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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 경영

리넷 리드고우 지음 | 좋은책만들기
영국이 도착하기 이전부터 홍콩은 원주민들에 의해서도 "향항(香港: 향기로운 항구)"로 불렸었다. 1841년 홍콩에 영국의 유니온 잭이 휘날리면서 홍콩은 변모를 시작했다. 홍콩지역의 상인들뿐 아니라 외국 상인들까지 그 거대한 자산을 앞다투어 이용하기 시작했고, 이내 홍콩은 구대륙과 신대륙간 무역 중심지로 부상했다. 영국이 비단, 차, 은에 대한 지불로써 아편을 중국에 팔기 위해 홍콩에 도착했을 때 홍콩은 긴 잠을 자고 있는 미개척지에 불과했다.



1841년에 로드 파머스톤(후에 영국 수상)은 홍콩을 돌아보고 "집 한 채 지을 수 없는 불모의 섬"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의 홍콩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력을 갖추고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초대형 21세기 산업제국으로 변모했다. 1999년 중반 2년여의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1인당 국민소득은 25,000 달러로 세계 4위에 올랐으며, 평균수명 역시 일본의 뒤를 이어 세계 2위였다. 저명한 경제학자 폴 크루그만은 말했다. "자유 시장 경제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려면 홍콩으로 가보라."



홍콩은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한다. "국가가 부유해지기 위해서는 국민들 스스로 잘 살기 위해 노력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러면 더 많은 일자리와 경제 성장, 더 많은 상품과 서비스, 그리고 부의 증대가 나타날 것이다."라고 주장한 애덤 스미스의 말이 세계에서 가장 잘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랜 동양의 전통인 가족관계는 결코 흔들리지 않고 있다. 홍콩에서 제조업은 경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대규모 공업단지들이 들어섰고, 점점 성장하는 첨단기술 분야를 위한 산업 지구들도 조성되었지만 이러한 변화의 한편에서 10명 이하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소규모 기업들도 증가했다. 이들 기업은 대부분 가족이 소유와 경영을 함께 하는데 홍콩의 가족기업은 점점 더 전문적이고 관료적인 경영 구조가 되어 가는 전통적 서구 형태를 따르지 않는다. 홍콩의 기업 유형은 가족이나 친구, 또는 전 고용주들이 운영하는 소규모 기업의 연결망을 만들어가는 형태이다.



"나는 이제 홍콩 정부의 행정을 이양합니다.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 1997년 6월 30일 장대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밤, 홍콩의 마지막 총독 크리스 패튼은 이 말을 남기고 빅토리아 항을 떠났다. 홍콩 반환이 이루어지기 전 몇 년 동안 영국과 중국은 홍콩의 미래를 놓고 지루한 줄다리기를 벌였다. 결국 1984년 조인된 양국 선언의 기본 원칙은 '1국가 2체제'였다. 이 원칙에 의해 홍콩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역으로 편입되었다.1959년 영국에서 독립한 싱가포르의 역사는 발전과 성장을 보여주는 한편의 놀라운 드라마이다. 자원이 부족한 조그만 섬나라가 40년도 채 안 되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쟁력을 갖춘 국가로 변신한 것이다. 오늘날 싱가포르의 1인당 국민소득은 과거 그들을 통치했던 영국의 국민소득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성공 스토리 뒤에는 '싱가포르 방식'이라 불리는 철학이 있다. 그것은 유교적 가치, 강력한 정치 체제, 엄격한 행동 규칙, 인내심, 교육의 가치에 대한 믿음과 사람이 가장 중요한 국가적 자원이라는 인식 등이 혼재된 것이다. 여기에 싱가포르만의 철저한 원리원칙주의, 재능 있는 인재들, 최고 수준의 인프라, 우수한 통신 체제가 가세하면서 가장 안정적이고 경쟁력 있는 비즈니스 환경을 갖춘 국가가 되었다. 싱가포르는 기업 경영의 공개성과 투명성에서도 강력한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효율적인 기업 지배 구조를 형성한 모범 사례로 싱가포르가 인용되는 것도 바로 이 원칙 때문이다.

