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투기의 역사
에드워드 챈슬러 지음 | 국일증권경제연구소
금융투기의 역사
에드워드 챈슬러 지음/강남규 옮김
국일증권경제연구소/2001년/520쪽/18,000원
1. 거품으로 만들어진 세계: 금융버블의 기원
무엇이든 교환하려는 인간의 성향은 거의 본능에 가깝다. 미래를 점치려는 경향도 인간 본성 깊숙이 자리잡은 특성이다. 이것이 투기의 원인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된다. 인류역사상 최초의 투기는 기원전 2세기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로마는 국가기능 가운데 조세징수에서 신전건립까지 상당부분을 퍼블리카니(Publicani)라는 조직에 아웃소싱하였다. 퍼블리카니는 현재의 주식회사처럼 파르테스(partes, 주식)를 통해 소유권이 다수에게 분산된 법인체였다. 당시 주가수준이나 주식시장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주가 변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은 남아있다. 키케로는 자신의 기록에 ‘고가 주’라는 단어를 쓰면서 “부실한 퍼블리카니의 주식을 사는 것은 보수적인 사람이면 피하는 도박과 같다.”고 말했다.
유럽은 중세 말기에 스콜라적 전통이 붕괴하고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서 채권이 발행, 유통되기 시작했다. 14세기 이후 베니스뿐만 아니라 플로렌스와 피사, 베로나, 제노바까지 확산되었다. 도시국가들은 주식(loughi)을 발행해 조달한 자본으로 세워진 회사들에 징세업무를 위탁하였는데, 이 초기 주식회사는 로마의 퍼블리카니와 매우 비슷했다. 북부 유럽의 정기시장에서는 중세 봉건왕조가 금기시하였던 상거래와 금융이 거의 무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시장참여자들은 지급불능 가능성이 높을수록 채권 값이 떨어지는 매커니즘을 발전시켰다.
17세기 초반 네덜란드 경제는 유럽에서 가장 왕성했고 선진적이었다. 1610년에는 암스테르담에 새 증권거래소가 설립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온갖 형태의 금융상품 매매가 이루어졌다. “상품과 외환거래, 주식, 해상보험... 암스테르담은 하나의 자금시장이었고 금융시장이었으며 증권시장이었다.” 금융거래는 자연스럽게 투기로 이어졌다. 미래 시점에 확정된 가격에 상품을 인도하기로 하는 선물거래가 일반화되었고, 17세기 이후에는 선물거래 대상이 매우 다양해졌다.
1630년대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고, 30년 전쟁으로 동유럽의 직물산업이 붕괴되어 네덜란드 직물산업이 호황을 맞고 있었다. 바타비아(자카르타의 옛 이름) 지역을 차지한 동인도 회사의 주가는 17세기 최고의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당시 유럽국가 가운데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았던 네덜란드인들은 풍요와 오만에 젖어 더 큰 부를 안겨줄 대상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 대상이 바로 튤립이었다.
2. 튤립 - 바보의 고깔모자
1573년 터키 술레이만에 파견된 네덜란드의 대사 오기에르 부스베크가 당시 네덜란드 최고의 식물학자였던 카롤루스 크루시우스에게 튤립 한 뿌리를 선물했다. 크루시우스는 이를 번식시켜 다시 여러 사람에게 배분했고, 자신이 집필한 『식물도감』에 등재했다. 초기 튤립은 귀족과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꽃의 색깔에 따라 튤립을 다양하게 분류했다. 최상급 꽃은 잎에 황실을 상징하는 붉은 줄무늬가 있어 ‘황제’라고 불렸고, 이어 ‘총독’과 ‘제독’ ‘장군’ 순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1624년 황제 튤립은 당시 암스테르담 시내의 집 한 채와 맞먹는 1,200 플로린(당시 유통된 금화)에 거래되었다. 꽃이 만개할 때까지 무늬와 색깔을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는 튤립의 특성이 투기의 우연성을 극대화해주었다.
네덜란드에서 튤립 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자 프랑스인들도 한 몫 챙기기 위해 1634년 파리 근교와 프랑스 북부지역에 튤립시장을 열었다. 튤립 투기가 국제화된 것이다. 1636년부터 1637년 겨울에는 튤립 뿌리들이 아늑한 땅 속에 묻혀 있어 거래가 성사되어도 투기꾼들은 뿌리를 인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바람거래’로 불린 튤립 선물거래가 나타났다. 파는 사람은 미래의 일정시점에 정해진 종류의 튤립 뿌리를 전달하기로 약속하고, 사는 사람은 받을 권리를 갖는 것이다.
