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에너지전쟁
대니얼 예긴 지음 | 올
2030 에너지전쟁
대니얼 예긴 지음
올 / 2013년 2월 / 936쪽 / 38,000원
제1부 석유의 신세계
러시아의 귀환
석유와 러시아의 미래: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러시아는 다시 석유 생산국으로 복귀했다. 산출량은 20년 전 소련이 사라지던 시절만큼 올라갔다. 하지만 상황은 여러모로 달랐다. 석유산업은 다른 나라들과 기술적으로 통합되었고 더 이상 하나의 정부 부처에서 모든 일을 다 처리하는 일도 없었다. 석유산업은 다양한 기업들이 저마다 다른 리더십과 문화와 방법론을 가지고 운영했다. 이런 모든 요건이 합쳐지면서 러시아는 다시 한 번 최대 산유국과 세계 2위 수출국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러시아의 석유 생산과 세입이 치솟을 때 블라디미르 푸틴은 러시아를 ‘에너지 강대국으로 보아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강대국’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대답했다. “그런 말은 냉전시대에나 어울리는 말입니다.” 냉전은 끝났다면서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러시아를 에너지 강대국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러시아 곳곳에 있는 석유, 가스, 원자력 등 에너지 잠재력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면, 우리나라는 분명 선두주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러시아는 에너지 자원과 에너지시장 덕분에 특별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중동 지역의 정세가 다시 불확실해지면서 러시아는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새로운 공급원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석유와 가스는 실제로 러시아의 회복과 성장의 원동력이었고, 정부의 첫째가는 수익원이었다. 고유가는 국고로 들어가는 돈이 더 많아진다는 의미였다. 이런 수익은 인구문제 때문에 더 중요해졌다. 노령층에 필요한 연금을 충당하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부가 석유와 가스에 지나치게 의존한 탓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불거지면서 온 나라가 어수선한 논쟁에 휘말렸다. ‘현대화’에 대한 요구도 논란거리였다. 현대화에는 탄화수소에서 벗어나 에너지의 다양성을 추진하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 법적으로 폭넓은 개혁과 정부기관 개편이 이루어지지 않고, 또 새로운 기업문화가 조성되지 않는다면 현대화는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고유가 시대를 맞아 완충 역할을 하는 국가 재산의 증가가 개혁의 고삐를 잡아당기고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현대화의 과정이 어떻든 석유와 가스는 이후로도 몇 해 동안 계속 러시아의 가장 큰 부의 원천이 될 것이고, 아울러 진보된 기술에 대해 자기만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석유와 가스의 바로 그런 중요성은 또 다른 종류의 위험을 드러냈다. 러시아가 과연 현재의 생산량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또 한 번의 큰 쇠퇴기를 맞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석유산업이 다시 위축된다면 경제는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대대적인 변화 없이는 현재의 생산량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새로운 투자를 유치하고, 무엇보다 석유와 가스의 ‘차세대’ 유전을 개발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지적이었다. 차세대 유전의 주요 표적은 해양플랜트였다. 특히 러시아 북쪽 해안 밖에 있는 북극권이 강력한 후보였다.
변경 지역 개발은 사할린 프로젝트보다 훨씬 어려운 과제여서 비용도 많이 들고 작업 과정도 훨씬 복잡했다. 따라서 국제 기업의 잠재적 역량이 다시 한 번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였다. 서구의 파트너들이 찾는 프로젝트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런 규모의 프로젝트를 추진할 능력을 갖춘 메이저 기업들에겐 특히 그랬다. 그러나 그런 관계가 성립되려면 서로 확실한 믿음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어차피 이런 관계는 장기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발 기간은 몇 년이 아니라 몇십 년 단위로 잡아야 했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영향력은 21세기 중반이 되어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마저도 아직은 전망일 뿐이다.
이라크 전쟁
석유: 페르시아 만과 그곳의 석유가 적의 손에 떨어지지 않게 막는 것은 해리 트루먼 이래로 움직일 수 없는 미국의 정책이었다. 그러나 적(이라크)이 이 지역을 지배하고 따라서 이 지역의 석유를 지배할 가능성은 나중에 이라크전쟁을 준비할 때보다 1990년과 1991년에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정복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전을 위협하던 걸프 위기 당시가 훨씬 더 컸었다. 동시에 2003년에는 미국도 영국도 이라크 석유를 통제하기 위해 1920년대식 중상주의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있었다. 이슈는 유정에 있는 석유를 누가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세계시장에서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느냐의 여부였다.