오늘날 싱가포르는 마치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것이 자기 자리에 위치한 커다란 책상과도 같다. 1960년대 이후 싱가포르의 경이로운 성공은 초대 총리 리콴유가 실시한 정책의 결과이다. 모든 것이 정확히 자기 자리에 위치한 책상을 만들어낸 사람이 다름 아닌 리콴유였던 것이다.



리콴유는 냉철한 시각으로 민주주의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는 생존과 번영을 위해 민주주의를 일부 수정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통제된 민주주의였다. 싱가포르가 오랫동안 영향을 받아온 말레이시아에서 분리되었을 때, 노동력과 지리적 이점 외에는 어떤 자원도 없었다. 새 정부는 싱가포르의 지리적 위치와 항만의 매력에만 의존하는 상업 발전에 반대했다. 산업의 다각화에 눈을 돌린 것이다.



새 정부는 싱가포르를 최고의 국제 금융 중심지로 변모시키기로 결정했다. 효율적이고 믿을 만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한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졌다. 또한 싱가포르의 유일한 자원이라 할 수 있는 노동력을 교육과 근면성, 열성적 의지로 무장시킴으로써 산업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도록 만들었다. 기초 상품 생산에서 출발해 점진적으로 고부가가치 상품을 개발, 세계에 공급한다는 전략이었다. 이 과정에서 리콴유가 내린 결정은 많은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국민들을 경제 개발의 길로 끌어들이기 위해 기술교육, 엔지니어링, 과학, 중국어의 학습을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했다. 심지어 대학 졸업생은 대학을 졸업한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고 권고하기도 했다. 싱가포르 국민들은 이에 대해 우생학적 편견이라며 반발했다.



리콴유의 결정들은 오늘날에도 논란거리로 남아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그의 결정이 실용주의와 국민들의 문화적 열망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이다. 그의 정치는 겉만 번지르르한 어떤 철학적 명제를 실현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어진 한계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실행 가능한 일들을 찾아내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싱가포르의 사례가 보여주는 가장 생생한 시사점은 정치와 경제, 기업 운영에서 문화가 갖는 중요성이다. 리콴유는 다음과 같은 확고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1960년대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는 말레이인과 점점 번성해 가는 화교 공동체 사이의 경제적 불평등 증가가 크게 인식된 시기이다. 말레이시아는 독립 후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지속적으로 추진했지만 두 집단의 격차는 점점 커져 갔다. 말레이시아에서 기업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쳐왔고, 계속 영향을 줄 일부 쟁점들에 대해 정부는 균형감각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결국 1970년에 적극적인 정책들이 도입되었는데, 그것은 경제적 불균형을 시정하고 말레이시아의 말레이인 공동체를 지원하도록 입안되었다. 즉 경쟁력을 갖춘 부미푸트라(bumiputra, 땅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말레이시아 토착민을 가리킴)라는 기업가 계층을 창출해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특히 향후 20년 내에 경제의 전체적인 상업 활동과 산업 활동 중 최소한 30퍼센트를 말레이인이 소유하고 관리하도록 계획되었다. 이러한 신 경제 정책은 말 그대로 특정 인종 집단을 위해 제도화된 아시아 최초의 확실한 보상 법령 사례였다. 이를 위해 정부는 국가 개입과 정부 지출을 증가시켰으며, 수입 대체와 수출 촉진이라는 산업화 모델을 발전시켰다. 경제 성장에 따라 정치인, 관료, 기업가들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었으며, 대부분 말레이인이었던 기업가들은 이러한 네트워크를 이용했다.



