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가짜다
제스퍼 베커 지음 | 홍익
중국은 가짜다
제스퍼 베커 지음/이은선 옮김
홍익출판사/2001년 9월/386쪽/12,000원
제1장 소수민족과 절대 빈곤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에 둘러싸인 채 굶주리고 있다. 중국에서는 어디서 사느냐가 부와 사회계급을 알려주는 척도가 된다. 여기에는 주변부에 사는 소수민족이 연관된다. 즉 중국에서 소수민족, 산악지방, 그리고 가난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지리적 환경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빈곤층, 특히 고지대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빈곤층은 대부분 영양소 결핍으로 인한 질병을 갖고 있다. 갑상선 종과 뼈와 피부에 생기는 질병은 이들에게 흔히 발병하며 저능아 출산율도 매우 높은 편이다.
가난은 중국 어느 곳에나 존재하지만, 지리적 환경과 공간적인 거리가 결정적인 요인이다. 마을이 큰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더 가난하다. 1979년에, 공산당이 농민 3명당 1명 꼴인 2억5천만 명이 기아 속에서 살고 있다고 발표했을 때 서방 세계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런 중국이 농업 개혁을 통해 곡물 생산량을 마오쩌뚱이 사망한 1979년의 280만 톤에서 1984년에 407만 톤으로 늘리자 서방세계는 중국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때부터 중국은 처음으로 곡물 수출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래도 중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빈곤층을 가장 많이 거느린 나라였다.
1980년도 말에, 중국 정부는 1억 명 이상이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에 1993년에 가난을 근절시키기 위한 7개년 계획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 계획은 제대로 먹고 입지 못하는 8천만 명(이중 5천 8백만 명의 극빈곤층은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다.)을 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999년에 정부는 2000년까지 가난을 근절시키겠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2천만 명에서 5천만 명 정도가 농촌 평균 수입을 밑도는 수준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이들을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제2장 무너진 환상 그리고 노선의 수정
1958년부터 중국 대륙을 휩쓴 소위 ‘대약진운동’은 중국을 공산주의의 유토피아로 만들려는 마오쩌뚱이 가졌던 오랜 이상의 결집이었다. ‘국가가 모든 사람들을 먹이고 입할 것이다. 모든 농민들은 붉은 깃발 아래에서 총을 들고 행진하는 군인과, 천을 만드는 노동자로 변신할 것이다.’ 마오쩌뚱 하에서 국가는 모든 것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보답으로 농민들에게 돌려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는 식량이 없을 때 나라에서 곡식을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허난성(河南省)의 한 도시에서 만난 농민의 말이다. 당시 허난성은 기근이 가장 심했던 지역 중 하나로 당국은 8명 중 1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었지만, 실제로는 이 지역 인구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대약진운동의 실패 후에도, 마오쩌뚱은 중국 농민을 ‘새로운 중국’에 걸맞은 ‘사회주의 인간’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집요하게 추진했다. 문화혁명 기간 동안 모든 형태의 종교는 금지되었고 많은 교회, 이슬람 사원, 불교사원, 성소와 기념비들이 무참히 파괴되었다. 탄생, 결혼, 사망, 그리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행해지던 기본적인 의식마저도 금지되었다. 이러한 ‘봉건적 미신’들과 함께 공산당은 카드놀이와 같이 간단한 오락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 같은 집요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유토피아는 건설되지 않았으며, 농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져 갔다.