이라크의 석유는 UN 제재 프로그램 아래에서 관리되고 있기는 해도 세계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이었다. 실제로 2001년에 미국은 이라크로부터 하루에 80만 배럴을 수입했다. 민주주의 국가 이라크라면 보다 신뢰할 만한 석유 공급자일 테고, 제재가 없다면 생산능력을 늘릴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9ㆍ11 테러범들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을 가진 자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예의주시하는 미국의 일부 정책결정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라크가 사우디아라비아와 맞수를 이룰 만큼 큰 수출국이 될 전망을 가볍게 볼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채택할 수 있거나 확실한 정보가 뒷받침된 전략 목표는 결코 아니었다.
전후의 석유산업을 조직하는 문제를 놓고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나왔지만, 분명한 점은 이라크 석유의 미래는 미래의 이라크 정부가 결정하게 되리라는 사실이었다. 석유산업에 필요한 수백억 달러의 투자와 기술을 쉽게 유치하기 위해서는 민영체제가 좋아 보이기는 해도, OPEC 회원이 되는 것을 포함하여 정부의 특권을 손상시키는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민영화가 된다고 해도 해방된 자유국 이라크는 강한 국가주의적 전통으로 인해 다른 어떤 석유 수출국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까다로운 조건을 투자가들에게 제시할 가능성이 있었다.
2002년과 2003년에 전쟁이 임박해졌을 때, 메이저 국제 석유회사들의 태도는 한층 회의적이고 조심스러워졌다. 일부는 전쟁이라는 발상 자체를 경계하기도 했다. 이들 회사들은 대부분 그 지역 생리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반발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바스당 정권을 무너뜨리면 이라크에 안정적이고 평화적이고 새로운 유형의 민주주의가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을 믿지 않았다.
‘국가 수립을 넘어서’: 2003년에 이라크 석유산업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석유산업이 아니라 이 나라가 필요로 하는 수익을 충당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되려면 이라크의 전반적인 상황이 개선되어야 했다.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전쟁 계획을 지휘하면서 어떤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다. 앞으로의 군대는 올리버 크롬웰의 용어를 빌리자면 몸집이 가볍고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의 군대’여야 했다. 럼스펠드는 국방부의 고루한 지휘체제를 극복하려 했다. 그가 보기에 국방부는 너무 신중하고 너무 위험을 기피하고 너무 보수적인 기관이었다. 그는 1990년부터 1991년 걸프 위기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콜린 파월이 주장했던 ‘압도적인 군사력’을 뒤집기로 했다. 대신 그의 말대로 “스피드와 민첩성과 정확성”을 모두 갖춘, 보다 작고 매우 숙련되고 규율이 엄하고 첨단기술로 무장한 군대가 신속한 승리를 거두는 데 보다 효과적이라는 것을 전장에서 입증하려 했다. 그리고 실제로 뛰어난 효율성을 갖춘 미국의 전투부대는 2003년 이라크전쟁에서 그 능력을 입증했다.
그러나 전쟁 중과 전후(상대방을 제압한 이후에 그 나라를 점령하고 통치하는 것)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문화, 병참, 훈련, 그리고 종교와 정치적 고려 등, 미군과 미국 정부의 민병대가 언제까지라는 기약도 없는 점령 통치를 위해 준비한 것은 별로 없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신속한 승리에 필요했던 군단의 수준은 전쟁을 끝낸 후에 그 나라를 점령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필요한 군대의 규모보다 훨씬 작았다.
