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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에 생명을 불어넣은 사람들 1

밥 존스턴 지음 | 굿모닝북스
반도체에 생명을 불어넣은 사람들 1

밥 존스턴 지음/박정태 옮김

굿모닝북스/2003년 11월/303쪽/12,000원



글을 시작하며 - 트랜지스터 세일즈맨의 나라?

1947년 12월 16일 벨 연구소에서 처음 탄생한 트랜지스터는 오늘날 수십 조 달러에 이르는 전자산업을 있게 한 작은 씨앗이었다. 더구나 일본인에게 트랜지스터의 등장은 환상적인 수준을 넘어 기적이라고 할 만했다. 1945년부터 1990년까지 이어진 냉전시대에 서방 진영의 국가들, 특히 미국은 좋든 싫든 간에 이 같은 엔지니어링 기술의 상당 부분을 군사적인 목적에 충당한 반면 같은 시기에 일본의 엔지니어들은 역시 좋든 싫든 간에 소비자 시장에서 먹혀 들만한 제품을 설계하고 제조하는 데 전념해야 했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에 유용한 제품으로 나온 것 중 하나가 바로 트랜지스터 라디오였다.

트랜지스터가 일본이라는 토양에 뿌리내려 만발할 수 있었던 데는 시기적으로 적절했던 여러 요인들이 있었다. 먼저, 트랜지스터는 원자폭탄과 마찬가지로 물리학에서 나온 것이며, 물리학 분야의 경우 일본인들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의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 트랜지스터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뛰어난 두뇌 외에 단지 몇 그램의 게르마늄이나 세계적으로 가장 풍부한 재료인 실리콘, 여기에 인과 같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몇 가지 화학재료가 고작으로, 부존자원이 거의 없는 일본에게는 딱 맞는 아이템이었다.

물론 이들 재료는 100만개의 원자 가운데 불순물 원자가 하나 이상 섞이지 않은 초고순도라야 한다. 따라서 이런 순수한 물질을 생산해 내려면 아주 복잡한 처리공정을 완비해야만 하는데, 사무라이 검을 만드는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복잡한 처리공정이란 일본인이 오래 전부터 최고의 자부심을 갖고 있던 분야였다. 일본의 전통적인 생산 방식 가운데 반도체 산업과 유사한 것은 우키요에라고 불리는 일본 근세 풍수화의 목판 인쇄물을 제작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반도체 칩을 제작하는 과정 - 실리콘과 산화물을 비롯한 여러 재료들을 하나씩 앞서의 재료 위에 아주 정교하게 배치하는 과정 - 과 매우 유사하다.

또 하나의 시의적절한 우연이 있었다. 미국의 통계학자인 W. 에드워드 데밍이 당시 미국에서는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지만 뛰어난 제조 방식에 기반을 둔 통계적 품질관리(QC)라는 혁명적인 사고를 일본인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제조업체들은 전 산업부문에 걸쳐 데밍의 QC 개념을 적용했고, 특히 반도체 산업은 그 어떤 분야보다 성공적인 결실을 맺었다.

아울러 반도체 산업이 막 시작된 초창기에는 현미경을 통해 전선을 각각의 소자 위에 납땜해야 했는데, 여기에 손재주가 뛰어난 일본의 젊은 ‘트랜지스터 여성 근로자’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반도체 제조공정에서 필요한 먼지 하나 없는 클린 룸을 위해 근로자들은 클린 룸에 들어오기 전에 반드시 아주 세심한 예방수칙을 지키고 특별히 제작된 옷을 업어야 했는데, 일본인들의 경우 이미 집에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벗고, 식사를 하기 전에는 반드시 손과 몸을 씻는 습관이 있어 이런 절차에 쉽게 익숙해질 수 있었다.

일본인들이 강점을 보일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문화적 요소는 트랜지스터와 반도체 칩의 크기가 매우 작다는 점이었다. 좋지 않은 지리적 환경 아래서 일본인들은 일찌감치 작게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다. 또 과도할 정도로 완벽을 추구하는 일본인의 기질 또한 도움이 되었다. 반드시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개인들 각자가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는 데서 오는 성취감 때문에 이렇게 한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반도체 산업에서는 바로 이 같은 과도할 정도의 세밀함이 높은 수율로 이어져 성공을 가져다주게 된다.

