서로 싸웠다. 심지어 부부싸움 같은 사소한 것까지 계급투쟁과 마오쩌둥 사상의 입장에서 조사를 받았다.
개혁하는 호랑이 올라타기
1976년 마오쩌둥이 죽은 뒤 덩샤오핑은 재빨리 권력을 강화하고, 2년 뒤 과감한 일련의 경제혁명을 선포했다. 덩샤오핑이 개혁을 시작한 1978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약 2억 명의 인구가 빈곤에서 해방되었다. 그러한 변화로 중국경제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았다. 가격통제를 해제하고 투자가 급증하자 1980년대 후반 인플레이션은 더욱 빨라졌다.
덩샤오핑의 위대한 유산 중 하나는 중국을 자신이 선택한 후계자 장쩌민에게 넘겨준 것이다. 겉보기에는 평범하지만 신중한 장쩌민은 중국을 떠들썩하지 않게 경제성을 계속하도록 도왔다. 장쩌민 주석의 가장 뜻깊은 행동 중 하나는 과거 서기장을 역임할 때 상하이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장쩌민은 전 상하이 시장 주룽지를 부총리로 임명했다.
주룽지는 1998년 총리가 되어 중국 역사상 빈틈없는 경제관료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1994년 이래 소비자 물가가 해마다 20% 이상 오르는 초인플레이션의 나락으로 떨어지자 경제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제동을 걸었다. 그리고 나서는 경기후퇴와 공급과잉으로 일어난 디플레이션을 해결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턱없이 부족한 인프라와 주택건설에 많은 돈을 쏟아 붓는 등 원대한 경기부양 프로그램을 채택하였다. 1999년에 갑자기 출현한 민간 부문과 정책 덕택에 많은 국민들이 단위체제의 족쇄에서 벗어났다. 모든 것을 고려할 때 놀라운 시간이었다. 경제개혁을 시작한 이래 거의 25년만에 연간 생산량이 1조 1,000억 달러, 세계 7위로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이 되었다.
계획 예정표
덩샤오핑이 시행한 혁명의 대부분은 1949년 이후 잃어버린 수십 년을 따라잡기 위한 것이었다. 엄청난 개혁이 실행되었으며, 더욱 현대적인 중국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개혁해야 할 부분이 많고 그를 위해 해결해야 할 어려움이 남아 있다.
중국에서는 사회적 불평등이 점차 심해지고 있다. 7천만 명은 여전히 절대빈곤에 허덕이고 있고, 다른 1억만 명은 하루에 1달러 이하로 연명하고 있다. 거대한 인구와 급격한 성장 때문에 중국은 환경면에서 빠르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미 중국의 많은 도시들이 세계에서 가장 오염이 심한 곳이 되었다. 그리고 석탄 사용과 도시화 이외에도 삼림 벌채와 발전으로 인해 해마다 농민들은 대규모의 홍수피해를 입고 있다. 중국의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는 제도와 관련한 것이다. 이는 WTO 가입으로 변화를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분야이기도 하다. 법원부터 경찰력, 기업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제도개선이 반드시 요구된다. 중국이 직면한 법률적․행정적 도전은 그 규모가 엄청나다.
중국이 WTO와의 협정을 이행할 만한 능력이 부족하다는 회의론자들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예를 들면 중국은 1995년 미국과 지적재산권을 충실히 이행하기로 합의했지만 지적재산권 침해는 여전히 주요한 문제다. 독립적인 사법부는 없다. 광범위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은 최고의 권력기관이다. 1980년대 중국은 흔히 인민해방군에서 제대한 군인을 재판관으로 임명했다. 당연히 그들 대다수는 공정한 법을 집행하기보다는 국가를 보호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중국의 변덕스러운 법률체제 때문에 외국인들은 강력하게 면책권을 요구하지만 가장 개혁이 활발하던 때조차 이상에 가까웠다.
만약 비관적으로 전망하는 쪽의 예상이 현실화된다면 WTO 가입으로 인하여 금융에서 농업에 이르기까지 보호받는 분야를 국내와 외국 경쟁사에 개방함으로써 수천 개에 이르는 국유 기업체는 개혁되거나 소멸할 것이며, 은행 역시 비슷한 변화에 직면할 것이다. 나라 전체에 수입 농산물과 공산품이 넘쳐날 것이며, 그 결과 농촌과 국유 기업체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게 될 것이다. 농촌에서는 항의시위가 빈번해지고 있다. 한편 국유 기업체에서 일하는 총 8,500만 노동자 가운데 2,500만 명은 중국 내에 세워진 더욱 효율적인 외국 기업체나 수입품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실로 가장 회의적인 시나리오는 WTO 가입으로 촉진된 변화 때문에 중국이 붕괴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중국에게 WTO 가입이 왜 필요한가
분명한 것은 WTO가 중국에 더 많은 개혁을 강요하리라는 점이다. 세계은행은 중국이 만일 국제적 경제 약속과 개방을 계획대로 차질 없이 진행한다면 세계무역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0년까지 지금의 3배 이상인 10%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수출도 배로 증가할 것이다. 세계의 노동집약적 상품생산량에서 중국의 몫이 점점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상대로라면 중국은 세계 2위의 무역국이 될 것이다. 이는 1위인 미국을 바짝 뒤쫓고, 3위인 일본을 훨씬 앞지르는 수준이다. 이러한 척도를 사용할 경우 중국은 2020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며, 19%를 차지하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 GDP의 8%를 차지할 것이다.