대부분의 거래는 어음결제로 이루어졌고, 이 어음의 만기는 대부분 튤립 뿌리를 캐는 다음해 봄이었다. 투기꾼 가운데 6만 길더를 벌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쥐고 있는 것은 현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어음’뿐이었다. 투기 열풍이 끝나갈 무렵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튤립 뿌리는 돌고 돌아 실체가 없는 거래가 되어버렸다.
1637년 2월 3일 튤립시장이 붕괴했다. 튤립거래의 중심지였던 하르렘에는 더 이상 살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수일 전부터 나돌고 있었다. 실제로 다음날 저가에 내놓은 튤립조차 전혀 팔리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매매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부도가 줄지어 발생했다. 전문적인 꽃 상인들은 채권투기꾼들에게 보유어음을 넘겨 일부나마 회수하려고 발버둥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네덜란드 예술가 피에터 놀페(Pieter Nolpe)가 튤립투기 직후 발표한 조각품〈바보의 고깔모자〉는 커다란 고깔모자 속에서 가격을 흥정하고 있는 투기꾼을 묘사한 것이다. 투기는 군중심리와 르네상스 시대 카니발 분위기를 타고 성장했다. 카니발이나 축제기간에는 도박이 널리 행해졌다. 17세기에 들어 카니발은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축제는 거래소에 의해 대체되었지만, 카니발 심리는 오래도록 살아남아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자본주의의 광기로, ‘바보들의 잔치’로 오늘날까지 살아있다.
3. 1690년대 주식회사 설립 붐
1687년, 뉴잉글랜드 호의 선장 윌리엄 핍스가 히스파니올라 섬 부근에 침몰한 스페인 해적선에서 건져 올린 은 32톤과 상당한 양의 보석들을 싣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왕과 선장, 선원들은 자신들의 몫을 챙긴 뒤 남은 19만 파운드를 1만 %의 배당금 형태로 항해를 지원했던 파트너들에게 배분했다. 이들의 성공적인 귀환은 영국 전역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양치기 소년이었던 핍스 선장은 돌아온 지 3주만에 기사작위와 기념메달을 받았다.
사정이 이쯤 되자 너나 할 것 없이 핍스 선장을 모방해 해저유물 인양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들은 핍스 선장처럼 파트너를 모집한 것이 아니라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보물인양회사들의 주식은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1690년대 영국 주식시장에서는 건전한 이기주의와 악명 높은 사기가 날줄과 씨줄처럼 얽혀있었다. 발기인들은 제 주머니만 불리기 위해 급조한 주식회사들을 마구 상장시켰고, 주가는 조작되었으며 허위정보들이 마구 돌아다녔다. 1694년 6월 21일 영란은행이 의회인가를 받고 정식 출범했다. 이는 금융혁명에 일대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영란은행은 120만 파운드를 정부에 빌려준다는 조건 아래 영국최초의 인가은행이 되었으며, 은행권을 독자적으로 발행할 수 있었다.
영란은행의 주식의 공모는 청약개시 2-3일만에 마감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청약자 명단에는 윌리엄 오렌지공의 총신인 포틀랜드 백작을 비롯해 약방주인과 등짐꾼, 옷수선공, 자수공, 농사꾼, 선원, 부두노동자 등 온갖 종류의 군상들이 있었다. 배정 받은 영란은행 주식은 20%의 프리미엄을 받고 팔려나갔다. 그리고 주식시장은 버블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 든 비용은 영국정부의 재정수입을 초과했다. 정부는 마침내 과거의 망령을 깨웠다. 통화품질을 떨어뜨린 것이다. 금의 함량을 줄인 것이다. 품질이 떨어지면서 영국인들은 집에 양화를 축장하기 시작했고 악화만이 시중에 유통되고 있었다. 1696년 여름 존 이블린은 일기에 “시장에서 생필품도 사지 못할 만큼 돈이 부족했다.”고 기록했다.
잉글랜드 북부에서 마침내 폭동이 일어났다. 금융의 핵심인 신용도 붕괴되었다. 정부의 단기채권은 폭락해 할인율이 40%까지 치솟았다. 마침내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했고, ‘우량주’였던 동인도회사의 주가도 1692년 200파운드에서 1697년에 37파운드로 폭락했다. 1693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 있던 140여 개의 주식회사 가운데 1697년까지 살아남은 회사는 단 40개에 지나지 않았다. 이 공황은 투기와 연결되어 발생한 최초의 경제공황이다.