1976년에 마오쩌뚱이 죽고,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숙청되었던 덩샤오핑이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선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였다. 복권된 덩샤오핑은 중국 현대사의 전환점이라 평가되는 제11의회의 제3총회에서 마오쩌뚱의 농경정책을 수정하는 대대적인 개혁작업을 선언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61년에 실험적으로 시행되었던 일가 계약 의무제도의 재도입이었다. 그리고 그는 농산품과 수제품을 사고 팔 수 있는 자유시장을 장려했으며 농민들이 외부인력을 고용하는 것도 허용했다. 이때부터 인민일보는 사람들에게 ‘부자가 되는 일은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도시에서는 자유 시장과 개인이 경영하는 식당들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매일 이른 새벽에 농민들은 계란, 닭, 여러 종류의 채소, 과일, 생선에 심지어는 돼지까지 싣고 각 도시 외곽의 도로로 쏟아져 나왔다. 누구나 이 농산물을 돈을 주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현 정부의 정책이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는 두려움을 계속 조장했다. 정부가 농민의 의욕을 북돋아 주기 위해 곡물에 더 높은 가격을 쳐준다면, 소비자 가격을 올리지 않는 이상 정부에서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두려움이 현실로 다가온 것은 80년대 후반이었다. 1986년에 정부는 몇 개 품목에 대한 보조금을 대폭 줄였다. 그러자 소금, 성냥과 같은 품목에 대한 매점매석 행위가 이어졌고 인플레이션은 두 자리 수를 기록하게 되었으며, 도시민의 실질소득은 감소하게 되었다. 1988년에 중국은 다시 돼지고기, 설탕, 계란 등을 배급하게 되었고 대량의 곡물을 외국에서 수입하게 되었다. 1989년에만 1,600만 톤을 수입했다. 이 과정에서 지방 관리들의 부패가 갈수록 심해져 중앙정부의 권력은 물론이고 공산당 자체의 힘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1990년대 초에 리평(李鵬) 수상이 이끄는 보수주의자들이 다시 권력을 잡았을 때, 그들은 국가의 역할을 증대시키고 농촌에 질서를 재확립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사적인 곡물매매가 다시 금지되었고, 정부는 곡물생산량을 늘리는 데 집중했다. 10년 간 황폐한 상태로 버려진 땅을 다시 복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작용하기 시작한 시장의 힘을 멈추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부는 더 이상 곡물에 대한 독점을 유지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농민들에게 곡물에 대한 시장가격을 지불함과 동시에 도시의 소비자들까지 보호하기에는 국가 재정이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국영곡물창고는 큰 손해를 봤고 빚은 점점 더 늘어만 갔다. 1992년에 국영 곡물창고의 빚은 43억 위안에 달했고 농민들에게 발행한 차용증서도 330억 위안에 달했다.
1995년 미국의 한 전문가는 20년 내에 중국 인구에 식량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세계 시장에서 팔리는 곡물을 전부 사들여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중국 정부는 그 해에 미국 시장 가격의 2배를 주고 옥수수를 사들였고, 1997년에는 10년 전 조달량의 2배인 1억 1천만 톤 이상에 달하는 여름 수확량 전부를 사들였다.
문제는 현재에 와서도, 그리고 앞으로도 중국의 농업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 농촌의 점차적인 민영화는 분명 농민의 사회적 위치에 큰 변동을 가져올 수 있지만,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농업기술은 아직도 원시적이고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은 90% 가량의 수확과 80% 가량의 파종이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곡물의 10%만이 상품으로 팔려나가며 이것조차도 제대로 포장되지 않고 있고, 생산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국에서 재배되는 식량의 70% 정도는 농민들이 집에서 먹거나 지하실에 저장해두고, 나머지 20%는 질보다 양을 따지는 국가 지급용으로 사용한다.
일본, 태국, 그리고 한국과 같은 주변국들과 비교해 봤을 때 중국은 더 넓은 1인당 경작지를 갖고 있고 농경지를 더 늘릴 수 있는 여지도 충분하다. 그러나 경작지를 더 늘리는 것은 관개사업과 우량 품종에 대한 투자를 필요로 한다. 문제는 농민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갖지 않는 이상, 이런 투자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이 높은 소득을 가져다주는 상업적인 농업을 하고 싶다면, 엄청난 사회적 변화를 겪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현재 중국은 약 4억에서 7억의 인구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만약 상업적 농업이 실현된다면 필요한 인력은 2억 명 정도가 된다. 그럼 나머지 사람들은 무엇을 한단 말인가? 상업적 농업이 실현되어도 문제가 발생하는 딜레마를 안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1990년대 후반에 이미 농촌의 실업자들은 4억의 농촌 노동 인구 중 1억 6천만 명이나 되었다.