WTO 가입의 가장 분명하고 즉각적인 영향은 지속적인 외국인 직접투자일 것이다. 대개 외국 자본은 더욱 정교하고 이익이 되는 분야에 투자하며, 신기술 신경영기법과 관련이 깊다. 외국인 투자는 중국을 세계적 수출국으로 변모시키는 신기술을 가져오는 자원이다. 중국 경제를 대표할 자동차 공장과 식품가공공장을 건설하는 것과 중국 인력에서 가장 유능하고 영리한 직원들을 고용하는 것도 바로 외국인 투자 분야다. 외국인 직접투자는 또한 점점 국내 시장을 목표로 잡고 있다.
WTO 가입은 국내 경제변화를 가속화시킬 뿐 아니라 정부와 기업의 자유재량권을 줄이고 투명성을 격려함으로써 부패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WTO에 가입했다고 해서 중국이 하루 아침에 변하지는 않는다. 지금 WTO 체제 시작과 함께 중국은 더욱 깊고 빠른 변화의 물살을 타려하고 있다.
제2장 WTO : 약속과 위험
약속
무역은 세계화의 가장 분명한 증거다. 자유무역의 대가는 극적이고 명백하다. 선진국에서 사라진 일자리는 개발도상국에서 저임금으로 다시 나타난다. 무역의 대가는 집중적이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분명하지만 소비자들에게 이익은 널리 퍼진다.
또한 WTO는 1930년대 경제 대공황을 최악으로 만든 악성 보복의 순환가능성을 제한한다. 바세프스키는 “세계 경기의 40%가 후퇴한 1997~99년의 아시아 금융위기 동안 WTO 회원들이 견지한 관점 덕분에 세계는 아시아 국가들이 회복하는데 필요한 시장을 계속 개방해 놓을 수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WTO의 상호이익과 법의 통치 시스템은 10930년대와 같은 보호와 보복의 사이클을 예방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경제위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정치적 투쟁을 피할 수 있게 해 준다.”
WTO가 추진하고 있는 자유무역은 빈곤을 종식시켰다. 자유무역 주창자들의 연합, 곧 에비앙 그룹은 1990~1998년에 세계적인 시장개방으로 7억 명이 빈곤에서 탈출하도록 도왔다고 주장한다. 국경을 초월한 투자도 늘어나서 외국인 직접투자는 1982년 580억 달러에서 1999년 8,650억 달러로 폭증했다.
위험
문제는 더욱 자유로워진 무역이 후진국에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대개 선진국의 계속적인 보호주의, 특히 농민들과 섬유, 의류 산업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개발도상국 정부 내 무역과 국내 경제를 연결하는 정책의 부재다. 특히 투자와 무역이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하지만 더 자유로워진 무역의 주요한 이익국인 선진국이 가장 큰 소리로 불평하고 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전통적으로 노동과 환경론자들이 세계주의자들이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발전을 위한 방안으로 자유무역을 인정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자유무역에 방해가 되는 지침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외교 정책」의 편집장 모이시스 나임은 "1990년 베를린에서 군중들은 민주주의와 자유무역을 가로막기 위해 쌓은 벽을 무너뜨렸다. 반면 시애틀에서 또 다른 군중들은 ‘세계화로 인해 발생할 재난을 막아 줄 벽을 다시 쌓아올리기 위해 WTO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문제는 자유무역의 대가는 빠르고 급증하는데 비해, 그것의 이익은 느리고 불공평하게 분배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무역과 개방 자체가 성장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성장속도는 더욱 느려질 것이다. 개방과 성장 사이에는 강한 연관관계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유무역과 WTO가 국제적인 무역법원으로 행동할 힘을 가질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사실에 대해 국가들의 주권이 초국가적인 기구에 의해 침식될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한편 개발도상국은 이러한 새로운 국제질서가 선진국의 우려하는 사항을 반영하여 자신들의 국가 발전을 위한 적절한 정책을 채택할 능력을 앗아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진다.
WTO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특히 지적재산권 협정에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지금 그 협정은 주로 선진국에 기초한 다국적 기업에만 이익이 되고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삶은 희생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자유무역질서의 옹호론자들은 더 자유스러운 무역의 이익이 많은 사람들의 몫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문제 외에도 자유무역의 이익을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제3장 중국으로의 진입
1980년대 중반과 후반은 무역 긴장이 고조되는 시기였고, 미국과 유럽 같은 부유한 GATT 회원국들은 동아시아 특히 일본, 대만, 한국처럼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들과 다툼을 벌였다. 이들 세 나라는 자신들의 시장은 개방하지 않는데 반해 신중상주의 무역정책을 고수한다는 비난을 사고 있었다. 가장 큰 무역 잠재국인 중국이 다음 순번이 될 것처럼 보였다.