4. 1845년 철도 버블
슘페터는 “혁신은 자본주의 경제역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투기꾼은 자본주의 경제의 전위대다. 1844년 후반기의 영국 경제상황은 나쁜 편이 아니었다. 이자율은 지난 100년 동안 가장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연이은 풍년으로 곡물 값도 낮게 형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철도건설 비용은 낮아졌고 철도회사의 당기순이익은 빠르게 상승했다. 당시 3대 철도회사는 통상 이자율의 거의 3배에 이르는10%의 배당을 실시했고, 철도혁명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나날이 증폭되고 있었다.
1845년 1월 16개 노선의 철도건설이 계획되어 자금조달에 들어갔고, 4월이 되자 철도건설 접수 건수가 빠르게 늘었다. 50개의 새로운 철도회사가 등록되었으며 이들 기업의 사업설명서와 주식공모 광고가 신문을 도배했다. 이 광고에는 회사 임시 발기인명단과 건설할 철도의 수익성, 10% 이상의 배당수익을 약속하는 문구가 꼭 들어가 있었다.
1845년 6월말 현재 13만 킬로미터의 철도건설 신청을 무역위원회가 심사하고 있었다. 이는 그때까지 건설된 기존 철도길이보다 4배나 더 긴 것이었고, 영국 국토의 남북길이의 20배에 가까운 것이었다. 7월에는 한 주 동안 12개 철도건설 계획이 공표 될 정도였다. 「더 타임스」는 1845년 10월 말 5억 6,000만 파운드 이상이 필요한 1,200개의 노선이 계획중이며, 겉으로 드러난 철도회사의 채무는 6억 파운드가 넘었다고 보도했다. 이는 당시 5억 5,000만 파운드였던 영국 국민총생산을 초과한 것이다.
당시 언론은 “도대체 어디서 그 많은 돈을 조달할 수 있겠는가?”라며 자금 조달 가능성에 의문을 표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과거 공황에서 발생했던 해프닝들이 되풀이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투기에 달려든 것이다. 1845년 늦여름 철도버블은 부풀어오를 때까지 부풀어올랐다. 한 철도회사의 주가수익배율이 5배까지 치솟았고, 철도회사 주식의 담보대출 이자율은 80%까지 솟구쳤다. 투기열풍은 소도시를 연결하는 지선망에도 몰아닥쳤고, 해외 철도에도 번져 수많은 해외철도 건설계획이 수립되었다.
철도투기에는 수많은 공직자들의 부패와 철도회사 임원들의 협잡이 발생했다. 철도건설이 본격화되자 철도회사들은 납입되지 않은 주식대금을 청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철도회사들은 의회인가를 받기 전에 주식대금의 일부만 받고 주식을 매각했다.)
1845년 10월 초 주식대금 납입을 위해 투기꾼들이 보유주식을 내다 팔기 시작하자 주가는 주저앉기 시작했다. 비극의 징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해 10월 말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회사의 주가는 최고점을 기록한 8월에 비해 40% 폭락했다. 철도투기가 파국을 맞자 철도회사 발기인들과 주식 청약자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주가가 치솟을 때는 청약자들이 1만 파운드 어치를 청약해도 단 몇 주만을 배정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청약자들은 자신의 납입능력보다 훨씬 많은 주식을 청약했다. 그런데 주가가 폭락하자 사정이 급변했다. 청약한 금액만큼 원치도 않았던 주식을 떠 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주식대금 납입을 독촉 받게 되었다. 「글래스고 내셔널」 신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모든 투기꾼들을 지배했던 탐욕이 이제 공포의 잔혹함과 복수의 광기로 급변하기 시작했다.”
5. 새 시대의 종말
1920년대 미국에서 신기술에 대한 투기꾼들의 환상은 주식시장의 호황을 유지하는 동안 지속되었다. 경제적 번영의 원동력과 투기의 대상으로서 자동차가 철도를 대체했고, 미국의 문화와 지도를 바꾸어놓았다. 곳곳에 자동차도로와 고속도로가 건설되고 수많은 차고가 세워졌다. 1920년대 미국 자동차는 700만 대에서 2,300만 대로 폭증했다. 1925-1928년 사이에 제너럴모터스의 주가는 10배 이상 치솟았다. 이 주가 급등은 당시 신문 1면을 장식할 정도였다.