제3장 개혁과 좌절
우리가 전에 버스를 타고 저장성(浙江省)의 한 마을에 도착했을 때 일이다. 그때 우리, 외국 특파원들은 기와지붕의 발코니와 앞마당에 호수가 있는 빌라들이 가득 들어선 길을 보고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가 1986년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중국에서 부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들어오세요, 들어오세요.” 우리는 왕씨의 재촉을 받으며 철로 된 대문을 통과해, 반짝거리는 대리석으로 포장된 안뜰을 지나갔다. 안뜰의 중앙에는 로마시대의 것만큼이나 화려한 분수가 우뚝 솟아있었고, 그 한가운데에서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물고기가 힘차게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안뜰 구석엔 반짝반짝 빛나는 빨간색 오토바이가, 다른 한쪽엔 새로 구입한 듯한 하얀색 세탁기가 서 있었다.
우리가 구경을 마치고 거실에서 금테가 장식된 찻잔으로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외무부에서 나온 조씨가 설명했다. “왕씨는 부유한 농민입니다. 제11의회 제3총회 이후 왕씨처럼 다른 농민들보다 부유해진 이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죠.” 1980년대에 주문처럼 반복되던 이 말은, 1978년 말에 열린 공산당 회의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 회의로 덩샤오핑의 권력은 더욱 강력해졌고, 그 자리에서 그는 중국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정책들을 채택했다. 마오쩌뚱의 평등주의 노선을 버리고, 인민 행정구를 해체하며, 시장을 다시 열고 농민들이 땅을 임대하여 자신의 사업을 갖는 것을 허용했던 것이다.
수정 정책의 창시자 덩샤오핑과 그의 참모들 후야오방이나 자오쯔양(趙紫陽)조차 이렇게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던 이들은, 그러한 정책들이 단순히 식량생산의 증가를 가져올 것이라고만 기대했는데, 실제로 중국을 산업화의 방향으로 이끌어버렸던 것이다.
1980년대 발전을 시작으로, 모든 지방의 농민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부자가 되길 원했다. 그들은 중국에서 가장 큰 강들의 삼각주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3개 경제발전 지역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 첫 번째는 양쯔강 삼각주 지역의 상하이와 항저우(杭州)를 비롯해서 저장성 북부에 이르는 지역이다. 혁명 이전부터 이곳은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으며 이 지방의 어류, 진주, 비단, 차와 과일은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두 번째 지역은 저장성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한때는 개항장이었던 연안 도시 윈저우(溫州)다. 세 번째 중심지는 중국 남부 광둥성의 주정강 유역 삼각주에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은 홍콩과 근접한 지리적 조건으로 이익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호의적인 중앙정부의 정책 덕분에 큰 이익을 얻어왔다. 1979년에, 광둥성은 개혁의 실험지로 선택되었고, 덩샤오핑은 새로 건설된 선전(深跡) 경제특구에 그의 모든 것을 걸었다.
세 지방 모두 연안지방에 특별정책을 적용하여 자원을 제공해주는 중앙정부의 전략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 결과는 괄목할 만했다. 그러나 그것이 새로운 부를 창출해낸 것은 중앙정부의 발전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혀 계획되지 않았던, 당국이 허용하는 범위 내의 차익금에 의해 운영되던 지방 기업들과 지방 당 위원회에 의해서였다.
이러한 성공이 다른 지역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이들 지역에서 단기간에 이뤄낸 성공을 거울삼아 곳곳에서 비슷한 산업이 착수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가장 변방지역들조차 가죽제품, 신발, 셔츠, 양복 등 생활필수품에서 가전제품에 이르기까지 생산 작업에 뛰어들었다. 낮은 임금과 낮은 세금에 끌린 한국, 타이완, 미국,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의 제조업자들은 중국이 필요한 설비와 자본, 품질과 마케팅을 제공하기 위해 열심히 협력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79년에는 다 합쳐봐야 겨우 국민 1인당 한 벌 이하인 7억 4천 4백만 장의 의류밖에 생산해 내지 못하던 중국의 의복공장들이 1991-96년 사이에는 50억 달러 상당의 직물제조 기계들을 수입하고 1996년에는 세계 의류 수출량의 16.7%를 차지하는(380억 달러 정도의 의류를 수출하게 되었다.) 등 세계 유수의 의류 생산지로 돌변했다. 다른 분야들이 기록한 수치들도 놀라웠다. 1989년에 중국은 3천 개의 가죽 공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7년 후에 공장의 수는 2만에 달했으며 공장에 고용된 노동자의 수는 150만 명이나 되었다.