1949년 미국 법무부는 AT&T에 대해 장비 조달과정에서 제조부문 계열 회사인 웨스턴 일렉트릭을 부당하게 우대하고 있다며 반독점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RCA와 IBM 같은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기술 기업들을 상대로도 반독점 소송이 제기되었다. 1950년대에 이들 세 회사는 모두 법무부의 강제적인 명령에 동의하게 되는데, 이 가운데는 자신들이 개발한 기술을 다른 모든 회사들에게 라이센스 해주라는 항목이 있었고 AT&T는 결국 트랜지스터 기술을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쓸 수 있도록 공개해야 했다. 이 같은 개방적인 라이센스 정책에 힘입어 마침내 반도체 산업이 형성될 수 있었던 셈이다.

RCA는 사실 라디오 기술의 개발이 회사의 출발점일 정도로 특허권에 기반을 둔 기업이었다. RCA는 설립되자마자 1920년대부터 라디오 기술의 특허권을 사용하는데 ‘패키지 라이센싱’이라는 독특한 방식을 도입했다. 이처럼 횡포에 가까운 라이센싱 덕분에 RCA의 로열티 수입은 회사의 중요한 수입원이 됐고, RCA는 이 돈으로 텔레비전과 같은 새로운 기술의 연구개발을 할 수 있었다. 1958년 법무부는 패키지 라인센싱이 독점금지법을 어겼다고 RCA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이로써 RCA는 텔레비전 특허권을 국내 경쟁 업체들에게 로열티도 받지 않고 상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했다.

당시 RCA를 이끌어갔던 데이비드 사르노프 회장은 외국 기업으로의 기술 이전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주로 텔레비전 생산과 관련된 특허권을 무려 82개의 일본 기업에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RCA는 라이센스를 준 외국 기업과 경쟁하지 않기 위해 아예 해외시장에 진출하지 않기로 했다. RCA는 이와는 별도로 세 곳의 일본 기업과 브라운관 제조를 위한 기술지원 계약을 맺었고, 네 곳의 일본 기업과는 트랜지스터 기술지원 계약을 맺었다. 기술지원은 - 라이센싱이 특허권을 사용할 수 있는 계약이라면 기술지원은 제조 공정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계약이기 때문에 - 라이센싱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사르노프는 당시 일본인들에게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존 D. 록펠러 3세 다음으로 유명한 미국인이었다.

이처럼 반도체 특허권의 개방적인 라이센싱 정책은 미국의 정치적 고려에 따른 세계 전략과 반독점 금지 소송이라는 국내적 압력, 기업의 상업적인 이해관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더욱 가속화됐다. 하지만 미국이 왜 그토록 무분별할 정도로 일본에게 기술 이전을 하고자 했는지를 설명해주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결코 일본이 그렇게 빨리 자신들을 따라 잡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8년 7월 1일 공식 발표된 트랜지스터의 발명과 1951년 벨 연구소가 라이센스 기업들을 위해 처음으로 열었던 심포지엄 기간은 반도체 산업의 걸음마 시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일본의 국영 연구소와 대학교에서는 이 시기에 아주 열심히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라이센싱이 이뤄지면 모든 책임은 민간 부분이 부담해야 했다.

소니는 1950년대 중반까지 전체 직원이 600명 남짓한 작은 회사에 불과했다. 소니는 웨스턴 일렉트릭으로부터 라이센스를 받아 반도체 소자를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소니가 시장에 내놓은 1세대 트랜지스터는 주파수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런 트랜지스터로 라디오를 만들게 되면 음질이 영 엉망이었다.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라디오의 튜닝과 증폭을 지원할 수 있도록 고주파 신호의 수신기능을 강화해야만 했다. 그래서 1950년대 초 몇몇 기업의 일부 기술자들은 진공관과 트랜지스터를 같이 쓴 하이브리드 라디오의 생산을 주장하기도 했다.

주파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소재에 첨가하는 불순물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었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상식적으로 행해져 왔던 안티몬의 첨가 대신 인을 첨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소니에서 일했던 젊은 물리학자 쓰카모토 데쓰오는 결정의 순도를 높일수록 트랜지스터의 고주파수 특성을 최대 50배까지 개선할 수 있다는 실험 결과를 내놓았다.