이와 아울러 1920년대 웨스팅하우스사에 의해 처음 세상에 출현한 라디오는 획기적인 문화전달매체였다. 라디오 판매대수는 1922년 6.000만 대에서 6년 뒤인 1928년에는 8억 4,000만 대로 급증했다. 라디오 시장은 RCA가 장악하고 있어, 당시 미국인들은 이 회사를 그대로 ‘라디오’라고 부를 정도였다. 따라서 RCA 수익은 1925년 250만 달러에서 1928년에는 2,000만 달러로 폭증했고, 주가도 1921년 1.5달러에서 1928년 85.5달러로 57배나 솟구쳤다. 투기열풍은 찰스 린드버그가 1927년 대서양 횡단 단독비행에 성공하자 항공기 산업으로 번졌고, 할리우드가 무성영화에 목소리를 불어넣는 데 성공하자 영상사업도 투기꾼들의 인기종목으로 부상했다.
1920년대 미국 증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빚을 내 주식투기를 벌이는 차입투기의 일반화였다. 당시 투기꾼들은 마진론을 끌어와 요즘 유행하는 ‘묻지마 투자’를 벌였다. 이 ‘묻지마 투자’의 실상은 25만 달러에 이르는 마진론을 끌어다 주식투기를 벌였던 영화배우 그루초 막스의 일기에 잘 묘사되어 있다. “증시가 대세상승을 보이면, 투자자문은 전혀 필요 없다. 그저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시세판 을 찍어 그 주식을 사면, 무조건 오른다.”
차입투기는 개인투자자들만이 벌인 게 아니었다. 이는 당시 ‘주식회사 미국의 금융구조’가 돼버렸다. 가스와 철도 등 공익성이 강한 기업들이 지주회사에 의해 인수 합병되었고 이러한 공공서비스 기업들에 대한 인수 합병 열풍은 1920년대 호황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1929년 이들 기업의 평균주가는 액면가의 4배 이상으로 뛰었고, 시가배당률은 1%이하로 떨어졌다. 은행들도 인수합병을 통해 대형화를 이루어냈다. 당시 투신사들의 성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1928년에는 200개가 넘는 새로운 투신사가 10억 달러 이상의 자금을 끌어 모아 설립되었고 1929년 1월~8월 사이에는 하루에 한 개꼴로 투신사가 설립되고, 25억 달러 규모의 수탁고를 올렸다.
주가가 주당수익의 30배를 초과하자, 새시대의 주식가치 평가방법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1924년 이후 주가는 기업의 순익증가율보다 3배 이상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높은 이자율은 경제활동을 위축시키기 시작했고, 임금상승은 거의 정체되어 있었지만 노동자들이 짊어지고 있는 할부채무는 늘어만 갔다. 미래를 저당 잡히는 할부 구매가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영국과 독일에서 뉴욕으로의 금 유입이 계속해서 늘어나는 바람에, 이들 국가에서는 이자율이 상승하고, 미국의 수출이 둔화되었다. 또 미국에서는 곡물수출 둔화로 미국 인구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의 구매력이 저하되었다.
1929년 9월 3일, 마침내 운명의 순간이 월스트리트에 찾아들었다. 이 날 다우존스지수는 이해 최고점을 기록했고, 바로 하루 뒤인 9월 4일 투자자문업자 로저 베브슨이 이날 열린 연례 미국 경제인회의에서 증시의 붕괴가 임박했다고 경고한 것이다. “공장들이 문을 닫게 될 것이고... 악순환이 되풀이 될 것이며, 결과는 가혹한 경제공황이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1929년 10월 24일 거품은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1930년 4월이 되자 다우지수가 300선을 돌파해 1929년 10월 붕괴이후 저점을 기준으로 50% 회복했다. 하지만 다우지수의 ‘곡예비행’(1929년 10월 -1930년 4월 초 사이의 다우지수 급변동)은 1930년 봄 끝내 추락하기 시작 다우지수가 41.88포인트까지 급강하한 1932년까지 이어졌다. 이 사이에 미국의 GDP는 1929년 수준에서 60%가 줄어들었고, 실업자 수는 1,250만 명까지 늘어났다. 농업인구를 뺀 나머지 국민의 3분의 1이 일자리를 잃은 셈이다.
1932년 3월에는 성냥왕 이바르 크루거가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 달 뒤인 4월에는 새뮤얼 인설이 부도를 맞고 해외로 도피했다. 이후 그는 소환되어 사기혐의로 법정에 섰다. 골드만 삭스 이사들도 회사공금을 낭비했다는 혐의로 법정에 서야했다. 1930년 말 윌리엄 듀란트의 보유주식은 증권사 직권으로 팔렸고, 그는 1936년 100만 달러에 가까운 빚을 갚지 못해 파산선고를 받아, 결국 뉴저지의 한 레스토랑에서 파트타임으로 접시를 닦아 생계를 이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