같은 시기, 광둥성의 신발 수출량은 4배 가까이 증가했다. 1998년, 광둥성은 세계 가죽 신발 생산량의 20%인 연간 20억 켤레를 생산했으며, 중국 전체로 보면 연간 63억 켤레의 신발을 생산하고 있었다. 이로써 중국은 세계 최대의 가죽 생산국이 되었으며, 가죽 신발은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수출품이 되었다. 또한 5천 개의 공장에서 10억 켤레의 운동화를 생산한 중국은, 이제 세계에서 운동화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가 되었다. 세계 유명상표들이 자사의 제품을 중국에서 제조할 뿐만 아니라 그와 유사한 상품을 생산해내는 모조품 공장도 많이 생겨난 것이다. 새로운 제조업에 대한 투자는 중국 전역에 퍼졌고, 1억 3천 명으로 추정되는 농촌의 잉여 노동력을 흡수했다.
그러나 1998년이 되자 국내외 수요는 더 이상 증가하지 않게 되었고, 따라서 농촌 기업들도 성장을 멈췄다. 재고품의 양이 점점 늘어나는 가운데, 등록된 농촌 기업의 수는 2백만 개나 줄어들어 2천만 개밖에 되지 않았다. 1997년과 1998년 사이에 2,000만 명의 농민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었다. 많은 이들이 고향으로 되돌아왔고, 도시에서 일하는 농민들의 송금액수도 현저히 줄었다. 이런 급속한 전환은 1997년에 시작된 아시아 경제위기와 맞물리는 것이었다.
인구에 비해 수요가 너무 적어지자, 많은 농촌기업들은 빚을 감당하지 못해 무너졌고 결국 파산했는데 시장에 가장 늦게 뛰어든 내륙지방의 기업들이 제일 먼저 무너졌다. 후난성의 지방정부에 의해 세워진 농촌기업들의 축적된 빚은 60억 위안에 달했다. 후난성의 도시들은 더 이상 직원들에게 급여를 줄 수가 없게 되자, 농민들로부터 받는 세금을 올리기 시작했다. 농민들의 수입 또한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농촌 기업들이 몰락하자 농촌의 은행들도 몰락했다.
결국 1990년대에 들어와서 농촌 지역의 빛이었던 이러한 중소기업들은 더 이상 중국의 경제적 기적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많은 공장들이 엄청난 공해 때문에 비난받았고, 급기야 1997년에 중앙정부는 채광, 석탄 세척, 가죽, 무두질, 그리고 종이를 만들고 직류를 염색하는 수많은 공장들을 폐쇄 조치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실업문제는 제품의 적절한 수요를 창출하는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위험한 것이었다. 중국은 단지 9억의 농민이 있고 연간 평균소득이 230달러밖에 되지 않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노동력을 덜 필요로 하는 현대적인 생산 기술상의 발달 때문에 직물산업과 같은 전통적인 노동집약적 산업에도 자동화된 기계들이 대폭 늘어나, 더 이상 훈련받지 않은 직공들이 필요하지 않게 된 현실이 중국 실업문제의 또 다른 문제였다.
제4장 대륙에 부는 바람
오늘날 중국의 경제특구들은 대부분 해외에 체류하는 중국 출신 억만장자들의 투자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그들이 하는 이러한 모든 사업은 애국심으로 포장되어 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대륙의 과학기술 수준을 향상시키고 그럼으로써 자유경제주의에 입각한 고도의 경영기술을 도입하겠다는 덩샤오핑의 비전을 현실화시키지는 못했다. 문제는, 성공한 중국인들의 투자에만 의지하는 한 경제특구의 미래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특구가 진정으로 중국 경제의 미래를 짊어지려면, 그곳은 외국인 투자에 걸맞은 조건과 환경을 고루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의지나 포부와는 다르게 움직이는 지방정부가 여전히 문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