소니에게 이 같은 연구 결과는 여러 면에서 엄청난 성과를 가져다 주었다. 무엇보다 소자가 좋아짐으로써 트랜지스터만으로 작동되는 새로운 라디오를 만들 수 있었고, 이는 다른 경쟁자들이 따라오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제품 차별화의 상징적인 사례가 됐다. 소니는 마침내 1960년 세계 최초로 트랜지스터가 10% 들어간 텔레비전을 선보였다. 사실 이 같은 성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고주파수 트랜지스터를 만드는 것이었고, 그 문제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에사키의 터널 다이오드 덕분에 해결됐다.

일본의 초창기 반도체 산업을 이야기할 때 소니의 궤적은 정말 대단하다. 이부카가 먼 장래를 내다보고 트랜지스터를 라이센스하기로 결정했고, 또 라이센스를 얻기 위해 필요한 외화를 구하려고 MITI와 싸운 과정, 또 웨스턴 일렉트릭의 트랜지스터를 주카모토가 새롭게 재개발한 것과 에사키의 터널 다이오드 등이 모두 소니의 전설을 낳은 중요한 요인들이다.

그러나 소니는 일본 기업 가운데 외국으로부터 기술을 이전 받은 첫 번째 회사도 아니고, 일본에서 트랜지스터를 처음으로 생산한 회사도 아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고베 고교라는 회사가 바로 이 같은 영예를 차지할 회사다. 어쨌든 소니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졌고, 트랜지스터를 이용한 새로운 제품들을 끊임없이 내놓았다. 반면 고베 고교는 경영진의 안목이 모자라 우물쭈물하다 1968년 정보통신 회사인 후지쓰에 인수된 뒤 이름조차 사라져버렸다. 다행히 고베 고교 출신 가운데 최소한 한 사람은 반도체 산업의 역사에 아주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그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던 사사키 다다시가 바로 그 인물인데, 부하 직원들은 그를 가리켜 로켓박사라고 불렀다.



제1부 계산기와 시계 : LCD, 평판 TV, 태양전지

로켓 박사 디즈니랜드로 가다

사사키 다다시는 1915년 일본 서부 해안가의 작은 어촌 도시인 하마다에서 태어났고, 태평양 전쟁 중 사사키는 통신부에 소속돼 항공기 제조업체인 가와니시에 배속되었는데, 그곳에서 전화와 무선통신, 레이다 등에 쓰일 진공관을 연구했다. 전쟁이 끝나자 기와시니는 공중분해되었고 가와니시는 고베 고교라는 신설회사로 떨어져 나왔다.

1947년 사사키는 웨스턴 일렉트릭 초현대식 공장에서 현대적인 진공관 제조방식을 배웠다. 그 곳에서벨 연구소의 바딘을 만나 토론을 하곤 했는데, 그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바딘은 그와 동료 연구원들이 아주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사사키는 일본으로 돌아와 몇 달 후 그것이 다름 아닌 트랜지스터라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1953년 초 고베 고교는 트랜지스터를 만드는 데 성공한 일본 최초의 기업이 되었다. 고베 고교가 트랜지스터로 만든 첫 번째 제품은 카 라디오였는데, 도요타에 납품됐다. 고베 고교는 이제 비약적인 성장을 눈앞에 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고베 고교는 부실한 경영으로 인한 유동성 부족으로 그렇게 되지 못했다. 1960년 여름부터 은행 관리를 받던 고베 고교는 후지쓰에 인수되고 말았다.

그 후 사사키는 교토 대학교 교수직을 제의 받았으나, 하야카와 전기의 고위 임원인 사에키 아키라의 요청으로 1964년 4월에 하야카와 전기에 - 하야카와 전기는 사사키의 설득으로 1961 일본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마이크로웨이브 오븐을 개발해냈고, 다음해부터 대량 생산하여 시장에 출시해 상업적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 에 들어갔다. 하야카와 전기에서 사사키는 특유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발산했고, 덕분에 그의 부하 직원들은 그에게 “로켓 박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사사키가 하야카와 전기에 합류했을 무렵 회사는 가전제품 시장 특유의 유령과도 같은 문제 - 가전제품의 속성상 주기적으로 거품과 붕괴가 반복된다는 문제 - 에 오랫동안 시달리고 있었다. 또 대부분의 가전제품 판매는 연말연시에 이뤄졌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가전제품 업계에서는 기존의 제품에 몇 가지 기능이나 액세서리를 추가해 소비자들로 하여금 이미 구식이 된 모델을 새 모델로 바꾸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하곤 했는데, 사사키는 이런 방식보다는 소비자들이 전혀 써본 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신제품을 개발해 시장에 내놓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경기 후퇴로 타격을 입은 가전업체를 다시 정상화시킬 만한 제품이 도대체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사사키는 전자계산기로 결론을 내렸다. 사사키는 휘하의 엔지니어들을 모아놓고 이제 목표가 무엇인지를 말해주었다. 엔지니어들은 그 때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인 계산기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사키는 이들보다 훨씬 앞서 나갔다. 훨씬 더 작고, 언제든 쓸 수 있으며, 상인이나 점원이 쓰는 것이 아닌 가정주부들도 쓸 수 있는 계산기가 목표라고 사사키는 이들에게 분명히 말했다.