오늘날 말레이시아의 경제적 환경은 그러한 급진적 정책과 1991년에 도입되어 실시된 국가개발정책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이 두 가지 정책은 말레이시아의 주요 두 인종 집단, 즉 말레이인과 화교 공동체 사이에 국가의 부를 보다 평등하게 분배한다는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한편 화교들은 그 정책을 이용해 말레이인으로부터 권력이나 영향력을 빼앗지 않는 동시에 경제적 기반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화교 기업가들은 그 기회를 말레이식 이름과 커넥션을 활용해 부미푸트라 기업 족벌과 제휴하는 데 이용함으로써 비(非) 말레이인 기업가들에게도 길을 열어주도록 했다. 그것은 두 집단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평화적이고 비적대적으로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경제적 위기와 잇따른 수하르토 대통령의 사임 요구가 높아졌던 1998년 인도네시아에서 가해진 화교들에 대한 인종학살을 본다면, 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 화교의 지위가 얼마나 허약해질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말레이인 편향적인 정책의 가장 지속적이고 치명적인 유산 가운데 하나는 경제가 정치적 보호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며, 오늘날에도 그러한 상황은 지속되고 있다. 그것을 분리하는 일이 21세기 말레이시아 기업가들에게 가장 큰 난관 중 하나다.말레이시아인을 수도원에서 350년 동안 살게 한 다음 미국 할리우드에서 50년을 더 살게 하면 필리핀인이 된다는 말이 있다. 필리핀은 과거 유럽의 식민지였을 뿐 아니라 미국의 식민지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로 인해 필리핀은 기업 지배구조나 산업 경영에서 유리한 점을 갖게 되었다. 필리핀은 동남아시아에서 기업가들과 경영자들에게 적절한 교육을 실시해야 하며, 실적은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기업 지배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한 국가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긍정적인 인식이 등장하게 된 시기가 필리핀이 정치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었던 때라는 점이다.



1986년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축출되면서 부정부패와 족벌 체제, 극단적 권력남용이라는 어두운 시대는 지나갔다. 특히 1992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피델 라모스는 여러 가지 긍정적 정치 개혁을 이루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6년 임기를 마치고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했다. 이로 인해 한때 아시아의 병자로 알려졌던 필리핀에서는 이제 사업을 하는 데에는 단 한 가지 길, 즉 올바른 방법으로 비즈니스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현재 필리핀은 역사상 경험해 보지 못한 경제적 시련에 직면해 있다. 1997년 7월의 아시아 경제 위기 이후 폐소화는 미 달러 대비 40퍼센트 이상 평가절하되었다.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국가에 비해 경제 위기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았는데도 말이다. 가뭄과 홍수가 교차하는 극심한 엘리뇨 현상으로 경제의 1/5를 차지하고 있는 농업 생산 역시 줄어들고 있다. 이제 필리핀은 국내외적인 시련에 대응할 수 있는 자체의 면역 능력을 강화시켜야 하는 동시에, 가난을 척결하고 인적자원을 개발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여야 한다.



필리핀의 산업은 다양하지만 대부분의 기업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즉 가족이 소유하는 족벌기업이며, 경제성과가 정부의 발전 정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기업은 현재 정부에 두 가지 사항을 요구하고 있다. 올바른 거시경제 운영과, 행정부 스스로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기업들이 올바른 기업 지배 모델을 정착시키는 데 긍정적 분위기를 조성해 달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해야 될 첫 번째 작업은 기업들의 사업 관행을 더 투명하게 만들고 정부와 기업체의 유착관계를 끊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기업들의 지대(地代) 추구 행위나 경쟁 회피 노력이 지속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널리 퍼져 있는 가난을 퇴치하는 것이다. 깨끗한 물, 정수된 물은 수백 만의 가난한 필리핀인들에게는 꿈 같은 얘기다. 뿐만 아니라 많은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다. 필리핀의 5세 이하 어린이 가운데 3분의 1이 표준체중에 못 미친다고 한다. 이 비율은 가장 가난한 세 나라, 말리, 부르키나 파소, 자이레보다 더 심각한 것이다.태국어로 타일랜드는 '자유의 땅'을 의미한다. 태국인들은 독자적으로 독립을 유지해 왔다는 데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태국은 아시아에서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던 유일한 국가이다. 태국이 식민지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지만, 이것을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국과 프랑스라는 두 식민지 열강 사이에서 자국의 살 길을 찾아 수년 동안 교묘한 줄타기 외교를 벌여왔다는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틈새에서 태국은 미얀마, 말레이시아, 인도차이나 반도를 사이에 둔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러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태국인들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는 실용주의적 사고가 발달하게 되었다.