1989년 6월,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던 시위자들을 잔인하게 진압한 사건은 무역회담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세계은행 차관도 동결되었고, 외국과의 경제, 외교적 관계도 급속히 냉각되었다. 중국의 국제적인 힘이 증가함에 따라 경제적 압력도 가중되었는데 특히 미국은 불투명한 정부업무 절차와 무역정책뿐만 아니라 점점 증가하는 지적재산권 위반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섬유 수출증가도 긴장감을 더해 주었다.
1991년 10월, 미 무역대표부는 중국 무역장벽 조사권을 발의했다. 1992년 양측은 지적재산권 협정에 서명했다. 그러나 협정은 전혀 효과가 없었다. 1994년 미국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내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94%가 해적판인 것으로 밝혀졌다. 중국의 저작권 침해율은 거의 100%에 가까웠다. 설상가상으로 저작권 침해공장들은 내리 2년 동안 대규모 수출까지 하기 시작했다.
1995년 2월, 미 무역대표부 미키 캔터 대표는 11억 달러에 달하는 중국 상품에 대하여 100% 관세를 명령했다. 관세 대상 품목에는 자동응답 전화기에서부터 보석함, 아동용 자전거, 파도타기 널까지 모든 것이 포함되었고, 미국이 이제껏 발표한 가장 큰 무역보복이었다. 무역보복이란 위협에 중국 정부는 시정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제재 조치가 시작되기 전까지 일련의 강도 높은 협상을 계속했다. 1995~1996년 동안 양국이 무역전쟁에까지 이를 뻔한 지적재산권에 대한 힘 겨루기를 하는 동안 WTO 회원 가입 문제는 무역분쟁에 밀려 뒷자리를 차지했다.
클린턴 행정부 초기 냉각된 중․미관계는 1995년 여름 대만 리덩후이 총통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백악관과 미 국무부가 저지른 실수로 더욱 악화되어 중국의 WTO 가입 일정을 늦추고 있었다. 중국에게는 리덩후이 총통이 그의 모교인 코넬대학에서 연설하지 못하게 하겠노라고 약속한 후 국회의 반대에 몰린 행정부가 리덩후이 총통을 그의 모교인 코넬대학의 강단에 세운 것이다. 대만 정부를 합법화하는 어떤 조치에도 극도로 민감한 중국 지도자들은 1996년 대만 대통령 선거 바로 전날 대만 주변 바다에서 일련의 미사일 실험을 함으로써 보복했고, 미국은 두 개의 항공 모함을 대만해협에 급파하여 힘을 과시했다.
그러다 다행스럽게도 중․미관계가 1997년 10월 장쩌민 국가주석의 방미를 계기로 극적으로 진전되어 협상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가운데 중국 주석과 미국 대통령은 1997년 11월 밴쿠버 APEC 정상회담에서 다시 만났다. 하지만 EU와 미국은 계속해서 중국의 서비스 분야 양보가 미흡하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이 기간 동안 금융 서비스 시장을 빠르게 개방했을 경우의 위험을 잘 보여준 아시아 금융위기와 국내 경제개혁의 어려움을 알고 있는 많은 회의론자들과 싸워야 했다. 그리고 해고당한 노동자 및 불안스러운 농민들의 빈번한 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제네바로의 긴 행군
WTO는 관세가 무역의 유일한 장벽이 되는 날을 향해 노력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세계무역은 쿼터제에서 보건, 안보 기준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비관세 협정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대부분의 WTO 가입 신청국가는 쿼터제, 인증요구, 허가 또는 통지요구 같은 어떤 종류의 비관세 조치를 제거하라는 압력을 받는다. 또한 과학을 빙자한 무역장벽 뒤에 숨을 수도 있다.
몇몇 신청국들은 의정서에 그들 국가가 개발도상국임을 명시하길 원하고 있다. 이는 이른바 ‘특별하며 차별적인 대우’를 통해 약간의 숨구멍을 찾기 위한 것이다. 당연히 중국은 개발도상국의 지위를 강력히 원했다. 중국의 요구는 당연했지만 미국과 다른 선진국들은 중국에 개도국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WTO와 전체 세계무역체제를 왜곡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국은 완강했고, 결국 특혜적인 무역대우를 얻었다. 중국은 또한 수입에 대하여 현재의 비관세 장벽을 유지하고, 특정지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추구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그러나 1990년대 동안 협상이 경과함에 따라 중국은 이들 사항의 대부분을 양보했다. 하지만 국민의 9억 명이 농촌에 살고 있고, 그들의 1/3 이상이 농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농업에 대한 양보를 거부했다.
1990년대의 대부분을 미국은 중국에게서 최혜국 지위를 빼앗느냐 마느냐에 대하여 해마다 토론을 해 왔다. WTO 회원이 되지 못하면 중국은 미국이 무역을 무기로 사용하는 이런 위협에 대한 효과적인 보호장치를 가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