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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 경영

리넷 리드고우 지음 | 좋은책만들기
아시아는 면적이 4천 4백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며, 동태평양 연안을 따라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인도네시아까지 이어져 있고, 서쪽 경계로는 우랄산맥에서 아라비아반도까지 뻗어 있으며, 서로 다른 인종과 종교, 언어, 문화를 가진 25억의 인구가 살고 있다. 그들은 경제적, 사회적, 기술적, 물리적 발전 단계가 모두 다르다. 따라서 '아시아'라는 단어 자체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인간정신과 지리적 요소들의 거대한 집단을 편의적이고 본질적으로 불분명한 하나의 단어 속으로 매몰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1997년 중반, 즉 아시아의 위기 전까지 인도, 홍콩, 싱가포르 등의 일부 아시아 국가들은 놀라운 경제 성장력을 보여줬다. 아시아 각 국가에서 호주 대사로 활동했던 리처드 울콧은 1998년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세기 동안 진행된 유럽과 미국의 경제 발달 과정이 아시아에서는 단 30년 만에 이루어 지고 있었다."

그러나 수십 년에 걸친 산업 번영기 이후 아시아 국가들이 경제적 혼란으로 빠져들자 세계 비평가들은 그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위기의 근원에 대해 실질적인 합의는 없지만, 이 위기가 태국에 의해 촉발된 신인도 위기였다는 데는 동의한다. 어떤 전문가는 이 위기는 필연적인 것으로 붕괴의 씨앗은 이미 경제적 붐에 잉태되어 있었으며, 경제는 순환 과정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아시아가 그 순환의 다음 단계, 즉 의도하지 않은 무력화 단계로 빠져드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그 위기가 진정한 성장과 단순히 과장된 확장을 구별할 능력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금융위기 발발 이후 아시아 기업의 총수들은 형편없는 경영, 근시안성, 미성숙, 부패와 정실주의, 족벌 경영에 대한 적극적 수용 등으로 계속 책임 추궁을 당해왔다. 그중 상당 부분은 타당하다. 위기를 겪은 아시아 국가들의 부패 정도는 매우 높은 수준으로 러시아나 브라질과 비슷하다. 다만 정실 자본주의는 아시아에서 여러 해 동안 일종의 생활 방식이었고 외국 투자자들도 그러한 경영 체제의 장점과 실제로 그 체제가 이끌어낸 수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위기를 그들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아시아의 경제 위기는 국제금융시스템 개혁에 계기를 제공했다. 이제 아시아 국가들은 국제 금융 시장접근에 따른 긍정적인 측면과 그로 인한 잠재적 불안정성 사이의 관계를 잘 조정하고 대비해야 할 것이다. 책임과 이익을 고려한 일련의 건전한 경영과 상당한 성과는 틀림없이 실질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아시아 경영자들은 자신들의 방법과 절차에 대해 면밀히 검토해야 하며,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폐기할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세계가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로 진입하면서 아시아가 직면한 새로운 경제, 사회적 도전의 하나로 모두가 인정하는 것들 중 하나다.

1. 일본/극과 극의 나라



친절과 포르노그라피, 존중과 부정행위




일본인들은 수수께끼 같은 사람들이다. 명예와 겸손, 숭배를 매우 중시하는 점잖고 기품 있는 사람들이면서, 기업환경은 야쿠자와 부패 정치인, 뇌물에 매수 당하는 관료들, 물밑거래가 이루어지는 어두운 세계이다. 온천욕을 즐기고 친절함이 국가 미덕인 반면 아동 포르노 잡지와 비디오의 약 80퍼센트를 생산하는 아동 포르노 시장의 중심지이다. 매우 바쁘고 긴장된 상황에서도 서로에게 공손히 인사를 건네는 여유가 있지만, 일본 의회를 보면 종종 위엄을 잃고 논쟁을 벌이다가 난투극이나 주먹다짐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일본이 빈약한 자원과 과밀한 인구를 가진 나라임을 고려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적인 성공은 어떤 기준보다도 놀랄 만한 성과이다. 일본 경제의 대표 지수인 닛케이 평균주가는 선진국 가운데 가장 빠른 연 10퍼센트의 상승률을 기록한 반면, 영국은 겨우 1퍼센트였다. 1985년 1월 영국의 실업률은 13.9퍼센트를 기록해 350만여 명이 실업자 신세였다. 같은 시기에 일본의 실업률도 과거 30년을 통틀어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했지만 고작 2.7퍼센트에 그쳤으며, 실업자는 15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 인구는 1억 2천만 명 가량인데, 이는 영국의 약 두 배이다.