이라크는 35년 동안 철저한 독재 치하에 있었고, 그 후 모든 기관이 무력화되면서 거대한 공백이 생겼다. 이라크에 주재해 있던 한 미국 관리의 표현에 따르면 이라크는 중동의 아랍 대국이었지만 거의 하룻밤 사이에 “제퍼슨식 민주주의”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모든 일이 추진되었다. 럼스펠드의 입지를 강화시켜준 또 한 명의 인물은 토미 프랭크스 미 사령관이었다. 프랭크스 사령관은 조기 승리를 거둔 후 가능한 한 신속하게 주둔군의 규모를 줄일 계획이라고 못 박았다. 부시 행정부 내의 지지자들은 대체로 전쟁을 낙관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즉, ‘전광석화 같은 승리’ 뒤에 신속한 철수와 새로운 민주국가 이라크의 출현이 이어지리라는 각본에 분위기는 한층 고무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쟁 이후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별로 따질 필요가 없었다. 또한 신속한 전쟁은 두말할 필요 없이 비용이 절약되기 때문에 예산에 대한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라크전쟁은 신속하지도 않았고 예산도 적게 들지 않았다. 직접적인 점령 비용만 1조 달러 이상이 들어갔다.
이라크는 석유국가였다. 전쟁 당시 GDP의 약 4분의 3이 석유에서 충당되었고, 전후에는 정부 수입의 95퍼센트가 석유에서 나왔다. 당시 관계자들은 석유의 생산과 수출을 얼마나 빨리 회복시키고 성장 궤도에 올려놓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대단히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전쟁 직전에 미 국방부 차관 폴 월포위츠는 석유 수출 물량을 회복하게 되면 이라크는 “국가 수립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그는 이라크가 빠른 시일 내에 현재의 생산능력을 두 배로 늘려 하루에 600만 배럴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쟁은 바그다드 시각으로 2003년 3월 20일 새벽 5시 30분에 시작되었다. 1차 걸프전이 끝난 지 12년 만이었다. 4월 9일 미군은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그날 미군 병사들은 이라크 시민들이 시내 중심가에 있는 사담 후세인의 거대한 동상을 끌어내리는 것을 거들었다. 동유럽 공산주의가 몰락할 당시를 연상시키는 장면이었다. ‘다원적이고 민주적인 이라크’가 멀지 않은 것 같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은 계획에 따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미 사령관 프랭크스 장군은 자신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조기 승리를 거둔 뒤라 9월까지 3만 명의 미군을 감축할 수 있으리라 단정했다.
“황폐하고 처참한” 석유산업: 그러나 막상 이라크 석유산업의 실상을 들여다본 순간, 모두들 아연실색했다.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가졌던 기대가 얼마나 성급했는지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석유산업은 몇 년째 방치된 채 투자 부족으로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후세인 정권이 붕괴하면서 커뮤니케이션 체제는 마비되었고 나라는 혼란에 빠졌지만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바그다드의 정부 청사들은 약탈 당하거나 불에 탔다. 석유부만 예외였다. 석유부는 미 육군 제3보병대가 진작 접수해놓고 있었다.
이라크의 석유 잠재력은 대단했지만 1970년 이후로 제대로 된 탐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찾아낸 유전 80개 가운데 석유를 생산하는 곳은 23곳뿐이었다. 1979년과 1980년에는 하루에 600만 배럴까지 생산량을 올린다는 계획을 마련해놓고 있었지만, 1980년대의 이란-이라크전과 1990-1991년의 걸프 위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낸 적이 없었다. 석유산업은 오히려 오랫동안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그래도 장애물은 여전히 많았다. 1991년에 후세인의 군대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면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유정을 폭파하고 유전에 불을 지를 수도 있다는 예상을 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석유산업 인프라는 전쟁 와중에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용케 견뎌냈다. 그러나 석유산업의 전반적인 상황은 한마디로 “황폐하고 처참했다.” 유전의 매장량은 몇 년 동안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피해가 막심했다. 장비는 녹슬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기계와 시스템은 폐물이 되었다. 핵심적인 바그다드 인근의 다우라 정유공장에 있는 제어실은 1950년대에서 막 튀어나온 세트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환경오염 또한 그 범위가 엄청났다. 이제 믿을 것이라고는 이라크 기술자들의 기술밖에 없었다. 그들은 임기응변의 명수였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해내야 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대부분의 인프라가 파괴되어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정유시설이나 유전에 전화도 없었고 석유의 흐름을 측정하는 기본적인 도구조차 없었다. 전문가들이 볼 때 이라크 석유산업과 경제를 복구하려면 우선 세 가지부터 해결해야 했다. ‘첫째 안전, 둘째 안전, 셋째 안전’이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안전문제 가운데 어느 것도 충족된 것이 없었다. 나름대로 체제를 갖추고 있던 국가를 무너뜨렸지만 미 점령군은 무엇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곳곳에서 긴장감만 고조시켰다.