태국의 실용주의는 수십 년에 걸쳐 여러 방면에서 나타났다. 태국인들은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 제도나 왕조, 종교를 발전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태국의 민주주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유한 색깔을 갖고 있다. 최근까지 태국 정치에서 가장 확실한 것 가운데 하나는 정부가 매번 주기적으로 바뀐다는 사실이었다. 군 장성들이 탱크부대를 방콕 시내로 몰고 들어가 가뜩이나 체증이 심한 도심 교통을 완전히 차단한 채 현직 수상을 몰아내고 다른 사람을 수상으로 내세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태국에서는 선거보다 그런 방식을 통해 정권이 바뀐 경우가 더 많았다. 지난 20세기의 50년 동안 태국에서는 열 다섯 번의 헌법 개정과 열 일곱 번의 쿠데타, 24명의 수상이 있었다.

태국에서는 경영자가 서구 기업보다 훨씬 많은 권한과 의사결정을 갖는다. 이것은 위기에 직면해 빠르고 효과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기업 내에서 견제와 균형의 역할이 약화될 위험도 있다. 태국은 본질적으로 위계적인 불평등 사회이기 때문이 두 사람이 상호작용하는 경우 자연히 누가 상급자이고 하급자인지 가려내기 위해 서로의 신분을 평가하려는 '감정이 싹트게 된다'. 일단 상호관계가 확인되면 일정한 행동 패턴이 나타난다. 상급자로 인정된 사람은 너그럽고 친절해야 하며, 하급자는 상급자를 존경심으로 대해야 한다. 이 경우 상급자는 하급자의 후견인이 된다. 실제로 태국에서 고용주들은 상당히 가부장적이다.인도네시아는 여전히 경제 발전의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물론 최근 들어 비약적인 도약을 이룩한 것은 사실이다. 수하르토 대통령이 전권(全權)을 잡은 1966년 1인당 국민소득은 70 달러에 불과했으나 30년 후에는 9백 달러까지 상승했다. 1990년대 들어 실질 GDP 성장률은 연간 6퍼센트에 달했으며, 인플레는 한 자리 수에서 안정되었고 무역 흑자 역시 폭발적으로 증대했다.



언뜻 보면 이러한 경제 성장이 행복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거대한 해외 부채 증가라는 복병이 숨어 있다. 막대한 해외 자본이 인도네시아로 몰려들었는데, 대부분 고수익과 빠른 자금회전을 노리고 들어온 단기성 자금이다. 더욱이 인도네시아의 정치체제는 권력과 영향력을 한 곳에 집중시키고 있었을 뿐 아니라 결과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풍토까지 만연해 있었다.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를 통제하고 지원해 줄 성숙한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무책임한 정치 제도까지 어우러져, 인도네시아는 하나의 거대한 도박장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모든 것은 1997년 중반 아시아를 휩쓴 경제적 폭풍의 영향으로 한꺼번에 날아가 버렸다. 인도네시아는 생존을 위해 IMF로 달려가 고개를 숙이고, 40억 달러에 이르는 긴급자금을 요청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교역과 상업에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많은 섬들이 인도네시아라는 하나의 국가를 이루기 위해 오래 전부터 각 군도들 사이에서 수세기 동안 비즈니스가 행해지고 있었으며, 이들 섬은 고대 인도와 여러 제국 사이의 교역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유럽의 열강들이 세게 각처에 식민지를 건설하던 시기에는 네덜란드인들이 상륙해 섬들의 향취에 흠뻑 매료되었다.



그 후 하나의 국가를 이루면서 프리부미스(pribumis)라 불리는 인도네시아인들의 차례가 되었다. 프리부미스는 원래 '흙의 자손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인도네시아의 거대한 잠재력이 가져다주는 풍요로운 과실들을 향유했다. 그러나 유구한 동방 교역의 중심지로써의 역사와 오늘날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앞다투어 국제 교역의 파고를 헤쳐나가고 있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뒤쳐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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