마가렛 대처는 영국 국수주의자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 대처는 일본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전세계의 산업 분야를 지배할 수 있게 한 특징들을 조사 연구하여 그것을 모방하라는 영국 기업들의 강력한 요구에 직면했다.

1986년 닛산은 유럽 최초로 영국 북동부 선더랜드에 생산라인을 설치해 자동차를 생산했다. 일본 경영자들이 채용한 영국 생산 직원들은 일본에서 적용되는 원칙에 따라 근무했는데, 5년이 지나면서 그곳의 노동자들은 영국의 다른 자동차 공장에 비해 매년 거의 두 배의 생산 실적을 올렸다. 일본 경제가 오래 전부터 산업화된 유럽 국가들과 미국을 빠르게 추월하자 전세계 기업들은 동양으로 눈을 돌렸으며, 일본식 패러다임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품질관리 프로그램과 'JIT(Just In Time)' 재고관리 시스템에 기초한 일본식 모델이 조직 문제에 관한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전세계적으로 미친 듯이 퍼져나갔다.

외국 기업들이 일본에서 겪는 난관은 규범이 다르고 폐쇄적인 문화에서 활동해야 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일본의 기업구조는 종신고용제라는 기업복지 시스템, 집단 의사결정이라는 전통적 방법, 기업과 정부간의 긴밀한 관계 등을 인정하는 환경이었다.

일본의 기업구조는 케이레츠와 자이바츠로 알려져 있다. 케이레츠는 일본의 기업 환경을 지배하고 있는데, 계열사들끼리 노골적으로 결속하면서 외부 기업에 대해 배타적 성향을 보이는 강력한 기업집단이다. 이 집단들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속성과 일본 기업 전반에 미치는 영향으로 인해 일본의 많은 외국 기업인들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이바츠'는 거대 금융산업 조직이다. 1903년에 이 자이바츠들이 전체 수입과 수출의 약 40퍼센트를 차지했다. 그들의 부가 팽창하면서 그것을 통제하는 집단들은 국가의 새로운 귀족이 되었다. 이들 집단과 정부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관료들의 정책을 지원하는 대가로 정부는 자이바츠 그룹에 대한 후원을 보장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협력 체제였는데, 제1차 세계대전 때 자이바츠가 정부의 팽창주의 정책을 강력히 지원함으로써 관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자이바츠의 영향력은 수출의 70퍼센트, 수입의 90퍼센트를 장악했고 1930년대가 되자 국가 경제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자이바츠는 기능과 활동을 다양화함으로써 대대적인 구조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재벌은 수직적으로 연결된 가족 지향적 자이바츠에서 수평적으로 연결된 사업 그룹이라는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자이바츠로 변화했다. 케이레츠는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기 시작했으며, 뚜렷한 과점 체제를 형성해 나갔다.

일본의 거의 모든 대기업들은 주거래은행을 중심에 두고 주변에 둥그렇게 둘러 서 있는 형태이다. 상호 주식보유, 선택적 상거래, 인력 유동, 전략 조정 등과 같은 많은 통합 장치들이 케이레츠의 성공과 안정화의 핵심 요소이다.

일본인들의 성격에는 모든 것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세계에서 지진 위험성이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한 일본인들은 태풍, 화산 폭발, 해일 등의 위협을 끊임없이 받아 왔으며, 이러한 두려움이 일본인의 심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또한 일본인들은 개인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거나 자신을 내세우는 것보다는 국가적 성취를 더 고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오랫동안 일본인들은 미국이 실현한 성과를 천박한 번영 추구하고 멸시해 왔다.

일본이 최초로 서양을 접하게 된 것은 중국을 향하던 포르투갈 선박이 바람 때문에 일본에 도착한 14세기 중반이었다. 1868년에서 1912년까지의 메이지 시대 동안 일본은 결국 외부 세계에 문호를 개방했는데 그 목적은 유럽과 미국을 따라잡는 것이었다. 이후 일본은 사회 경제적인 분야뿐 아니라 교육분야에서도 서구화와 전통을 결합시키면서 근대적 국가로 변해갔다.