추월차로에 들어선 중국
성공의 대가: 중국의 에너지 소비와 GDP 수치는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계 어디를 보아도 이토록 빠른 속도로 빈곤에서 빠져나와 경제성장 가도로 진입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중국을 괴롭혀온 고질적인 기아와 영양실조도 빠르게 줄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환경문제라는 대가가 따른다. 물 부족, 그리고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쓰레기로 인한 오염도 큰 문제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빠르게 증가하는 에너지 소비로 인하여 가장 먼저 오염되는 대기이다. 중국 사람들은 오염을 폐로 직접 느낀다. 대기오염의 주범은 석탄이다. 중국은 가정의 주방용이나 난방용, 공장의 발전용이나 생산용으로 석탄을 사용한다. 전기 수요는 약 10퍼센트 증가했다. 빠르게 늘어나는 자동차도 대도시의 오염 수위를 높이고 있다. 신차에 대한 배기가스 규제는 유럽 수준을 요구하지만 별다른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 되면서, 에너지 집약적인 중공업은 세계시장에 공급하는 물량을 두 배로 늘린 상태였다. 예를 들어 중국은 철강 부문에서 세계 총생산량의 절반에 가까운 물량을 책임지면서 최대 철강 생산국이자 최대 철강 수출국으로 거듭났다. 따라서 미국과 유럽의 에너지 집약적인 생산 부문을 중국이 밀어내면서, 미국과 유럽에서 소비되는 에너지의 일정 몫이 중국으로 옮겨갔다고 말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미국과 유럽이 에너지 소비를 중국에 아웃소싱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겹치는 이해관계: 오늘날 중국은 글로벌 석유시장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빠르게 변화하는 주역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중국의 가파른 에너지 소비 상승과 급등하는 석유 수입은 중국과 다른 주요 수입국 모두를 불확실한 상황으로 몰고 간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잠재되어 있는 갈등의 불씨는 서로의 촉각을 곤두서게 만든다. 그러나 다른 석유 소비국들, 특히 미국과 중국은 공통의 관심사도 많다. 이들 두 나라는 경제성장을 추진하는 재정과 무역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들의 관계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긴밀할지 모른다. 더구나 그들은 세계의 가장 큰 석유 소비국으로서 특별한 관심을 공유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모두 필요한 석유의 약 절반을 수입한다. 중국은 절반이 넘을 수도 있다. 대체로 이 두 나라가 소비하는 석유의 양은 전 세계 석유 소비량의 약 35퍼센트 정도이다. 시장이 안정되고, 교역과 투자가 개방되고, 에너지 안보가 보장되어야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도 두 나라가 갖고 있는 공통점이다.
그러나 중국은 글로벌 시장과 시장의 안보를 유지하는 기관에 대한 신뢰를 통해 그들의 신용을 향상시켜야 한다. 이렇게 되면 중국이 사용하는 에너지와 그 내역에 대한 투명성이 보장되어 국가신용도가 높아질 것이고, 따라서 다른 수입국들도 분명한 태도를 취할 것이다. 또한 미국과 중국은 모두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기존의 에너지뿐 아니라 재생가능에너지와 대체에너지 개혁을 서두르고, 기후변화의 위협을 줄이기 위해 탄소를 관리해야 하는 공통의 관심사를 갖고 있다. 그들은 둘 다 청정에너지를 의제로 상정해놓고 있다. 더욱이 세계 석탄매장량 1, 2위 국가로서 그들은 전기 발전의 상당 부분을 석탄에 의존하는 형편이기 때문에, 상업적 청정 석탄을 개발해야 하는 관심을 공유한다. 이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검토한다면 협력의 여지는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런 협력은 두 나라의 에너지와 경제적 입지를 한 단계 더 향상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글로벌 공동체뿐 아니라 두 나라의 안보와 복지에도 큰 기여를 할 것이다.