반도체 시대가 시작된 뒤 처음 20년 동안은 비록 복잡하기는 하지만 제조가 가능한 바이폴라 트랜지스터가 주류를 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의 잭 킬비와 패어차일드의 밥 노이스가 거의 동시에 집적회로를 발명하자 이제 연구원들은 만들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전계 효과 트랜지스터(FET)로 눈을 돌려야만 했다. 가장 일반적인 FET는 MOS FET로, 원래 이 물질을 만드는 데 사용된 세 가지 재료 ‘금속-산화막-반도체(metal-oxide-semiconductor)'의 머리 글자를 붙인 것이다. MOS 트랜지스터는 구조가 더 단순한 데다 작동 방식에서 훨씬 더 적은 전력을 소비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볼 때 MOS 트랜지스터는 엄청난 규모의 집적이 가능했다.

마침내 1967년 그로브와 그의 동료 연구원들은 MOS FET를 기반으로 한 집적회로의 대량 생산을 가로막고 있던 모든 장애물들을 완전히 없애는 데 성공했고 프랭크 완라스는 마침내 제너럴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에서 처음으로 상품화한 MOS 집적회로를 만들었다. 이 거대한 MOS 집적회로는 오토네틱스가 나중에 사사키에게 만들어줄 계산기용 칩의 전형이 됐다.일본 국내에서 전자계산기용 MOS 소자를 생산하자고 설득하는 데 실패한 사사키는 다시 한번 전기를 모색하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갔다. 사사키가 마지막으로 오토네틱스를 들르기 전 그가 방문했던 회사는 줄잡아 열 곳이나 됐다. 대답은 한결같았다. MOS LSI를 만드는 것은 무척 어려우며 수율이 너무 낮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모든 회사가 군수용 칩을 만드는 데도 일손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1968년의 운명적인 날에 오토네틱스의 사장인 프레드 아이스톤이 생각을 바꿔 헬리콥터까지 보내 사사키를 다시 데려와 협상을 더 진행해보자고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정밀 가전제품에 대한 사사키의 아주 강력한 논리적 설명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전 사업의 핵심은 대량생산을 통해 원가를 획기적으로 떨어뜨린다는 데 있다. 이것이야말로 경험곡선(학습효과)으로 알려진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1969년 초 오토네틱스의 설계를 담당하고 있는 엔지니어들은 4칙 연산이 가능하며, 소수점 표시를 포함해 여덟 자리까지 나타낼 수 있는 계산기를 단 4개의 칩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고 하야카와는 오토네틱스로부터 3,000만 달러 어치의 제품을 구매하는 계약을 맺었다. 마이크로콤펫 (Microcompet)QT-8D로 이름 붙여진 이 데스크탑 계산기의 무게는 불과 1.4킬로그램이었고, 가격은 277달러로 매겨졌다. 1969년 9월, 오토네틱스는 잘 만들어진 2만 5,000개의 칩을 처음으로 선적하였고, 다음해 4월 오토네틱스는 충분히 이익이 나는 사업임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해 마침내 오토네틱스의 일본 파트너는 100만 대째 계산기 생산을 축하했다.

사사키가 오토네틱스와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에서는 난리가 났다. 다른 일본 계산기 업체들도 우르르 뒤를 따른 것이다. 이들은 통산 산업성으로 몰려가 외화 배정 신청부터 했다. 미국 회사들에게는 갑자기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셈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성공을 거둔 회사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였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는 캐논에게 디자인을 라이센스 해주고 칩을 파는 데 그치지 않고 자사 상표로 계산기를 직접 만들었다. 이 회사는 포켓형 계산기를 처음으로 선보이며 미국 시장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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