2. 한국/무덤에서 부활하다



부활과 개혁의 나팔 소리




한국이 적대적이고 경제적으로 불균형한 두 국가로 분단되는 상황을 초래한 참혹한 전쟁에서 막 벗어난 상태였던 1954년 세계은행이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당시 세계 경제에 대한 엄밀한 분석을 통해 아시아의 두 국가는 어떤 방법을 쓰든 경제 발전을 달성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 두 국가란 바로 대만과 한국이었다.

하지만 1954년의 죽음에 가까운 자포자기 상태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무덤에서 부활했다. 겨우 1세대 만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가 거대한 산업 강국으로 성장한 것이다. 1962년 경제 개발을 시작한 이후 30년 동안 한국은 8퍼센트의 연평균 성장률을 기록했다. 1973년부터 1978년까지 실질성장률은 11퍼센트가 넘었다. 1995년 한국의 연간 정부 예산은 1천억 달러에 달하는 세입과 980억 달러의 세출을 기록했고, 국내총샌산(GDP)은 4천 560억 달러를 넘었으며, 1인당 국민소득도 1963년 최초로 측정한 1백 달러에서 1997년에는 1만 달러를 넘었다. 싱가포르와 대만, 홍콩과 함께 한국은 아시아의 용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아시아 금융위기 확산의 희생물이 되면서 580억 달러의 채무 불이행으로 1997년 12월 IMF에 지원을 요청하기 전까지 한국은 경제 규모가 세계에서 11번째였다. 또한 고도로 숙련된 노동력과 아시아에서 식자율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98퍼센트)였다. 그러나 이런 부분들이 계속해서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는 희망과 함께 21세기 한국이 극복해야 할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1997년 7월의 아시아 경제 위기는 한국 경제가 조직, 운영되어 온 방식과 맞지 않는 결과를 많이 파생시켰다. 역설적이게도 그 결과 중 많은 부분들이 한국을 세계 경제로 부상시켰던 것에 기인한다. 그것은 한국의 계층화된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웃이자 매우 혐오하는 일본과 복합적이고 깊은 관련이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기업 활동방식이 크게 바뀌어야 한다는 광범위하고 강한 요구가 나오고 있다.

우선 재벌로 알려져 있는 거대한 기업 집단 모델은 오랫동안 정부와 밀착해 왔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일본 스타일의 국가 자본주의 경영 모델을 포기하라는 급박한 요구도 있다. 이는 재벌 시스템, 즉 한국 산업을 지배하는 동시에 국가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수직적으로 통합된 기업 네트워크를 가진 거대한 족벌기업에 대한 급진적 개혁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재벌은 한국 경제에 크게 의존해 성장했다. 따라서 개혁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논리에 따라 그러한 개혁을 선택하는 것은 관료와 은행가들, 재벌 사이의 밀접한 역사적 관계를 무너뜨리는 셈이 된다.

또한 과거에 침묵을 지켜왔던 대다수 주주들이 구시대의 틀을 버리고 자신들의 투자에 대해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내고 있다. 또 더 큰 책임과 투명한 회계 방식 도입 및 재벌 그룹 자회사들 사이의 상호 채무 보증 해소를 바라고 있다.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



첫째, 애국심이 너무 강해서는 안 된다. 다른 국가에 비해 한국에서 유달리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정서를 찾아본다면 그것은 바로 애국심이다. 그러나 새로운 경제 환경은 적대적 기업인수 및 합병, 외국인 소유에 대한 허가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한국이 새로운 경제 환경에 익숙해지려면 무엇보다 '한국의 것은 한국인이 소유해야 한다.'는 사고를 바꾸어야 한다. 즉, 국가 경제를 세계화하고 외국 투자자에게 비즈니스를 공개하려면 과거의 고립주의적 발상을 버려야 할 것이다.

둘째, 유교적 정신 기반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귄위에 대한 존경, 상급자에 대한 우선 적용, 개인의 복종 등으로 대변되는 유교 관념은 한국인의 정서에 뿌리 깊게 박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기업 조직은 그에 대한 좋은 사례이다. 한국 기업 조직은 일본의 모델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조직 자체가 한 사람의 최고 리더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본보다 유교적 기반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 이로 인해 설립자나 큰아들이 리더가 되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은 기업을 매우 위계 서열적이고 엄격한 구조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관습의 가장 큰 결점 중 하나는 밑으로부터의 많은 창조적 아이디어 생산을 막는다는 것이다.

셋째, 교육 제도 문제이다. 일제 식민지 시절의 교육제도 혹은 일본의 교육제도와 비슷한 한국의 현행 교육 제도는 전면적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단순한 생산용 자동로봇 대신 독창력 있는 인재를 양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인도/아시아의 느림보 코끼리



인도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시장이지만 아직까지 국제 비즈니스 계의 주목을 받은 적은 없다. 또 아프리카와 유럽, 북미 대륙을 합한 것보다 더 인구가 많지만, 그 방대한 인적자원을 제대로 이용해 본 적이 없다. 홍콩과 마찬가지로 19세기에 영국 자본주의가 기세를 떨치면서 인도는 런던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홍콩과 인도의 상황은 무척 대조적이다. 인도는 전혀 번영을 누리지 못했다. 자유방임주의는 꿈도 꿀 수 없었으며, 오늘날까지 극심한 가난과 부패한 정치, 비효율적인 산업과 느려터진 관료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특히 거대하고 느려터진 관료주의는 현재 인도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큰 장애물로 알려져 있다.

인도는 독립 후 철저한 비동맹 정책을 추진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세계 비동맹 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인도는 소련이 후진 농업국에서 근대 산업국으로 탈바꿈한 것을 매우 부러워했다. 또 소비에트적 경제 발전 모델이 인도처럼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비권위적인 민주 체제 아래에서도 가능하다고 믿었다. 1950년부터 1970년까지 정부의 통제력은 거의 모든 경제 영역으로 확산되었다. 항공 및 철도 산업의 국가 독점이 가능해졌고 해외 무역 및 해외 자본은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그 결과 경제는 철저히 정부 주도, 정부 지배하에서 운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사회주의의 비효율성과 자본주의 체제의 불평등성을 섞어놓은 것 같은 체제였다. 그로 인해 인도의 비즈니스는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과잉 규제되어 왔다. 인도에서 자유로운 교역과 상업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장애 요인이 바로 정부 관료들의 무분별한 경제 개입에 있었던 것이다. 월스트리트 저널과 워싱턴에 본부를 둔 헤리티지 재단이 매년 공동으로 발표하는 국가별 경제 자유 지수에서 인도의 경제 자유도는 최악의 수준이다.

그런데 1991년 나라시마 라오 수상이 집권하면서 혁명적 변화가 시작되었다. 라오 정부는 인도가 1990년대의 변화된 경제 현실, 즉 인도의 오래 된 동맹국이자 원조자이며 경제발전 모델의 제공자였던 소련이 몰락한 현실을 몸으로 부딪혀 이겨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라오 정부는 40년간의 폐쇄적 경제 정책을 마감하고 새로운 자유화의 시대를 열었다. 정부는 안정적 거시경제 운용과 구조적 비효율성의 제거, 인도의 국제적 신인도 향상과 개방 정책의 실시, 국제 경제 환경에 걸맞는 경제 정책 수립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라오 개혁으로 오늘날 인도는 과거보다 훨씬 더 경쟁적인 경제 환경을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튼튼한 토대화 세계로 진출하려는 훌륭한 자세를 갖추고 있다.

4. 홍콩/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곳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 화려함과 단아함 등 서로 대비되는 특성들이 동 시에 뒤섞여 있다. 홍콩은 높이 치솟은 거대한 자연항으로, 많은 인파가 북적 대는 대 중화제국의 항구도시이다." - 홍콩의 마지막 총통 크리스 패튼

영국이 도착하기 이전부터 홍콩은 원주민들에 의해서도 "향항(香港: 향기로운 항구)"로 불렸었다. 1841년 홍콩에 영국의 유니온 잭이 휘날리면서 홍콩은 변모를 시작했다. 홍콩지역의 상인들뿐 아니라 외국 상인들까지 그 거대한 자산을 앞다투어 이용하기 시작했고, 이내 홍콩은 구대륙과 신대륙간 무역 중심지로 부상했다. 영국이 비단, 차, 은에 대한 지불로써 아편을 중국에 팔기 위해 홍콩에 도착했을 때 홍콩은 긴 잠을 자고 있는 미개척지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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